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77
백의의 청년이 안개에 휩싸여 균열로 들어서자 붉은 흡혈마수들이 뒤를 따랐다. 붉은 안개는 스멀스멀 균열 안으로 스며들어 흔적 없이 사라졌다. 붉은 안개가 흡혈마수들을 쏟아낸 순간부터 그들이 다시 돌아갈 때까지 채 1각도걸리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오운래와 수련자들은 머리가 저릿해졌고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저… 저자는 대체 누구지?”
수련자들은 서로의 얼굴에서 충격의 빛을 읽어냈다. 방금 있었던 일을 그들은 평생 잊지 못할 것만 같았다.
운해성역 수련자에게 풍의 선계를 점거한 흡혈마수란 두려운 존재로 일찍이 신종에서 풍의 선계를 되찾고자 보냈던 자들 중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운해성역 사람들 사이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흡혈마수의 훈련에 저 백의의 청년이 성공해낸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깊은 침묵이 내려앉은 그곳으로 이내 몇 갈래의 빛이 날아들었다. 이들이 기다리던 수련자들이었다.
한제가 예상했던 대로 탈변 후 옅은 금색으로 변한 흡혈마수는 특유의 감지력과 기운으로 붉은 흡혈마수들을 통제했다.
흡혈마수 사이의 계급 차이는 엄격했다. 그들은 곧장 자신들의 왕을 영접했다.
균열 안으로 들어가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신식으로 확인했던 노란 빛으로 뒤덮인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세상 곳곳에서 기이한 붉은 안개가 수시로 피어올랐다가 광풍에 밀려갔는데 그 속도는 놀라울 정도였다.
한제는 풍의 선계에 이르자마자 짙은 선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미 폐허가 됐지만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고 깊은 곳일수록 더욱 그랬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바람이었다. 끝없는, 무궁무진한 바람!
풍의 선계는 그 이름처럼 바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딘가에 수만 년 동안 축적되어 있던 고독한 바람이 하나의 구멍을 통해 방출되고 있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불어온 바람에 깨끗이 쓸려가기라도 한 것인지 땅에는 모래조차 없었다. 바람에 옷과 머리도 거칠게 뒤로 휘날렸다.
바람은 가벼워졌다 거세지기를 반복했다. 가벼운 바람일 때는 작은 손가락이 온몸을 간질이는 듯 상쾌했지만 거세졌을 때는 온몸을 부수고 원신을 무너뜨릴 쇠망치 같았다.
고독과 적막함. 한제가 풍의 선계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느낀 감정이었다. 시종일관 불어 닥치는 바람에서도 외로움에 사무친 듯한 곡성이 들려왔다. 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웅얼거리며 흐느끼는 듯한 소리에 심신이 기이하게 진동했다.
한제의 사방을 둘러싼 백여 마리의 흡혈마수들이 끽끽 소리를 냈다. 그러자 한제를 태운 흡혈마수의 왕, 금혈마수(金血魔獸)는 흥분한 기색으로 하늘을 향해 길게 울부짖었다.
그 울음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진 순간, 전방에서 바람에 떠밀리던 붉은 안개가 쾅 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1백 개가 넘는 붉은 빛이 튀어나와 포악한 흡혈마수가 되더니 울부짖었다.
“캬오오!”
하지만 녀석들의 눈은 자신들의 왕에게 집중됐고 이내 충성의 의지가 가득한 눈으로 다가왔다.
한제는 이곳의 흡혈마수들에게 특이한 점이 있음을 진즉 눈치 챘다. 그들에게는 많건 적건 선기가 있었던 것이다.
풍의 선계에 머무른 지 오래되었으니 자연히 선기를 갖게 됐을 터였다.
그것보다 한제의 관심을 끄는 것은 붉은 녀석들의 힘이었다.
한제는 이전에 요령의 땅에서 붉은 흡혈마수를 본 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지만 이곳의 흡혈마수들은 모두 규열기 수련자에 상당했다.
게다가 종종 눈에 띄는 암적색 마수들은 심지어 규열기 후기에 비할 만했다. 더욱이 이곳은 풍의 선계의 가장 바깥쪽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즉, 이 녀석들은 풍의 선계 흡혈마수들 중 가장 약한 편이라는 뜻.’
흡혈마수는 매우 특이한 마수였다. 반드시 힘이 전부는 아니라 왕보다 더 많은 호위병들에게 보호받는 녀석이 있을 때도 있다.
