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7
17. 직장상사를 살해하는 세 가지 방법 (14)
***
강원도 산자락에 위치한 별장 앞에 서울 번호판을 단 택시가 들어섰다. 민준은 장갑을 낀 왼손으로 5만원권 지폐를 잡히는 대로 건넸다.
”거스름돈은 됐습니다.”
기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택시가 비포장 도로를 따라 내려간 뒤에야 민준은 고개를 돌려 출입문을 보았다.
약 1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선명하게 문에 달린 마법 자물쇠를 볼 수 있었다. 마녀협동조합이 재작년 출시한 스테디셀러다.
많이 팔렸다는 것은 기본적인 성능이 보장된다는 뜻이지만···.
‘하이엔드 급이라고는 볼 수 없지.’
하필 저것을 고른 의도엔 이 장소를 별 볼 일 없는 곳으로 봐 줬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숨어있을 터.
아마도 이곳의 소유주, 장태준의 기대였다.
휘잉!
봄은 아직 문턱에 걸려 있다. 산바람은 쌀쌀했다. 민준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 걸었다. 계단을 몇 개 올라간다. 그가 잠금장치에 눈길을 주었다.
철컥!
주인을 맞이하듯, 별장의 정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린다. 민준은 그대로 주머니 속 손을 밖으로 빼지도, 걸음 속도를 늦추지도 않고 일정한 보폭으로 걸었다. 현관을 통과해 내부로 들어서자 문이 조용히 닫혔다.
그렇게 자물쇠를 손쉽게 무력화한 뒤 민준은 안을 살폈다. 인테리어는 별장 주인의 세련된 취향을 표출하고 있었다. 모던하지만 차갑지 않고, 깔끔하지만 휑하지 않다. 적어도 밖으로 드러난 부분은 그러했다.
자, 이제 장태준의 인간으로서의 취향은 잘 봤다. 그렇다면 진짜 보금자리는 어떻게 꾸며 놓았을까?
화륵!
두 눈에 백색 불꽃이 감돈다.
‘흐음.’
그는 실내 동일 좌표에 겹쳐진 영계 풍경을 살폈다. 다른 차원층으로 던진 시선 끝에 형광 형체가 길게 이어지고, 둥글게 불타고, 파도처럼 일렁였다. 민준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퇴적된 마법적 단층을 뒤졌다. 흔적 대부분이 일주일을 넘기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저건 다 소사이어티 놈들이 뒤지고 간 흔적이다.’
한남동 자택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자, 체포된 놈 말고 다른 인원을 보내 이곳도 탈탈 털었던 것이 분명했다.
‘일주일 보다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때부터는 아주 깔끔하군. 이상할 정도로.’
그러니 수색자들은 장태준의 진짜 정체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준은 그들이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을 보려고 한다. 상대의 정체를 짐작한 이상 평소와는 궤가 다른 집중과 힘을 발휘해야 했다. 그의 이마에서는 드물게도 약간의 땀방울까지 흘렀다.
그런 노력을 기울인 끝에 민준은 마침내 찾아냈다.
‘영계의 흔적을 지운 시도가 있었다.’
진흙탕 위에 남겨진 발자국을 다시 반듯하게 메우는 것처럼 영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가능하지만, 그 난이도는 절대 만만치 않다. 하물며 지운 사실을 파악하는 건 더 어렵다. 그런 일을 민준은 해냈다. 애매하게 단절된 흔적을 찾아 다가간다.
비밀 통로로 이어지는 입구는 통념처럼 깊숙한 지하실에 있지도, 침실의 숨겨진 벽 뒤에 있지도 않았다.
민준은 거실 한가운데 당당하게 위치한 벽난로 앞에 섰다. 현관문을 열고 바로 몇 걸음 직진하면 도달하는 위치. 이 별장의 주인은 비밀문을 설치할 때 은밀성보다는 생활 편리성을 중시한 것 같았다. 절대 들킬 리 없다는 자신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간이 애매하게 뒤틀려 있어.’
비유하자면, 현실과 구분이 안 갈 정도의 초고해상도 사진을 난로 앞에 겹쳐 놓은 듯한 풍경. 하지만 눈이 아주 좋은 사람은 사진의 테두리를 보고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민준이 그랬다.
스윽!
조심스럽게, 숨겨진 공간 안에 손을 쑤셔 넣었다. 간단한 손짓 같았지만 몇 겹으로 중첩된 주문이 도포되어 있었다. 손가락 몇 개가 잘린 것처럼 사라졌고, 그는 그대로 각도를 틀어서 문을 열 듯 젖혔다.
쉬익!
허공이 찢어졌다. 소사이어티가 찾지 못한 통로가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산맥의 지저로 연결되며, 따라가다 보면 거대한 생물이 본래 모습대로 휴식을 취하기 충분한 공동(空洞)이 나온다는 걸 민준은 알았다.
그래서 무작정 들어가는 대신 다시 주문을 외웠다. 위장용 별장이든, 진짜 거주지든 비어 있으리라 짐작했지만 만약을 위한 처사였다. 아직 충분히 남은 흑마력은 손가락 위에 작은 먼지 한 톨을 빚었다.
“후우!”
민들레 씨앗처럼 숨결을 타고 둥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먼지가 움직이는 경로에 따라 뇌에 정보가 쏟아지고, 잠시 후 그는 안이 비어 있다는 걸 확신했다.
진입.
