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as the Hero’s Older Brother RAW novel - Chapter (88)
용사의 형으로 산다는 것 88화
88화 흡혈귀
그렇게, 카르가토는 두 눈 멀쩡히 뜬 채로 자신의 부족이 통째로 강탈당하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어떻게든 발악을 해 보려 했으나, 준비된 상태가 아닌 샤먼은 무력하다.
카르가토는 기약 없는 복수를 다짐하며 차가운 벌판 아래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그림자 밑으로 한 소녀가 숨어든지도 모른 채.
셰인은 그런 카르가토를 일부러 살려서 보냈다.
황녀에게 공을 최대한 몰아주려면 아직 죽여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대변자여. 어찌할 생각이오?”
“인간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할 거다.”
“음?”
“내가 이미 수를 써 뒀다. 그보다, 우선 흡혈귀를 만나 봐야겠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녀는…….”
“괜찮다. 생각해 둔 것은 이미 있으니.”
흡혈귀는 위험한 종족이다.
단 몇 명으로 하룻밤 사이에 과거 오크들의 고향, 우르부라크를 초토화시키지 않았던가.
당장 한 마리만 날뛰더라도 셰인이 감당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셰인에게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갑의 입장에 서 보겠군.”
그러면서, 셰인은 신전으로 향했다.
* *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공간.
한 점의 빛조차 들어오지 못하는 이곳에 한 소녀가 두려움 가득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밤하늘의 달처럼 찬란한 은발과, 아룬비다의 눈밭보다도 창백한 피부.
거기에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지닌 소녀의 눈에서는 아무런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오크들은 자신들이 마력을 깨우치기 위해 이 소녀에게 흡혈을 당하고, 그 피를 채혈해 왔다.
그리고 그 피를 마시는 것으로 마력을 터득해 온 것이다.
그러나 흡혈귀에게 있어서 혈액이란 생명력 그 자체인 탓에, 소녀는 매번 채혈을 당할 때마다 생살이 뜯겨져 나가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런 시간을, 무려 수백 년 동안 겪어 왔으니.
소녀는 더 이상 고통에 몸부림 칠 기운조차 모두 소진하여, 눈동자에는 무기력함만이 남아 있었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그러한 고민도 샐 수 없을 만큼 해 봤으나, 기억에도 없던 어린 나이에 납치를 당한 어린 흡혈귀는 그 해답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
“…….”
셰인은 그런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동질감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곳은 갇힌 소녀의 정신세계.
그녀가 직접 만든 정신세계는 이처럼 아무것도 없는 흑색의 공간에 불과했다.
그만큼 그녀에게 있어서 무엇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전생의 셰인조차도 이러지는 않았다.
셰인에게는 있던 말동무조차 없이, 이 어린 소녀는 지금처럼 새카만 공간에 혼자 갇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고통을 두려워하며 수백 년이라는 시간을 견뎌 온 것이다.
그 시간 속 느껴지는 고통을, 감히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눈앞의 소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셰인. 그 스스로 밖에 없었다.
하지만 셰인은 지금 이 눈앞의 소녀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니다.
그걸 다시금 스스로에게 인지시키며, 셰인은 입을 열었다.
“나가고 싶나.”
“누구……?”
인간의 언어는커녕 언어라는 것 자체를 알 리가 없는 소녀였으나, 정신세계에서는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이 고통만 가득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으냐.”
“아…….”
진득한 피가 담긴 듯한 눈동자가 놀라움에 커진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한 또 다른 존재.
이 검은 공간과 고통뿐이 전부였던 소녀에게 이러한 경험은 생전 처음이었기에 당황한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셰인은 그런 소녀의 말을 천천히 기다렸다.
지금 저 소녀가 느끼는 감정을 전부 이해한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비슷한 상황을 겪어 봤기에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바깥이라는 게, 존재하나요?”
세상에 대한 제대로 된 개념도 확립되지 못한 소녀의 질문에, 셰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훨씬 다채로운 세상이 존재하지.”
“이곳처럼 아프지는 않나요?”
“글쎄. 그건 네가 하기 나름일 거다. 하지만, 여기서처럼 아무 이유 없는 고통은 찾아오지 않지.”
