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66
167. Hate to Hate (5) >
***
민준이 레어로 향한 뒤 하은성은 홀로 그를 기다렸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혼자 남은 건 아니었다. 이성이 망가진 정신체까지 카운팅하면 말이다.
=제발··· 놓아줘···.=
=아파, 힘들어, 괴로워, 아아···.=
서로 엉겨 붙어 발악하는 망령들.
레어로 데려갈 수 없기에 민준이 여기 묶어 놓은 외계인 영체들이다.
그들을 보며 하은성은 오싹함을 느꼈다. 죽고 나서 온갖 끔찍한 귀신을 목격했지만 이런 자들은 처음이다. 사망 직전 모습을 딴 외계인들을 보니 죽은 방법은 다양했지만 동시에 묘한 일관성이 느껴졌다.
가장 끔찍한 최후를 안기려는 악의.
최대한 비참한 죽음을.
“으으!”
부르르, 몸을 떤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어야 외계인에게 저런 증오를 품을 수 있는지 그는 상상할 수 없었다.
‘요원님··· 예전엔 이렇게 오래 붙잡아 두지 못했는데.’
달란트 덕분일까?
그의 고용주(어떤 성격 더러운 고룡 표현을 빌면 ‘소유주’)는 나날이 강력해지는 중이다. 망령을 다루는 힘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아직 망령을 부려서 결계는 못 뚫는 모양이지.’
그러니 자신을 데려왔을 터다. 다시 말해, 하은성의 고유 능력은 아직 민준도 흉내 낼 수 없는 영역.
유령은 확신했다. 저 요원은 아직 자신이 필요한 거다.
‘어떻게 보면 다행인데.’
덕분에 두 여동생은 호사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가끔씩 멀리서 잘 사나 관찰하곤 하는데, 하프 오크 막내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인간처럼 성형수술을 하고 싶다며 히스테리를 부리는 일을 빼면 말이다.
민준이 아니었다면 엘더 드래곤이 이 정도로 신경 써 주지 않았을 것을 하은성은 안다.
하지만.
‘이 빚은 대체 언제 상환 가능한 거지?’
날 잡고 한번 진지하게 이야기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요즘 들어 민준의 분위기가 너무 무서워서 말 꺼내기 두렵다.
‘그리고 이 몸에는 언제까지 붙어 있을까?’
이 몸의 원주인, 정체불명의 드래곤은 여전히 자신의 부름에 답하지 않는다. 민준이 약속했던 한 달을 아득히 초월하여 이제 반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다 진짜 내 몸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자문하며 하은성은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이토록 오래 빙의하는 건 사후(死後) 처음이었으며, 자연스레 산 사람만 느끼는 각종 즐거움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하필 이 몸이 혐오하여 마지않는 용족이라는 게 꺼림칙했다.
그런데도.
‘너무 편하단 말이야. 원래 내 몸이었던 것처럼.’
처음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날이 갈수록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기분이다. 최근 민준이 다시확인하듯이 몇 번이나 물어봤는데 그때마다 하은성의 답은 똑같았다.
– 거부감이요? 미칠 것 같은 기분? 아뇨, 그런 건 없는데요. ······아, 살이 너무 쪄서 날 때 어깨가 좀 저리긴 한데 요즘은 조금씩 빠지는 중이고요.
그러자 민준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인 걸 어쩌겠는가?
‘그래도 이 몸이 여러모로 편하긴 해. 조만간 가게 될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응하기도 유리할 거야.’
하은성을 납치하듯 홍콩에 데려온 뒤 민준은 통보했다.
-일주일 안에 미국에서 큰일 하나 마무리하고 당분간 멀리 뜰 거다. 너도 같이 가는 거야.
멀리 뜬다고?
거리는 상대적 개념이다. 한국은 물론이고 지구 반대편 미국에서도 먼 곳이라고 하면 결국 북극이나 남극밖에 남지 않는다.
‘이 몸이면 아무리 추운 곳에 가도 사는 데 지장 없겠지. 더군다나 ‘당분간’이라고 하면 말이야.’
설사 영하 50도의 동토라고 해도 하은성은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의 민준이라면 텔레포트로 순식간에 오갈 수 있는 거리이니까.