각종 트랩과 경계 주문을 피해서 걷는다. 마침내 두 갈래 길을 만났을 때 민준은 지체없이 왼쪽으로 틀었다. 종족 특유의 거주지 양식에 따르면, 집주인이 아니라 그를 위해 사역되는 작은 생물들이 머무는 곳. 장태준 혼자 연구를 진행했다면 지구의 실험장비를 쓰기 편하게 의태 상태에서 했을 것이다.
‘그럼 그렇지.’
그의 짐작은 맞았다. 마침내, 민준은 숨겨진 실험실과 마주했다.
아무런 장치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 그는 힘차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표정을 살짝 굳혔다.
***
‘······이거, 생각보다 규모가 큰데?’
안에는 유리관에 담긴 용액, 시료 보관용 냉동고, 실험장비, 모니터 등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혼자 이 모든 것을 통제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규모.
이곳의 실험은 과학 문명에만 의존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법적 사건의 재조립은 어렵지 않았다. 여기에서는 흔적을 다 지울 수 없을 만큼 마법을 자주 쓴 이유도 있을 것이고, 안전한 장소라고 장담한 까닭도 있을 것이다.
“······!”
잠시 뒤, 민준은 장태준이 이곳에서 어떤 실험을 했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일단, 유리관 속에 있는 것은 대량의 용혈이었다.
‘마법으로 채혈되었고, 보관이 잘 되어 아주 신선한 상태야.’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용혈을 꾸준히, 저렇게 대량으로 수급할 수 있었는가?
답은 간단했다. 장태준은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정체는, 실험에 필요한 용혈을 ‘자체적으로 수급’할 수 있는 종족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저거군.’
시선이 옆의 냉동고 쪽으로 옮겨간다. 그곳에는 장태준이 생산했을 시제품이 보관되어 있다.
김연주의 혈액이 왜 필요했는지, 용혈과 그것 사이의 반응을 장태준이 왜 연구해야 했는지를··· 민준은 이곳에 남겨진 ‘주술’의 흔적으로 알 수 있었다.
용은 전염병에 걸리지 않고, 만독불침지체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상식.
그렇다면 용의 신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물질이 정녕 전무한가?
아니다.
‘드래곤을 유혹하는 ISP 발현자의 혈액!’
외부 화학물질에 일절 영향을 받지 않는 용족은 기이하게도 저 호르몬에는 반응한다. 그런 특성에 주목한 장태준은 두 물질 간 반응을 연구한 끝에, 용족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촉매를 합성하는 것에 성공한 것 같다.
여기까지만 해도 위험한 연구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장태준이 다음으로 착수한 것은, 용의 화학물질 면역체계를 뚫는 그 무기를 다른 무언가와 결합하는 주술적 실험으로 보인다.
미사일 탄두에 ‘사랑의 묘약’ 대신 다른 물질을 집어넣는 시도.
그리고 민준이 보기에는 그 화약이 용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종류일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결국 그가 제조하고자 한 것은, 오로지 용에게만 반응하며 작용하는 폭탄.
거기까지 파악한 뒤 지체없이 전화를 건다.
“네, 요원님, 안녕하십니까? 젠킨슨 회장님 대신 전화 받았습니다.”
본래는 직통으로 연결되어야 할 번호였지만 엘프 비서가 받았다. 전화기를 맡겨 두고 뭔가 중요한 일에 전념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민준은 그가 볼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지금 당장 회장님 바꿔 주십시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난색을 표하는 비서의 음성이 울린다. 하지만 민준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지금 만나고 있는 손님이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왔든, 차원계 끝에서 도약을 해 왔든 상관없습니다. 당장 나와서 이 전화 받아야 할 겁니다.”
엘프가 몇 마디 더 웅얼거렸지만 민준은 다 듣고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말을 끊으며,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회장님과 같은 조상을 둔 불법체류자 이야기라고 언급해 주십시오. 당장 박차고 달려 나올 거니까요.”
이제 수화기 너머에는 말소리 대신 다급하게 뛰어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
장태준의 숨겨진 연구실이 발견된 지 한 시간도 채 지나기 전에 많은 것들이 파악되었고, 정리되었다.
그 결과로 속초의 작은 포구 어귀에 고급의 검은 세단 한 대가 멈춰 섰다. 조수석이 열리고 민준이 나온다. 습한 바다바람이 코 끝에 맴돌았다. 그가 얼굴을 살짝 찡그리는 사이, 등진 운전석의 문도 열렸다.
민준은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를 따라 차에서 내린 것은 금발을 단정하게 자른 남자였다. 외모를 보면 많이 잡아야 10대 후반, 아직 청년이라기 보다는 소년이라는 말이 어울릴 서양인이었다.
둘은 눈길을 교환하지도, 말을 섞지도 않았다. 묵묵히 방파제를 향해 걸었다. 그들 위치에서 보면 바다와 인접한 전방에는 누구도 없었다. 하지만 민준이 계속 걷자 허공이 출렁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보이지 않는 선을 넘었다.
그러자, 밖에서 보이지 않던 풍경이 나타났다.
바다를 향해 낚시대를 드리우고 앉은 중년 남자.
민준이 낮은 목소리로 상대를 불렀다.
“장태준 씨?”
긴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석양을 등으로 받은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에는 무기질에 가까운 빛이 침착되어 있다.
“······.”
잠깐의 침묵 뒤 장태준은 무색에 가까운 어조로 말했다.
“이런, 내가 기다리던 손님이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