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0
20. 직장상사를 살해하는 세 가지 방법 (17)
***
속초시 사건으로부터 며칠 뒤, 민준은 창천은행 본점에서 일을 마치고 나왔다.
그는 바로 택시를 잡으려다 말고 멈춘다. 생각이 갑자기 닿은 듯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마침 가까운 곳에 꽃집이 있었다.
“어서오세요.”
발성 기관을 제거한 만드라고라 화분과, 모기박멸용 산성초 바구니를 지나 민준은 평범한 화분 앞에 멈춰 섰다. 들고 가기 적당한 크기에 잎이 많이 달려 딱 엘프 취향이었다.
“이건 뭡니까?”
“금전수에요. 이파리가 동전처럼 생겨서 돈나무라고도 하고요. 새로 개업한 가게에 많이 선물들 하세요.”
“딱 좋네. 이거 하나 주세요.”
식물 이름 유래 같은 것에는 관심 없지만, 가게에 가져다 놓을 것이니 좋은 핑계거리가 될 것이다.
주인이 화분을 포장하는 사이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 지난주 속초시 해안가에서 발생한 국지성 폭풍우에 대한 정부의 공식입장은 변함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단순한 자연현상이었다는 겁니다. 속초시에 거주하는 몇몇 이능력자 시민들의 신고가 접수된 것은 사실이나, 이런 종류의 폭풍은 마법적 현상과 혼동될 여지가 많다는 설명을 덧붙이며···.
귀를 기울이던 꽃집 주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참, 나. 저걸 누가 믿어? 손님도 저거 찍은 영상 봤어요? 유튜브에 쫙 깔렸던데.”
“아··· 뭐. 네.”
민준은 건성으로 답했다. 주인은 바쁘게 손을 놀리며 말을 잇는다.
“평범한 자연 현상?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사람들 모이면 다 뭐라는 줄 알아요? 정부가 저렇게 철저하게 숨기는 걸 보면 큰일이 나긴 난 거라고 난리에요. 물론 방송이나 인터넷 같은 데에서는 이런 말 못하죠. 괜히 음모론 퍼뜨리고 다닌다고 정부에 찍혀서 연금이라도 깎이면···.”
말꼬리를 흐린다. 성토를 하다가 아차 싶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민준의 옷차림을 살폈다. 정부 쪽 일을 하는 사람 같지는 않았는지 말을 마무리지었다.
“아무튼, 요지경 같은 세상이야. 어떻게 저런 사건이 이대로 묻힐 수가 있는지.”
민준은 화분을 받으며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꽃집을 나와서 바로 택시를 탔다. 행선지를 말한 뒤 잠시 생각에 잠긴다.
‘역시, 그 결계로도 역부족이었군.’
민준과 엘더 드래곤, 그리고 엘더에 비견되는 용이 한시간 넘게 펼친 치열한 전투의 여파는 완벽하게 숨길 수 없는 규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진상은 철저하게 은폐되었다. 젠킨슨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다. 아직까지는 떠들썩해도 며칠 안에 관련 뉴스는 미디어에서 종적을 감출 것이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듯이.
그것이, 이 아슬아슬한 사회가 아직까지 유지되는 원동력 중 하나였다.
‘장태준은 이런 세상이 비정상이라고 믿은 걸까?’
생각의 흐름이 자연스레 이어졌다. 그 몽상가의 의도가 무엇이었을지 추측한다.
‘그렇지만, 혹여 용을 전멸시킨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이 달라질까? 예를 들어, 그 빈자리를 인간이 차지하고 그들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가 온다 해도 말이야.’
결국은 망상에 가까운 위험한 생각일 뿐이었다.
민준은 마지막 순간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속초 포구를 긁듯이 때리던 비바람이 점차 약해진다.
장태준의 생명력이 피워낸 불꽃 역시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다른 생물로 치면 이미 혼수상태에 빠질 부상이라는 걸 민준은 알았다. 더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응급실에 실려와, 그저 숨이 끊어지기만 기다리는 상황.
하지만 용의 신체는 그가 이런 순간에도 의식을 유지하고 정상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민준은 장태준의 두개골 속 여섯 개의 뇌 중 적어도 세 개 이상이 이미 기능을 정지했으리라 추측했다.
용은 민준에게만 들리는 정신파를 흘린다. 둘의 대화는 생각의 속도에 가깝게 진행되었다. 젠킨슨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나는, 원래 내일 이 세계를 떠날 예정이었다.=
단 하루의 차이 때문에 그의 도주는 실패했고 목숨까지 잃게 된 것이다. 하지만 텔레파시에 원망은 배어 나오지 않는다.