***
=아니, 윰투스. 그러니까 화신께서 우리 차원으로 피신을 오신다는 이야기인가?=
‘네, 맞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이 흘러넘치는 공간에서 두 사제의 영혼이 대화하고 있었다. 윰투스는 막 화신의 전언을 읊은 참이다. 그걸 들은 엘라후-프라가 고위 사제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화신께서는 이 세계의 박해와 수난을 피해 잠시 참된 교인들 땅에 거하시려 합니다.’
=위원회를 피해 밀항한다고? 그게 가능할 리가!=
‘이미 많은 이들이 성공한 일입니다. 본단에서는 도착지 터미널에서 도약선 유도만 잘 해 주면 됩니다. 출발지 터미널 문제는 이쪽에서 해결할 겁니다.’
=이건 여타 밀항과 경우가 다르지 않나? 설명대로면 위원회가 눈에 불을 켜고 군사력까지 동원하여 화신을 찾고 있을 거고, 우리 차원은 아직 제한적 록다운을 실행 중이니 더욱 눈에 띌 텐데.=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단 입장에서는 반겨야 할 일이 아닙니까?’
그렇게 윰투스가 반박했지만 사제는 영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어차피 예정된 수순이었습니다. 신혈을 교단 본부에서 지구로 옮기는 방법을 찾지 못한 이상 화신께서 본부에 직접 가실 수밖에 없지요.’
민준은 윰투스를 통해 이미 지시한 바 있다. 지금까지 제단에 모아 놓은 달란트를 가져올 방법을 찾으라고. 하지만 본단에서는 여태 그럴싸한 피드백을 주지 못한 것이다.
민준은 생각을 바꿨다. 그쪽에서 가져올 수 없다면 자기가 가기로. 위원회의 추적도 피할 겸 일석이조였다.
윰투스가 의심쩍은 투로 물었다.
‘그런데 그간 진행상황 공유가 없어도 너무 없던데요?’
=아, 그게···.=
고위 사제는 주저했다.
=아무래도 화신의 요청이 순탄스럽게 진행될 것 같지 않아.=
이어진 말을 들은 윰투스는 격노했다. 설마 했는데 우려가 현실로 벌어지고 있던 것이다.
‘뭐라고요?!’
사제는 차분하게 말을 되풀이했다.
=사제들 일부는 여전히 주저하고 있다네. 화신의 정체에 대한 불신이 아니야. 단지 그분에게··· 달란트를 전부 봉헌하는 건 조심스럽다는 거지.=
‘허, 참!’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우리 대다수는 아직 화신을 직접 뵙지도 못했···.=
‘정말이지, 듣기에 망측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윰투스가 들끓어 오르는 화를 가라앉히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감히 그들이 누굴 의심한단 말인가?
사제는 변명하듯 말했다.
=그럴 만도 해. 지금 본단의 면면을 보면 봉헌에 찬성하는 사제들도, 주저하는 이들도 모두 신성력이 변함 없이 온전하니까.=
섬기는 존재를 부정한 순간 신성력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지금 상황에는 몹시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따르려는 자도 주저하는 자도 모두 멀쩡하니까.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은 윰투스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 문제는 곧 해결되겠군요. 그분의 성체를 눈에 담은 순간 모든 의심과 불신은 사라질 것입니다. 미간에서 흘러내린 폭포수 같은 피가 흐린 판단력과 헛된 의심을 씻어 낼 터이니까요.’
그는 자신만만했다.
***
엘더 드래곤, 로이베르트는 자신을 친(親)위원회파니 비둘기파니 치부하는 말을 들으면 몹시 화를 내곤 했다.
그 역시 옛날 전쟁을 겪은 고룡이다. 위원회는 우리의 원수라는 종족적, 역사적 사명에 당연히 동의했다. 지상 최고의 종족이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눌려 살 수는 없으며, 평화는 영원하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는 우주를 휘어잡는 권력을 흉측한 종족 손에서 되찾아야 하니까.
‘하지만.’
동시에 로이베르트는 이렇게도 생각한다.
그런데··· 그 일을 굳이 ‘지금’, ‘내가’ 할 필요가 있는가?