하지만 흡혈마수에게는 탈변이라는 특이한 신통력이 있었다. 대부분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지만 탈변할 수만 있다면 종족의 왕이 될 수도 있었다. 특히 탈변하게 되면 동족 사이에 위엄을 발산할 수 있게 된다. 이 위압감은 영혼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어지간한 힘의 차이가 아니고서는 이 위압감에 굴종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런 위압감을 느끼게 되면 흡혈마수는 충성을 바치거나 죽을 각오로 덤벼드는데 이렇게 벌어진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쪽은 전보다 한층 강력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왕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결투에 다른 흡혈마수들은 절대로 관여하지 않았다. 대신 결투가 끝나면 이들은 곧장 승자 밑으로 들어갔다.
이제 한제를 둘러싼 흡혈마수의 수는 이미 2백을 넘긴 상태였다. 그중에는 암적색을 띤 녀석도 열 마리나 됐다.
허나 이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한제의 목표는 풍의 선계 깊은 곳에 있는, 더욱 강한 흡혈마수였다.
서사의 기억에서 보았던, 신비로운 수련성을 빽빽하게 채웠던 진보랏빛 흡혈마수들. 녀석들이 서사만큼이나 강력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가 억지로 금혈마수를 탈변시킨 것도 그런 이유였다.
암적색 흡혈마수들을 바라보던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잠시 고민하다가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풍의 선계 가장자리를 맴돌았다.
몇 시진 뒤, 또 한 덩어리의 붉은 안개를 발견한 금혈마수는 곧장 포효를 내질렀다.
머지않아 모여든 흡혈마수의 수는 3백에 달했다. 그중 16마리는 규열기 후기 수준에 가까운 암적색이었다.
‘이 정도면 녀석들만으로도 정열기 수준 수련자 하나 정도는 쉽게 처리할 수 있겠군. 허나 아직 부족해. 1만 마리를 이끌 수 있다면 쇄열기 수련자라 해도 녀석들만으로도 충분할 터. 만약 10만 마리를 모은다면? 쇄열기 절정의 수련자라도 나를 당해내지 못할 것은 물론, 천쇠도 겁날 것 없을 터! 더구나 1백만 마리, 1천만 마리라면⋯⋯?’
한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날을 계획해왔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한제는 3백 마리의 흡혈마수를 끌고 먼 곳으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 몇 번을 더 붉은 안개와 마주쳤고 그때마다 그가 이끄는 흡혈마수의 수는 늘어만 갔다.
얼마가 지났을까?
이제 그의 주위로는 1천여 마리의 흡혈마수가 모여들었고 그중에는 규열기 후기 수준에 이르는 암적색 흡혈마수가 20여 마리에 이르렀다.
심지어 적갈색의 흡혈마수도 두 마리가 있었는데 그 힘은 능히 규열기 절정에 비할 만했다.
한제는 이틀간 풍의 선계 가장자리를 한 바퀴 돌면서 흡혈마수의 수를 늘려감은 물론이고 선옥까지 찾아냈다.
흡혈마수들 때문에 수련자들의 진입이 많지 않은 탓인지 풍의 선계에는 선옥이 제법 많았다.
하지만 한제는 썩 기쁘지만은 않았다. 이제 이곳의 가장자리에 남은 붉은 안개의 수가 많지 않아 한두 시진 만에 겨우 하나를 발견할까 말까 할 정도였다.
한제는 저 멀리 풍의 선계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지난 이틀간 관찰한 결과 그는 이곳의 흡혈마수 대부분은 안쪽에 응집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거친 바람에 의해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흡혈마수는 얼마 되지 않는 것이다.
“저 깊은 곳에는 흡혈마수가 많겠지. 강력한 놈들도 많을 테고 어쩌면 왕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무턱대고 달려들 수는 없지.”
고민하던 한제가 눈을 번득였다. 금혈마수가 그의 의중을 파악한 듯 작게 쉭 소리를 내자 주위의 흡혈마수들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우오오오!”
기이한 관통력이 깃든 이 소리는 죽음을 앞두고 동료를 부르는 소리 같았다.
수많은 흡혈마수들의 소리는 형태 없는 파문을 형성해 풍의 선계에 널리 울려 퍼졌다.
한제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정신을 집중했다.
또 다른 금혈마수
얼마 지나지 않아 천둥소리 같은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가 싶더니 저 하늘 끄트머리에 붉은빛이 드러났다.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두려울 정도였다. 요란한 소리까지 더해져 심신이 더욱 진동했다. 심지어 하늘도 진동하기 시작하면서 대량의 균열을 드러냈다.
