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94
“아악!”
세상을 뒤덮은 어둠에 잠겨 있던 수련자들은 원신에 고통을 느꼈다. 햇살에 갈라진 검은 밤처럼 원신이 찢겨 나가는 듯했다.
무극종의 태상장로 역시 표정이 크게 변했다. 그는 다급히 몸을 물리면서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그러자 번득이는 붉은 고리가 떠올라 주위에서 맴돌면서 잔야력에 대항했다.
콰쾅!
온 세상이 요란하게 뒤흔들렸다. 동시에 세상을 뒤덮었던 어둠이 금빛에 완전히 밀려나 흩어져 사라졌다.
이때, 규칙의 그물이 하나로 응집해 한제를 뒤덮으려 했다. 해수면으로 솟아오르는 해를 저지하고 한제를 가둘 생각인 것 같았다.
한제는 두 손을 바깥쪽으로 강하게 떠밀면서 온몸의 원력을 동원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발산된 금빛이 태초의 규칙을 품은 예리한 검처럼 사방으로 쏘아졌다.
바다에서 태어난 잔야력은 태초의 규칙을 품고 있었다. 떠오르는 태양을 막을 수 있는 힘은 없다. 제아무리 규칙의 그물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제의 손짓에 잔야력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갔다. 동시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규칙의 그물이 움찔하더니 쩌적 갈라져 어둠과 함께 허무로 돌아갔다.
어부가 던진 그물은 물고기의 몸부림에 그대로 찢겨 나갔고 물고기는 그물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한제는 그물을 빠져나온 물고기처럼 곧장 바다로 돌아가는 대신 그물을 던진 상대에게 복수를 하려 했다. 그는 온몸으로 금빛을 내뿜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냉랭한 눈으로 저 멀리서 끊임없이 잔야력에 대항하고 있는 백발노인을 바라보았다.
“감히 내 신통력에 대항하려 하느냐?”
한제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아까 전 백발노인의 말을 그대로 돌려준 것이다. 허나 잔야력을 직접 목격한 수련자들은 한제의 말을 오만하다 느끼지 않았다.
백발노인은 끊임없이 물러서면서도 전의를 드러냈고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허공을 두드렸다. 그때마다 체내에서는 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서 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노인은 수만 척을 물러나 마침내 잔야력에서 벗어났다.
노인의 수준은 상당했고 한제는 잔야력의 위력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노인의 몸 주위에는 피처럼 붉은 고리가 맴돌았고 뒤로는 허상의 빛 고리가 수십만 척으로 불어나 있었다. 그 고리에서 발산된 붉은 빛이 사방을 뒤덮었다.
“네 신통력은 잘 구경했으니 나 역시 한 수 보여주마!”
노인은 신중한 얼굴로 말했다.
그 순간, 노인의 뒤에 나타난 빛 고리가 한층 짙어졌다. 그 빛의 힘을 빌린 듯, 노인은 순식간에 1만 척을 뛰어넘어 달려들었다.
허나 한제는 침착했다. 잔야력을 발휘하느라 체내의 원력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지만 두 눈에는 전의가 가득했다.
미간에서 규칙의 반점이 번쩍이면서 급속도로 회전했고 이에 세상의 원력이 한제를 향해 응집했다.
그의 수준으로는 첫 번째 천쇠를 넘긴 자를 상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부상 때문에 봉인을 풀어 수준의 제한을 해제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더욱 힘들 터였다. 그럼에도 그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한제는 백발노인이 다가온 순간 오른손을 들어 휘둘렀다. 그의 손짓에 발아래 바다로부터 엄청난 기운이 솟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한제의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끝없는 바다 위에 거대한 돌문이 하나 우뚝 서 있었다. 하늘을 떠받칠 듯 거대한 문에서는 아주 오래된 기운이 느껴졌다. 풍의 선계 안에서 보았던 유월의 문이었다.
그 장면이 순간 한제의 심신을 뒤덮었다.
한제는 오른손을 휘둘러 그 장면을 기이한 방식으로 세상에 구현해냈다.