그는 세상을 떠난 선대 로드의 말을 떠올렸다.
-로이베르트, 자네 말대로 우리가 세상을 재단하는 데 쓰는 시간 단위는 다른 종족보다 훨씬 길고 크지. 그런데 세상을 오래 걷는다는 건, 다시 말해 후손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시간도 더 길다는 뜻이지 않은가?
드래곤 로드는 후손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지금 우리들’이 노력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로이베르트는 그런 주장이 항상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렸다.
미래를 위한 책임은, 그 미래를 살아가는 자들이 짊어지면 되지 않겠는가?
로이베르트는 확신했다. 이번 세대에서는 위원회를 이길 수 없다. 직접 목격한 기술의 격차는 그토록 극심했으니.
그래, 동의한다. 드래곤은 위원회에게 반격해야 한다. 하지만 그 의무는 후손들이 짊어질 것이다. 모두가 싸움을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다. 어떤 개체는, 혹은 어떤 세대는 지금 가지고 있는 거라도 잃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하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증거로 시비를 걸면, 그 결과는 지구의 자산 가치 폭락뿐이다.’
로이베르트는 이번 세대의 전쟁을 원치 않았다.
‘용을 약화시키는 음모를 꾸민다고? 카바이트가? 정신병자 망상에 가까운 소리군.’
결국 취소되었긴 하지만, 용족 회의를 위해 사전 배포된 비밀 자료를 그도 읽었다.
그리고 어이가 없어서 껄껄 웃어 버렸다.
일단 증거부터 변변찮다. 카바아트가 연루된 물증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전부 범행 주체나 범행의 도구로 사용된 자들 증언밖에 없었으며 그나마 대다수는 이미 죽어 버렸다.
‘고대 종족이 밉고 증오스러운 건 알겠는데 이건 너무 나갔어. 카바이트가 용을 개조한다고? 허무맹랑한 드워프 소설에나 등장할 설정이다.’
그렇게 기억을 더듬고 비웃고 있는데.
“음?”
그는 방 안에 모습을 드러낸 인간 때문에 당황했다.
여긴 그가 식당으로 쓰는 공간이므로 노예들도 드나들 수 있지만, 입장 전 허락을 받는 건 필수다.
‘저 새끼가 미쳤나?’
모르는 얼굴이다.
하지만 한 손에 식칼을, 다른 한 손에 후라이팬을 든 걸 보니 요리사인 모양.
“뭐냐? 오늘 식사는 본체 상태로 할 건데 왜 인간 요리사가?”
레어의 모든 노예들 얼굴을 기억할 만큼 한가한 드래곤이 아니었으므로 큰 의심을 두지는 않았다. 단지 그 무례함에 분노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분노는 미심쩍음으로 변했고.
‘아니, 잠깐. 저 후라이팬 설마··· 오리할콘? 그리고 칼은···.’
미심쩍음은 위기감으로 바뀌었다.
‘저거 인간이 맞나? 아무것도···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의 등 뒤에서 검은 기운이 폭발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네놈!”
본체 상태로 식사를 기다리던 드래곤은 일단 강제 사출(射出) 마법진을 발동시키려 했다. 레어 안에서 싸우는 것은 어불성설이니까.
그건 이미 상대가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눈치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랬다면 굳이 나갈 필요도 없이 여기서 주문 한 번으로 으깨 버렸으리라.
그런데.
화르르륵!
“아니?!”
드래곤을 위해 설계된 거대한 식당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당혹감 속에서 로이베르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암흑이 사방을 잠식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더 미치겠는 건···.
‘텔레포트가?!’
전이 마법진이 발동하지 않았다. 동시에 주변을 면밀히 감지하던 용족의 감각이 둔해지는 느낌이다.
비유하자면 어둠이 응집하여 아공간을 만들고 그를 가둬 버린 것 같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콰라라라!
고룡은 분노하며 몸을 뒤튼다. 마법을 전담하는 뇌가 순식간에 수십여 개 주문을 펼쳤다. 이동, 분석, 파훼, 보호, 왜곡 등 다양한 속성을 담은 스펠이 사방을 휩쓴다.
