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87
이제 몇 시진만 가면 출구에 도착할 터였다.
허나 그 무렵, 거대한 흡혈마수 무리는 고작 1백 리 거리까지 추격해온 상태였다. 특히 크기가 수십만 척에 달하는 그 거대한 금혈마수는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매섭게 한제 쪽을 노려보았다.
한제는 이제 두 번째 저물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흡혈마수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저물공간에는 선력과 원력이 충분해야 하는데 마침 한제는 둘 다 부족하지 않았다. 원정이든 선옥이든 그에게는 넘치도록 많았다.
한제가 오른손을 움켜쥐자 허공에 균열이 생겨났다. 길이가 1만 척에 달하는 균열에서 음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한제의 미간에서 규칙의 반점이 회전하면서 천둥번개가 튀어나오더니 균열 가장자리를 맴돌며 끊임없이 번득였고 이내 균열을 고정시켰다.
동시에 남색 화염도 일어나 균열 안쪽을 태워버렸다. 덕분에 그 너머에서는 한기가 흩어져 사라졌고 공간은 한층 더 넓어졌다.
한제는 이어서 선옥과 원정을 새 저물공간에 모조리 집어넣었다. 이에 새 저물공간에는 선력과 원력이 가득 찼다.
한제는 금혈마수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금혈마수가 쉭 소리를 냈고 이를 신호로 주위의 흡혈마수들이 모조리 저물공간으로 들어갔다.
가장 마지막에 들어간 것은 금혈마수였다. 녀석은 들어가기 직전에 고개를 돌려 한제를 보더니 이내 들어갔다.
모든 흡혈마수를 저물공간에 집어넣은 한제는 오른손을 휘둘러 균열을 흩어버렸다.
이제 풍의 선계에 남은 것은 그 혼자였고 뒤에서는 수많은 흡혈마수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 한제는 가속 부적을 꺼내 몸에 붙였다. 여기에 체내의 원신까지 가동해 쇄열기 수준의 기운을 고신의 힘과 융합시켰다.
한데 한제는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뒤쫓는 흡혈마수들 중 그 거대한 흡혈마수는 분명 강력했다.
하지만 어떤 신통력도 발휘하지 못했고 속도도 생각보다는 느렸다.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고민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속도를 높였고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며 걸음을 내딛었다. 그 순간, 한제는 파문에 녹아들어 자취를 감췄다.
운해성역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축지성촌(縮地成寸)을 사용한 것이다. 사실 운해성역은 안개와 기이한 힘으로 가득해 축지성촌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술법은 풍의 선계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선계의 특성상 원하는 만큼 먼 거리를 한 번에 이동할 수는 없고 자칫하면 전혀 낯선 곳에 이르게 될 수도 있어 매우 위험하기는 했다.
축지성촌의 실패를 줄이려면 가고자 하는 곳을 정확히 떠올릴 수 있도록 직접 가봤던 곳을 목표로 삼아야 해야 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축지성촌을 이용해 풍의 선계 깊은 곳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적은 이유는 운해성역에는 안개의 방해 때문에 이 술법을 깨달은 자가 매우 적었기 때문이다.
풍의 선계 출구 가장자리를 떠올린 한제가 허공으로 녹아들어 자취를 감추었을 때, 흡혈마수들의 쉭, 쉭 소리도 귓가에서 사라졌다.
한제는 기이한 경계에 이른 듯한 느낌을 받았다. 허무 자체가 된 듯 아무런 존재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세상의 일부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제가 다시금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며 한 발 앞으로 내딛은 순간, 원력이 응집되면서 사라졌던 그의 몸을 다시 형성했다.
풍의 선계와 운해 8급 성역을 잇는 통로 근처에 이른 상태였다. 고개를 돌려 보니 저 하늘 끄트머리에서 포효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몸을 날려 균열을 넘어가면서 풍의 선계에서 빠져나왔다.
그 순간, 선계 깊은 곳. 중심부 세 조각 중 하나의 석상이었던 노인이 밝은 눈빛으로 혼잣말을 웅얼거렸다.
“이번에는 내가 널 도왔으니 다음에는 네가 날 도와야 한다.”
한편, 선계의 균열에서 빠져나온 한제는 8급 성역의 익숙한 우주를 눈에 담았다.
어쩐지 어색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선계에는 안개도 없어서 시야가 탁 트여 있었지만 운해성역은 안개로 가득해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극종⋯⋯.”
그는 기억을 더듬어 무극종을 향해 나아갔다.
“아직 충분하지는 않지만 많은 흡혈마수를 얻었다. 나의 몸 상태만 완벽히 회복하고 녀석들을 잘 이용한다면 탁삼과의 싸움에서도 어느 정도 버텨낼 수 있을 터. 시간이 조금 더 있다면 금혈마수를 진화시키고 더 많은 흡혈마수를 모을 수도 있었을 텐데…”
★ ★ ★
8급 성역 무극종. 수련성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큰 대련장 위에서는 5급 성역 분종의 시합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감히 자도종에 대적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10만 명에 이르는 수련자들의 시선이 대련장 위로 집중됐다. 풍해를 비롯해 붉은 머리의 노인과 무극종의 강력한 수련자들이 가장 높은 대에 앉아 있었다.
하얀 도포의 노인이 대련장 위에서 자도종의 제자와 싸우고 있는 또 다른 5급 성역 분종의 제자를 가리키며 웃었다.
“자도종은 최근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군. 노운종의 공이 작지 않아! 이 도우, 신종에서 노운종을 탐내서는 안 될 것이네.”
