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84
어느새 끝없는 바다가 돌문 아래에 나타나 있었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돌문이 바다 위에 불쑥 솟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닷물이 거칠게 달려들어 철썩이는데도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 멀리 바다와 하늘 사이로 떠오른 태양이 햇살을 번득임에 따라 한제 부자의 뒤편으로 긴 그림자가 늘어졌다.
“바다에서 솟아오른 해가 밤을 부수고 세월은 기억처럼 흐르는구나. 영원이란 없지만 찰나의 영원함은 언제나 사람을 취하게 하고 슬프게 하지. 평아, 아비는 두 번째 신통력은 유월(流月)이라 이름 붙이려 한다.”
유월, 시간의 흐름이라는 뜻이다.
시간의 흐름이 있다면 세월은 영원이 될 수 있다. 허나 영원을 찰나의 순간으로 무너뜨릴 수 있다면 경이로운 위력을 발휘하게 될 터였다.
한제의 깨달음은 이어졌고 눈 깜짝할 사이 이레가 지났다. 그가 문 위에 앉은 지 열흘이 된 셈이다.
강한 바람도 돌문 위에 어린 세월의 기운을 몰아내거나 빽빽하게 모여 있는 흡혈마수들의 대형을 어그러뜨리지는 못했다.
지난 열흘 동안 금혈마수 역시 줄곧 제자리에 앉아 한제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열흘째 되는 날 땅거미가 질 무렵, 저 멀리 하늘 끄트머리에서 열 개가 넘는 빛이 다가왔다.
이들은 의식에 참여하지 않은 8급 성역 소속 수련자들로 오운래와 일행들이었다.
이들은 한제와의 조우 이후 몇 명의 수련자가 더 모이자 조심스레 풍의 선계에 진입한 상태였다.
한데 아무리 조심스럽게 행동했다고는 해도 흡혈마수를 한 마리도 마주치지 않자 오히려 불안해졌고 이에 더욱 신중을 기했다.
이후로도 여전히 흡혈마수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기에 이곳이 과연 풍의 선계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이들은 그간 흡혈마수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던 풍의 선계 안쪽까지 진입할 수 있었다.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이들은 속도를 늦췄다. 반면 긴장감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그럼에도 점점 큰 수확이 있었기에 멈출 수는 없었다.
한데 이날, 이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우뚝 멈춰 섰다.
이곳에서 그들은 감히 신식을 넓게 펼칠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지금은 신식을 펼칠 필요도 없었다.
저 멀리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붉은 구름이 떠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이들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이곳에 들어온 지 근 열흘 만에 드디어 흡혈마수를 발견한 것이다.
한데 기이하게도 흡혈마수들은 달려들지 않았다.
오운래와 수련자들은 망설이기 시작했다. 대신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곧장 도망칠 채비를 해두었다.
“저 흡혈마수들 안쪽에⋯⋯.”
한 사람이 찬 숨을 들이마시며 붉은 구름 너머를 응시했다. 거대한 돌문이 어렴풋이 보였다.
“이곳에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했던 모양이군. 저런 문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 걸 보면 말이야. 선계가 무너지기 전에 세워졌던 제단 같은데…”
검은 옷을 입은 청년이 중얼거렸다.
“돌문 위에 누가 있어!”
이들 중 수준이 가장 높은 오운래는 수천 마리 흡혈마수들 사이로 거대한 돌문 위에 누군가가 가부좌를 튼 모습을 보았다.
그 말에 모두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말이군! 한데 누구지?”
“흡혈마수들이 공격하기는커녕 오히려 저자를 보호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그게 말이 되는 건가?”
눈앞의 광경을 좀처럼 믿을 수 없었던 수련자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특히 흡혈마수가 사람을 보호할 리가 없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때, 오운래가 애써 침착함을 되찾고는 중얼거렸다.
“그때 균열 밖에서 마주쳤던 백의의 수련자 기억하나? 저 돌문 위에 앉은 사람도 백의를 입고 있군. 만약 저자가 저 흡혈마수들을 통제할 수 있는 거라면⋯⋯.”
그 목소리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열흘 전 균열 앞에서 느꼈던 충격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듯했다.
“우리가 흡혈마수를 마주치지 않았던 것이 저자와 관련 있는지도 모르겠군. 공연히 건드리지 말고 어서 떠나는 편이 좋겠어!”
오운래는 곧장 몸을 물렸다.
한데 그때, 놀랄 만한 변화가 발생했다.
한제 옆에 엎드려 있던 금혈마수가 고개를 번쩍 들고 냉랭한 눈으로 수련자들을 응시하더니 돌연 쉭 소리를 냈다.
이를 신호로 수천 마리의 흡혈마수가 순식간에 흩어지면서 붉은 구름이 꿈틀거렸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수련자들에게로 돌진했다.
“도망쳐!”
오운래의 다급한 외침에 모두가 급변한 얼굴로 맹렬히 물러났다.
하지만 그들의 속도로는 남혈마수까지 떨쳐낼 수는 없었다. 수백 마리의 남혈마수는 남색 유성들처럼 무리에서 튀어나왔다.
