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57
158. 죄인이 꿈꾸는 사이 (1) >
젠킨슨의 비서, 블레어 캠벨은 스스로를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그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블레어는 설사 이 세상에서 그녀의 권리를 보호할 법률이 사라진다고 해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이미 초법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젠킨슨의 울타리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녀를 처벌할 법률이 없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블레어는 보편적인 윤리와 도리에 어긋날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데도 엘프는 지금 혼란스럽다. 앞으로의 일은 든든한 방패 젠킨슨조차 무사할 수 있을지 확신 못 할 영역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눈앞의 상대들에게 그녀가 지금부터 하려는 말이 과연 도리에 맞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진실의 일부를 숨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어는 명령에 따르기로 했다. 젠킨슨은 불신의 벽이 두터운 엘프가, 가까스로 마음의 문을 열고 신뢰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블레어의 말을 듣는 이들은 그녀만큼 혼란스러워 보였다.
“저··· 저기··· 그러니까···.”
고블린, 동철이 기가 죽은 목소리로 평생의 입버릇이 된 말을 중얼거렸다.
“사장님··· 죄송··· 저 잘, 이해 못 했어요···.”
도움을 구하듯 레이크필드를 본다. 늙은 엘프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제 종업원과 함께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음에도 지금까지 입을 꾹 다물고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은 그는 신중한 목소리로 묻는다. 방금 듣고 이해한 바를 더듬으면서.
“그러니까, 여기 이 자리 모두를 젠킨슨 컴퍼니에서 고용하겠다는 말씀입니까?”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게 여러분들을 보호할 최선책이라고 회장님께서는 판단하고 계십니다. 대외적인 고용 계약서와는 별도로, 회장님 개인과 맺는 계약도 작성할 겁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기분이 나쁘실 수도 있지만···.”
블레어는 최대한 담담하게 표현하려 애썼다.
“여러분들을 엘더 드래곤 젠킨슨의 사유 재산 비슷한 것으로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사건 후 젠킨슨은 위원회 지구 대표소의 긴급 호출에 응했다. 그는 철야 심문이 끝나고 얼음장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돌아오더니 급하게 여러 가지를 지시했다. 그중 하나가 지금 이들을 불러모아 제안하는 것이었다.
고룡은 민준의 상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 어둠은 민준이 불러낸 것이 맞았다. 그러나 거기에서 상대한 적은 원한을 품은 흑마법사 학파 따위가 아니었다.
조세징수사령부.
위원회의 가장 날카로운 칼날.
수형자인 민준이 그들을 학살한 뒤 사라진 내막을 파악하고 젠킨슨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벗이 그럴 능력을 가졌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일을 실행에 옮겼다는 사실에 더 기겁한 것이다.
위원회는 지금까지 민준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맹백했다.
‘탈옥.’
그 단어를, 블레어는 참으로 껄끄럽게 입 안에서 굴렸다.
그녀는 고룡의 고백을 통해 뒤늦게 요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위원회가 직접 관리하는 죄수라니.’
그런 자들이 존재하는 것도 몰랐는데, 수십 년 알고 지낸 요원의 정체가 바로 그것이란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외계인이라니··· 범차원급 범죄자라니!’
그녀의 상관은 탈옥한 죄수의 주변인들을 위해 나서고 있다.
그 자체로는 불법성이 성립하지 않겠지만···.
‘아니, 정말 그럴까?’
그녀는 위원회 형법 체계에 무지했다. 드래곤들이나 그 전문을 외울 것이다.
동요를 엘프다운 가면 아래 감춘 채 블레어는 계속 설명했다.
“서점의 두 분이 목격하신 것처럼 지금 예민준 요원님을 노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자들을 피해 요원님은 잠시 거취를 감추신 것처럼 보여요. 그 사이 적들이 혹시나 주변인들에게 손을 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안전히 돌아오실 때까지 회장님께서는 직접 여러분들을 보호하시려는 겁니다.”
말을 하면서도 블레어는 의문이 들었다.
정말, 이들을 지켜낼 수 있을까? 상대는 위원회인데.
하지만 젠킨슨은 장담했다. 그럴 이유가 있다고 했다. 최근 위원회가 한 드래곤에게 증거 없이 강제력을 행사하려다가 실패했고, 젠킨슨은 다른 로드 후보자들과 함께 이 사건을 공론화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용의자를 무력화하면 저절로 증거가 드러날 거라 판단한 것 같다. 상황이 애매할 때 자주 쓰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용은 살아남았고, 그들은 결국 증거 없이 애먼 드래곤을 두드려 패려다가 실패한 꼴이 되었다. 그 결과 위원회는 지구의 용족들에게 정치적 부담을 지게 되었다고.
···이렇게 간추린 내용만 들은 블레어 입장에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설명이었다. 대체 무슨 증거를, 무슨 혐의를 말하는 건지도 이해할 수 없었고.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한 명씩 바라본다. 그들 중에서도 레이크필드의 눈동자가 유달리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때, 침묵하던 캐시가 말했다.
