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as the Hero’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74)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74화
74화 버린 자와 선택하는 자
테라스로부터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에 한 금발의 청년이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그 모습엔 범상치 않은 자태가 흘러나오니, 누가 보더라도 그가 고귀한 혈통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청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비교적 어두운 방으로 이어졌다.
“그렇군요. 저의 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라…….”
“예. 현재 매지셔널 위습에서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흐음…….”
청년, 제페르 디 와이어트 새뮤얼은 여전히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마치 누군가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움직임이군요. 안 그렇습니까?”
“1황녀와 2황녀가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미리 계획된 일임은 맞는 것 같습니다.”
“누구일지 궁금하군요. 제 몸 지키기 바빴던 첫째 누이와 추락한 둘째 누이를 움직이게 만든 이가…….”
“매지셔널 위습에서 학회를 연 인물은 클레이튼 가문의 장남이라고 합니다.”
“아아. 그 상인 가문의 장남입니까. 이번에도 일을 화려하게 시작했군요.”
혹시 그 소년이 이번 일의 배후일까 싶었지만, 새뮤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18살에 불과한 소년이 두 황녀를 직접 움직였다?
말이 되지 않았다.
그의 가문인 클레이튼의 가주가 아니고서야.
그러나 반대로 클레이튼 가문의 가주는 정치와 거리를 두는 인물이다.
“그러고 보니 저지먼트 기사단에서 그 가문과 접촉했다고 들었는데. 별다른 성과는 없었답니까?”
“메자이아 대수림의 개방으로 인해 바쁘다는 답변만 돌아오고 있습니다.”
본래라면 상인이라는 점을 이용해 연합국의 지하도시에 똬리를 틀게 만들 예정이었다.
황실에서 밀어 주고 클레이튼 가문의 크기를 생각하면 일전에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살리에르 백작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올 수 있었을 테니.
하지만 그런 클레이튼의 가주에게 메자이아 대수림이라는 더 큰 떡이 놓여져 있는 마당에, 위험성이 다분한 지하도시는 그리 매력적인 요리가 아닐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대니얼 단장이 실망하고 있겠군요.”
“…….”
까악─ 까악─
그때.
테라스 난간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새뮤얼은 익숙하다는 듯 그런 까마귀의 발치에 놓인 종이뭉치를 집어 들었다.
“참…… 요즘은 그자들과 위치가 바뀐 것 같단 말이죠.”
종이를 펼쳐 읽은 새뮤얼은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새뮤얼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남자는 그런 새뮤얼의 미소가 섬뜩하다고 느껴졌다.
여태껏 자신의 말을 듣지 않던 수하들에게 짓던 미소와 같다고 해야 할까.
그들이 최후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한다면, 이 섬득함은 괜한 게 아니었다.
“군대를 움직여야겠습니다. 이대로 제국을 생각하는 황족이 누이들밖에 없다는 인식이 생기면 곤란하죠. 이 제국의 안위를 그 누구보다 걱정하는 것은 저이니 말입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하면, 차출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슬슬 대니얼 단장이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려 북부를 호령하는 오크들을 상대하는 일이니. 나머지는 알아서 말 잘 듣는 이들로 고르도록 하십시오.”
저지먼트 기사단.
황실의 검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학회가 끝난 바로 다음 날.
셰인은 오랜만에 맡는 숲 내음에 눈을 떴다.
과거 비 내리는 소리가 가득했던 메자이아 대수림은 어느새 제법 많은 수의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이곳에 얽힌 이윤과, 아직 떨어질 게 남은 과자부스러기를 받아먹기 위한 행렬이 줄을 잇고 있는 것이다.
다만 수명이 긴 엘프들은 조용한 것을 원했고, 그에 따라 프리실라가 한 번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의 수를 제한해 두었기에 이전보다는 많지 않았지만.
프리실라의 정기가 담긴 세계수의 잎으로 메자이아 대수림에 도착한 셰인은 평소처럼 프리실라를 찾아갔다.
“오랜만이네요. 그런데 피부가 더 하얘지신 것 같아요.”
프리실라가 미소를 띠며 그리 말하자, 셰인은 적당히 받아 주며 본론을 꺼냈다.
“드래곤의 역린을 받으러 왔다.”
“어머.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요?”
처음 둘의 계약은 메자이아 대수림의 안정이었다.
아직 진행 중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인간들 사이에서 메자이아 대수림에 나오는 이득이 한가득 얽힌 상태다.
그러니 더 이상 전쟁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없게 된 지금.
엘프들은 셰인과 프리실라의 계약처럼 이제 안정기에 들어섰다고 봐도 좋았다.
“좋아요. 조금 이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여전히 당신의 가문에서 많은 부분을 도와주고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프리실라는 자신의 가슴에 양손을 올렸다.