이 하얀 도포의 노인은 온화한 얼굴에 귀태가 흘렀다. 또한 선인의 기질이 풍기는 두 눈은 밝게 번득였고 쇄열기 수준의 기운이 느껴졌다.
노인의 곁에는 외모가 절륜한 두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중 보라색 옷을 입은 여인은 특히 아름다워,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허나 그녀에게서는 가까이 다가가기도 힘들 만큼 서늘함이 느껴졌다.
이에 주위의 수련자들은 끊임없이 그녀를 힐끔거리면서도 감히 다가서지는 못했고 그래서인지 그녀는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반면 다른 한 여인은 밝은 표정과 사근사근한 태도 덕분에 주변 사람들의 귀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특히 그녀가 만개한 꽃처럼 미소를 지을 때면 보는 사람은 저도 모르게 그 웃음에 도취되곤 했다.
이 여인은 가볍게 웃으며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종주님, 그런 말씀 마셔요. 소녀는 그저 스승님께서 노운종을 칭찬하신 적이 있다고 말했을 뿐인데요. 노운종을 신종으로 받아들일지 말지는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얀 도포의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더는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따금 그의 눈은 차가운 여인에게로 향했지만 끝내 상대의 정체는 파악할 수 없었다.
이때 대련장 위의 자도종 무리에서 노운종이 걸어 나왔다. 종주인 그 역시 시합 참가자 중 한 명이었다. 용모를 더욱 빛내주는 보라색 도포를 입은 채 선 그는 더없이 용맹하고 굳건해 보였다.
그의 맞은편에는 또 다른 5급 분종의 종주가 서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그 노인은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노운종 저자 예사롭지 않습니다. 과연 스승님께서 칭찬하신 인물다워요. 수준은 높지 않지만 경지가 아주 높을 것이 분명합니다. 도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을 테고요. 은미 사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비선은 대련장 위에 선 노운종을 바라보며 곁에 앉은 여인에게 작게 속삭였다.
모은미는 운해성역의 분종 시합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비선의 제안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노운종을 힐끔 훑어보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좀 달라 보이기는 하네.”
그녀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지만 노운종이라는 사내를 볼 때마다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었다.
이비선이 눈을 깜빡이며 작게 웃었다.
“노운종은 수련한 지 3천 년이 겨우 넘었습니다. 단약을 복용하지도 않았는데 1천년 만에 문정기에 이르고 1천년 만에 정열기에 이르렀으며, 다시 1천년 만에 도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지요. 파천종 이천매도 그와 도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눴답니다. 모 도우가 있었던 곳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나요?”
대화에 끼어든 것은 하얀 도포의 노인이 아니라 그의 곁에 앉은 한 중년 사내였다. 종주와 나란히 앉은 것으로 보아 무극종에서 상당한 신분인 듯했다.
모은미는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사람 있지요. 수련을 시작한 지 2백 년 만에 결단기에 이르고 5백 년 만에 영변기에 이르렀으며, 8백 년 만에 문정기를 돌파해 1천 년이 되었을 때는 음양이의에 이른 사람이요.
제가 그곳을 떠나오기 전, 그는 수련을 시작한 지 2천 년도 안 돼 정열기 초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생사의 경지와 인과의 경지를 깨달았지요. 저 노운종이라는 사람이 그보다 수준은 높지만 도를 논할 때는 상대하기 힘들 겁니다. 목숨을 건 전투 역시 어떻게 끝이 날지 확신할 수 없지요.”
무극종을 뒤집다 (1)
모은미의 목소리에는 옅은 슬픔과 복잡한 감정이 배어 있었다.
이비선은 두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
“은미 사저에게 그런 칭찬을 받다니, 기회가 있다면 저도 꼭 한 번 그 분을 뵙고 싶습니다.”
모은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럴 기회는 없을 거야.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모르니까. 운해성역으로 왔을 가능성은 크지 않아.”
모은미의 말을 들은 중년 사내가 덤덤하게 말했다.
“나 역시 궁금해지는군요. 그의 이름이라도 알려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그자의 이름을 알아야 혹여 만나게 되더라도 바로 죽이지 않고 한 번쯤 기회를 줄 수 있을 테니까요.”
다소 무례한 상대의 말에 모은미는 한층 싸늘해진 눈으로 그 추 씨 사내를 노려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이름은 알 필요 없습니다. 만에 하나 그와 마주치게 된다면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까요.”
사내는 모은미의 날이 선 말투에도 개의치 않는 듯 껄껄 웃었다.
“모 도우께서 굳이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한편, 하얀 도포의 무극종의 종주는 내심 불쾌한 마음으로 중년 사내를 한 번 훑어보았다. 허나 끝끝내 아무 말도 꺼내지는 않았다.
영리한 이비선은 애써 웃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종주님, 이천매도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디에 있나요?”
이어서 그녀는 곁에 있는 모은미에게 설명했다.
“이천매는 우리 운해성역에서 아주 보기 드문,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여인입니다. 수련을 시작한 지 1천 년 만에 쇄열기 절정에 이르렀지요.”
심지어 모은미조차 이번에는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도포의 노인이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이 도우는 5급 분종인 귀원종과 연이 있다더군. 지금도 그들과 함께 있지.”
이비선은 흠칫 놀랐다. 귀원종은 들어본 적도 없는 곳인데 어찌 이천매와 연이 있단 말인가.
“풍 장로 직접 본 자네가 여기 여러 도우들에게 설명을 해주게나.”
무극종의 종주는 대련장을 내려다보고 있던 풍해에게 말했다.
풍해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비선과 모은미에게 포권을 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