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6
16. 직장상사를 살해하는 세 가지 방법 (13)
정팔이 갑자기 변한 공기를 감지하고 그를 보았다. 하지만 이내 이어지는 김연주의 말 때문에 다시 고개를 돌린다.
“이 새끼가 진짜 미친 새낀가 싶었어요···.”
김연주는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원래 몽상가인 줄은 알았지만··· ‘사회오염’이니 뭐니 하는 이상한 말 떠들어 댈 때부터 좀 또라이같았지만··· 내가 그런 말을 했는데 아무 것도 캐묻지 않고 한다는 소리가···. 내 피를 좀 달라니.”
그가 독자적으로, 비밀리에 진행하던 연구가 벽에 부딪친 모양이었고 ISP 발현자의 혈액이 실마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설마?”
조금 전부터 이유 모를 침묵을 유지하는 민준 대신 정팔이 묻는다. 김연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짐작을 긍정했다. 그러자 오크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어휴우···.”
미칠 것 같이 화가 났지만, 결국 그녀는 상대가 원하는 대로 혈액을 제공했다. 외도를 고백했지만, 상대의 반응은 없었다. 김연주는 한참을 그래왔듯 이번에도 갈등을 회피하기로 했다.
여전히, 둘의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거기까지 들은 정팔이 아연실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둘 다 단단히 돌았구만.”
김연주는 정기적으로 혈액을 뽑아서 그에게 넘기는 행위··· 즉, 둘 만의 비밀을 관계를 유지하는 보험처럼 여겼다. 그녀가 희생해서 이 관계를 계속 이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지장애에 가까운 사고였다.
하지만 결국, 이 아슬아슬한 관계의 파국이 다가왔다.
그것도 꽤나 폭력적인 형태의 파국이었다.
‘미안해.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어.’
침대에서 느닷없이 폭탄 같은 말을 꺼낸 장태준은, 오랫동안 유예했던 작별 선언을 했다. 드디어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행선지가 어디인지 캐묻는 말에는 여전히 일절 응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에 한 청천벽력 같은 말은 이것이었다.
‘내가 가진 효성실업 주식은 전부 사회복지재단에 넘길 생각이야.’
아마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상실감이, 분노로 뒤바뀐 것은.
‘그리고, 연주 네가 가지고 있는 주식도 내게 팔아 줬으면 좋겠어.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따라 줘. 값은 내가 충분히 쳐 줄···.’
김연주는 그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금 나랑 장난해요?! 설명도 없이 떠나겠다는 것도 울화통이 터져서 죽겠는데, 뭐? 내 주식을 처분해요? 효성실업, 당신 개인 회사 아니잖아요. 같이 키운 회사인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어. 그 주식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당신도 위험해질지 몰라.’
성의 없는 거짓말이자, 변명이었다.
그 때부터는 기억이 끊긴 듯 잘 생각나지 않았다. 오로지, 철저하게 버려졌다는 좌절감만 끓어올랐다.
회사를 위해 한 몸을 바쳤고, 개인적인 연구 목적으로 필요하다는 혈액까지 정기적으로 제공했다. 결국 자신은 장태준에게 있어서 다용도로 쓸모 있는 부하 직원이자, 귀찮게 굴지 않는 편리한 오피스 와이프이자, 원할 때마다 피를 빨리는 실험용 모르모트에 불과했던 것이다.
집을 뛰쳐나간 뒤 정신을 차리니, 김연주는 외도 상대인 드래곤 앞에 있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고백한 그녀에게 에델은 화를 내지 않았다.
‘뭐, 나는 딱히··· 짜증날 것도 없는데? 네가 밖에서 나 말고 누구랑 자고 다니든 상관없어. 난 드래곤이잖아. 원체 그런 것 신경 안 쓰는 종족이라고.’
그녀의 흥미를 끈 것은 고백 중 다른 내용이었다.
‘장태준이라는 놈이 용족 유전자를 연구하고 있었다고? 그것도 혼자서, 비밀리에?’
장태준이 언젠가 짧게 언급한 적 있었다. 그의 ‘집’ 안에 숨겨 놓은 비밀 금고가 있다고. 그 내부에 제대로 된 랩(Lab)을 구축하여 용족의 유전자를 혼자 연구하는 중이라고.
단, 그 위치와 들어가는 방법은 김연주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몇 년을 드나들었지만 철저한 비밀로 지킨 것이다.
‘너, 그 새끼한테 복수하고 싶지?’
그렇게 둘의 음모가 시작되었다. 괘씸죄를 빌미 삼아, 에델리네스는 장태준을 납치하여 고문하고, 겸사겸사 그의 모든 주식과 그동안 연구한 데이터를 강탈한다.
그런 말을 하는 에델리네스는 정의를 구현한다는 목적 보다는 주식의 액면 가치에 더 큰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엘더 드래곤에게는 콧방귀가 나오는 액수였지만 빈털터리로 지구에 넘어온 저능력자 드래곤에게는 군침 도는 먹이였던 것이다.
