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25
126. 드래곤이 새끼를 숨김 (3) >
***
민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면 깊숙한 곳에 금이 갔다. 두꺼운 지층이 갈라진 듯한 틈. 그곳에서 기억이 새어 나왔다.
저 메시지는 태초의 종족이 가축에 남기는 표식이다. 아마도 잠이 들기 직전 시대의 것으로 보였다.
‘오베르 거미와 섞어 버려서 정보가 제대로 표시 안 되는군.’
현재 가축(용거미 괴물)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 상태이니, 본래는 ‘도축’이라는 표현이 나오면 안 된다. 대신 연령과 출산 유무, 질병 이력 등이 표시되는 것이 정상. 그런데 유전 정보가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인지 사후(死後) 기준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민준은 생각한다. 저것은 유전자에 새겨진, 일종의 바코드다. 가축의 생애와 죽음에 따라 자동으로 갱신되는 정보.
심지어 새끼를 낳으면 동일한 시스템이 후손의 피에 계승된다. 물론 대를 이어 갈수록 지속적인 유지 관리는 필수였다.
‘저 괴물을 만든 놈들은, 대체 어떤 용의 유전자를 갖다 쓴 거지?’
젠킨슨의 피는 동일한 마력파에 반응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은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민준도 가늠할 수 없는 긴 시간이 지났고, 당시 동족들이 키우던 개체는 다 죽어서 남아 있지 않을 터이고 그 후손도, 후손의 후손도 마찬가지였다. 유지 보수 없이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다. 유전자에 심어 놓은 사념체가 멸절하기 충분한 시간이.
그러니 남아 있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지금 저것은 반쪽이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지금 살아 있는 최고령 드래곤의 피를 가져다 써도 저런 반응이 안 나올 텐데.’
민준은 고민하다가 말했다.
“나도 해석이 안 돼. 모르겠어.”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이것만큼은 솔직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만약 전부 말한다면? 저 표식이 드래곤을 가축으로 키우던 자들이 남긴 흔적이며, 용고기 품질을 관리하기 위한 체계의 일부라고?
믿지 않을 것은 물론 상황이 매우 골치 아파질 것이다.
“그런가? 어쩔 수 없지.”
젠킨슨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민준은 그런 그에게 덧붙였다.
“혈액 샘플을 내게도 좀 주겠어? 혼자 좀 더 연구해 보고 싶은데.”
“물론이지.”
***
홍콩에서 열리는 용족 회의 개최 3일 전, 젠킨슨은 텔레포트를 펼쳤다. 고룡이 꽤 신경 써서 구축한 거대 마법은 민준과 증거물, 증인들, 부하 직원들을 한꺼번에 이동시켰다.
“민준, 나는 먼저 실례하지.”
목적지에 도착한 뒤 젠킨슨은 직원들과 함께 사라졌다. 본 회의가 시작되기 전 드래곤끼리 미리 만나 안부를 나누고, 각종 안건을 사전에 조율하는 작업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속세에서 벗어나 은둔 생활을 하는 용들이면 모를까, 인세에 깊이 관여하는 고룡들은 대부분 바쁜 삶을 산다. 그렇기에 시간을 허투루 사용할 수는 없었다.
“요원님 숙소는 이곳입니다. 그럼, 회의 당일 모시러 오겠습니다.”
괴물과 혼종 아이들은 직원들이 비밀 장소에 숨겨 놓았고 민준은 거기까지 관여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젠킨슨을 따라다니며 용들의 담화에 낄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아직 본 회의 전이므로 다들 폴리모프 상태로 돌아다닐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드래곤 로드가 잡아 준 호텔에서 처박혀 있었다. 방 안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한편,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골몰했다.
그러다 보니 밤이 왔다.
-딴! 딴딴딴!
밖에서 웅장한 음악이 들렸다. 민준은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객실 발코니 아래 모인 인파가 보인다. 구룡반도 최남단, 빅토리아 하버(Victoria Harbour)에 접한 호텔에서 몇 걸음만 걸으면 나오는 대표적 관광지인 스타의 거리였다. 그곳에 모인 관광객들은 바닷물 너머 홍콩섬을 보며 사진 찍기에 열중했다.
“시작한다, 드디어!”
음악 소리는 홍콩 시정부에서 이 시간에 매일 진행하는 레이저 쇼의 일부였다. 현악기와 강렬한 전자음이 어우러져 공기를 때린다. 물 건너 항만을 따라 늘어선 마천루 사이, 각양각색의 광선이 쏘아져 하늘을 물들였다. 빗선이 리듬에 맞춰 춤춘다. 빌딩 외부 LED 조명이 집합적으로 주거니 받거니 빛을 확산했다.
여기까지는 매일 반복되는 쇼의 일부다.
오늘 관광객들 눈을 가장 사로잡은 존재는 스카이라인 위를 부유하고 있었다.
“저기 봐!”
서로 색채를 드리우는 아름다운 스카이라인. 그 위에서 선형 물체가 나아간다. 움직임은 매끄러웠고 비행은 유려했다. 레이저 쇼가 한창인 홍콩의 밤하늘을 느긋하게 가로지른다.