하지만 어떤 반응도 없었다. 공격에 말려들어 으깨진 타깃도 없었고, 어둠을 해석하려던 주문은 침묵했다.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시도도 수포로 돌아갔다.
‘대체!’
목덜미에 스산하고도 예리한 날이 파고든 것은 그때였다.
스겅!
뭔가 따끔, 하더니.
불로 지지는 것 같은 통증이 이어진다.
“크아아악!”
콸콸!
고룡은 너무 오랜만에 느낀 그것을 쉽게 정의하지 못했다. 지구 이민 초기, 영지를 빼앗기 위해 다른 고룡과 싸웠던 날 이후 한 번도 못 접했던 감각.
비늘 안쪽까지 파고드는 깊은 아픔.
“크라라라!”
푹! 푹!
푸슉!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공격이 이어졌다. 곧 드래곤은 자신의 목덜미, 날갯죽지 밑의 움푹 파인 골, 꼬리뼈와 골반 사이 틈, 발꿈치, 허벅지, 겨드랑이 등에 비슷한 자상이 늘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콸콸콸!
어둠 속 기압은 정상이 아니었다. 온천수가 터지듯 상처에서 피가 솟구쳐 오른다. 그것은 검은 흐름 속으로 녹듯 사라졌다.
“······!”
로이베르트는 형언할 수 없는 악몽에 시달리는 기분이었다. 적의 목적은 대량의 피를 빼앗아 자신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용은 보호 마법을 강화하려 했다.
하지만 어둠 속 포식자는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휘익!
화살과 같은 속도로 검은 안개를 뚫고 나타난 인간.
그의 왼손에 들린 후라이팬이 검은 물결을 가른다. 노리는 곳은 용의 뒤통수였다. 로이베르트는 경악과 의혹이 뒤섞인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
굳이 오리할콘으로 후라이팬을 만들어야 했던 이유란···.
쾅!
후라이팬의 넓은 면으로, 민준이 용의 뒤통수를 후려 깠다.
맞는 입장에서는 전력 타격으로 느껴졌지만 사실은 매우 정교한 힘 조절이 동반되고 있었다.
‘죽이면 안 된다.’
오늘도 불살(不殺)의 다짐을 가슴속에 새기며.
쾅! 쾅! 팅! 쾅!
민준은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하나, 둘, 셋, 넷···. 놈의 상태를 확인하고 횟수를 세며 때린다. 타격 부위는 마뇌(魔腦)가 위치한 바로 그 위였다.
과연, 고룡은 예전에 이 방법으로 기절시킨 어린 용과 달랐다. 안 죽이려고 노력하며 힘을 빼긴 했지만 참 악착같이 버틴다.
민준은 집요하게, 오로지 한 곳만 집중하여 타격했다.
쾅!
“카륵!”
쾅!
“켁!”
쾅!
“콹!”
이마에 흐르는 땀을 그림자로 닦으며, 민준은 투덜거렸다.
‘레이먼드 때처럼 칼로 등을 따서 해결할 수 없으니 품이 많이 드는군.’
그러자 다른 손에 잡힌 후라이팬이 중얼거렸다. 기가 질린 듯.
=저기··· 이번에도 딱히 딴지를 거는 건 아닌데 말입죠. 지성체니 어쩌니 해도··· 결국은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겁니까?=
민준이 대답하지 않고 열심히 두드리는 사이, 결국 여섯 번째 뇌에서 뇌진탕을 일으켰다.
비틀!
휘청이는 드래곤의 몸에 빈틈이 보였다. 마법저항이 사라진 순간, 주변을 둘러싼 그림자가 촉수를 뻗으며 용을 휘감는다. 핏줄처럼 퍼져서 몸을 감고, 목줄기를 타고 올라오더니 주둥이와 이빨 틈을 파고들었다. 그리곤 강제로 입을 벌렸다.
‘안 돼!’
용은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절규한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지만 아주 끔찍한 짓이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고룡답게 매우 정확한 예감이었다.
***
“아, 요원님. 돌아오셨어요?”
“바로 출발하자. 오늘 안에 세 마··· 아니, 세 명 더 해치워야 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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