=그 호문쿨루스가 평범한 이에게 발견되었다면 내 유언 대로 화장되었을 거다. 아무리 빨라도 내가 떠나고 일주일 쯤 뒤에 그리 되었겠지.=
검시를 마친 시신이 법무대리인에게 인도되고, 제대로 3일장까지 치르는 스케쥴을 고려하여 계산한 것이었다.
‘그렇군.’
이제 민준은 호문쿨루스를 발견했을 때 품은 두가지 의문 중 하나의 답을 얻었다. 어째서 실종되고 일주일을 기다린 뒤에 가짜 시신을 매달았는가? 사체의 부패 상태를 보면 텀이 분명 존재했다.
‘미리 짠 계획이 아니어서, 제작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또 하나의 의도가 있었군. 화장이 꼭 당신이 떠난 후에 치러져야 할 이유가 있다면.’
민준은 표정 관리를 했다. 찰나의 순간 오가는 의미의 파편들.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며 답을 추론한다.
‘시신에··· 장난을 쳐 놨군.’
돌아오는 정신파에는 약간의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약간, 심술을 부려 보았지.=
죽어가면서도, 그는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연구 중에 변이체가 나타났다. 용족에게만 전염되는 특징은 변함없지만, 감염증상이 뒤죽박죽으로 발현되는 바이러스.=
그는 사실 민준과 이민국의 예측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던 모양이다.
=성공으로 치부하기엔 애매했어. 내가 원한 건 어떤 환경에서도 100% 치사성을 보이는 바이러스였는데··· 그 변이체가 일으키는 증상은 복불복이었거든. 어떤 실험에서는 미약한 반응으로 끝났고, 어떤 실험에서는 몇 초 만에 검체의 DNA를 파괴했다. 가장 강력하게 반응할 때는 100시버트 이상의 방사능에 노출된 것과 같은 효과를 보였지.=
텔레파시를 쥐어짜는 그의 정신이 점차 붕괴되고 있었다. 집중력을 발휘하며, 용은 마지막까지 숨겼던 악의를 고백한다.
=사례가 뒤죽박죽이라 표본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적당한 수의 개체가 사는 이곳에 이걸 한 번 뿌려보면 어떨까 싶었어.=
여차하면 실패해도 상관 없다는 투였다.
조용한 웃음에 가까운 울림.
=그래서 난 그 변이 바이러스에 마법적 특성을 하나 심어 두었다. 500도 이상의 고열과 접촉할 때 동면에서 깨어나 활동을 시작하도록.=
일반적인 바이러스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온도다. 하지만 교묘하게 숨겨진 마법이 생존을 가능케했다.
호문쿨루스는 그것을 숨길 최적의 매체였다. 경찰에서 검시를 했어도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결국은 시신을 연고자에게 인도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종국에는 고인의 유지에 따라 화장되고, 시신을 태운 연기에 섞여서 바이러스는 멀리 퍼져 나갔을 터. 그것이 장태준의 계획이었다.
민준은 묻는다.
‘왜 내게 이런 것을 말하는 거지?’
=글쎄, 이유는 너도 짐작할 텐데. 수형자.=
‘······.’
=자, 이제 나는 모든 것을 말했다. 이걸 가지고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오롯이 너의 몫이다.=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이 모든 대화가 찰나에 마무리되었고, 민준은 장태준의 거대한 동공이 서서히 빛을 잃어가는 것을 보았다.
동족을 혐오한 몽상가의 죽음이었다.
“······끝났군.”
젠킨슨이 조용히, 고인에 대한 용족의 예를 표한다.
둘 사이 침묵이 감돌던 몇 초는 민준이 선택을 내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호문쿨루스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
“젠킨슨.”
민준의 결단은 빨랐다.
***
고블린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아··· 주인님!”
빗질을 하던 동철이 환한 얼굴로 민준을 반긴다.
“이제 몸은 좀 괜찮아?”
“괜찮··· 아요. 헤헤.”
서점에 난입한 드래곤의 마수를 피하여 레이크필드를 안전하게 대피시킨 그날 이후 동철은 꼬박 사흘을 앓아 누웠다.
유전자에 내포된 용에 대한 공포를 의지로 이겨냈다지만, 몸에는 그 필사적 저항이 독과 피로로 남았던 것이다.
“다 나았으면, 오늘 장사 끝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고블린의 두 눈에서 환희와 열기가 터져 나왔다.
신이 나서 두 배의 속도로 빗자루를 놀리며 사방에 먼지를 뿌리는 그를 뒤로 하고 민준은 서점 안으로 들어섰다.
“저 왔습니다. 이건 선물이에요.”
