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71
172. Hate to Hate (10) >
***
화르르륵!
두둑! 두두둑!
찰랑거리는 어둠이 도테스를 집어삼킨다.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 부서지고 끊어지는 소리가 나다가 이윽고 멈췄다. 그때까지 그녀는 촉수 하나 까닥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부하를 구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으으!
어둠을 헤치고 침입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델의 시선이 관 같은 것 몇 개를 짊어진 삼안(三眼)의 외계인과, 입에 거품을 물기 직전의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 드래곤을 가볍게 스쳤다. 그런 자들에게 신경을 쓸 시간도 없다는 듯 델은 오직 끓어오르는 어둠의 중심을 응시했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그녀를 이 변방 차원까지 오게 만든 진짜 이유가.
기억을 되찾고 그녀가 해 온 모든 일의 동기가 된 자가.
‘이번에는 당신이 내게 왔구나.’
지금까지는 항상 내가 찾아가기만 했는데.
백 년에 가까운 세월을 버티고 한국에서 재회했을 때를 기억한다. 세상 모든 것이 단조로운 무채색으로 덮이고 오직 그만이 총천연색으로 빛나던 그 순간을.
그리고 지금은 당시보다 더 강렬한 대조가 펼쳐져 있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킨,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어둠 속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그가 어둠의 결을 찢고 쪼개는 한 줄기 서광처럼 보였다. 검은 얼룩 한 점 허락하지 않는 선명한 빛.
조영(照影)의 예리한 경계에 선 전남편은 닿으면 살점이 떨어져 나갈 듯한 눈빛이었다. 그 속에서 델은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건져 낸다.
“······.”
목소리를 내기 직전, 어떻게 부를지 고민했다.
카인? 민준?
하지만 상대에겐 그런 망설임이 없는 것 같았다.
건조한 목소리로 그가 말한다. 문장의 형태는 질문이었으나 내용은 선고에 가까웠다.
“넌 전부 알고 있었지?”
짧은 침묵 뒤.
그는 전처를 이렇게 호칭했다.
“엔델리온.”
***
민준은 델이라는 한 명의 개체를 보는 동시에 종(種) 전체를 보고 있었다.
또한 현재 이곳에 웅크린 촉수 괴물을 보는 동시에 먼 옛날 변방 행성의 괴물들을 보고 있기도 했다.
생생하게 떠오른다.
무의미한 학살을 이어 나가던 괴물들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고,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던 실험체들은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포유류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하늘을 쏘아본다.
저 괴물들이 왜 멈췄는가? 저것은 다음 공격을 준비하기 위한 잠깐의 정적인가? 아니면···.
생사의 갈림길에 선 약자들, 실험체의 머리는 매우 바쁘게 회전한다. 기만인가? 저주스러운 촉수가 언제 다시 대지를 후려칠지 모른다. 생존 본능은 긴장을 풀지 말 것을 경고했다.
하지만 그런 포유류들에게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 괴수들의 눈동자는 오로지 위를 향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실험체들도 시선을 따라간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푸른 하늘과 따사로운 빛을 내리는 태양뿐.
“······!”
실험체들은 짐작하지 못했다. 저 괴물들은 그들이 인지하는 범위 밖 세상을 볼 수 있음을. 촉수 생물은 대기권 밖, 광활한 우주를 응시하고 있었다. 경이와 공포가 동공에 스며든다.
훗날 엔델리온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칭할 그들은 그곳, 우주 공간에 부유하는 거대한 존재를 목격했다. 그리고 서로 신호를 바삐 주고받는 중이었다. 이 상황을 해석하기 위해서.
=세상에, 맙소사. 저건 대체 뭐야? 너희도 보고 있어?=
=그래, 보여. 말도 안 돼. 뭐지? 새로 나타난 별인가?=
=아니야. 별은 저렇게 생기지 않았고 저런 식으로 움직이지도 않아.=
=움직여? 살아 있어? 맙소사. 정말 살아 있는 것 같아. 심지어 똑같아. 우리랑 똑같이 움직인다고!=
=똑같지만, 너무 거대해!=
대기권 밖에 나타난 자는 그들을 쏙 빼닮은 어떤 존재였다.
