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as the Hero’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191)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191화
191화 개인의 정의
검이 뚫고 들어간 실험관에서부터 쩌적 금이 번져 나갔다.
그 너머로, 아네이스의 검에 심장을 꿰뚫린 로버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미 호문쿨루스의 암시와 함께 저지먼트 기사단의 영혼을 이어받은 아네이스의 눈빛에서는 제대로 된 이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네이스의 눈동자 속, 편린이나마 남은 감정에서는 짙은 슬픔이 자리하고 있었다.
로버트는 여전히 무감정한 표정으로 아네이스의 머리를 쓰다듬듯, 유리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윽고 금이 간 실험관에서 흘러나오는 백염이 자연스럽게 아네이스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마치 아기가 어미의 모유를 자연스럽게 찾아 마시듯, 아네이스의 육체는 주변을 맴도는 로버트의 백염을 탐욕스럽게 흡수했다.
그럴수록 로버트의 눈빛에서 생기가 사라져 갔고.
이내 아네이스의 시야도 암전되었다.
* * *
사람으로 가득 찬 마차에 탄다면 이런 느낌일까.
어둠뿐인 공간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숨 가쁘듯 답답한 느낌이 아네이스의 정신을 압박해 왔다.
분명 정신은 몽롱해서 자신이 방금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았는데, 이상하리만치 이 답답한 느낌만큼은 그 무엇보다도 선명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기는커녕 이 숨 막히는 감각은 더더욱 강해져, 아네이스는 본능적으로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꽉 막힌 공간에서 아네이스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움찔거리는 자그마한 움직임뿐.
그런 아네이스의 의지에 반응하듯, 공간을 가득 채운 또 다른 영혼들이 움찔거렸다.
가뜩이나 좁은 공간에 일말의 여유마저 사라지고, 각 영혼들이 살기 위해 점차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아네이스는 자신의 의지 이전에 살고자 하는 생존 본능이 멋대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멋대로 조급해진다.
숨이 콱 막히고, 몸이 혼자 발악하기 시작한다.
아네이스가 그러하듯, 다른 영혼들도 마찬가지.
조바심이 느껴졌다. 아니, 그것은 살심이라 해도 좋으리라.
내가 살기 위해서는, 옆에 것을 죽여야만 한다는.
아네이스가 살기를 흘리는 것처럼 주변에서도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할 무렵.
어둠으로 가득했던 세상에, 새하얀 불꽃이 주변을 가로막고 있던 벽을 허물자 그제야 주변이 제대로 보였다.
“아······.”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아네이스는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
생존 본능으로 인해 일어나던 살심이 가라앉은 뒤에서야 주변을 둘러봤다.
그곳에는 푸른 불꽃이 넘실거리는 사람 형태의 무언가가 있었다.
수십 개나 되는 그것들은, 방금까지 아네이스처럼 살기를 풀던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분위기를 내비추고 있었다.
아네이스는 본능적으로 그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단원들. 내가 죽였던······.”
그제야 몽롱했던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며, 그간 자신이 해 왔던 일들이 떠올랐다.
자신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일어난 일들.
처음 검을 휘둘렀던 것은 자신의 의지가 맞았으나, 첫 레버넌트와 검을 섞은 이후부터는 마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단장님······?”
가장 마지막에 자신이 심장을 찌른 존재가 떠올랐다.
친아버지의 죽음 이후,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던 감정의 요동이 느껴졌다.
그것은 두려움이자, 죄책감. 그리고 분노와 배신감이었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그런 아네이스의 영혼에 영향을 받은 듯, 방금까지 조용했던 주변의 영혼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영혼들의 목소리가 공명하며 아네이스를 다시금 압박해 나갈 때.
화르르륵─!
백염이 그런 영혼들의 공명을 불사르며 나타났다.
그곳에는 푸른 영혼들과 다르게 새하얀 영혼이 아네이스의 앞에 서있었다.
“······단장님.”
영혼은 폭력적으로 변하는 푸른 영혼들로부터 아네이스를 지키듯 둘러 감쌌다.
