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as the Hero’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22)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2화
22화 무아지경
“클레이튼 백작이라. 과연 우리 말에 순순히 따르겠나?”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풍성한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의 물음에 부하로 보이는 이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네. 클레이튼 백작이라면 살리에르 백작의 공백을 메꾸면서도 보다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는 판단입니다.”
“내가 알기론 클레이튼 백작은 돈 자체에 관심을 두고 있는 전형적인 상인이던데?”
“물론 그렇습니다만, 최근에 보인 행보를 보면 금전적 이득과 상관없는, 정치적인 움직임을 시도하고 있는 정황을 파악했습니다.”
남자, 올리버 G 대니얼은 부하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연합국의 시장에서 클레이튼 가문이 가지고 있는 위상은 결코 낮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모시고 있는 주군 또한 클레이튼 가문과 선이 연결되길 바라고 있을 정도였으니.
“좋다. 한데, 정치적 움직임이라는 건 무엇이냐. 그 치는 어느 조직에도 후원을 하고 있지 않을 텐데?”
클레이튼 백작은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 돈자루를 푸는 가문이 아니었다.
간혹 뿌린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건 공공의 이익이나 거래의 성사를 위해서지, 정치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아직 후원처럼 대놓고 행동은 하고 있지 않으나, 최근 들어 귀족들의 연회에 참여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흠…… 그 클레이튼이 그렇단 말이지.”
연회가 단순히 먹고 노는 장소가 아닌 만큼, 클레이튼 가문의 가주는 귀족계의 분위기를 염탐하고 있는 것이라 봐도 좋았다.
“그러고 보니, 아네이스의 나이가 올해로 몇 이었지?”
“열일곱입니다.”
“소문에 들리는 그 클레이튼 가문의 천재 또한 같은 나이라 들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로웰 가주의 성격은 굉장히 신중한 편입니다. 그 정도의 이름을 날리는 아들의 혼사 문제는 꽤나 신중하게 나서지 않을지요.”
“그렇다고 우리 저지먼트 기사단의 딸이란 이름이 결코 작지는 않을 터.”
아니, 오히려 이름값만 따진다면 클레이튼 가문은 저지먼트 기사단에 미치지 못한다.
일개 상단 가문과, 대전쟁 때부터 황실을 보좌해 온 기사단의 이름값이 어찌 같을까.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귀족들의 순혈주의를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쯧. 그놈의 순혈주의자들.”
그러나 현재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받고 있을 아네이스는 전 단장, 린트베르크 K 로버트의 친딸이 아니었으니.
서로의 이름값은 부족하지 않으나, 이쪽에서 명분이 부족한 것은 맞았다.
“로버트여. 그대의 충심은 결국 죽어서까지 나를 귀찮게 하는군. 가는 길에 자식이라도 하나쯤 남기고 가지 그랬나.”
지금도 그 큰 등이 떠오른 대니얼은 잠시 주먹에 힘을 쥐었다 풀었다.
“그럼 머저리라 불리는 첫째도 괜찮을 테지. 들어 보니 최근 철이 든 것 같다고 하던데.”
“예.”
“클레이튼 가문의 가주와 약속을 잡게. 내 직접 나설 테니.”
“알겠습니다.”
부하가 방 밖으로 나가고, 홀로 남은 대니얼은 한쪽 테이블에 위치한 사진을 바라봤다.
자신과 저지먼트 기사단원들, 그리고 전 단장 로버트와 아직 한참 어린 아네이스가 찍힌 단체 사진이었다.
사진 속 자신은 웃고 있었으나, 대니얼은 잘고 있었다.
저 웃음 속에 얼마나 더러운 감정이 가득했던가.
그 더러운 감정에서 벗어나고자 이렇게 단장직에 올라왔음에도, 여전히 대니얼의 가슴속에는 질투가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 자리에 서 있으니…….
“네 흔적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이는군.”
커지면 커졌지, 작아지지는 않았다.
* * *
“야, 약혼 말입니까? 형님의?”
“그래.”
수정구로 통신이 끝난 뒤, 클라인은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셰인을 바라봤다.
형님이…… 약혼을?
물론 그들도 귀족인 만큼 약혼이라는 단어가 익숙한 것은 맞았지만, 여태까지 둘의 아버지인 로웰이 약혼과 관련된 말은 단 한 번도 꺼내 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거기다 형님이 약혼이라니…….