그의 손짓에 파도는 포효하며 몰아쳐 거대한 회오리를 일으켰고 다음 순간 거대한 돌문이 해수면에 우뚝 솟았다. 그리고 그 순간,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이 세상을 뒤덮었다.
잔야력의 충격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수련자들은 갑자기 바뀐 눈앞의 광경에 더 큰 충격에 빠졌다.
백발노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돌문이 나타난 순간 심신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고는 흠칫 놀라 멈춰 서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찬 숨을 들이켰다. 수준 높은 수련자답게 그는 저 돌문에서 풍기는 세월과 동시에 불길함을 느꼈다.
‘법보 하나 없이 저토록 강력한 신통력들을 발휘하다니! 엄청난 강자다!’
허나 노인의 전의는 더욱 짙어졌다. 무극종 태상장로인 그가 쉽사리 물러날 수는 없었다.
한데 돌문이 솟아오른 순간부터 한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솟아오른 돌문을 타고 맹렬히 솟구쳐 오를 뿐이었고 그 눈빛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문 위에 선 한제는 마치 세상의 꼭대기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백발노인이 달려들었다. 그의 주위에서 붉은 빛이 번득였고 뒤에는 10만 척에 이르는 빛이 파멸적인 힘으로 한제를 압박해왔다.
노인이 다가옴에 따라 아래의 바닷물이 요동쳤고 실제로 대련장 바닥에는 쩍쩍 금이 갔다.
수련성의 절반을 차지하는 대련장이 그대로 와해되고 부서진 돌조각이 바다에 떠밀려 나갔다. 하늘에도 수없이 많은 균열이 나타나 갈라질 조짐을 보였다.
그 순간, 놀랍게도 그곳의 모든 수련자의 미간에 새빨간 점이 하나씩 나타났다. 이 점들은 체내의 정화로 만들어진 것처럼 반짝였다. 오직 극소수의 수련자들만이 필사적으로 원력을 가동해 붉은 점에 대항했다.
이 붉은 점은 백발의 노인이 수련한 규칙이었다. 그의 수준이 증폭되며 10만여 명의 수련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때, 노인이 다시 몸을 날렸다.
거리가 1천 척으로 줄어든 순간, 한제는 세월 속에서 깨어난 듯 번득이는 두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백발노인의 심신이 바르르 진동했다. 동시에 그는 세상에 나타난 미묘한 변화가 바로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
“유월⋯⋯.”
한제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고 그 순간 백발노인의 심신에 녹아들어 그의 기억에 영향을 미쳤다. 이에 노인의 몸은 그대로 허공에 멈추었다. 두 눈에는 저항의 빛이 약하게 드러났지만 그뿐이었다.
유월의 공격은 육체도 원신도 아닌 기억에 가해지는 공격이었다. 한제는 유월이라는 신통력이 칠채계의 노인이 발휘했던 도산(道散)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순식간에 1백 년 전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신통력!
시간의 흐름은 이 순간 서서히 변해갔다.
그 무렵, 백발노인의 얼굴에서는 주름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반면 눈에는 더욱 격렬한 저항의 빛이 담겼다. 그는 지금 자신의 기억에 침잠된 채 무려 1천 년의 세월을 책장처럼 한 장씩 넘기고 있었다.
그 영향을 받은 것은 백발노인만이 아니었다. 10만여 명의 수련자들 또한 1천 년 전의 기억으로 되돌아간 상태였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고 눈 깜짝할 사이 또 10초가 지났다.
모든 수련자는 부지불식간에 2천 년 전의 기억까지 되새겼다.
백발노인은 격렬히 발버둥 쳤다. 그러나 기억이 거슬러오름에 따라 수준은 점점 낮아졌다.
다시 10초가 지나고 노인은 어느새 3천 년 전의 기억까지 보게 되었다.
자신이 가장 아꼈지만 요종의 균열에서 전사한 제자는 유골조차 찾을 수 없었고 무극종으로 돌아온 것은 부러진 검 한 자루뿐이었다. 그 검을 본 순간, 당시의 깊은 슬픔이 다시금 차올랐다.
