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as the Hero’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26)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26화
26화 준비(4)
진득한 진청색 피를 온몸에서 흘리는 트롤의 괴성이 숲에 울려 퍼졌다.
아네이스는 지친 몸을 이끌고 그런 트롤과 마지막 대치를 이어 갔다.
트롤의 가죽은 수십 번에 걸쳐 베이고 찔려 넝마처럼 변한 지 오래.
그마저도 타고난 회복 능력으로 몇 번에 걸쳐 체력을 회복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너무 오래, 그리고 또 많이 회복했기 때문일까.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친 트롤은 더 이상 상처를 회복하지 못했고, 이내 무릎을 꿇었다.
한편 아네이스의 상태는 결코 좋다고 볼 수는 없었다.
여기저기 구른 흔적은 당연했고, 마지막까지 발악하는 트롤은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최후에 생명을 불태우듯 휘두른 놈의 몽둥이를 미처 제대로 흘리지 못하고 내상까지 입은 듯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네이스는 얼굴에 미소가 자리해 있었다.
생사결.
비록 몬스터였으나, 신체강화를 제외한 어떠한 마력도 쓰지 않고 순수 인간의 힘으로 상대하는 트롤은 그야말로 하나의 벽처럼 느껴졌으니.
그 벽을 기어코 부수어 버린 아네이스에겐 이 고통 또한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휘두르라던 셰인의 말처럼, 아네이스는 이번 전투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것도 저런 괴물을 상대로 1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말이다.
특히 마지막을 장식했던 트롤의 그 공격은 아네이스에게 작은 깨달음을 가져다주었다.
죽기 직전 마지막 생명을 불태우는 트롤의 공격은 아네이스의 ‘예지’를 살짝 비틀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겨우 실마리를 잡은 수준이었으나, 이 감각을 잊지 않고 계속해서 되뇌다 보면 분명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 터.
“……고마워.”
만약 셰인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경험을 언제쯤 맛볼 수 있었을까?
아네이스는 이번의 작은 깨달음을 셰인 덕분에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솔직하게 감사를 표했다.
“네가 직접 성취한 일이다. 나보다는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끼도록.”
“……부끄러워하는 거야?”
“헛소리.”
“훗.”
그런 아네이스의 미소에 셰인이 고개를 돌려 남은 팀원들을 바라봤다.
클라인은 같은 검사로서 아네이스의 깨달음에 순수한 축하 인사를 건넸고, 디라일라는 여기저기 구른 탓에 피를 흘리면서도 웃는 아네이스를 보며 기가 죽어 있었다.
하지만 이내 디라일라도 활짝 웃음꽃을 피웠다.
방금 저 트롤이 이 던전에서 마지막 상대였기 때문이다.
“으아, 드디어 끝났다.”
일행은 그대로 앉아서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앞서 디라일라와 클라인 또한 고블린이나 코볼트를 상대했고, 그중에는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을 자랑하는 ‘워 보어’라는 이름의 멧돼지 무리 또한 토벌하느라 지친 탓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쉬었을까.
일행들이 쉬는 사이 셰인은 쓰러진 트롤에게 다가가 녀석의 목에 걸린 나뭇잎 목걸이를 끊어 들었다.
‘예정대로 이것까지 얻었군.’
이번 던전에 들어온 이유.
팀원들의 전력을 가다듬는 것도 있었지만, 셰인의 최종 목표는 바로 이 트롤이 목에 걸고 있는 나뭇잎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이나 평범해 보이고, 실제로도 별다른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그런 나뭇잎.
그러나 셰인은 이 나뭇잎의 진정한 활용처를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 숲 자체가, 그리고 이 트롤이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나뭇잎이었다.
‘세계수의 나뭇잎. 이걸 먹는 건 두 번째로군.’
유일하게 엘프와 대화할 수 있는 수단을 얻은 셰인은 일행들의 시선을 피해 나뭇잎을 씹어 삼켰다.
* * *
“아으! 죽는 줄 알았네, 진짜.”
던전을 마치고 아카데미에 돌아온 일행들은 먼저 해산하기로 하고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이래저래 팀의 첫 던전 토벌을 무사히 마친 만큼 축하하는 자리라도 가지는 게 어떨까 싶었지만, 그럴만한 체력이 남은 사람은 없었다.
마력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한 채로 진행한 던전 토벌은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보통 피곤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셰인은 거기에 할 일이 더 있었다.