최근 셰인이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 줬다지만, 한 여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게 잘 상상이 가지 않는 클라인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되면 형님도 지금보다 더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클라인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반면, 셰인은 전생과 달라진 상황 속에서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네이스라…….’
린트베르크 J 아네이스.
그 유명한 저지먼트 기사단의 딸.
심지어 학과시험에서도 3등을 차지한 우등생이다.
안 그래도 아네이스에게는 한 번 접촉할 기회를 엿보고 있긴 했다.
그녀 또한 전생에 셰인이 기억할 정도로 우수한 인간이었으니.
그런데 그런 그녀와 약혼으로 이어지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살리에르, 그 벌레의 빈자리를 채우겠다는 속셈인가.’
셰인의 정체를 알고 접촉해 온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셰인은 그 자리에 단 하나의 증거도 남겨 두지 않았으니.
다만 저지먼트가 섬기는 주인에게 살리에르 백작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가 결코 작지 않았던 만큼, 하루 빨리 그의 빈자리를 채울 궁리를 하고 있었을 터.
셰인은 오히려 이 일이 기껍게 다가왔다.
‘오히려 써먹을 수 있겠군.’
아직은 이야기가 오가는 정도니 셰인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보다 클라인.”
“예?”
“아직 팀은 안 구했지?”
여기서 팀이란, 지휘학과 생도라면 반드시 해야 할 팀 구성이었다.
지휘학과 생도들은 각자 자신의 팀원을 구해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으로 점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 예. 아직은 이론적으로 더 배워야 할 것 같아서 모집은 미뤄 두고 있습니다.”
“그래? 마침 잘됐구나.”
“……?”
“내 논문으로 인해 라비아타 모험단 쪽에서 협업 논의가 들어왔다.”
“라, 라비아타 말입니까?”
오늘 따라 놀랄 일이 왜 이렇게 많은지.
라비아타의 위명은 클라인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지금은 자취를 감춘 헤르메스 모험단과 더불어 모든 모험가들이 꿈꾸는 동경의 대상이 아니던가!
“학과 시험에 제출한 내 논문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 같구나. 함께 메자이아 대수림에 가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세상에! 축하드립니다, 형님!”
정말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클라인.
하나 그것도 잠시, 제 형이 제출한 논문의 내용을 떠올리곤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지만 메자이아 대수림이면…… 명색이 5대 요람 중 하나 아닙니까.”
“그렇지. 많이 위험할 거다.”
“끄응…….”
만약 메자이아 대수림의 원정을 무사히 다녀온다면 셰인의 명성은 천정부지로 솟아오를 것이지만.
반대로 얻는 명성만큼이나 위험도 함께 도사리고 있을 터.
“그래서 하는 말이다만, 클라인. 함께 가지 않겠느냐?”
“제가, 말입니까?”
“그래.”
클라인의 능력은 그 메자이아 대수림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메자이아 대수림은 몬스터보다 환경 자체가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클라인이 곁에 있다면 위험할 일도 없을뿐더러…… 클라인의 성장에도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거기에 5대 요람에 들어가는 만큼, 클라인이 직접 구성한 팀이 아니라 하더라도 학과 점수를 얻을 수 있을 테고.
한편 클라인은 내심 큰 감동을 받고 있었다.
형님이 자신을 믿고 이런 제안을 해 준 것일 테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런 다짐을 하며, 클라인은 셰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 *
다만 그런 클라인의 생각과 다르게 아카데미에 퍼진 소문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이어졌다.
“야, 클라인. 너 라비아타랑 협업하기로 했다며? 진짜 대단하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알 로스의 말에 클라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맙긴 한데, 내가 하는 거 아냐. 우리 형님이 하신거야.”
“어? 그래? 그거 진짜였구나?”
“응?”
설마하니 당사자가 소문을 모르고 있냐며 알 로스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임마, 아카데미에 지금 너 형님 관련해서 소문 싹 퍼졌어.”
“……? 뭐라고?”
“네가 라비아타하고 협업하는 거에 너희 형님이 숟가락만 쓱 얹었다고 하던데?”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본래 라비아타 정도 되는 수준의 명성을 지닌 존재가 움직이다 보면 소문이야 금세 부풀어 오르기 마련이다.
거기에 라비아타도 관련해서 인터뷰를 진행하며 분명 클레이튼 R 셰인과 계약을 맺었다고 했건만.