“아…….”
그러자, 그녀의 눈동자에서 자그마한 물기가 어리더니 이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왜 눈물이 나는 걸까.
고통에 겨울 때만 나오던 게 아니었던 건가.
새로운 깨달음을 느낄 시간도 없이,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고 싶어요. 여기서……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그래.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내가 도와주마.”
“가시는 거예요……?”
문득 불안하다는 듯 소녀의 두 눈이 떨렸다.
두려울 테지. 생전 처음 보는 존재에게도 이렇듯 의존하고 싶어 할 만큼.
“내가 여기 있을수록 네가 밖으로 나오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괜찮으냐.”
“…….”
“자주 찾아오마. 이제 이곳에서 고통을 겪는 일도 없을 테니, 안심하거라.”
“아아…….”
정말 그 고통이 이젠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까.
셰인은 소녀에게 잘 있으라는 말을 남긴 채, 그 공간에서 사라졌고.
소녀는 언젠가 셰인이 다시 찾아올 날만을 기다리며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 * *
“잘 다녀왔소?”
눈을 뜬 셰인을 반긴 존재는 바투칸이었다.
신전지기인 그는 셰인이 흡혈귀 소녀의 정신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그 주변을 지키기 위해 서 있었다.
“그래.”
“신기하군. 여태까지 정신이 깨어 있었다니.”
바투칸은 어딘가 묘한 표정으로 흡혈귀 소녀를 바라봤다.
사실, 둘은 서로가 앙숙이라 해도 좋을 사이였다.
바투칸은 자신들의 선조가 모조리 흡혈귀에게 몰살당해 고향을 잃은 처지가 되었고.
소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이곳까지 납치를 당한 것이었으니.
여태까지 소녀의 존재를 딱히 신경 쓰지 않았던 바투칸이었으나, 이어지는 셰인의 설명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인격이 형성되고, 동시에 우리가 피를 뽑아 쓸 때마다 고통을 느꼈다는 건가.”
바투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월이지 않은가.
무려 수백 년 동안 생살이 뜯겨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 아무런 지식도 없이 그저 갇혀 지냈다는 사실이 바투칸으로 하여금 씁쓸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오크의 오만함이 잘못이었을까, 흡혈귀의 잔혹함이 문제였을까.
바투칸은 그 둘에 우선순위를 정하지 않았다.
단지, 바투칸은 이제라도 소녀가 자유롭길 바랐다.
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저 소녀의 고통이 곧 오크라는 종족의 미래가 달린 일이었으니만큼, 바투칸은 감히 거기에 의견을 달 수 없었다.
“바투칸. 너는 우선 종족을 다스려라. 나는 방법을 찾도록 하지.”
“방법이라면?”
“이 흡혈귀가 없더라도 너희가 마력을 다룰 수 있는 방법. 그걸 알아오겠다.”
“……! 그런 게 가능한 일이오?”
“인간도 할 수 있던 일이다. 이미 선례가 있던 일이니만큼, 너희라고 못할 것은 없지.”
“으음……!”
다만 그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무수한 노력이 필요할 터.
그럼에도 셰인이 이리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신이 남기고 간 아카식 레코드 덕분이었다.
“자주 찾아오도록 하지. 내부 관리는 철저히 하도록.”
“알겠소. 그리하도록 하지.”
“특히, 기술을 깨우치도록 해라. 전투보다는 기술의 발전이 너희 종족의 미래를 감당할 테니.”
“기술이라…….”
오크라고 무식하게 둔기만 들고 싸우는 것은 아니다.
그들 또한 쇠를 다를 줄 알았고, 몬스터의 부산물로 다양한 장비를 만들 줄 알았으니.
“필요한 일에 대한 분류를 확고히 하도록.”
앞으로 오크들은 셰인을 위해 해 줘야 할 일이 많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오크들의 고향을 되찾아 줘야겠으나, 셰인은 오크들의 고향 우르부라크에 관한 대략적인 지식은 알고 있었다.
어차피 조직과 맞서 싸우다보면 우르부라크 또한 다시 오크들의 품에 돌아올 터.