따로 모험가 협회와 아카데미에 복귀 서류를 제출하고, 또 던전에서 얻은 전리품을 현금화하면서도 분배 또한 해야 했기 때문이다.
“형님. 제가 좀 도와드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바쁘시지 않습니까.”
그 외에도 셰인은 라비아타와의 협업과 관련해 아직 정리해야 할 서류가 남아 있는 상태였다.
여러 모로 바쁜 나날이 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셰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괜찮다. 나는 그리 지치지 않았다. 그보다는 돌아가서 이번 토벌에서의 전투를 복기해 보도록 해라.”
“으음…… 그래도.”
“괜찮대도. 어서 가 봐라.”
“……그럼,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클라인까지 떠나고 홀로 남아 이어지는 업무를 모두 마친 셰인은, 근처 골목길로 들어가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확실히, 조금 바쁜 하루가 되긴 하겠군.”
진짜 사냥은 바로 지금부터였다.
* * *
“뭐, 뭐냐. 도대체 뭐냔 말이다!!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고, 이 씨발 새끼야……!”
셰인은 언젠가 나이가 들어 노쇠한 슬라임을 본 적이 있었다.
멀쩡한 슬라임과 다르게 코어가 불안정했던 슬라임은 점액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흐물거리기만 했었다.
“워, 원하는 것이라도 있느냐? 마, 말만 해라! 어? 내 돈이고 뭐고 전부 넘기겠다. 그러니, 그러니 뭐라 말 좀 해 보란 말이다……!”
눈앞에 있는 이 살덩어리의 이름 모를 귀족을 보니 그때 그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그 늙은 슬라임과 다르게 눈앞의 살덩어리는 말이 많다는 것 정도일까.
“제발, 제발…… 목숨만은…….”
눈앞의 귀족은 극도의 공포에 다리 사이를 축축하게 적시며 필사적으로 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존재는 무언가 다르다.
새하얀 가면과 대비되는 검은 안개로 몸을 감싼 이 존재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별장에 침입한 직후부터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의 호위 기사들을 죽여 버렸다.
평범하게 죽이는 것도 아니었다.
몇몇은 싸우지도 않았음에도 그대로 미쳐 버리며 허공에 검을 휘둘렀고, 또 어떤 기사는 벽과 바닥에 생성된 정체 모를 이빨에 의해 씹어 삼켜졌다.
그럼에도 이 가면의 존재는 어떠한 말 한 마디 내뱉고 있지 않으니, 그 침묵으로부터 오는 공포가 귀족의 정신을 잠식하고 있었다.
“히, 히힉! 그, 그럼 저건 어떠냐! 엘프, 엘프다! 아주 어렵게 구한 이종족이란 말이다. 어지간한 귀족 놈들도 구경하기 힘든 물건이라고!”
귀족의 말에 셰인이 시선을 돌려 한쪽에 손과 발이 속박된 한 여인을 바라봤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과 대비되게 그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는데.
그중에서도 소지와 약지가 잘린 왼손은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았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거품이 가득했다.
‘엘프에게 포션이라도 먹인 모양이군.’
그러나 포션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약품이기에, 다른 종족에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는 독극물에 해당되니 저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한편 셰인이 엘프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귀족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저걸 주마! 그러니 이대로 떠나 다오. 그러면 절대 너를 쫓으라는 명령 따윈 하지 않겠다. 평생 조용히 살 것이야!”
“…….”
그러나 셰인이 여전히 말없이 엘프를 쳐다보자, 두려움에 의해 정신이 나가 버린 귀족은 생존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이, 씨발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라 하지 않았느냐!!”
거의 비명이나 다름없는 괴성을 내지른 귀족이 품에서 단검을 뽑아 들고는 그대로 셰인을 향해 돌진했으나.
그걸 두고 볼 어둠의 정령이 아니었다.
셰인을 감싸고 있던 어둠이 귀족의 손을 포박하고 그대로 그 육중한 몸뚱이를 들어 올렸다.
[Krrr…… 주인님.]정령이 정중하게 물어 왔고, 셰인은 공중에 매달린 채로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버둥거리는 귀족을 지그시 바라봤다.
“어쩌면, 잠깐의 평화에 취했던 것일지도 모르겠군.”
그러면서 다시금 시선을 엘프에게 돌렸다.
“아니면, 너무 여유를 부렸다거나.”
본래라면 이대로 녀석을 붙잡아 심문이라도 할 생각이었으나, 다 부질없이 느껴졌다.
살리에르를 상대할 때도 그랬다.
