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54
155. 세상에 나쁜 용은 없다 (27) >
***
홍콩의 고룡, 레이먼드 웡은 순간 묘한 감각을 느꼈다.
그는 왜 갑자기 이런 위화감이 스멀거리며 올라오는지 알 수 없었다. 하물며 얼마 전 한국의 오크 국회의원이 자신과 동일한 상태에 빠진 적이 있음도 상상 못했다.
잠시 갸웃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밖의 고용인들을 불러 식탁 위를 치우도록 했다. 의문은 금세 사라졌다.
든든한 포만감과 지극한 행복감 속에서, 레이먼드는 사라진 막내아들과 조력자들의 독촉마저 잊고 여운에 잠겼다.
***
어둠이 꿈틀댄다.
시야가 차단된 지금, 토드족은 민준을 볼 수 없었지만 민준은 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방금 자신이 한 일을 생각했다.
‘수형자가 된 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몸을 바꾸지 않았어.’
파견지가 바뀔 때마다 의체를 몇 번이고 교체하는 다른 수형자들과는 달랐다.
생각해 보면 황태자 호위를 맡았던 차원을 제외하고는, 파견지도 항상 인간들이 사는 차원이었다. 따라서 굳이 인간 형태 몸을 바꿀 필요 없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영혼을 갈아 끼우는 데에는 달란트가 소모되니까.
콰르르르!
민준은 사방에 치닫는 어둠을 보았다. 진흙처럼 농밀하고도 깊은 자락을.
그 정체는 그림자 괴물을 구성하는 물질의 농축된 원액 같은 것이었다. 토드족이 펼친 공간 응결조차 뚫고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아시프-1에는 차원의 결을 베는 능력까지는 없었다. 이 현상을 가능케 만든 것은 검이 아니라, 그것이 낸 상처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사실이었다. 상처를 낸 것은 검의 힘이지만, 갈라진 틈을 물질계가 아닌 다른 차원층과 연결시킨 것은 상처 자체의 힘이다.
다시 말해, 민준의 몸이 해낸 일이다.
다만 기대와 달리 달란트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민준은 끝도 없이 흘러나오는 저것 역시 그의 일부임을 알았다. 저것이 그의 힘이라는 것도.
손에 쥐었으니, 휘둘러 봐야겠지.
***
“헉!”
갑자기 바뀐 시야에 토드족이 경악했다.
민준은 어둠을 조종할 수 있었다. 저것이 무엇을 은닉하고 무엇을 드러낼지 선택한다.
그 결과 생존자들은 이제 서로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 선 수형자도.
지휘관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가 치밀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어둠은 괴이한 형태로 발악하며 기어 왔다. 그리고 검은 혀로 허공을 핥으며 꿈틀거렸다. 토드족은 등껍질 아래 불쾌한 기운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끈끈하고도 눅눅하게, 불길한 예감이 치밀고 올라왔다.
민준의 얼굴에는 뚜렷한 표정이 없었다. 그것이 그를 더 두렵게 만들었다. 지독한 갈증이 느껴졌다. 민준이 마주한 것과 다른 종류였다. 목이 아니라 마른 피부를 물기로 적시고 싶었다. 먼 옛날 물가에 살던 시절 새겨진 본능.
당시 이 종족은 포식자나 천적, 그 밖의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들을 잡아 죽이던 종족이 가까이 오면 물속으로 도망쳤다. 유전자에 학습된 내용이 남아, 아직도 위협을 느끼면 물에 빠지고픈 충동에 시달리는 것이다.
민준은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상대가 더 예민했다면 시선에 섞인 경멸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걸 읽을 수 없는 종족에게 민준은 모든 것을 초월한 듯이 무심하게 보였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먹지도 못할 해로운 것들이. 짜증 나게.”
화르르륵!
어둠이 요동쳤다.
밤의 자락이 뭉쳐, 하필 가장 오른쪽에 있던 자에게 다가간 건 우연이었다. 태풍이 불고 지진이 몰아닥치는 데에는 인과가 있을 뿐 특별한 의도는 존재치 않는다. 사건의 주체가 사건의 결과에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느끼지 못하든지.