“가끔 찾아오도록 하지.”
“알겠소. 그런데, 엘더 샤먼은 어떻게 할 생각이오?”
“놈들이 자리를 잡았다고 했나?”
“그렇소. 그리고 그 수가 상당하지.”
비록 50만 대군이 패배로 인해 많이 죽었지만, 여전히 많은 숫자가 살아남았다.
엘더 샤먼 카르가토는 용케 흩어진 오크들을 규합시키고 자신들만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어 낸 상황.
바투칸은 혹여 카르가토가 이곳을 향해 진격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셰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여기로 와서 전쟁을 해 봐야 녀석에게 유리할 게 없다. 놈도 이미 너희가 마음을 돌린 것을 알고 있으니.”
언젠가 놈에게도 여유라는 게 생긴다면 피의 복수를 감행하려 할 터이나…….
글쎄. 놈에게 과연 그런 여유가 생길 날이 찾아올까.
“당장은 놈도 다가올 인간의 군대에 대응하려 할 테지.”
카르가토는 더 이상 인간의 영토를 침략할 생각이 없었다.
대신 50년 전처럼, 인간의 군대를 상대로 꾸준히 소모전을 펼치며 알아서 나가떨어지기를 노리고 있을 터.
더군다나 아직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는 무명의 입장에서 이렇듯 와해된 오크는 더 이상 쓸모가 없을 터.
유일하게 놈들이 흥미를 가지고 있을 만한 게 흡혈귀였으니, 그 부분만 주의한다면 될 일이다.
‘그래 봐야 산왕의 기운 때문에 놈들이 손을 댈 방법도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고, 셰인은 다시금 비두론 성으로 돌아왔다.
* * *
“어디를 그리 쏘다니고 다니나.”
자신의 방에 설치되어 있던 포탈을 활용해 돌아온 셰인을 반긴 것은 다름 아닌 아나스타샤였다.
“오크들의 근거지에 다녀왔습니다.”
“그런가. 일은 잘된 모양이군.”
“예. 그렇습니다.”
아직 자신의 정체를 완벽히 밝히지 않은 올리시아와 다르게, 아나스타샤에게는 셰인도 상당한 정보를 푼 상태였다.
그녀의 성격상 그러한 정보들을 통해 정치적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깔려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제국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충분한 결단력까지 갖추고 있는 사람이지 않은가.
이런 사람은 괜히 정보를 숨기기보다, 풀어줌으로써 믿음을 사는 게 더 이로웠다.
“전쟁의 기간은 어느 정도로 보고 있지?”
“지금으로서는 최대 2년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아룬비다를 포함해, 아직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북부의 땅은 굉장히 넓다.
거기에 엘더 샤먼인 카르가토는 그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오크였으니.
이미 자신의 본거지를 제외하더라도 더 많은 부락을 만들어 둘 예정일 터.
놈은 분명 철저한 게릴라전으로 전쟁의 양상을 이어 갈 것이다.
반면 셰인의 포탈 덕분에 황실의 군대는 보급에 큰 문제가 없어졌으나, 여전히 아룬비다의 혹독한 날씨는 해결방안이 없기에, 전쟁은 그만큼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무겁군.”
“어차피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 2년 동안 황태자를 견재할 수단이 무궁무진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앞서 이미 두 황녀에게 여론전으로 밀린 새뮤얼은 이번 전쟁에서 발을 뺄 수단이 차단됐다.
그런 만큼 전쟁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 최대한 공을 쌓아 밀렸던 여론에 대항하려 할 터.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마냥 밝지는 않았는데, 그 과정에서 고통받을 병사들의 걱정 때문이었다.
분명 많은 사상자가 생길 테지.
그러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내버려 두면 그 희생이 같은 인간에게 몰려가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새뮤얼의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지금 흘리는 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희생이 생겨날 것이다.
오히려 지금 하는 행위는 미래에 일어날 유혈 사태를 줄이기 위한 일이었으니, 아나스타샤도 이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더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더 노력해야겠군.”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면서 셰인은 아나스타샤가 직접 타 온 홍차를 집어들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