생각해 보면 회귀 전의 셰인은 지금보다 더 악독하고 처절하게 상대를 짓밟았다.
그게 인류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던 고귀한 영혼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타락이 없어진 이후, 셰인은 적을 너무 유하게 상대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저 붙잡고 심문이라니.
이 얼마나 인간적인 사고방식이란 말인가.
“영혼이 망가지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지.”
그러면서, 셰인은 살덩어리 귀족을 위아래로 훑었다.
“먹어라.”
[예, 주인님.]“영혼 한 조각 남기지 말고.”
그 말에 어둠으로 일렁이는 아가리를 벌리던 정령이 멈칫거렸다.
[하지만 그러기엔 아직 제 힘이…….]“내 힘을 보태 주지.”
[아아……!]여태까지 그저 물질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던 오리진의 양이 달라졌다.
마치 빗물로 고인 물줄기가 세찬 강줄기가 되듯.
셰인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오리진의 질과 양이 모두 한껏 늘어났다.
[너무, 너무 맛있습니다. 황홀합니다, 주인님……!]“됐으니 이거나 먹어치워라.”
[예!]“끄윽, 끼이이익!”
가진 바 형상이 훨씬 뚜렷해진 어둠의 정령이 점차 다가오며 이빨을 번들거리자 귀족이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이내 축 펴지며 팔다리가 늘어졌다.
과도한 공포로 인해 기절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둠의 정령이 입을 멀려 귀족을 집어삼켰고, 그제야 이 자리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셰인은 두 눈을 감고 어둠의 정령과 동화했다.
녀석에게 먹힌 귀족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방금, 셰인이 정령에게 명령한 것은 단순히 귀족을 먹어치우라는 내용이 아니었다.
영혼의 섭취.
다만 영혼은 어둠의 정령으로서도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셰인은 이를 위해 자신의 오리진을 녀석에게 전달했다.
이와 같은 일은, 이미 전생에 너무 많이 해 왔기에 숨 쉬듯 쉬운 일이었다.
다만 셰인은 여태까지 그 방법을 무의식중에 쓰지 않고 있었다.
그때의 자신은 타락으로 인해 그 행동에 이런 짓거리에 거리낌이 없었다.
단순히 물리적 죽음이 아닌 영적 죽음은 필요 이상의 잔인함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굳이 이런 것들을 상대하는 데 대수가 어디 있겠나.’
당장 셰인이 상대하는 게 전생처럼 무고하며 고귀한 영혼을 가진 적도 아니고.
그저 인류를 좀먹는 거머리나 진드기 같은 놈들이 아니던가.
“평화에 취해 있던 거지.”
그렇게 셰인은 이름 모를 귀족이 남긴 영혼의 조각을 모아 그것을 토대로 정보를 모았다.
귀족의 이름은 리암 알친.
하이엘 왕국 출신의 자작.
6년 전에 연합국으로 들어옴.
타종족의 고통으로 우월감을 느끼는 성적 취향.
“별 쓸데는 없었군.”
그러면서, 셰인은 품에서 두꺼운 책을 꺼내 들었다.
“이것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것도 시간이 걸리겠어.”
여기저기 손때가 많이 탄 책은, 이전에 죽은 살리에르 백작이 생전에 만들어 둔 거래 장부였다.
거래 장부는 매우 세밀하게 적혀 있었는데, 거래 상대의 이름과 날짜, 품목은 물론이고 심지어 어디서 몇 시에 누구를 통해 거래를 이뤘는지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과연 살리에르와 거래를 했던 놈들은 자신들의 목줄을 잡고 있는 이 장부의 존재를 알까?
아마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장부에는 셰인이 가장 원했던 정보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래서 혹여 리암 알친의 기억 속에 그와 관련된 정보가 있을지 몰라 영혼을 살펴본 것이었지만, 쓸데없는 추잡한 기억만이 읽힐 따름이었다.
“놈의 영혼을 더 살펴보도록. 이종족 노예와 관련된 정보라면 모조리 기억해 둬라.”
[알겠습니다, 주인님……!]만족스러운 포식을 했기 때문일까, 어둠의 정령의 대답에는 어느 때보다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럼 이제…… 진짜 볼일을 보도록 할까.”
[이미 능멸당한 몸, 더 이상 어찌할 생각하지 말고 죽여라!]이딴 소리나 내뱉는 정신 나간 엘프였으나, 어쨌든 셰인의 메자이아 대수림 공략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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