두꺼운 서적에 고정되어 있던 엘프의 시선이 움직인다. 그는 민준이 손에 든 금전수 화분을 보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번에는 말려 죽일 시간적 여유가 없었나 보지?”
민준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그것을 선인장 화분 옆에 두었다. 그리고 서점 주인과 마주 보며 앉는다.
“몸은요?”
“난 원래 멀쩡했다네. 동철이가 욕봤지.”
노령과 쇠약해진 신체에도 불구하고 이 엘프의 정신은 강철처럼 굳건하기만 했다. 두 사람 다 걱정하는 것은 오히려 동철 쪽이었다. 민준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트라우마로 남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요즘 핸드폰으로 계속 용족과 관련된 영상을 검색해서 보더군.”
“······그래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나저나, 자네 왜 내게는 말을 안 했나?”
엘프가 미뤄왔던 질문을 한다. 시선은 나란히 놓은 두 화분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준은 그동안 이 서점을 결계로 지켜왔던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걸 레이크 필드에게 알리지 않은 이유도 입에 담지 않았다. 그저, 빙그레 웃었다.
늙은 엘프는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그의 능청스러운 얼굴을 보았다. 그렇게 몇 초,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엘프 쪽이었다. 그는 요즘 세상 흘러가는 이야기를 했고 민준도 시답잖은 농담으로 받아쳤다. 그렇게 몇 분 이야기를 나누다가 민준이 먼저 일어났다. ‘본사’에 제출할 보고서가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자 레이크필드는 보고 있던 두꺼운 책을 내밀었다. 예의 그 드워프 작가 신간이었다. 그는 이미 완독했다며, 관심이 있으면 빌려 가라고 권유했다. 민준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
우우웅! 우우우웅!
사무실에 들어서자 그를 반긴 것은 창고에서 흘러나오는 공명음이었다.
이상성욕을 지닌 에고 후라이팬은 아직까지도 이곳에 있다.
장태준의 정체가 밝혀지고 나서 그의 유언장은 법적 효력을 잃었고 모든 재산은 국가에 귀속되었다. 그렇기에 본래는 저것도 이민국에 넘겨야 했지만 젠킨슨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뜻을 비서를 통해 전달했다.
알고 보니, 저 모델은 인격을 복사당한 트롤 명쉐프가 제조사를 고소해서 이미 생산과 판매가 중지된 물건이라고 한다. 사유는 사전 협의가 안 된 그의 ‘은밀한 부분’까지 복사하여 전 차원계에 취향을 아웃팅 당했다는 것. 충분히 이해가 되는 동기였다.
그 때문에 법적인 문제가 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이민국이 임의로 처분하기에 부담이 되는 모양이었다.
우웅! 우우우웅!
자기한테 말을 걸어 달라는 시위를 무시했다.
‘이제 완전히 기운을 차린 모양이지?’
후라이팬에게 장태준의 죽음을 전달했을 때, 인공인격이 보인 반응은 ‘아, 그렇습니까?’라는 짧은 대답뿐이었다. 하지만 그날 하루 종일 후라이팬은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으며 몸을 울려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그것이 그 나름대로 옛 주인을 추모하는 방식인 것 같았다.
삑!
구석에 놓인 컴퓨터 전원을 켠다. 모니터와 본체, 키보드까지 모두 일체형으로 제작된 구형 기계였다. 타자를 두드리자 까만 화면에 하얀색 글자가 채워졌다. 그는 오늘 파악한 내용까지 종합하여 최종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 사망한 불법체류자의 재산은 지구차원 한국정부 이민국에서 압수했으며, 유언장 내용 중 공범의 정체를 추측할 단서는 없는 것으로 사료됨.
그는 오전에 이민국 행정요원과 함께 창천은행 본점 VIP 금고를 방문했다. 목적은 장태준의 유언장 열람. 외계인으로 입증된 이상 행정집행은 당연한 일이었다.
민준은 내용 중에 그의 밀입국을 도운 자들을 특정할 단서를 살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기대한 것은 찾을 수 없었고, 대신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유언장 요약: 장태준이 보유했던 효성실업의 주식(시가 2천억원가량)은 전량 사회복지재단에 기부 희망. 해당 재단이 외계인이나 특정 범죄집단에 연루된 혐의는 없는 것으로 확인 완료.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다음 문장을 타이핑한다.
– 그 밖에 보유하고 있던 예금, 유가증권, 미술품, 귀금속, 특허권, 거주하던 집을 포함한 부동산 등 재산 일체(시가 8천억가량)의 상속자는 사망 직전까지 관계를 유지한 인간 여성으로 지정하였음.