왜 소문이 그런 식으로?
“쯧…… 너희 형님, 보기에 많이 바뀌긴 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로 보였나 봐.”
“…….”
친구의 설명에 클라인은 입을 다물었다.
이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형님을 지켜드릴 수만 있다면 됐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일어나다니.
“안 되겠다. 어서 빨리 내가 협업에서 빠진다고 공표해야…….”
“머리도 좋은 애가 오늘따라 왜 이래? 네가 빠진다고 해서 저런 소문이 없어지겠어? 오히려 너희 형님이 성과를 혼자 독식하려 한다고 욕만 더 먹을걸?”
평민 출신인 알 로스는 하늘에서 떨어진 기회를 뻥 차 버리려는 클라인의 행동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지 극구 말렸으나, 클라인의 가슴은 무겁기만 했다.
확실히, 이제 와서 빠진다고 하면 정말 로스의 말처럼 될지도 몰랐다.
“하아……. 이걸 어쩌지.”
그렇게 고민이 이어지고.
수업이 끝나고 셰인을 만날 때까지, 클라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클라인, 표정이 왜 그러지?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느냐?”
“형님……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이상한 소문이…….”
“소문?”
주변 소문에 관심이 없던 것은 셰인도 마찬가지였던지라, 클라인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셰인에게 소문에 대해 말했다.
어지간하면 셰인의 열등감을 부추기고 싶지 않았으나, 적어도 자신이 형님의 기회를 빼앗는 것보다는 차라리 형님께 미움을 조금 받는 게 더 나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뭘 그런 걸 또 신경 쓰고 있느냐.”
“예? 하지만 이건 엄연히 형님 혼자서 하신 일이잖습니까.”
“클라인.”
“……예.”
“내가 예전에 말했었지. 소문에 휘둘리는 머저리들을 상대로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그 말을 지키고 있다. 너는 어떠하냐.”
“…….”
클라인은 올해 아카데미에 막 들어왔을 당시를 떠올렸다.
[그리고 때로는 너의 그런 시선이 사람의 마음을 더욱 무너뜨린다는 것을 알아 두거라. 나는 불쌍하지 않으니까.]무심코 또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말았다.
물론 형님이 걱정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는 엄연히 형님이 이겨 내야 할 일.
클라인은 스스로의 태도를 반성했다.
‘맞다. 형님은 신경조차 쓰지 않으시는데 내가 먼저 설레발 치는 것도 웃긴 일이야.’
실제로 클라인은 형님이 과거처럼 상처를 받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이내 스스로의 내면에 숨겨진 진실을 깨달았다.
‘그랬구나. 겁을 먹은 건 오히려 나였어.’
생전 처음으로 형님이 자신에게 잘해 주고 있다.
말투도 이상하게 고풍스러워진 걸 제외하면 주변인들에게 가시 돋친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아직 한 명 뿐이지만, 형님에게 직접 팀원이 되겠다는 사람까지 생겼다.
모든 것이, 과거의 형님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많이 바뀌었기에.
혹여 형님이 다시 과거로 돌아가진 않을까, 또다시 마음의 상처가 번지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때, 클라인은 마치 스스로의 내면이 맑게 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클라인의 내면에 있던 망설임의 벽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클라인이 서 있는 상태로 눈을 감으며 몸을 옅게 떨었다.
‘무슨?!’
한편, 그걸 지켜보고 있던 셰인은 속으로 작은 경악을 터뜨렸다.
무아지경(無我之境).
이따금 하나의 일에 극도로 몰입하여 다른 것은 모두 잊고 그 하나에만 정신을 집중한 상태.
그저 많이 집중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는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무아지경은 스스로의 내면에 어지러이 퍼진 탁한 기운을 소멸시켜, 존재의 격이 올라가는 현상이었으니.
대부분의 경우 목숨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드물게 이런 경험을 하는 이들이 등장하는데, 그럴 때마다 그들은 커다란 성장을 맞이하게 됐다.
한데 클라인은…….
‘고작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무아지경에 이르다니?’
셰인으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이내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이래야 내 동생이지.’
그리고, 셰인은 용사의 형으로서 더 어울리는 미래를 떠올렸다.
‘육체적 성장은 충분한 것 같군. 그럼 이제…….’
전투에 익숙한 정신적 성장의 밑거름을 다질 차례였다.
‘던전을 가야겠군.’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