지금 민준의 행동이 그러했다. 그가 어둠을 흔들어 최우측의 토드를 노린 데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었고 치밀한 계획도 없었다. 이곳의 모든 토드는 그에게 똑같았기 때문이다.
저것들은 해롭고, 눈에 보이면 잡아 죽여야 한다.
그래서 민준은 그렇게 했다.
“흐, 흐··· 흐아악!”
들끓는 어둠 앞에서 토드는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그리고 본능은 때때로 지능 높은 생물도 의미 없는 짓을 하게 유도한다. 그는 머리와 양팔, 두 다리를 등껍질 속으로 숨겨 버렸다. 그러자 매끈한 몸통이 바닥에 뒹굴었다. 야생의 공격을 버티기 위해 그리 진화했지만 현대에는 쓸모 없어진 행동이다. 포유류에서 진화한 종족이 위험 앞에서 털을 부풀리는 맥락이었다.
어둠이 부드럽게 다섯 갈래로 나뉜다. 그리고 머리와 사지를 숨긴 구멍 속을 파고 들어갔다.
곧,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드득!
빠직!
찌이이익!
비명은 찰나에 멈췄다. 그 뒤로 들린 건 뼈가 부서지고, 꺾이고, 근육과 장기가 찢기는 소리뿐이었다. 넓적하고 둥근 몸통은 거칠게 흔들리다가 뒤집혔다. 등껍질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뱃가죽이 부글부글 끓었다. 표면에 기포가 일듯, 살가죽이 둥글게 뭉쳐 솟아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주륵!
잠시 후, 다섯 구멍에서 으깨진 살점과 장기, 혈액이 섞여서 흘러나왔다. 민준은 그것이 풍기는 향에서 역겨움을 느꼈고, 어둠은 그것을 품기 싫다는 듯 결 사이로 내보냈다.
순식간에 한 명이 죽었다. 토드족은 포식자 앞에 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확한 판단은 아니었다. 상대는 그들을 입에도 대고 싶지 않아 했으니까.
“공격! 공격해!”
팟!
파팟!
마도구가 광선을 뿜어낸다. 하지만 레이저는 중간에 끊겼다. 어둠이 가닥을 덮어 민준에게 닿지 않았고 허망하게 사라졌다. 마법도 마찬가지였다.
토드족들은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저 수형자가 갑자기 변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이제 와서 까닭이야 중요치 않았다. 이대로는 싸워 이길 방법이 없다.
그때, 어둠이 또 한 번 움직였다. 방금 죽은 토드의 바로 곁에 있던 자였다.
“으, 으, 으아아아악!”
그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비행 주문조차 파훼되었고, 믿을 것은 두 다리밖에 없었다. 그는 선조들이 개조한 튼튼한 육신을 믿고 죽을힘을 향해 달렸다. 북쪽으로, 저 먼 곳으로. 공간 응결 결계 끝까지 도망쳐 비상 탈출을 꾀하려는 생각이었다.
민준은 담담하게 그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쓰지 않고, 약간의 틈을 두고 기다리듯이.
“헉! 헉! ···허어억?!”
얼마나 달렸을까.
도망치던 그는 머릿속이 하얗게 물드는 광경을 직시했다.
“······?!”
분명 멀리 도망쳤는데 눈 앞에 무언가 보였다. 나아갈수록 점차 커지는 그것은 그가 뒤에 두고 도주했던 풍경이었다. 뒤에 두었던 동료들이 전방에 있었다. 여전히 도망치지 못한 채, 귀신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
본래 도망자의 뒷모습을 향했던 민준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등 뒤에서 다가오는 그를 환영하듯이 손을 들었다.
토드는 머릿속으로 원통의 구조를 떠올렸다. 한 지점에서 시작된 질주가, 지름을 한 바퀴 돌아서 결국은 출발한 지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구조.
공간 왜곡.
“마··· 말도···.”