한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지만 눈동자는 바짝 졸아들어 있었다. 먼 하늘 끄트머리에서 나타난 붉은 빛의 수는 대충 헤아려도 1천이 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많은 수의 흡혈마수들이 달려들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틀림없이 붉은 흡혈마수보다 훨씬 강력한 놈들도 섞여 있을 터였다.
잠시 후, 1천 마리가 넘는 흡혈마수들이 달려들었다. 암적색 흡혈마수만 해도 1백 마리에 달했고 심지어 적갈색 흡혈마수도 수십 마리에 달했다. 하지만 녀석들이 가까이 접근하기도 전에 금혈마수가 휙 날아오르며 옅은 금색 빛을 번득이며 짙은 위압감을 발산했다. 그러자 다가오던 흡혈마수들은 그 위압감에 덜덜 떨었다.
“캬아악!”
“캬오오!”
붉은 흡혈마수들은 모두 곧장 복종하는 듯했고 암적색 흡혈마수들 또한 잠시 혼란스러워하다가 이내 복종했다. 하지만 적갈색 흡혈마수들은 뒤로 물러나 달아나기 시작했다.
한제는 금혈마수에게 추격 명령을 내리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격렬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무궁무진한 흡혈마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만에 이를 듯한 규모였다.
“이런!”
한제는 머리가 저릿해졌다. 그는 금혈마수의 현 상태로는 한 번에 이토록 많은 흡혈마수를 응집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개중에는 남색 빛을 띤 녀석도 심지어는 흰색 빛을 발하는 녀석도 있었다.
한제는 곧장 몸을 날려 주위에 모여 있던 2천여 마리의 흡혈마수에게 휩싸인 채 심신으로 명령을 전달했다.
금혈마수는 2천 마리의 흡혈마수를 이끌고 하늘 끄트머리에 모습을 드러낸 대규모의 흡혈마수들을 피해 물러났다.
다행히 그 대규모의 흡혈마수들은 사방을 한 번 빙 돌기만 할 뿐, 금혈마수를 뒤쫓지 않고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빽빽하게 하늘을 뒤덮은 그들의 모습은 한제의 머릿속에서 좀처럼 떨쳐지지 않았다.
그중 남색 흡혈마수인 남혈마수(藍血魔獸)는 정열기 수련자보다도 강력한 기운을 발산했다. 그 수는 많지 않았지만 몇 마리만 있다 해도 충분히 두려울 터였다.
무엇보다 한제를 놀라게 한 것은 하얀 빛을 뿜어내던, 반투명한 백색 흡혈마수인 백혈마수(白血魔獸)였다.
녀석이 풍긴 쇄열기 수준의 기운에 한제는 욕심이 날 정도였다.
그 수는 많지 않아도 녀석들을 장악하기만 한다면 붉은 흡혈마수 수만 마리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을 터였다.
“다른 자들에게는 이곳이 위험천만한 곳일지 몰라도 내게는 보물 창고와 같다!”
한제는 흥분을 애써 가라앉히며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이곳에 보라색 흡혈마수도 있을까? 그리고 녀석은 수련자로 치면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
물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는 곁에 있는 금혈마수를 바라보았다. 주작성에서 얻게 된 녀석이지만 그는 이 흡혈마수가 왜 그곳에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혼란스러운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녀석은 일찍이 보라색을 띠었고 지금은 금색에 이르렀다.
허나 수준으로 보자면 이곳의 흡혈마수들보다도 한참 떨어졌다. 만약 금혈마수가 풍기는 위압감이 아니었더라면 녀석이 진짜 흡혈마수가 맞는지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봐야 답은 알 수 없었기에 한제는 생각을 정리하고 2천 마리의 흡혈마수를 이끌고 느릿하게 풍의 선계 깊은 곳으로 향했다.
수만 마리의 흡혈마수를 마주한 한제는 계속해서 흡혈마수를 모으려던 생각을 바꾸었다. 자칫 문제가 생겼다가는 감당하기 힘들 터였다. 차라리 천천히 풍의 선계 깊은 곳으로 진입해 기회를 노리는 게 나을 듯했다.
풍의 선계에 진입한 지 닷새 째 되는 날, 한제는 여전히 풍의 선계 가장자리를 맴돌았다. 중심에 아주 조금 더 가까워졌을 뿐이었다.
이곳에는 둥둥 떠 있는 선계의 조각이 하나 있었다. 한데 그곳에 이르자마자 한 줄기 남색 빛이 휙 하고 달려들었다.
“저것은…?‘
굳은 눈으로 살피던 한제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돌았다. 남색 빛 안에 들어 있는 흡혈마수를 확인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