새하얀 화염이 장벽처럼 둘러싸였을 때, 아네이스는 자신을 품은 영혼을 바라봤다.
“저,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여전히 아네이스의 감정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일으킨 만행이 떠오르자 사죄하고 싶다는 마음이 스치는 한편, 머릿속 저편에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떠올랐다.
다 죽어 가는 모습으로도, 계속해서 괜찮다 말하던 친아버지의 모습이.
그리고 도적떼의 습격이었다는 거짓을 입에 담던 양아버지의 모습도.
모든 게 혼란스럽기만 하던 그때, 새하얀 영혼은 그런 아네이스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는 아네이스의 귓가로, 영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네이스.]“아······.”
양아버지의 목소리.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를 아버지라 부른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에게 남겨진 단 하나의 가족.
[나는 너에게 수많은 거짓을 내뱉었다.]“······.”
[그리고 너는, 그런 내 거짓을 전부 꿰뚫어 봤었지.]“네.”
그와 첫 만남 이후부터, 줄곧. 아네이스는 그의 거짓말을 알아차렸다.
[마녀는 우리 백발의 아이들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 왔다. 하지만 그녀도 모르는 게 있었지. 신체적인 연구는 줄곧 해 왔을지언정, 아이들의 성향까지는 연구하지 않았으니까.]그럴 만도 했다. 호문쿨루스에게 있어서 백발의 아이는 재료이기도 했거니와, 아이들은 모두 감정이 옅었으니까.
그러나 그들 모두 저마다의 감정이 뚜렷하게 있었고, 같은 백발의 아이로서 로버트는 그들마다 개성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네가 거짓을 알아보듯, 나는 감정을 숨길 줄 알았다.]“감정을요······?”
그러자, 동시에 아네이스는 어떤 한 기억을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평생 잊고 살아왔던 기억이었다.
며칠 전, 셰인에 의해 꿈으로 깨달은 기억.
그날은 기사단원으로서 첫 실전을 끝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직 말단에 불과했던 아네이스가 했던 것은, 어느 한 흑마법사의 연구실에서 아직 개조가 덜 된 키메라를 죽이는 일이었다.
하나같이 모두, 자신보다 어리거나 또래였던 아이들뿐이었다.
아네이스의 검에는 그들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수건으로 그런 아이들의 피를 닦아내고 있던 아네이스에게, 로버트가 다가왔다.
“괜찮으냐.”
별거 아닌 질문이었고, 아네이스의 대답도 별거 아니었다.
“괜찮아요.”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멈칫.
아네이스는 하던 일을 멈추고 로버트를 올려다봤다.
“제가, 거짓말을 했나요.”
“그래.”
“······.”
자연스럽게 아네이스의 표정이 구겨졌다.
거짓말은, 아네이스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었으니.
“아네이스. 너는 내게 가끔 묻고는 했지. 정의가 무엇이냐고.”
“······네.”
“오늘 우리는 더 많은 피해를 줄이고자 흑마법사를 죽였다. 그것은 정의지.”
“······.”
“하지만, 신체 일부가 키메라화 된, 아직 자의식을 지닌 아이들도 함께 죽였다. 흑마법은, 제국에 존재해선 안 될 것이니까. 이것도 정의더냐.”
그 질문에 아네이스는 아직 피가 남아 있는 자신의 검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누군가에게는 정의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키메라가 일상에 섞인다면 시민들은 불안해할 것이다. 그들에게 우린 정의다.”
“그런가요.”
“하지만, 오늘 우리의 검에 죽은 아이들에게 우린 악의였을 거다.”
“······.”
그러면서 로버트가 말했다.
“절대불변의 정의 따위는 없다. 누군가에게 정의라면, 또 누군가에게는 악의다.”
“어려워요.”
“모순덩어리지. 하지만 말이다, 아네이스.”
“네.”
“원래 삶이라는 것은 모순덩어리에 불과하단다.”