김연주는 장태준이 재산 대부분을 효성실업 주식으로 보유했다고 짐작했지만 사실은 전혀 달랐다.
주식은 어디까지나 일부일 뿐이었고, 그나마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사라지기 전 기부의 형태로 처분하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주식을 뺀 진짜배기는 모두 김연주에게 상속하는 것이 유언장의 요지였다.
‘호문쿨루스를 집에서 발견되게 두는 대신 굳이 먼 야산에 매단 이유도··· 그 집 역시 김연주에게 갈 유산이기 때문이었나?’
장태준이 좀 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사라졌다면, 그래서 민준이 이 케이스를 맡지 않았다면 그는 인간으로서 사망했을 것이고 유언장대로 모든 것이 집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다 의미 없는 가정이 되었다.
민준은 그 뒤로도 집중하여 몇 줄의 문장을 더 적었다.
‘여기가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자신의 공적을 명확하고 깔끔한 언어로 나열하는 것.
젠킨슨이 개인적으로 약조한 대가는 이미 수령했다. 이 보고서는 그것보다 훨씬 간절한, 다른 종류의 보상을 위한 절차였다. 지명수배범을 잡았을 때는 약식으로 보고해도 되지만 이런 특별한 경우에는 실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광을 좀 팔아야 한다.
그리고 민준은 800년의 직장(수형)생활 짬밥으로 광이라면 누구 보다도 잘 팔 수 있었다.
‘전송!’
엔터를 누르자 화면이 반짝인다. 이 컴퓨터에는 랜선은 커녕 전화선도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영계를 경유한 통신망을 써서 먼 차원으로 데이터를 전송한다. 민준은 이제 느긋하게 위원회가 얼마의 달란트를 책정할 것인지 기다리면 되었다.
어쩌면, ISP의 원리를 규명하라는 5만 달란트짜리 의뢰에 대한 기여도까지 인정받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민국은 레어에서 압수한 시료 일부를 위원회와 공유할 계획이라고 하니까.
페로몬 연구 같은 전문 영역은 어차피 손댈 수 없는 영역이었는데, 이렇게 숟가락을 얹을 수 있다면 대만족이다.
‘자, 그럼···.’
시계를 본다. 상록수 서점의 영업 종료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시간도 때울 겸, 캐시가 사무실에 새로 가져다 놓은 스카치를 딴다. 온더록 잔 바닥만 적실 정도로 따른 뒤 입에 머금었다.
“······.”
광물과 곡류를 섞어 녹인 듯한 향을 입 안에 굴리며 잠시 앉아 있다가.
문득 떠올렸는지 서랍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서 작은 앰플 하나를 꺼낸다. 마법 용기 안에는 검붉은 피가 찰랑이고 있었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용족에게만 반응하는 바이러스라.’
속초에서 장태준이 죽음을 맞이한 순간, 민준은 호문쿨루스를 어떻게 처분할지 결정을 내렸다.
그는 수사 중 확보한 증거품이라며 사체를 통째로 이민국에게 넘겼다. 원본의 사망을 확인했으니 계속 가지고 있을 핑계거리가 사라졌으니까. 즉시보고를 놓쳤다는 이민국의 질책 역시 없었다. 원래 계약요원이 일하는 방식이 그랬다.
단, 그가 증거품의 모든 부분을 100그램의 오차도 없이 제출한 것은 아니었다.
‘열을 가하면 동면에서 깨어난다고?’
그가 쥐고 있는 것은 호문쿨루스로부터 채취한 혈액이었다.
젠킨슨에게 장태준과 나눈 대화는 언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민국에서 그걸 대뜸 태워버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험한 테러리스트가 남긴 물건이니만큼 정밀검사를 진행할 것이다. 아마 높은 확률로 그 비밀 역시 알아낼 터.
다만, 그들은 끝까지 모를 것이다. 민준 역시 그 바이러스를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 의심을 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날 건드리지 못한다.’
그는 앰플을 다시 서랍 깊숙한 곳에 집어넣고 봉인했다.
이것을 따로 챙겨둔 것은 충동적 행동에 가까웠다. 갑자기 ‘예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 간 것이다. 호문쿨루스를 이민국에게 넘기기 전에 자신이 그걸 건드리면 ‘안 될 것 같다’고.
그래서 민준은 이번에는 자신의 예감과 반대로 행동해 보기로 했다. 800년의 경험이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의 예감은, 언제나 지독하게도 맞지 않는 편이었다.
민준은 마지막 한 모금을 넘기며, 저 바이러스를 앞으로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빈 잔을 책상위에 올려 놓았을 때, 그는 드래곤의 방식으로 인간을 사랑하려고 한 어리석은 몽상가를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