“음…….”
옅은 신음과 함께 프리실라의 손에 마력과 정기가 모이기 시작하자, 연녹색 빛줄기가 조금씩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심장으로부터 하나의 보석이 형체를 갖추며 그녀의 손 위에 놓여졌다.
얉은 모습을 한 보석은, 그 어떠한 보석보다도 찬란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에메랄드하고는 비교조차 안 될 찬란함 앞에, 셰인은 지난 생을 통틀어 두 번째로 보는 드래곤의 역린을 바라보곤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결국 이걸 다시 한번 갖게 되는군.’
전생에 드래곤의 역린은 지금처럼 고귀한 자태를 취하고 있지 않았다.
조직에 의해 한껏 오염되고, 고든의 온갖 실험이 끝난 뒤에야 자신의 손에 들어왔던 것이지 않나.
보석으로부터 느껴지는 힘 자체는 전생보다 적었으나, 근본적인 질은 훨씬 잘 갖춰진 상태다.
애초에 역린이 가진 힘보다는 근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더 중요했던 셰인이기에 오히려 좋았다.
“다만 이걸 드리기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뭐지?”
“이걸 가지고 뭘 하고 싶으신 가죠?”
“전쟁.”
“…….”
“전쟁을 막을 전쟁. 그게 내가 원하는 거다.”
아이러니하지 않나. 전쟁을 막기 위한 전쟁이라니.
“그렇게 해서 뭘 얻겠다는 건가요?”
“때론 두려움이 전쟁을 억제하기도 하는 법이지. 걱정 마라, 프리실라. 너의 종족에 득이 되면 득이 됐지, 해가 될 일은 일절 없을 테니. 넌 지금처럼 인간들에게 있어 우호적인 종족이면 된다. 인간들의 호의를 받고, 또 그들의 존중을 받으면 돼. 잘 자라나는 나무처럼, 햇빛에만 있으면 된다.”
그 밑에 있는 그림자는 내가 책임질 일이니.
그렇게 뒷말을 덧붙인 셰인을 바라보는 프리실라의 눈빛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가야 할 수밖에 없는 길을 걷는 동생을 바라보는 누나의 표정과 같다고 해야 할까.
“……거래할 뿐인 우리의 관계에 제가 더 말을 더할 필요는 없겠죠. 하지만 셰인.”
“왜 그러지?”
“안식을 찾을 자리는 찾아보세요. 당신의 정신력이 얼마나 강하다 한들, 결국 당신 또한 한 명의 인간이니까.”
“그건 걱정할 거 없다. 이미 있으니.”
녀석도 지금쯤 열심히 움직이고 있을까.
셰인은 자신의 동생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고, 프리실라는 가만히 그런 셰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당신을 위한 안식을 찾아야죠. 아직은 어리석은 사람.’
그렇게, 프리실라는 평소처럼 셰인에게 자신의 정기를 교체해 주며 둘의 만남은 조용히 마무리 지어졌다.
* * *
“이, 이게 뭐여?”
“허미…….”
“이, 이게 전부 물자라고? 여기 아룬비다에?”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만…….”
“이렇게 미치면 얼마든지 환영이지, 썩을 새끼야!”
아룬비다의 이른 아침.
비두론 성에 모인 주민들은 영지의 앞에 차곡차곡 쌓이는 물자들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언제나 마차 하나 분은 될까 싶을 정도로 적은 물자만 보다가, 성의 입구에 방해가 된다 싶을 정도로 한가득 쌓이는 걸 본 게 얼마 만이던가.
아니, 정확히는 본 적도 없는 수준이었다.
최근 메자이아 대수림이 개방됨에 있어서 물자가 조금 풍족하게 들어온 감이 있었으나, 그마저도 조금이라는 말을 써야 할 정도에 불과했으니.
“흠흠. 안녕하십니까! 저는 클레이튼 상회에서 온 하보크 상단의 하보크 메링턴입니다. 혹시 처분이 힘든 몬스터의 부산물이 있으십니까? 아주 합리적인 가격에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푸짐한 인상을 가진 한 상인의 용기 어린 외침에 주민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격? 저 양반이 뭘 모르고 하는 말 아냐? 여기에 금화가 무슨 쓸모가 있다고?”
“야 이, 멍청아. 저거 안 보이냐?”
“포탈?”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진 포탈.
그에 아룬비다 주민들도 의아하다는 듯 포탈을 바라봤다.
“저게 왜?”
“아오, 이 돌대가리. 야, 우리가 왜 매번 물자가 엿 같이 부족했는데? 왔다갔다 뒤지게 힘들어서 그런 거 아냐! 근데 저기에 포탈이 생겼다는 건 이동이 편해졌다는 거고!”