“······.”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미는 자연을 이롭게 하는 분해자다. 사체를 먹어치우고, 땅을 비옥하게 만들지. 하지만 반대로 녀석들은 타고난 사냥꾼이기도 하다. 개미라는 작은 생명체에게도 모순이 존재한다. 피식자들에게 그들은 악의덩어리겠지. 그러니 인간이라 한들 모순이 없겠느냐.”
아네이스는 그런 로버트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모순적이다.
어려운 말이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거짓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모든 거짓이 나쁜 것은 아니지. 방금 네가 한 거짓말은, 어떤 의미로 내뱉은 거짓말이었니.”
그 말에 아네이스는 잠시 생각에 빠지는가 싶더니, 살짝 얼굴을 붉히며 솔직하게 말했다.
“걱정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고, 약한 모습도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 그렇다면 그 거짓말은, 나쁜 거짓말이냐, 선한 거짓말이냐.”
“······선한 거짓말도 있어요?”
“적어도 너는 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고 했지. 거기엔 배려가 있었다. 배려는 나쁜 것이냐?”
이건 쉬운 질문이었다. 아네이스가 금방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래. 세상에는 다양한 거짓말이 존재한다. 아무런 의미 없는 거짓말도 존재하지. 가령, 남들에게 자신을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거짓말도 있는 것처럼. 그러니 모든 거짓말에 일일이 반응하자면, 끝도 없단다.”
“······.”
“그래서 여기에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거짓말을 보는 게 아니라, 거짓말을 하는 상대를 봐야지.”
“상대를······.”
“그래. 그리고 상대가 너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그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를 잘 생각해 보아라. 그럼 머리 아픈 고민은 지금보단 더 줄어들 거다.”
그 말에 아네이스는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친아버지의 거짓말 이후, 남들의 거짓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아네이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단장님도 거짓말을 하시나요?”
“그럼. 나도 많은 거짓을 일상에 안고 살아간다.”
“그건 싫은데.”
그러자 평소 표정에 변화가 그리 많지 않던 로버트가 약간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내 비밀을 하나 알려주마.”
“비밀이요.”
“나는 감정을 숨길 줄 안다. 정말 필요한 거짓말을 할 때면, 그렇게 내 스스로의 감정을 숨기고, 거짓말에 필요한 감정을 덧씌우지. 만약 내가 그렇게 거짓말을 할 때면, 신호를 주마.”
“어떤 신호요?”
“눈을 깜빡이는 건 어떻겠느냐?”
“······좋아요.”
그러면서 둘은, 서로만이 알고 있는 비밀 신호를 주고받았다.
단 둘만이 알 수 있는, 비밀 신호였다.
* * *
잊어버렸던 기억이 영상처럼 흘러나왔다.
그러면서, 아네이스는 정신 세계로 들어오기 전, 몽롱했던 정신 속 자신이 로버트를 찌르기 직전 그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는 생기 없는 눈동자가 깜빡였을 때. 뭐라고 했던가.
– 그래. 유일한 정의가 되어, 내가, 그리고 수많은 백발의 아이들이 그러했듯 제국을 지켜라.
– 그게, 정의다.
정의. 정확히 정의에 대해 말할 때마다, 로버트는 눈을 깜빡였다.
아네이스는 수백, 수천 번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남들에게 물어봤던 질문을 던졌다.
“정의가 뭔가요.”
그 질문에, 로버트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내게 정의는, 자유를 향한 갈망이란다.]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한평생 모든 것을 타인에 의해 조종되어 살아왔던 삶.
그런 로버트에게, 아네이스의 자유는 곧 자신의 정의였다.
로버트의 대답에 아네이스는 그 수많은 질문 중, 정의에 대한 대답에 처음으로 거짓을 느낄 수 없었다.
[너에게 정의란 무엇이더냐.]“제 정의는······.”
문득, 먼 옛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괜찮다. 다 괜찮을 거야.
자식에 대한 사무친 걱정으로 물들어 있던 친아버지. 그리고, 지금도 자신의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양아버지.
아네이스는, 언젠가 자신이 처음으로 했던 거짓말을 떠올렸다.
“걱정이 없는 세상. 그게 제 정의에요.”
그 말에, 로버트가 웃음을 지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