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as the Hero’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184)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84화
184화 내 소중한 거
토옥, 토옥.
눈을 가리고 기감이 차단된 아네이스는 그녀의 양아버지, 린트베르크 K 로버트의 손에 이끌려 어딘지 모를 지하로 향했다.
눅눅한 물때의 냄새와, 찰박거리는 발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아래로, 아래로.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네이스의 안대가 풀린 것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였다.
“이곳은, 우리 저지먼트 기사단이 처음 탄생한 공간이란다.”
로버트의 말에 아네이스는 자신이 눈을 뜬 공간을 둘러봤다.
냄새와 소리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지하실의 풍경은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물때와 이끼가 잔뜩 낀 천장과 벽.
그리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넓게 퍼질 정도로 넒은 공간.
거기에, 알지 못할 다양한 수식이나 정보가 적힌 서류 더미까지.
“그리고 저게, 우리가 ‘정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란다.”
마지막으로, 아네이스는 로버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 * *
“그녀의 기억은 여기까지입니다.”
셰인은 자신의 앞에 선 요염한 자세의 여인이 하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막 아네이스의 기억을 모두 살펴본 셰인은, 전생에 자신이 자세히 알지 못했던 저지먼트 기사단과 얽힌 비사를 파악했다.
‘어느 정도 유추는 할 수 있었지만, 생각보다 어처구니가 없군.’
전생에 온갖 것들을 봐 왔던 셰인조차 그리 생각할 정도로, 저지먼트 기사단과 황실 사이에 얽힌 비사는 간단하지 않았다.
아주 오랜 시간, 어쩌면 제국이 내세운 ‘정의’라는 뿌리가 흔들릴 정도로.
그러면서 셰인은 아직 깊은 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아네이스를 바라봤다.
전생의 그녀가 ‘철혈의 정의’가 될 수밖에 없던 이유를,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이번에는 조치를 취할 수 있겠군.’
아예 몰랐다면 대비를 하기 힘들겠지만, 어찌 됐든 가장 중요한 정보가 셰인에게 들어왔다.
셰인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성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것으로 너희 여왕과 했던 계약은 끝이 났다. 꺼져라.”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미리 말해 두건대.”
“…….”
“다시는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마라. 이번 같은 자비는 다신 베풀지 않을 터이니.”
“명심, 또 명심하도록 하지요.”
눈앞에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몽환의 종족, 서큐버스였다.
루시드 렘이 여왕으로서의 능력을 전승하기 위해 부른 다음 대의 서큐버스 여왕.
그녀는 셰인에게 루시드 렘의 능력을 계승받고 떠나기 전, 아네이스의 잊힌 기억을 되살렸다.
그 대가로 그녀는 셰인에게 죽지 않을 수 있던 것이다.
새로이 여왕이 된 그녀는 셰인에게 적대적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전대 여왕을 죽인 종족의 원수였음에도, 루시드 렘에게 능력 계승을 받는 와중 겪었던 공포가 그녀에게도 각인된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서큐버스 여왕은 셰인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네고 모습을 감췄다.
* * *
“……그런 것이었나.”
“믿기지가, 않네요.”
셰인은 곧바로 아네이스의 기억에서 읽은 내용을 두 황녀에게 말해 주었다.
당연히 둘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저지먼트 기사단은 오로지 황제가 제국의 ‘정의’를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
그와 관련된 이미지 작업도 오랜 시간 해 오지 않았던가.
그만큼 저지먼트 기사단의 존재는 제국민들의 자부심이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그 뿌리부터가 썩어 있었다는 사실은 상상치도 못한 채.
“아마 황성에서 봤다는 백염의 안개는, 일종의 폭주 현상일 겁니다.”
“그렇다면 지하에 있다는 그 시설을 파괴하는 수밖에 없겠군. 하지만 그걸 겨우 두 사람이 해낼 수 있을까?”
“적의 수는 그리 많지 않으니, 제가 뒤에서 따로 움직인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겁니다.”
“저도 동의해요. 아네이스 양의 실력도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고요.”
올리시아도 동의하고, 셰인이 함께 나선다고 하니 아나스타샤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백염의 영역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가 얼마 없으니 어쩔 수 없군. 하기사, 이에 관한 일은 최대한 아는 사람이 적어야 좋은 일이니.”