이에 수련자들은 머리가 저릿해졌고 더욱 속도를 높였다. 붉은 구름을 봤을 때만 해도 그 안에 남혈마수가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기에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남혈마수는 그 자체로도 강력하지만 심지어 신통술도 쓸 수 있어 정열기 수준 수련자와 맞먹는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기 때문이다.
수백 마리의 남혈마수가 금세 수련자들을 따라잡아 포위했다. 피에 굶주린 듯 날카로운 소리와 끔찍한 생김새, 거대한 주둥이, 그리고 온몸에서 번득이는 남색 빛에 오운래를 비롯한 수련자들은 악몽을 꾸는 듯했다. 더구나 자신들로서는 저항할 힘도 없었다.
붉은 구름도 점차 다가와 남혈마수의 포위망 바깥쪽을 둘러쌌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에 수련자들의 눈에 절망이 드리웠다.
수천 마리의 흡혈마수에게 둘러싸인 일은 난생 처음이었다. 아마 이들의 선배 중에도 이런 일을 겪은 이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절망감에 휩싸인 채 최후의 반항을 해보려 마음의 준비를 했으나, 어째서인지 흡혈마수들은 공격을 해오지 않았다.
놈들은 포위한 상태에서 좁은 길을 하나 내줬다. 그 길은 돌문이 있는 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수련자들은 이 기현상에 긴장한 듯 침을 꼴깍 삼킬 뿐이었다. 그때, 오운래가 결연한 모습으로 앞장섰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돌문 위에 가부좌를 튼 수련자의 모습이 두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옆에서는 옅은 금색의 흡혈마수가 드러누워 냉랭한 눈으로 수련자들을 훑었다.
금혈마수의 시선을 느낀 순간 오운래는 우뚝 멈추어 섰다.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저 금색 흡혈마수가 명을 내리면 주위를 둘러싼 흡혈마수들이 곧장 공격해올 것임을 직감했다.
“금혈마수… 흡혈마수의 왕!”
수련자들은 금혈마수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챘다.
눈 깜짝할 새 백 년
오운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한제에게 공손히 포권을 했다.
“오운래가 선배님을 뵙습니다. 방해할 의도는 전혀 없었으니 언짢게 생각하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이어서 다른 수련자들도 분분히 포권을 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한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제자리에 앉아 두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이에 오운래와 수련자들은 흡혈마수들에게 갇힌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수천 마리의 흡혈마수에게 둘러싸인 채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려니 난감하고 긴장이 됐다.
사실 한제는 그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때 한제는 모든 신식이 심신으로 녹아든 상태라 외부의 일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수련자들을 포위한 것도 이쪽으로 안내한 것도 모두 금혈마수가 한 일로 한제는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저들이 살기를 발산하거나 원력의 파동을 일으킨다면 한제는 곧장 깨어날 터였다.
허나 이들은 감히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자신들의 목숨이 저 백발 수련자의 손에 달려 있다고 여겼을 뿐만 아니라, 이 많은 흡혈마수들을 상대로 저항할 마음도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초조한 상황에서의 기다림은 계속되었다.
“두 번째 신통력은 유월이라 이름 붙이려 한다.”
한제는 심신 안에서, 돌문 위에 앉은 채 곁에 있는 평에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의 심신에서는 파도소리만이 들려왔다.
한참 뒤, 한제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살짝 휘둘렀다.
순간, 전방의 해수면에서 파도가 출렁였고 하늘에 닿을 듯 거대하게 불어나더니 끊임없이 요동치면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때, 오운래를 비롯한 수련자들은 엄청난 힘이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그들은 순식간에 기이한 충격에 휩쓸렸고 순간 눈앞이 이지러지는 것을 느꼈다.
시야가 다시 또렷해졌을 때 그들의 눈앞에 있던 모든 것은 흩어져 사라지고 거대한 돌문만이 서 있었다. 그 끝이 한눈에 담기지도 않을 만큼 거대한 돌문이었다.
돌문에서는 오래된 기운이 흘러나와 가늠하기 힘들 만큼 거대한 힘을 형성했다.
수련자들은 그 힘에 그대로 침몰돼 성난 파도 위의 조각배처럼 휩쓸렸다.
“유월⋯⋯.”
오래된 기운을 품은 목소리가 느릿하게 울려 퍼졌다. 무궁무진한 세월을 품은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오운래와 수련자들은 몸을 바르르 떨었고 눈빛은 멍해졌다.
뒤이어 하나하나의 기억이 심신에서 떠올라 점차 모든 것을 대체했다. 이들은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시간의 변천을 경험할 수 있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한순간조차 이들에게는 1백 년처럼 느껴졌다. 기억은 심신 안에서 빠르게 흘러 눈 깜짝할 새 1~2백 년, 3백 년⋯⋯ 이윽고 1천 년 전의 기억까지 지나갔다.
고작 열을 셀 만한 시간에 이들은 1천 년의 기억을 되새긴 것이다. 동시에 이들은 기억을 따라 1천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기억의 흐름에 따라 오운래는 1천 년 전의 정열기 중기 수련자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수련자들 역시 1천 년 전의 수준으로 퇴보한 상태였다.
1천 년 전 중상을 입고 폐관수련을 하는 중이었던 수련자는 몸을 바들바들 떨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의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이들은 정말로 자신이 1천 년 전의 그때로 돌아간 것으로 여겼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