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18
119. Shock and Terror (17) >
***
하은성은 요즘 우울하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 18만 달란트라는 빚을 언제 다 갚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현재 생활에 큰 불만은 없지만 불확실성은 불안이 되어서 가슴을 짓눌렀다.
그리고 몸을 빌린 이 드래곤이 깨어나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도 걱정됐다. 민준이 그를 자유로운 유령 상태로 방치할 것인가? 그 요원은 평상시에는 정상인 같은데 달란트와 문제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돈귀신처럼 굴곤 한다.
그를 울적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인은 최근 알게 된 충격적 사실이다. 어떤 후라이팬과 관련된.
‘내가 그동안 세뇌당했었다니!’
후라이팬의 음식을 먹고 느낀 행복감이 모두 정신 조작이었단다.
하은성은 어이가 없는 한편 공포감과 허탈감을 함께 느꼈다.
예상하지 못한 큰 상실감도.
‘그게 다 가짜였단 말이야?’
후라이팬 때문에 느꼈던 기쁨과 전율이 모두 이능력에 조종당한 결과물이자 거짓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그가 먹어온 캐시의 요리는 그리 훌륭한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면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후라이팬을 회수당한 후 재개한 점심 모임에서 캐시의 진짜 실력을 맛보게 된 하은성은 울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눈물을 흘렸다. 아직도 하은성은 이해할 수가 없다. 대체 어떻게 해야 스크램블 에그에서 코를 쥐어뜯을 듯한 매운맛이 날 수 있는지.
하은성은 그런 음식을 지금까지 계속 먹어온 것이다.
뇌에서 벌어진 장난질이 그것을 기가 막힌 요리로 탈바꿈했을 뿐.
‘원효대사 해골 물도 아니고···.’
감각의 한계치를 넘어선 극상의 요리를 맛보다가 갑자기 현실의 나락으로 떨어진 박탈감은 생각보다 컸다.
캐시와 하은성은 벌써부터 후라이팬에 대한 금단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왜 마약에 중독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은성은 나름 진지하게 생각한다. 텅 빈 눈빛으로, 마트의 진열대를 바라보며.
‘행복이란··· 뭘까?’
정신 조작으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면, 어쩌면 영원히 그런 상태에서 사는 것도 아주 나쁜 일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로움과 불안, 우울과 걱정은 모두 지워 버린 채··· 비록 거짓된 행복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에 푹 적셔진 채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그의 눈에 누군가 들어왔다.
‘왜 이렇게 눈에 거슬리지?’
그는 지금 캐시와 함께 마트에 나와 있었다. 다음 점심 모임을 위한 준비였다. 후라이팬에서 자립하여 제대로 된 음식을 대접하겠다며 캐시는 의욕에 불타올랐고, 하은성은 공포를 느꼈지만 감히 제지하지 못했다. 그렇게 도착한 마트에서 둘은 따로 움직였다.
그런데 하은성의 감각에 어떤 남자가 계속 잡혔다.
폴리모프를 한 상태라도 드래곤의 예리한 감각은 완전히 죽지 않는다. 하은성은 그에게서 수상한 기척을 느꼈다. 남자는 다른 곳을 보는 것처럼 시선을 돌리면서도 캐시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
하은성은 조용히 남자를 따라 움직인다. 진열대 사이에 숨어 그 너머로 상대를 살폈다. 캐시의 움직임에 맞춰 남자가 계속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뭐지?’
그때 캐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알아차린 것인가?
아니었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진열장 너머 하은성을 보고 다가온다. 그 순간 남자가 캐시의 동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하은성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진열대에 손을 뻗어 집히는 것 아무거나 들고 포장지를 살피는 척한다.
“···너, 그거 살 거야?”
다가온 캐시의 목소리에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하은성은 그제서야 자신이 뭘 잡았는지 보았다. 오크용 유두 크림(350ml 대용량, 1+1 행사 상품)을 다급히 제자리에 돌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남자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누나, 혹시 이상한 거 못 느꼈어요?”
캐시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 왜.”
“일단 걸어요.”
하은성은 카트를 밀면서 캐시와 함께 움직인다. 그리고 본 것을 설명했다. 캐시의 표정이 굳었다.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캐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몸은 용이잖아. 그냥 넘기기는 불안해. 민준 씨에게 이야기를 해 놓아야겠어.”
캐시가 전화기를 꺼내 든 순간.
그때 그의 시야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구르르릉!
땅이 거칠게 요동쳤다.
“꺄아악!”
“지진이다!”