잠시 후, 노인은 4천 년 전, 이어서 5천 년 전의 기억을 보게 됐다. 첫 번째 천쇠를 맞아 그 끔찍한 고통을 마침내 이겨냈을 때 자신의 몸에서 났던 썩은 냄새까지도 똑똑히 느껴졌다.
과거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고통이 밀물처럼 그를 집어삼켰고 수준은 급속도로 흩어졌다.
어렴풋이 드러난 생사겁(生死劫)
노인은 밀려오는 고통과 함께 분노에 차 울부짖었으며, 두 눈에서는 더욱 강한 저항의 빛이 번득였다.
“난 1만 9천 년을 수련해왔고 천쇠에도 굴하지 않았다! 내 손으로 죽인 자는 셀 수 없을 정도고 피의 규칙도 깨달았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노인의 포효가 울려 퍼지자 뭔가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이어서 피를 토해낸 노인은 빠른 속도로 몸을 뒤로 물리면서 유월의 힘에 저항했다.
그러자 주위 수련자들의 미간에 나타났던 붉은 점들이 요란하게 번득이면서 노인에게로 달려들어 체내에 녹아들었다.
하지만 노인의 안색은 창백했고 한제를 노려보는 눈빛에서는 은은한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이건… 대체 무슨 신통력이지!”
2만 년에 가까운 세월을 수련자로 살아온 그로서도 이토록 기이한 신통력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만약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더라면 그래서 1만 년 이전의 기억에까지 이르렀더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 노인은 상대에 대한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한편, 한제는 덤덤한 표정과 달리 속으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월의 완벽한 위력을 발휘하기에는 아직 익숙지 않았고 체내의 원력도 얼마 남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가 워낙 강력한 수련자라 5천 년 전의 기억까지 되돌리는 것이 한계였다.
다만 상대방은 이로 인해 매우 놀랐음은 분명했다.
유월은 그곳의 모든 사람의 세월까지 거스르게 만들었고 이에 한제를 보는 수련자들의 눈에는 경외심이 가득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10만여 수련자들의 뇌리에 자신의 존재를 단단히 각인시킨 것이다.
풍해 또한 더 이상 한제에게 원한을 가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모든 수련자들은 한제가 나타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나타나기 전에 퍼져 있던 소문들까지 더해져 한제의 인상은 한층 깊어졌다.
더구나 그들은 저 백발의 수련자가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이라 여겼다.
이로써 여자호가 몸담은 귀원종을 건드릴 자는 이제 없을 터였다.
무극종 종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자는 분명 천쇠에 이른 수련자일 터. 부상이 있는 상태에서도 태상장로를 꺾었다. 만약 저자가 법보라도 사용했다면? 저런 수련자라면 융숭하게 대접해야 한다. 또한 8급 성역 종파의 시합에 나가준다면 우리의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야!’
한편, 여연비 또한 놀란 마음을 안은 채 한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한제가 이토록 강해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1백 년 전, 스승이 택령술을 발휘하면서 남긴 말을 떠올린 여연비의 눈이 반짝였다.
그때, 노운종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도 수준이 제법 높아졌다 여겼건만 상대와의 격차는 더욱 벌어진 것이다.
허나 이천매에게는 한제의 수준이 중요치 않았다. 단지 자신이 이곳에 그와 함께 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요종을 떠나오게 만든 그를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했다.
모은미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한제는 볼 때마다 놀라운 변화를 보였지만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다만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가깝지도 낯설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하며 영원히 서로에게 무관심한 삶을 이어갈 것이다.
한편, 신종의 이비선은 기이한 눈으로 한제를 응시했다. 그녀는 몰래 옥패를 움켜쥐고는 방금 본 모든 것을 똑똑히 기록했다. 그리고 기록을 마치자마자 손을 꽉 움켜쥐었고 그러자 옥패는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그녀로서는 그저 운해성역에서 새로운 강자를 발견했으니 의무적으로 보고한 것이었으나, 이를 본 스승이 엄청난 충격에 휩싸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졌네. 여 도우의 신통술은 내 평생 들어본 적도 없는 것이었어. 분명 천도에 대한 깨달음이 매우 깊은 게지. 감탄했네!”
뒤로 물러선 백발노인은 점차 안정을 찾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