아니, 닮았다는 표현도 부족했다. 몸의 형태나 비율, 색깔,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 완전히 같은 형태로 보였다.
다만 딱 하나 차이점이 있다면 크기다.
‘그’는 너무도 거대했다.
엔델리온은 자연의 섭리와 상식의 보루가 모래탑처럼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종족처럼 그들도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해 왔다. 그 확고한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신들보다 거대한 생명체는 없었다. 부인할 수 없는 진리였고 깨질 수 없는 전제였다.
그것이 오늘 붕괴되었다.
‘그’는 우주 공간에서 모든 것을 초월한 눈빛으로 이 별을 내려다본다. 괴물들은 그 시선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그’의 촉수는 어찌나 굵고 긴지, 행성 몇 개를 통째로 휘감아 구슬처럼 굴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기적적인 구조물이 엉긴 육신은 은하와 은하 사이를 몇 초면 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뜻한 바 무엇이든 행할 수 있을 듯한 저 존재는 그 큰 몸을 드러냈음에도 이 행성에 그늘 한 점 비추지 않고 있었다. 촉수가 태양을 가리는 식(蝕)은 없었다. ‘그’가 이 세상 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했다. 엔델리온은 영혼을 전율시키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들 사이 오가던 신호가 점차 줄어들더니 이내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지금까지 접해 본 적 없는 감정이 차오른다. 먼 훗날 그들은 그걸 경외감, 경건함, 압도감 따위의 단어로 장식할 것이다.
혹은 ‘이해할 수 없는 공포를 숭배해 버리는 감정’이라는 긴 문장을 동원하거나.
“당신은··· 당신은 누구입니까?”
북쪽 대륙의 촉수가 흘린 그것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자신도 확신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목소리가 우주에 몸을 고정시킨 존재에게 닿을지.
그런데, 닿았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여 그 모습으로 왔노라.
정신으로 전달된 음성은 따스하고도 거룩했다. 그들은 훗날 ‘신성한’이라는 형용사를 만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촉수들은 헤엄치다 소행성에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아주 기분 좋은 충격이었다. 여전히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 수 없지만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를 사랑하기에 여기에 오셨다!
“···아!”
초월적인 존재에게 주목받고 사랑받는다는 확신. 촉수들은 그 낯설고도 깊은 감정을 다양한 형태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허공에 펼쳐지는 연체 실뜨기를 보며 ‘그’는 고민한다.
‘일단 이 모습으로 등장한 건 잘 먹힌 것 같고.’
거대 촉수 앞에서 훨씬 더 거대한 촉수로 등장한다는 건 좋은 생각이었다.
외형적 동질성은 한 집단을 묶거나 다른 집단을 배척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문명 수준이 조야할수록 더욱 그러했다.
생김새 때문에 사랑하고, 생김새 때문에 미워한다.
다시 말하면 그 자신도 수준 낮은 짓을 한 거다. 불문율을 깨고 개입한 것은 실험체가 사람을 너무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으니까. 한편 촉수들이 실험체를 죽인 건 너무 다르게 생겼기 때문이었고 말이다.
그는 반성하는 대신 다음 단계를 궁리한다. 저들은 이미 자신을 숭배할 준비를 마친 상태다. 이제는 계시를 내릴 차례.
그는 근엄하게 말했다.
-그 짐승은 해로우니 가까이하지 말라.
첫 번째 계명이었다.
초기 문명에서는 터부(Taboo)가 훌륭한 통제 장치다. 호기심을 끊고 이 행성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터.
그가 그리 말하자 감동에 젖어 있던 촉수가 열의를 뿜으며 말했다.
“해로우니 전부 죽여 없앰이 옳습니까?!”