진열대가 쓰러지고 제품들이 모조리 쏟아질 정도의 격렬한 진동이었다. 시야가 위아래, 양옆으로 마구 흔들렸다. 하은성은 캐시를 번쩍 들고 그나마 안전해 보이는 장소로 이동했다. 사람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에도 용의 균형 감각과 운동 신경으로 거침없이 걸음을 내디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이어지던 지진이 드디어 멈췄다. 하은성은 그제서야 두 손으로 받쳐 든 캐시를 내려놓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울음과 한숨, 비명이 울려 퍼진다. 가벼운 부상자가 곳곳에 속출했다.
“아니, 대체 기상청은 뭘 하는 거야? 오늘 예언에 이런 내용은 없었잖아!”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일기 예언에는 그날의 재해 상황도 포함되며, 지진 같은 큰 이벤트는 당연히 미리 정확한 시간을 예지하여 공표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간혹 이렇게 오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한국의 일기 예언관들 실력이 형편없다느니, 다른 나라에서 스카우트를 해 와야 한다느니 하는 불만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하은성은 남자의 행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캐시는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나, 왜 그래요? 일단 나가요.”
잠깐의 침묵 뒤 그녀가 말했다.
누군가가 보낸 메시지를 응시한 채로.
“방금 지진, 자연적인 게 아닌 것 같아.”
“그럼요?”
캐시는 이민국에서 자동 생성하여 송신한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
-(언론 유포 금지) 2020년 X월 X일 17시 36분 서울시 자곡동 인근을 진원지로 한 지진 발생. 마법적 현상으로 추측. 해당 지역의 요원은 본 사태에 외계인 연관 여부를 확인하여 이민국에 보고 요망···.
캐시의 두 눈이 깊어졌다.
저곳은, 지금 민준이 가 있는 곳이었다.
***
민준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그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았다. 자곡동의 안가는 그린벨트와 접해 있었는데, 방금 전까지 나무와 풀이 우거졌던 그 땅에는 흙먼지가 가득했다. 분진이 조금씩 가라앉자 나타난 풍경은 압도적이었다.
마치 거대한 생물이 대지 위에서 몸부림치며 밀고 지나간 것 같다.
처음부터 나무 한 그루 없는 메마른 땅이었던 것처럼, 휑한 평지가 부채꼴로 이어져 있었다.
‘다행히 휘말려 죽은 사람은 없는 것 같지만.’
각도와 방향이 교묘하게 비껴 나간 덕분이었다.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누구 하나 말을 꺼내거나 다가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건 좀 심하잖아. 내가 뭘 했다고.’
그저, 막았을 뿐이다.
자신에게 찌르기를 날리는 블레이드의 공격을 막기 위해, 전처가 준 오리할콘 후라이팬을 들어 올렸다. 방패처럼 면을 세워서 몸을 보호했다. 그렇게 주문을 외울 잠깐의 시간을 번 것이다. 그래도 소재가 소재이고, 엔델리온의 기술력으로 만든 물건이니 공격 한 번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너무 과했다.
엔델리온, 그치들이 만드는 물건에는 본래 그런 면이 있긴 하지만···. 거기에 델의 집요함까지 더해진 결과물이었다.
우웅! 우우웅!
바닥에 떨어진 검이 운다.
숙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마도 잘게 붕괴되어 공기 중에 흩뿌려졌으리라.
아무리 뛰어난 에고 소드라고 해도 그것을 쥐어 줄 사람이 없는 이상 꼼짝달싹도 할 수 없다.
싸움은 민준의 승리였다. 다만, 그 승리를 얻은 방식이 예상과 많이 달랐다.
그는 전처의 이름을 뇌까린다.
‘델···.’
방금 전 검과 후라이팬이 충돌한 순간, 세상이 무너져 내릴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땅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민준은 그 현상이 무엇인지 알았다. 본래 자신에게 향했을 반발력을 피뢰침처럼 대지로 흘려보낸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그가 입은 대미지는 전혀 없었다.
블레이드의 찌르기가 그 정도 위력일 터는 없었다. 후라이팬이 수십 배, 혹은 수백 배로 돌려 준 것이다. 민준에게 가해진 공격을 기묘한 파동이 휘감고, 극도로 증폭하여 다시 튕겨 낸 것. 후라이팬을 든 소유자에게는 그 어떤 반발력도 돌려 주지 않은 채로.
민준은 멍하니 은색의 후라이팬을 내려다보며, 대체 몇 번째인지 세기도 힘든 말을 되풀이했다.
‘델, 넌 항상··· 너무 과해.’
다만, 덕분에 일이 쉽게 마무리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제조자의 철학 역시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걸 든 사람을 건드리면 뼈도 추리지 못하게 분자 단위로 갈아 버리겠다는 의도와, 반대로 소유자는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게 보호하겠다는 목표 의식이.
“······.”