“……그렇겠죠. 언젠간 알려야 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부와 외부에 적이 있는 지금 밝힐 일은 아니에요.”
결국, 황성으로 향하는 길을 열기 위해 나서는 이들은 셰인과 클라인, 그리고 아네이스로 확정이 되었다.
* * *
사흘이라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러는 사이 어제부터 도착하기 시작한 각 영지의 지원군들이 모여들었고, 10만 언저리쯤 되었던 병사들의 수도 수십만에 이르렀다.
그사이 올리시아는 지원군들의 지휘관들과 함께 수도 인근에 퍼진 언데드들을 소탕할 작전을 짰고, 아나스타샤는 수도로 진입할 계획을 보다 세부적으로 완성시켜 갔다.
이윽고 결전의 날이 밝았다.
비교적 언데드의 힘이 줄어드는 이른 새벽.
태양이 그 모습을 드러낼 무렵, 수도로 향할 결사대가 결연한 표정으로 모여들었다.
이미 낮은 등급의 언데드들은 앞서 세르데타인을 함락시키기 위해 수도에서 모두 나온 상태였고, 내부에 남아 있는 언데드들은 고위 언데드들뿐.
그 특성상 병사들은 큰 도움이 되지 않기에, 결사대는 베테랑 기사와 마법사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결사대가 수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그 시각, 클라인과 아네이스 또한 준비를 갖췄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
클라인의 물음에 아네이스가 답했다.
“괜찮아. 컨디션은…… 오히려 넘쳐 나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형님? 형님은 후방에 배치된다고 들었어. 지상에서 황녀님이랑 움직인데.”
“……그래?”
“어, 혹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어. 어젯밤에 날 혼자 두고 떠났어.”
“??”
클라인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무엇인지 뇌 속에서 제대로 된 해석이 안 되는 모양이다.
“필요한 것만 가지고 떠났어.”
“……?!”
자신의 기억을 날름 봐 버리고, 혼자 유유히 사라져 버리지 않았던가.
낮이 되어 잠에서 깨어났던 아네이스는 방에 자신이 홀로 남겨졌다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물론, 그걸 클라인에게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크게 축약하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클라인은 그 축약의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어? 어어어?!”
“왜 그래?”
얼굴이 붉어질 대로 붉어진 클라인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차 물었다.
“아아아니! 그. 필요한 것만이라면……?”
“내 소중한…… 거.”
“…….”
오해는 깊어져만 갔다.
* * *
두 사람이 출발할 시기는 결사대가 수도로 진입하고 반나절이 지난 이후다.
결사대가 먼저 앞길을 다져 놓으면, 그 뒤에 두 사람이 수도의 지하수로를 통해 진입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수도의 초입부에서 노란 신호탄이 하늘 높이 쏘아졌다.
내부에 들어선 아나스타샤가 두 사람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엘프들의 협력으로 이 인근에는 언데드가 없는 걸 확인했습니다.”
수도의 초입부로 들어온 직후, 안내역을 맡은 기사의 말에 클라인과 아네이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의 지하 수로로 통하는 길목.
입구에서부터 어둡고 축축한 분위기가 풍겼다.
“여기까지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게 제 일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두 분 모두 무운을 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기사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럼 출발할까.”
“응.”
발화석을 켜고 내부로 들어서자 바깥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축축한 지하 수로가 두 사람을 반겼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뒤따라 들어갔다.
어찌나 은밀한지, 내부로 들어서는 두 사람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한편.
클라인과 아네이스가 지하 수로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접한 아나스타샤는 수도에 어느 한 귀족의 저택을 임시 거점으로 잡았다.
“흐음…….”
수도 에키온의 지도를 펼친 아나스타샤는 각 지역별로 투입되는 병력을 확인하며, 곳곳에서 들어오는 정보들을 취합했다.
고작 반나절에 불과했지만, 마법사들이 모여 대규모 마법을 펼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늘 위로 거대한 눈동자가 떠올라 주변을 응시한다.
7서클의 마법사가 중심이 되고, 6서클 마법사 십여 명이 보조하며 만들어진 마법, 워 아이(War eye).