“아!”
그러나 그저 좋다고 보고 있는 이들이 있는 반면, 오히려 걱정 어린 시선으로 쌓이는 물자를 바라보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뭔가 일이 터지려는 것 같은데.”
“미미르 경이 황실에 가서 받아 온 건가? 그냥 주진 않을 텐데…….”
“저 포탈이 열려서 개방된 거 아냐?”
“아니지, 아니야. 그럼 저렇게 상단이 오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물자가 저만치 쌓이는 건 말이 안 되잖아.”
“하기사…… 그런데 무슨 문제가 터지려면 상인들도 안 와야 하는 거 아닌가?”
“전쟁을 안 겪어 봐서 하는 말이지. 전쟁터야말로 일획천금의 기회라고. 돈에 눈이 멀어 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 말이야.”
“아아…….”
“그럼 진짜 무슨 일이 터지려는 건가?”
“저번에 펠리스 님이 나갔다 온 거랑 관련이 있는 건가?”
아룬비다의 주민들 사이에서 그런 의문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그날 저녁.
아나스타샤가 모든 주민들을 한데 모았다.
저녁이 되어 더욱 추워진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룬비다의 주민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그녀의 부름에 응했다.
“제군들. 우리는 현재 바람 앞에 선 촛불이다.”
그 말에 주민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시작부터 저런 말로 분위기를 잡는 걸까?
그 이유는 금세 밝혀졌다.
“최근 나는 한 가지 제보를 받았다. 오크들이 마력을 쓰기 시작했다더군. 그리고 확인 결과, 그 보고가 사실이라 판명됐다.”
“……! 마, 마력 말입니까?”
“아니, 그 무식쟁이 오크 놈들이 어떻게 마력을 씁니까?”
“글쎄. 너 같은 놈들도 쓰는데 그놈들이라고 못 쓸까?”
“이 미친놈이?”
쿵!
한참 소란이 가중되려 할 때, 아나스타샤가 대검의 끝으로 땅을 내려치며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하여, 비밀리에 편성한 특수 수색대가 오크들의 전초기지를 습격, 그 결과 오크들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쿵!!
“전쟁. 오크들은 50년 전과 같이, 제국의 북부를 정복하고자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다.”
“…….”
쿠웅!
“그들은 고대 흡혈귀의 마법을 이용해 마력을 깨우치고, 자신들만의 주술을 만들어 작위적으로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키려 하고 있다.”
“……!”
쿵! 쿵!
“제군들. 이번 겨울은 특히 더 혹독한 나날이 이어질 것이다.”
쿵!! 쿵!!
“하나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단 한 번도 적들에게 우리의 성벽을 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가?”
쿠웅! 쿠웅!
“또한! 이번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롭지 않은 겨울이 될 터. 나의 용사들이여. 들어라. 외부에서 우리는 버려진 자들이라 비웃을 테지만, 그건 착각이다. 저들에게 그런 선택권 따위는 애초에 주어진 적도 없었다.”
쿠웅!! 쿠웅!!
“착각하지 마라, 제군들!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저 제국을 저버릴 것인가, 아니면 이 손으로 직접 지킬 것인가. 그 선택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말이다!”
쿠웅!! 쿠웅!! 쿠웅!!
“제군들. 어찌하겠나. 우리를 버렸다 비웃는 저들을 우리도 똑같이 버리겠는가? 아니면 우매한 자들에게 현실을 보여 주며 그들의 착각을 바로잡겠나!”
어느새 아룬비다의 주민들은 아나스타샤의 타이밍에 맞춰 자신들도 지면에 발을 구르고 있었다.
얼마 만일까.
이 혹독한 날씨에도 이렇듯 심장이 뜨거워진 것이.
7년 전.
아나스타샤가 아룬비다에 첫 발을 들였을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두 눈을 빛냈다.
자신들과 다르게 이곳 아룬비다에서도 눈빛에서 단 한 번의 절망을 띄운 적 없던 강인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들 모두 그녀를 따르기로 한 것이고.
바로 지금.
그들은 또다시 자신들이 시험대 앞에 섰음을 깨달았다.
“물론이지요, 황녀님!”
“저 바깥 놈들에게 알려 줍시다! 우리가 누구인지!”
“버리긴 누가 버렸답니까!”
“맞습니다! 선택지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오오오옷!”
그리고, 그들은 결코 아나스타샤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녀의 말처럼, 자신들의 위기는 곧 제국의 위기요, 이번 전쟁을 잘 마무리한다면 제국 놈들도 더 이상 자신들을 경시하지 못하리라.
그 믿음직스러운 영광의 길에는 바로 2황녀, 제페르 디 나타샤 아나스타샤가 앞장 설 것이니.
비로소 전쟁의 준비가 끝났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