“···정팔이 아저씨는요? 그리고, 은성이는?”
이 자리에 없는 사람들.
블레어는 짐작했다는 듯 답했다.
“박정팔 후보님은 현재 입장 때문에 명시적 고용 계약은 맺지 못하겠지만, 이면 계약으로 보호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하은성 씨는 일단 껍데기는 드래곤이니 비교적 안전합니다. 다만 그 두 분도 일단 거처는 옮길 생각입니다.”
스스로도 확신 못 하는 말을, 장담하듯이 늘어놓는다.
그러자 캐시가 물었다.
“혹시, 회장님은 짐작 가는 바가 있다고 하시나요? 민준 씨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블레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는 조금의 은폐도 없었다.
“알 수 없다고 하십니다.”
***
그는 악몽에서 깨어났다.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며.
휘이잉!
바람이 분다. 미풍이 이마를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산짐승의 울음과 노래, 나뭇가지가 서로 부대끼며 잎을 뿌리는 소리. 덥지도 춥지도 않은 온도와 적절한 습기가 피부를 감쌌다. 그는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태양과 달이 공존하는 시간이었다. 추락하는 햇살을 입은 산봉우리가 황금색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인지하는 감각은 넓고도 자유로웠다.
···자유로웠다.
‘뭔가, 긴 꿈을 꾼 것 같은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덩이에 묻은 풀과 물기를 털어 낸다. 그리고 방금 꾼 꿈에 대해 생각했다. 정확한 서사보다는 느꼈던 감정이 주로 떠올랐다. 억압된 것 같은 부자유감, 분노, 좌절, 원한, ···그리고 복수를 향한 다짐.
숲의 노랫소리가 멎었다. 기억의 되새김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지평선 너머로 시선을 던진다.
자주와 주홍을 거칠게 붓질한 상공에 점묘화가 펼쳐졌다. 검은 점들이 무리를 짓고 날아오고 있었다. 새떼처럼 빼곡하게.
‘이제 돌아오는군.’
낮잠이 꽤 길었다. 도시에서는 상상 못 할 삶이다.
그는 자신했다. 내겐 복잡한 도심보다 지금 생활이 어울린다고. 여길 불편한 시골 수준을 넘어 원시시대의 편린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애초에 전원생활의 묘미를 모르니 하는 말이다. 그들이야말로 멋과 여유를 모르는 촌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오늘은 좀 늦긴 했는데?’
먹이를 찾기 위해서 평소보다 멀리 날아가야 했다는 소리다.
어쩌면 다음 달쯤 축사를 다른 대륙으로 옮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와 가축들이 이 땅을 비우고 세월이 흐르면 다시 녀석들에게 먹일 짐승 개체 수가 늘 것이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반복한 과정이었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서.
콰르르!
충분히 가까워졌는지 가축들의 기척이 귀를 간지럽혔다.
그것은 하늘을 가득 메운 드래곤 떼였다.
콰라라라라!
날개짓하던 녀석들은 하나둘씩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하강한다. 그리고 벌집처럼 빼곡한 구멍이 뚫린 축사 입구로 착륙했다. 과정은 매끄러웠고 누구 하나 자기 집을 잘못 찾아가는 용은 없었다.
비행경로가 얽히거나 서로 부딪치지도 않았다. 비늘 하나 스치지 않고 마법 같은 곡예를 부리며, 복잡한 궤적을 그렸다. 매일 보는 입장에서는 별 감흥이 없지만 처음 보는 이들은 절로 감탄을 자아내는 장면이다.
지금 축사로 돌아오는 녀석들은 비교적 말을 잘 듣고, 똑똑하며, 상대적으로 가까운 곳에서 먹이를 찾을 정도로 능력 좋은 녀석들이다.
조금 기다리면 그보다 뒤처지는 녀석들이 날아올 터였다.
곧, 그의 눈에 띄었다.
콰르르! 콰라!
용 짖는 소리가 더욱 격해졌다. 그중에는 두드러지게 날카로운 외침도 섞여 있었다.
드래곤들의 복귀가 이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방금 전까지의 완벽한 군체 비행과 달리 무리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한다. 대형 외곽에서 날던 녀석들이 자꾸 이탈하고 엉뚱한 곳으로 새는 기미도 보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콰르르! 콰릉!
금색 유성 같은 궤적을 그리며 한 마리의 드래곤이 날아왔다. 녀석은 다른 개체를 아득히 초월하는 속도로 하늘을 질주했다. 황금 화살처럼 보이는 그 드래곤은 전광석화처럼 무리 전방과 좌우를 종횡하며 대열이 무너지지 않도록 관리했다.
녀석은 드래곤의 길을 인도하는 드래곤이었다. 용 떼가 방향을 잃지 않게 관리하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도록 감시하며, 반항하는 놈들을 입질과 으르렁거림으로 위협하여 제자리로 돌려보낸다.
그리하여 마지막 남은 드래곤 하나까지 축사로 돌아간 후.
휘이이이이!