그 행보는 땅을 걷는 생물로 치면 산책이나 밤 나들이에 가까웠다. 하지만 여파는 대단했다. 하늘로 시야를 확보한 모든 사람들이 그 절경을 볼 수 있었으므로.
더군다나 평범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 본체를 흔하게 목격할 수 없는 생물인 것이다.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은 밤하늘의 비행체.
드래곤.
“······.”
비행 중인 그는 민준이 가장 최근 뚝배기를 깬 드래곤과 같은 속(屬)이었다.
뇌룡이라는 뜻이다.
뱀처럼 길쭉한 동체. 검푸른 물속에 푼 비단처럼 유유히 흐른다.
하늘을 나는 드래곤은 그대로 홍콩 야경의 일부가 되었다.
“레오(Leo)다!”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이름을 아는 저 젊은 용은 이곳을 영지로 삼은 고룡의 막내아들이다.
“와, 실제로 보니까 더 멋있어.”
“너무 아름다워···!”
그 모습을 내다본 민준이 혀를 찬다.
“아무튼, 저 관종 새끼.”
해소되지 않는 심리적 결핍을 다른 종족을 지배하고 통제하며 채우려는 많은 용과 달리 그는 특이한 방법을 택했다. 저 드래곤은 권력 행사에 따른 복종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대신 다른 종족이 던지는 환호와 관심, 찬양은 매우 즐겼다.
“내려온다!”
드래곤이 고의로 고도를 낮추자 레이저 가닥이 몸에 닿았다. 뇌룡의 비늘은 유리알처럼 반짝거렸고, 광선에 맞을 때마다 그것을 잘게 조각내고 부쉈다. 빛의 파편은 사방을 찌른다. 폭발적인 반사광. 드래곤은 온몸으로 색을 토했다.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용의 몸은 등나무 가지처럼 보였고 그 위에 피어나는 불꽃은 꽃망울 같았다. 화려한 색채의 향연. 순수한 빛으로 조각한 폭죽이 밤을 물들였다.
용은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레이저를 온몸으로 튕겨내며, 빌딩 옥상 근처까지 아슬아슬하게 내려왔다가 다시 꺾는다. 그리고 하늘 높이 솟구쳤다. 오늘따라 구름이 유난히도 낮았다. 달빛이 묽게 섞인 구름에 닿을 듯 말 듯 헤엄친다. 구경꾼들은 넋을 놓고 그 모습을 구경했다.
그렇게 HSBC 빌딩에서 시작하여, 4번 해안 간선 도로를 따라 완차이(灣仔)항 상공까지 드래곤이 도달했을 무렵.
=혹시, 저 광대놀음을 구경 중이라면 한 가지 제안하지. 여기 내려와서 나와 함께 비웃지 않겠나?=
민준은 정신파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오래 고민하지 않고 회신을 보낸다.
‘저 병은 아직도 못 고쳤군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아무래도 질리던 참이었습니다.’
그는 객실 방문을 나섰다.
***
인터컨티넨탈 호텔 1층의 로비 라운지는 앉아서 통창 너머의 쇼를 감상하기 최적의 장소였다. 평범한 건물로 치면 2~3층 높이는 될 천고를 잇는 거대한 유리창, 그 밖으로 파노라마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모두가 레이저와 용이 합작한 서커스를 감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민준은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라운지를 가로질러 카운터 형태의 바(Bar)로 간다. 창문과 거리가 멀고 각도상으로 밖을 보기 힘든 위치라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바텐더를 제외하고는 손님 한 명뿐. 그가 아는 사람이었다.
민준이 먼저 말한다.
“쟤는 대체 뭐가 문제랍니까?”
남자가 씁쓸하게 웃었다.
“모두의 고민이야. 칼리에테르는 저것도 일종의 기형이라고 평했지. 말을 옮기지는 마. 큰 싸움이 벌어질 테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드.”
지구의 용족을 대표하는 존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수형자는 용이 권하는 대로 옆에 앉는다. 드래곤 로드는 민준의 취향을 기억하고 있었다.
“쿨일라?”
좋지요. 민준은 그리 답한 뒤 바텐더를 향해 덧붙인다. 더블, 온더락으로.
“이게 얼마 만이지?”
“그때 파티 이후로 처음인 것 같습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렀나?”
민준의 시선이 로드의 손가락을 향한다. 용족은 폴리모프 상태에서도 액세서리를 끼는 일이 거의 없다. 따라서, 그가 반지를 끼고 나타난 사실은 민준의 호기심을 건드렸다.
“못 보던 물건인데요.”
“여기 주인장한테 내기 바둑으로 땄어.”
여기 주인이라.
중의적 표현이다.
그가 언급한 상대는 홍콩 최고 노른자 땅에 위치한 이 호텔의 주인인 동시에··· 여기 홍콩시의 주인이기도 하므로.
지금 한창 밖에서 광대 짓 중인 드래곤의 부친.