민준은 땅에 떨어진 검을 향해 다가간다. 숙주가 그리 대단치 못한 능력자라 다행이었다. 그도 이름을 알 만한 1티어 웨폰 마스터였다면 대체 어디까지 강해졌을지 예상하기도 힘들었다.
그는 은색 팬을 집어넣고, 흑색 팬을 꺼내 들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두 종류의 팬을 양손에 동시에 드는 걸 필사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자괴감이 느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에고 후라이팬에 물었다.
‘어때? 느낌이 오냐?’
민준은 또 한 번 놀랐다.
수다쟁이 에고 후라이팬이 침묵의 미덕을 보였기 때문이다.
바로 대답하지 않고 심사숙고하듯 시간을 두다가 답이 돌아왔다.
=으음, 조금만 더 가까이 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민준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저 검을 직접 잡을 생각은 없었다.
우웅! 우우웅!
한편, 에고 소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요원을 보며 몸을 필사적으로 공명하고 있었다. 그는 좌절감을 느꼈다.
상대는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을 터였다.
최선아가 그리 예지했다.
그러니 저 요원이 자신의 손잡이를 대뜸 잡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검은 한탄했다. 생물이 아닌, 물건으로서 자아를 갖춘 그의 한계였다. 이대로 다시 감금당하고, 방치되는가? 예전 멕시코의 한 경찰서 증거실 창고에서 보냈던 어둠의 세월을··· 이곳에서 되풀이하는가?
지독한 절망감이 찰랑거리며 올라왔다.
검은 자문한다.
‘혹시··· 최선아는 이 상황까지 예지한 건가?’
에고 소드의 정신은 과거를 향한다.
***
선지자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낸 뒤 블레이드는 각종 예언 능력자를 홀려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해 보았다.
하지만 그 누구 하나 그의 기준에 맞아 떨어지는 자가 없었다. 세뇌를 가한 순간 예지 능력은 무용지물에 가까웠으며, 기억을 살펴보니 누구 하나 그리 대단한 능력자는 아니었다. 불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그래서 블레이드는 공표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 자신이 예지 능력자이거나 그런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중이라고 추정되는 이들의 리스트까지 만들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숨어 있는 능력자도 분명 있으리라 판단한 것.
곽도출을 제거하라는 의뢰를 받았을 때 블레이드가 나선 것은 최판석 의원이 그런 사람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오크 의원에게 깊은 흥미를 가졌다. 그의 행보를 분석해 보니, 미래를 미리 알지 못하면 도저히 택하기 힘든 일들을 반복해 왔고, 그 덕분에 지금의 자리까지 이른 남자였다.
전 세계에 그런 조건을 충족하는 후보자들은 꽤 많았고 그 덕분에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던 의원이었지만, 이번 기회에 기억을 한번 살펴보기로 했다.
적당한 숙주 하나를 골라 의원실로 향하던 그때.
“······!”
닫힌 문 너머에서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들어오시게. 기다렸다네.”
오크는 암살자를 반겼다.
심지어 혼자도 아니었다.
그 곁에 앉아 있는 여자는, 곽도출이 죽여 달라고 의뢰를 넣은 아내··· 최선아였다.
블레이드는 숙주의 얼굴 가죽 위에 무덤덤한 표정을 띄웠다. 그리고 그 둘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정보가 샜을 리는 없지. 하지만 당신들은 내가 여기에 올 것을 알고 있었군.”
본사에서 청부 업자의 신상까지 의뢰인에게 알려 주지는 않는다. 하물며, 청부 업자가 직접 의뢰인을 찾아가는 일도 본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예견했다면.
“예지 능력자는 당신이 아니라.”
고개를 돌려, 곁에 앉은 딸을 바라본다.
하필 이 자리에 동반해야 할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이쪽이신가?”
최선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를 대뜸 베는 대신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물론 악인으로 판정되지 않은 상대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리 말하는 대신 딴청을 피우며 되묻는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최선아가 웃었다.
“당신은 내가 살아 있는 걸 원하니까요. 그리고, 오직 이 방법만이 날 살릴 수 있어요. 날 세뇌한다고 한들 예지는 제대로 발휘되지 못할 거예요. 우리는 손을 잡아야 해요.”
블레이드는 그렇게 말하는 여인의 얼굴을 응시했다.
파리하고 창백한 얼굴. 일 년의 절반은 병원에서 보낼 정도로 건강이 매우 안 좋은 상태라는 것은 청부업자도 인지하고 있었다.
외부에는 그저 몸이 약한 거로만 알려졌지만···.
블레이드는 초인에 가깝게 끌어 올린 숙주의 감각을 공유했다. 그녀의 몸에서 묘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중독인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대로면 일 년 이상 버티지 못할 운명이에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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