금색 비늘의 드래곤은 다른 녀석들처럼 축사 안에 들어가는 대신 공중을 몇 바퀴 돌며 배회했다. 무언가를 찾는 눈치였다.
“······!”
드래곤의 눈이 지면의 누군가를 포착한 순간.
급작스러운 곡예 낙하가 시작되었다.
먹잇감을 낚아채는 매의 움직임과 비슷했다. 비현실적으로 빠르고 과격한 방향 전환.
그는 상공에 못박힌 황금 얼룩이 순식간에 덩치를 불리는 걸 보았다. 성급하긴. 혀를 찬 뒤, 잠시 후 벌어질 일을 대비해 두 눈을 감았다.
부우우웅!
엄청난 풍압.
대지에 한없이 가까워진 황금색 드래곤이 풀밭 위 한 뺨 몸을 띄운 채 스쳤다. 낙엽과 마른풀이 폭풍을 만들며 그의 얼굴을 덮쳤다.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휘날렸다.
쿵! 용이 두 발을 딛는 소리가 들린다. 쿵! 쿵! 쿵!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 바람이 완전히 멎은 것을 확인한 뒤 그는 두 눈을 떴다.
정면에서 질주해 오는 드래곤. 눈동자에는 불꽃 비슷한 것이 맺혀 있다.
“아드키엘!”
이름을 부르자.
콰라라라라!
용이 열의 가득한 표정으로 화답한다. 그는 몸에 힘을 주며 긴장했다.
쿵!
드래곤이 그를 들이받았다.
“야, 야! 알았어! 알았어! 진정해!”
그는 바닥에 등을 대고 쓰러졌다. 신장 두 배 크기의 골드 드래곤이 그를 깔고 정신없이 얼굴을 혀로 핥았다.
크릉! 크르르릉!
한참 난리를 피우던 드래곤이 드디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는 다른 방식으로 요란을 떤다. 날개를 퍼덕이며 목을 쉴 새 없이 흔들었다.
그는 뺨에 묻은 침을 닦으며 아드키엘의 표정을 읽어냈다 오늘 유달리 용 떼의 귀가가 늦어지기는 했다. 드래곤의 얼굴에는 애탄 기다림과 뜨거운 갈구가 서렸다.
밥 시간이 지나 있었다.
***
낮에 자유로이 짐승을 잡아먹도록 풀어 두지만 저녁이 오면 모든 용은 목장주가 준비한 별도의 사료를 먹는다. 바깥에서 아무리 배불리 먹었어도 용들은 그것을 원한다. 이 행성에 사람이라고는 그 하나밖에 없으므로, 그 일을 하는 담당자 역시 그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허공에 손짓을 몇 번 함으로써 이미 축사 안에 들어가 애타게 기다리는 가축들에게 사료를 공급했다. 아드키엘 앞에도 그것을 가득 담은 그릇이 나타났다. 골드 드래곤이 맹렬하고도 공격적인 자세로 그걸 해치우는 광경을 보며 그는 웃었다.
그렇게 맛있나?
작고한 스승의 레시피는 뛰어난 기호성을 자랑했다. 노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는 잠시 침묵했다. 이 행성은 본래 스승의 목장이었다. 숨을 거둔 뒤에는 그가 물려받았고.
사실, 애도의 의미가 있을까 자문하게 될 정도로 긴 삶이었다. 동족들 수명이 점차 길어지고 있긴 하지만 스승 같은 장생을 영유한 자는 달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승을 떠올릴 때마다 은은한 슬픔을 느꼈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것인가? 그를 아는 누구도 잃지 않게 될 시대가.
노력할 따름이었다.
그럴 시간은 충분했다. 도제식 신분제에 따라 고귀한 자리를 물려받은 그 역시 스승과 비슷하게 긴 생애를 걸어 나갈 것이다. 그는 상념에서 벗어나, 허공에 화면 몇 개를 띄웠다. 가르침에 따라 공장형 사육 시스템에 반대하며 전통적인 방사형 농장을 꾸리는 그였지만 모든 편의성을 포기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정신과 연결된 시스템은 축사 내부를 점검했다.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 마리가 비잖아?’
목소리를 내서 투덜거렸다.
“야, 이 녀석아. 이거 어쩔 거야? 한 마리 떨구고 왔잖아.”
한참 먹느라 정신없던 아드키엘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갸웃거리며 갸릉댄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용의 큼지막하고 맑은 눈이 거울처럼 주인을 비춘다. 그는 그걸 보며 코웃음을 쳤다. ‘이 자식, 분명 지금 내 말 알아들었어. 이럴 때 보면 사람 같다니까.’
그는 축사로 돌아오지 않은 드래곤의 인식 번호를 확인했다.
코이스-아게르-아게르-아젤-할레키아-류브라이-코이스······.
“자, 다 먹었으면 이 녀석 잡으러 가자.”
“크릉!”
아드키엘의 등 위에 올라타며 그는 중얼거렸다. 낙오한 드래곤이 걱정되었다.
그 녀석, 엉뚱한 곳에서 혼자 돌아다니다가 카바이트 따위에게 물리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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