“······.”
민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로드, 아시지요? 그거···.”
“알아. 촉수 괴물들이 만든 물건이지.”
델이 블레어에게 선물로 준 것과 비슷한 아티팩트였다. 민준은 그것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여기 사람들 눈에는 반지로 보이지만, 사실은 ‘촉수 걸이’에 가깝다. 사용자가 변신해도 자유자재로 수축 및 확장되며 몸에 감길 것이다.
민준은 홍콩을 영지로 둔 고룡이 저런 것을 창고에 보관 중이었던 것도, 내기에서 이긴 로드가 하필 그것을 지목한 것도 모두 의외였다. 그 표정을 본 로드가 웃는다.
“왜 내가 이걸 택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군.”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그는 내가 이걸 달라고 하자 고민도 하지 않고 넘기더군. 가치는 알고 있지만 자기가 쓸 생각은 들지 않았던 거야. 계륵이지.”
고대 종족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자신들이 우주 최강 생물이라 뽐내며 기세등등하던 드래곤. 그들이 패전 후 겪은 정신적 상처는 치명적이었다.
따라서 용족은 아픈 기억을 머릿속 가장 깊숙한 서랍에 쑤셔 박았다. 그리고 여간해서는 손대지도, 열어볼 엄두도 내지 않았다.
지금 로드가 낀 반지는 그 서랍을 강제로 여는 열쇠나 마찬가지다.
그는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외면하기만 해서는 발전이 없어. 드래곤의 기술력으로는 도저히 작동 원리를 알아낼 수 없다는 것도 상처에 기여했겠지. 그렇다고 계속 모른 척하면 안 돼. 그래서 나라도 이걸 가까이 두면서 여러 실험을 해 볼 생각이야.”
연구 목적으로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엔델리온이 만든 기이한 물건에 대한 다른 드래곤들 반응과는 천지 차이였다.
“나는 그들의 귀환을 직접 목격한 세대야.”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떠나 있다가 돌아온 고대 종족은, 자신들이 본래 살던 차원들을 지목하며 지배권을 돌려 달라 요구했다. 그곳이 본디 자신들의 정신적인 근원이며 고향이라는 근거를 들면서. 맡겨 놓았다는 듯이, 당당하게.
논리는 간단했다. 자리를 비운 사이 침입자들이 허락도 없이 들어와 점유하고 있으니, 정당한 주인으로서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것. 그사이 그곳을 지배하던 용족 입장에서는 환장하는 소리였다.
용족의 기록에 고대 종족에 관한 서술은 신화인지 역사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을 정도로 애매모호하게 적혀 있었다. 하물며 그 기록이 사실이라고 해도 드래곤이 삶의 터전을 포기할 근거는 되지 못했다.
결국 양측 모두에게 영토 주권을 주장할 역사적 권리가 있었다. 누구 하나 양보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그렇게 용족과 고대 종족 사이 1차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싸움을 직접 목격한 드래곤 로드는 회상한다. 그때 고대 종족은 지금처럼 무시무시한 기술력을 보유한 괴물들이 아니었다. 결국 용족이 승리했다. 그 전쟁은 그랬다.
“그런 놈들이, 다음번 전쟁에는 갑자기 말도 안 되는 무기와 기술을 가지고 나타났단 말이지?”
두 번째 전쟁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젠킨슨도 어렴풋이 기억하는 시대에 치러졌다. 그 결과는 모든 드래곤에게 트라우마를 선사했다.
용족의 패배.
“이 반지를 연구한다고 모든 비밀이 풀리지는 않겠지. 그래도 포기해서는 안 돼. 언젠가는 이 치욕을 갚아야 하니까. 내 세대에 불가능하더라도, 다음 세대에서는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난 그 과정의 디딤돌이 되면 족해.”
오만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드래곤의 발언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발언이다.
민준은 생각한다. 그런 특이한 용이기에 골치 아픈 로드 자리를 맡은 것일지도.
“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래야지.”
그제서야 민준은 늦은 축하 인사를 건넨다.
“경사,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민준은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도저히 셀 수 없었다.
“이번이 몇 번째 자녀입니까?”
“지구에서만 열여덟 명이야.”
그럼 지난번 그가 참석했던 자리가 지구에서의 열일곱 번째 이혼 축하 파티였던 모양이다. 한 배우자를 상대로 딱 한 명의 아이를 가진 뒤 이혼을 반복하는 루틴이니까.
다른 용과 비교해도 과할 정도로 드래곤 로드는 수차례 결혼과 이혼을 되풀이했다. 그 결과 용족 기준으로 연령대가 고만고만한 배다른 아이들이 줄줄이 양산되었다. 지구 내 용족 출산율에 가장 많이 기여한 자가 바로 그다.
민준은 속으로 중얼거린다. 아무튼, 여러모로 특이한 드래곤이라니까.
그때 로드가 말했다.
“참, 나한테 뭐 팔 거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차.
그것 때문에 찾아온 건가?
머릿속에 오리할콘 후라이팬을 떠올리는 동시에, 민준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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