그는 짜증을 느꼈다.
다시 강조한다.
-가까이하지 말라. 너희 몸에 불결한 피를 묻히지 말지어다.
“우··· 우우우?!”
실험체들은 공격을 멈추고 하늘 높은 곳으로 멀어지는 괴물들을 보았다. 살아남았다는 기쁨에 우는 이들도 있었고 죽어 나간 형제자매들 시신 앞에서 이를 악무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대를 이어 오늘 일을 전승할 것이다. 별의 바다에서 내려온, 촉수 달린 악마들의 이야기를.
포유류들을 뒤로한 채 엔델리온들은 행성 대기권을 벗어났다. 그리고 우주 공간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더 가까이 가려고 애썼지만, 위대한 존재는 접근하는 것과 같은 속도로 멀어졌다. 훗날 ‘신기루’를 의미하는 엔델리온 단어에 ‘신神’이라는 형태소가 포함되는 이유였다. 종족 특성상, 높은 건축물 따위를 세워 연결하는 발상도 불가능했다. 결국 그 거리가 위대한 존재와의 격차임을 깨닫고 그들은 겸손하게 시도를 멈추었다.
닿을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촉수들의 신은 그곳에 실존하지 않았고 보이는 것은 투영된 그림자에 가까웠으므로.
다음 계시를 기다리는 촉수들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규율을 강제했으니 그 보상도 줘야겠지?’
기초적 훈련법이다.
채찍 다음에는 사료를.
종교적 규율은 영원할 수 없다. 신실한 종족이 각종 핑계를 대며 교리와 타협하는 경우를 그는 너무 많이 보아 왔다. 강철 같은 인내를 녹슬게 만드는 가장 뛰어난 비약은 시간이다.
‘계속 내 말을 따를 수 있도록. 어겼다가는 보상을 빼앗긴다는 두려움이 생기도록.’
하지만 저들을 위한 사료를 새로 개발하거나 저기까지 보내는 일은 너무 귀찮고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닿을 수 없는’ 존재의 컨셉과 맞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물질을 보내는 순간 초월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 사이 다리가 놓이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보상은 지금과 같은 목소리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지식을 좀 나눠 주면 되겠군.’
물론, 아주 조금만.
이미 개입한 것만으로도 규칙을 깬 것이다. 감히 그에게 반기를 들지는 못하겠지만, 지나친 일탈은 피하는 것이 좋았다.
그러니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의, 아주 약간의 지식만 전하도록 하자.
‘저 녀석들 ‘도구’에 대한 개념이 형편없지?’
너무도 뛰어난 육신과 능력 때문에 기형적으로 발전한 문명. 필요한 모든 것을 염력 등으로 해결할 수 있기에 오로지 몸에만 집중하는 덫에 빠졌다.
그 빈틈을 본 그는 결정을 내린다.
내가 너희에게 도구를 주겠다. 정확히는 그것을 만들 지혜를 주겠다.
비유하자면 인류에게 처음으로 불 다루는 법을 가르치는 것과 같았다. 절대적 기준으로는 별것 아니지만 상대적 기준으로는 눈부신 혁명.
-너희가 나를 앎에, 내 너희의 지혜가 되리라.
그는 엔델리온에게 지식을 주었고, 엔델리온은 그에 보답하여 그를 섬겼다.
엔델리온은 그를 섬긴 최초의 숭배자였다.
그리고 동시에···.
***
“모를 리가 없어. 네가, 몰랐을 리가 없어.”
현실로 의식을 옮긴 민준은 여전히 양가적인 기운을 담아 목전의 촉수를 노려본다.
저 한 명의 개체에게나, 저 종(種) 전체를 향해서나 그는 항상 단순하게 표현할 수 없는 상반된 감정을 느꼈다.
아마도, 애증이었다.
“······.”
촉수는 수긍하듯 침묵한다. 그런 그녀를 보며 민준은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그는 되뇌었다.