어둠이 들끓었다. 도망자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껍질 안으로 숨겼다.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그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으니까.
어둠 자락은 이번에는 더 빨리 움직였다. 그의 왼팔이 반쯤 들어가고, 오른팔과 양다리는 아직 껍질 속에 감추기도 전에··· 날을 세운 어둠이 목덜미와 등껍질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지렛대처럼 힘차게 들어올려 유격을 벌렸다.
쩌억!
우드득!
등껍질이 산 채로 분리되었다. 껍질 안쪽 아치형으로 붙은 척추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선천적 갑옷을 잃은 토드 등 아래 내장이 꿈틀거렸다.
우득! 어둠은 주먹으로 구기듯 뜯어낸 등껍질을 으스러뜨리더니.
퍽!
약한 부위를 드러낸 토드의 등 위를 내려친다. 그는 비명이라는 단어로는 의미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괴성을 지르고는 죽었다.
영혼이 찢겨질 듯한 소음이 멈춘 뒤, 민준이 말했다.
귀찮다는 듯이.
“그냥···.”
더 이상 하나하나 잡아 죽일 필요도, 그의 능력을 실험해 볼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는 말이었다.
우웅!
아시프-1이 지시에 응하여 공명했다.
“너희끼리 죽여라.”
한때 물과 친숙한 생물이었지만, 토드족은 지상에서 호흡을 한다. 그들은 사방을 어둠이 덮고 나서도 계속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은 그들의 호흡기를 따라 그 내부를 조금씩 덮은 뒤였다.
토드족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은 귀가 찢어질 듯한 괴성을 지르며 공격했다. 뭉툭한 손가락을 오므리고, 발굽 같은 단단한 손바닥으로 상대의 머리를 후려쳤다. 망치로 두들겨 맞은 충격 속에서, 새의 부리를 닮은 뾰족한 입술로 눈을 내려찍었다. 콱 물고는 살점을 찢어발겼다. 껍질 안에 머리를 숨기면 그 안으로 부리를 들이밀고 쪼아 댔다. 그들은 살점을 탐하며 서로를 최대한 많은 조각으로 나누는 데에 집중했다. 피와 내장이 흘렀다. 어둠은 더럽다는 듯, 그 자기참여형 도축장을 품는 대신 결을 나누어 맴돌았다.
잠시 후, 오직 한 명의 토드만 남아 그곳에 서 있었다.
“아··· 아···!”
그를 남긴 것은 적극적으로 주장을 펼친, 민준의 다른 한쪽 자아 때문이었다.
덕분에 세상에서 숨 쉴 기회를 몇 분이나마 더 얻은 것도 모른 채 지휘관은 배은망덕한 선택을 하려 했다.
간신히 연장된 삶을 스스로 마감하려 한 것이다.
둥실!
그는 구체 마도구를 자기 관자놀이 위에 띄웠다. 가쁜 호흡 속에서 생각했다. 눈 앞 동족들 꼴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러느니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았다. 본능적으로 머리가 껍질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았다.
위잉!
구체에서 레이저가 뿜어져 나왔다. 지휘관의 머리를 겨냥한 채.
그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이제 해방될 수 있다. 이 지옥으로부터. 저 괴물로부터 이젠···.
“······.”
해방···.
“······.”
그의 부리 같은 입이 열렸다.
“···아.”
그는 자신이 왜 아직 살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방금 구체에서 발산한 레이저가 그의 왼쪽 뺨에 닿기 직전, 그 가닥이 갑자기 끊기더니 오른쪽 뺨 한 뼘 위에서 다시 이어져서 나아가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을.
절망한 그에게 민준이 시선을 툭 던졌다. 한 명을 남긴 건 들어야 할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민준의 두 자아는 협상을 한다.
‘그래, 정보가 필요하긴 하지.’
하지만.
‘꼭 산 채로 들어야 할 필요는 없잖아?’
둘은 합의했다.
피쉭!
목이 날아갔다.