결국 김연주는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한밤중에 화해를 빌미로 장태준을 몰래 불러냈고, 그 장소에는 에델리네스도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장태준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뒤로, 누구도 그를 본 적이 없었다.
***
그 후로 이어진 말은 후회의 토로와, 역겨운 자기합리화 및 변명의 반복이었다.
더 들어도 의미가 없을 것 같다고 판단한 정팔이 물었다.
“형님?”
민준의 얼굴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다.
머릿속으로 뭔가를 반쯤 확신한 민준이 묻는다.
“당신의 혈액은 누가 채취했지? 어떤 방식으로?”
그는 김연주의 생명력이 정상인 대비 모자랐던 이유를 이제 알았다. 그런데, 걸리는 부분이 하나 있다.
“···태준 씨가, 직접.”
“피는 한 번에 얼마나 많이? 채혈 주기는?”
김연주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한 번에 300ml 정도, 일주일에 한 번씩 약 일 년 간 채혈해 갔다고.
“설마! 말도 안···!”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민준을 보고 정팔마저 움찔했다.
“왜, 왜 그러세요?”
저 요원이 지금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을 오크는 처음 보았다.
하지만 민준은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
‘그럼 겨우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14리터나 뽑아갔다는 소리잖아!’
그것도 일반적인 채혈 방식이 아니었다. 마법을 동원하여 생명력까지 함께 채취하는 방법. 피를 마법 시료로 쓸 때 사용하는 방식이다.
장태준은 김연주로부터 직접 채혈을 했고, 항상 독특하게 생긴 주사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것이 어떤 아티팩트인지 민준은 잘 알고 있었다.
‘마법 채혈로 그 정도를 뽑아 갔는데 멀쩡하게 살아남을 인간은 없어!’
하지만 김연주는 살아있다.
채혈을 한 ‘술사’ 능력이 그만큼 뛰어났던 것이다. 피에 담긴 생명력을 시료로 쓸 수 있을 만큼은 많이 뽑았지만 생명에 지장이 가지 않을 정도로 제한하는 고도의 컨트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김연주가 들은 내용에 따르면 장태준이 막판에 집중한 연구는 ‘ISP 발현자 혈액이 용혈에 끼치는 영향과 원리 규명’이었다.
마법적 성질의 상호 작용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통상적으로 두 물질이 비슷한 용량으로 필요하다.
‘인간 혼자 드래곤 유전자 연구를 했다기에, 냉동 샘플을 암시장에서 눈꼽 만큼 구한 줄 알았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단단히 오판을 하고 있었다.
‘그런 식의 연구라면 김연주 피가 저만큼이나 필요할 리 없어. 제대로 된 연구를 한 게 맞다면··· 마법적으로 채혈한 ‘용혈’ 역시 최소 14리터는 소모되었을 거다. 그걸 평범한 인간이 대체 어디에서 구할 수 있지?’
머릿속에서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정팔아.”
“네, 형님!”
오크가 긴장하여 답한다.
“장태준 사장, 여기 집 말고 소유한 부동산이 또 뭐 있지?”
그가 급하게 서류를 뒤진다.
“어어··· 부산 해운대에 주상복합이 하나 있구요. 제천에 콘도가 하나 있고. 가천에 별장도 하나 있고···.”
민준이 이 사건을 맡고 본격적으로 움직인 지 겨우 사흘 째다.
그동안 서울 안에서 넘치는 증거를 쫓는 데 바빠, 장태준이 서울 밖에 산 부동산까지 찾아갈 여유는 없었다. 그런 곳은 경찰이 수색했지만 드러난 것은 없었다. 마법사가 가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아니, 설사 소사이어티의 조직원이 갔어도 아무 흔적도 못 찾았을 터다. 민준의 짐작이 맞다면.
“그것들 중에, 최대 높이 800미터 이상의 산(山)과 인접한 건물이 있나? 아니면 직경 3km이상의 호수와 가까운 건물은?”
정팔은 조건에 맞는 항목을 찾아냈다.
“아, 강원도 속초시에 위치한 별장이 딱 조건에 맞네요. 바로 근처가 설악산입니다.”
민준은 더 들을 것도 없이 바로 일어났다.
“좋아, 지금 바로 거기로 출···.”
말을 하다 말고 정정한다.
“아니, 정팔이 너는 김연주를 서로 연행해. 나 혼자 갔다 올게.”
이번에도 정팔을 데려가는 것은 위험하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소사이어티에서 백날 찾아봐도··· 비밀 금고가 나왔을 리가 없지.’
민준까지 장태준의 한남동 자택을 그렇게 샅샅이 털었는데 아무 것도 안 나온 이유 역시 명백했다.
‘자기 집에 비밀 금고가 있다고? 그게 거짓말은 아니었을 거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이겠지.’
장태준의 정체가 민준이 짐작하는 그것이 맞다면, 한남동 저택은 그의 ‘진짜 집’이 아니다.
그 종족이 인지하는 진정한 집은 다른 형태일 수 밖에 없다는 걸 민준은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