엔델리온.
저 괴물들은 최초로 그를 섬긴 이종(異種)이자.
최초의 배역자들이다.
“수형자 신세를 벗어나서 기억을 되찾은 순간 이미 알았을 거야. 내가 누구인지. 정체가 무엇인지.”
신분이 공주라면 몰랐을 리 없다. 모왕(母王)의 가장 소중한 보물, 그녀의 모든 지혜를 물려받는 후계이므로.
다른 종족을 초월하는 지식은 우주를 항해할 정도의 강인한 육체와 함께 이 종족의 양대 무기였다. 그들이 아주 사소한 제약 하나만 극복했더라면, 드래곤과의 전쟁은 휴전으로 끝나지 않았을 터다.
“그런데도 여태 입을 꾹 다물고 있었어?”
“나는.”
촉수가 변명하듯 말한다.
“나는 그저 당신이 영원토록 행복하기를 바랐을 뿐이야.”
힘겹게 덧붙였다.
“함께했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그 소원은 같아.”
거대 촉수와 요원 사이 심상치 않은 대화가 오가자, 뒤에서 드래곤 하나가 하임리히법 처치를 받는 기도 폐쇄 환자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둘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민준은 계속 델을 향해 다가갔고, 델은 그의 시선을 외면하지도 뒷걸음질 치지도 않았다.
그때였다.
콰쾅!
터미널을 띄운 화면 속에서 다시 한번 대폭발이 일어났다. 눈동자를 돌리지 않고 그 장면을 인지한 델이 말했다.
“저렇게 터미널을 엉망으로 만들면 당신이 도망칠 길이 사라지는 거야. 뉴욕 말고 다른 곳은 전부 기능이 봉인되었어. 저기가 유일한 출구라고.”
지금이라도 돕겠다는 투로 들렸다. 하지만 민준은 여전히 독기를 품고 다가왔다. 델은 그 표정에서 폭력적인 충동을 읽어 냈다.
예견된 결과였을까?
부부의 연이 끊겼을 때 싸움은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비난을 쏟아 내는 민준을 델이 외면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제대로 끝을 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기에 델은 이 순간 예감했다. 백 년이 넘게 유예해 온 그 싸움의 끝을 지금 봐야 할 수도 있겠다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이대로 민준의 손에 죽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죽일 수도 없었다.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싸울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번에는, 싸움이 아니라 전투나 전쟁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각오를 한 델에게 예상 못 한 문장이 툭 던져졌다.
“필요 없어. 애초에 저기서 도약선을 타고 도망칠 생각은 없었으니까.”
델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단 대화를 이어 나가는 건 좋은 신호다.
‘싸우러 온 게 아닌가? 날 죽이러 온 게 아니야?’
가까스로 긴장을 조금 늦추며, 촉수는 전남편에게 묻는다.
“도망을 포기한 거야? 하지만 지구에 머문다고 뾰족한 수가 없잖아.”
“떠나는 건 맞아. 하지만 다른 걸 타고 갈 거야.”
“무슨 말이야? 뭘 탈 건데?”
민준은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델은 초조함을 느꼈다. 시간이 없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이면 도와줄게. 하지만, 당신 계획을 모르는 이상 나도 촉수 쓸 방법이···.”
그때였다. 그녀의 머릿속에 한 줄기의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믿을 수 없었다. 가능하다고 여겨 본 적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도한 적도 없었고.
그 순간에도 민준은 묵묵하고도 무거운 시선으로 델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긋이, 정통으로 꽂아 내리는 눈빛.
민준의 침묵은 답을 주기 싫다는 거절의 표시가 아니었다. 침묵과 함께 쏟아진 눈빛이, 델이 건넨 질문의 답이었다.
무얼 타고 갈 것인가?
델의 동공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수십 년 함께 산 남자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이다. 상식과 상이한 내용임에도 의심할 수 없었다.
전처는 묻는다.
“······나?”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