지휘관이 맞이한 것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죽음이었다. 그는 안도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제는 진정으로 도망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캬아아아아아악!=
자신의 영혼이 몸에서 분리되어, 영계로 소환되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힘에 얽힌 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지휘관은 자신이 망령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끔찍하게 죽었거나, 끔찍한 꼴을 보고 죽은 토드족의 영혼 다수는 광기에 빠진 채 어둠 속을 배회했다. 그리고 민준은 그들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사령술로 끌어모으며 중얼거렸다.
“아아, 목마르다.”
구제(驅除)는 끝났다. 그는 어둠 속에 남겨진 다른 이들을 살폈다. 레이크필드와 동철은 안전하게 결계 속에 숨어 있다. 켄티우스는 바닥에 바짝 엎드린 채 귀를 눕히고 비늘을 세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음에도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꼈을 터. 그리고 윰투스는···. 민준은 미간의 세 번째 눈에서 피를 폭포처럼 흘리며 지하실에서 혼절한 그 사제를 확인했다. 나쁜 상태는 아니었다. 극락에 닿은 듯한 쾌감 속에서 정신을 놓은 것이다.
일단 다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나니, 목이 끊어질 듯한 갈증이 더 심해졌다.
망령을 공중 속에서 끌어모으며 민준은 생각한다. 그의 두 눈동자에서는 여전히 기묘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되뇐다.
목을 좀 축이고 싶은데.
곁에서 웅크리고 있는 저 어린 용은 입가심도 안 될 것이다. 저런 걸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많은 걸 바라지는 않아. 딱, 2천 살 정도 먹은 용 한 마리가 주변에 있으면 좋겠는데.’
그는 정신을 뒤흔드는 깊은 갈망을 느꼈다.
목이 마르다.
***
젠킨슨은 이천년 용생(龍生) 통틀어 가장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방금 홍콩에서 긴급한 보고를 받은 참이다.
“이나이스의 레어가 불타고 있다고?!”
블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지? 그로서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다른 드래곤들은 방조할 것이다. 돕겠다고 나설 드래곤을 달리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녀가 품은 알 속 아이와 혈연관계인 상속자들은 오히려 기뻐하겠지.
이럴 때 동족들을 모아 원조에 나설 드래곤 로드는 공석이다.
모두가 하기 싫어 하는 그 일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꼭 전대 같은 독특한 자가 맡지 않아도, 원래 로드 자리는 용족이 후천적으로 제작한 양심이자, 취임과 함께 탄생하는 집단 윤리 의식으로 기능한다.
후계가 없는 상태에서 발생한 로드의 갑작스러운 사망이, 그들 종족에게 얼마나 큰 상실인지 젠킨슨은 다시금 느꼈다.
그리고 고뇌했다. 그는 이나이스와 친하지도 않고 별 연이 없다. 하지만 로드의 연인이, 그리고 그가 남긴 아이가 위험에 빠진 상태에서 방조할 수는 없었다. 젠킨슨은 그런 드래곤이었다.
그런데.
“민준은 연락을 받지 않고?”
“네. 그쪽 역시 접근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민준의 상가를 정체 모를 어둠이 덮어 버렸다. 그리고 확인된 바에 의하면 친구는 그 안에 있는 것 같다.
‘갇힌 것인가?’
어둠의 성질을 직접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한 젠킨슨은 그 정체를 상상하지 못했다. 하물며 그가 아는 형태도 아니었고, 흑마법이 아닌 다른 계통 마법에도 어둠을 다루는 종류는 존재한다.
젠킨슨은 고뇌했다.
존경하던 고인의 유족이자 같은 드래곤인 이나이스와 그녀의 아이.
몇백 년 우정을 나눠 오고 있지만 드래곤이 아닌 민준.
어차피 텔레포트를 쓰면 이동은 순식간이지만 거기에서 얼마나 시간이 소요될지 알 수 없다.
누구를 먼저 도와야 할 것인가?
차기 드래곤 로드를 노리는 용으로서 적합한 선택은 무엇인가?
“······.”
찰나의 고민 후.
젠킨슨은 선택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