일정 범위 내를 감찰하는 저 마법의 눈은, 지금 이 시간에도 황성을 주변으로 일어나는 변화를 보여 주고 있었다.
‘아직까진 큰 움직임은 없군. 오늘까지만 분위기를 보고, 바로 병력을 움직인다. 속전속결이 중요해.’
이번 수도 탈환작전은 가능한 한 빠르게 끝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 의견은 아나스타샤보다는 올리시아가 올린 사안이었는데, 수도의 탈환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제국 외부에서 다른 시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정치 같은 머리 아픈 건 잘 모르겠다만…… 그래도 빠르게 끝내서 나쁠 건 없지.’
적어도 너무 완벽을 기하다가 타이밍을 놓치는 것보다는 나았다.
거기에 셰인의 말에 의하면, 적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강해진다고 했으니 가능한 빠르게 죽이는 게 좋다고 했다.
다만 그만큼 준비는 철저해야 했는데, 그 이유로 셰인은 무명을 꼽았다.
[무명의 입장에서도 이번 사태는 상당히 무리한 상황입니다. 그만큼 내몰렸다는 의미지요. 필시 유의미한 타격을 주기 위해 더 많은 준비를 해 뒀을 겁니다.]그에 셰인은 무명의 중요 간부 중 하나가 찾아왔으리라 판단했다.
나태의 군단은 이런 곳까지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질투는 이제 막 탄생했다.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해 봤을 때, 이곳까지 찾아올 가능성이 가장 높은 무명의 인물이 누구일까.
셰인은 그 해답을 어렵지 않게 도출해 냈다.
“카르후. 그때 그놈이 다시 나타난단 말이지…….”
아나스타샤가 북부의 아룬비다보다도 서늘한 목소리로 놈의 이름을 불렀다.
일전, 아룬비다에서 놓치고 말았던 그 웅족 수인의 이름을.
* * *
“거참. 지루하구만, 지루해.”
간지러운 귀를 후비적거리며 카르후는 황성의 테라스에 나와 붉은 하늘을 바라봤다.
분명 해가 중천에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둡게 느껴지는 황성의 하늘.
그 아래서 카르후는 황성 밑으로 포진해 있는 언데드 군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병사들처럼, 각자의 위치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카르후에게 따분함만을 선사했다.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도 벌써 며칠째군. 쩝, 가만히 대기하고 있는 것도 몸이 근질근질하단 말이야.”
그러면서 카르후는 주변을 둘러봤다.
“요즘 그 시끄러운 꼬맹이도 영 보이질 않고 있고…… 아, 나도 그때 사막에 따라갔어야 했나?”
듣기로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분노의 군단장인 블레이크가 상당한 중상을 입었다고 하지 않던가.
그만큼 치열한 전투였으리라.
뿐만 아니라 그가 가진 군단마저 모조리 도륙을 당하고 말았다.
그것도, 고작 두 명에게.
카르후는 그들이 전멸됐다는 안타까움보다, 그만한 강적을 자신이 상대할 수 없었다는 현실이 더욱 슬펐다.
“아버지도 결국 패배했고. 태양을 다루는 성녀라고? 라비아타라. 나도 꼭 한 번 상대해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아주 화끈한 전투가 됐겠어.”
웅족 특유의 둥근 귀가 기운 없이 축 처졌다.
“근데 난 여기서 저런 거나 지키고 있어야 한다니…….”
그러면서, 카르후는 고개를 돌려 어전을 바라봤다.
제국을 책임질 황제의 왕좌 앞에 앉아 있는 금발의 청년과, 그런 그를 보좌하듯 로브를 깊게 눌러 쓴 측근.
그리고, 긴 복도에 질서정연히 서 있는 데스 나이트들까지.
“언데드는 패는 맛이 안 난단 말이지. 끄응. 그나마 밖에 있던 덩치가 좀 해 볼 만할 것 같은데…….”
아쉽다는 눈초리로 카르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며칠 더 기다리면 되겠지? 그때 그 여자도 다시 온다고 했으니까.”
과거의 영광이 아직 티끌이나마 남아 있는 어전을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카르후는 자신의 상대가 올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