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10
211. 마음의 발명(The Invention of Heart) (8)
***
어린 티를 다 못 벗은 드래곤이 격분하여 외친다.
“이런 젠장! 쪼개져! 쪼개지라고!”
고함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충돌음이 레어 안에 울렸다.
쾅! 쾅! 쾅!
카이엔이 소환한 빛의 검날은 보석 위에 연신 부딪쳤고 그때마다 신경이 곤두서는 소음이 반복되었다.
아시스파엘은 바로 곁에서 몇십 분째 계속되는 그의 분전고투를 복잡한 감정으로 보고 있었다.
카이엔은 주문을 외울 때만 해도 깔끔하고도 정확하게 양분된 드래곤 하트를 보게 되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대체 얼마나 단단한 거야, 젠장!”
카이엔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일그러졌다. 연인 앞에서 부끄러운 꼴을 보였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자존심 빼면 비늘 붙은 거죽이나 마찬가지인 어린 용 입장에서 이 상황은 악몽 같았다.
잠자코 있던 아시스파엘이 드디어 목소리를 얹었다.
“저, 카이엔.”
“······.”
“이제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잠깐의 침묵 후.
“제기랄!”
욕설을 뱉으며 카이엔은 빛의 칼날을 지워 버렸다.
사실 그에게 마나가 거의 남지 않은 걸 아시스파엘은 짐작하고 있었다. 일부러 타이밍을 맞춰 슬쩍 권유한 것이다. 카이엔은 힘이 부쳐서가 아니라 그녀가 그렇게 요청했기 때문에 멈추는 듯 연기하며 물러났다. 얼굴은 여전히 격노한 채였다.
그는 연인을 의식한 듯 더 극적으로 화를 냈다.
“별, 지랄 같은 물건이 다 있군!”
둘 다 이런 역경은 예상하지 못했다.
드래곤 하트가 상속되는 장면을 목격한 바도 없고, 이런 고농축된 결정을 다뤄 본 경험 역시 있을 턱 없는 드래곤 둘이 머리를 맞댄 결과다.
아시스파엘은 보석 표면을 본다. 지금까지 카이엔이 악전고투했음에도 거기엔 생채기 하나 없었다. 실금 같은 균열이나 손실도 없이 처음 가져왔을 때처럼 깨끗하다.
그냥 고룡도 아니고 우주에서 손에 꼽히던 드래곤의 유산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덕분에 대신 금이 간 것은 카이엔의 자존심이었다. 그녀는 연인 앞에서 네가 못 하니 나라도 해 보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역효과가 뻔하니까.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힘으로는 역부족일 것 같아.”
카이엔은 침묵으로 긍정한다.
이건 큰 문제였다. 그들 힘으로 표면을 부술 수 없다면 내용물을 그들이 흡수할 수도 없다.
혹시나 숨겨진 결계가 있나 싶어 팔목의 아티팩트를 가져다대 봤지만 어떤 반응도 없었다.
그때, 카이엔이 중얼거렸다.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아시스파엘의 얼굴이 확 굳었다.
“뭐?”
“드래곤 하트를 이대로 가지고 지구를 탈출한 다음, 그들에게….’
“네 조력자들에게 이걸 쪼개 달라는 부탁까지 한다고? 그들 손에 잠깐이라도 넘기는 건 안 될 말이야, 카이엔.”
마음에 걸렸음에도 여태 말하지 않은 부분을 언급한다.
“내 생각에, 밀항하기 직전 우리는 드래곤 하트를 미리 흡수해 놓아야 해. 그들과 접촉하기 직전에 말이야. 안전을 위해서.”
카이엔이 투덜거렸다. 그는 여태 로드 말고 다른 이의 장례식에 참관해 본적 없지만, 듣기로 드래곤 하트의 분배 작업은 고룡들이 맡는다고 했다.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노인네들은 이걸 대체 어떻게 쪼개는 거지?”
“우리가 모르는 주문이 있겠지. 그들에겐 경험이 많을 테니까.”
“젠장, 왜 그런 걸 우리들한테는 가르쳐 주지 않는 거야?!”
부와 지식을 독점하는 고룡들 행태에 카이엔은 분노를 토한다.
그렇다고 이걸 고룡에게 들고 갈 수도 없는 일.
“······!”
고민하던 그는 순간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자신의 팔목에 걸린 금속 물체를 응시했다.
카이엔은 고대 종족의 결계를 무효화하는 주문 같은 건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아티팩트 덕분에 심장을 훔칠 수 있었다.
“···그래. 주문을 모르고 가르쳐 줄 사람도 없다면, 도구를 쓰면 될 일이지.”
“아티팩트 말이야?”
“드래곤 하트도 반으로 갈라 버릴 수 있는 무기. 기왕이면 공간째 균열을 만드는 종류가 좋겠어. 검을 쓰는 종족이 가끔 그런 걸 만들어 내잖아.”
“하지만 내가 가진 것 중 그런 비싼 물건은 없는데···.”
그들 또래 드래곤이 스스로 쟁취하거나 제작할 만한 보물은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에게 물려받는 것은 가능하다.
“생전에 로드는 고대 종족의 것을 포함해서, 각종 신비한 아티팩트를 사 모으는 취미로 유명했지. 그의 유산 중 그런 종류가 있을지도 몰라!”
드래곤 하트를 제외한 로드의 나머지 재산, 예를 들어 금융 자산이나 부동산, 아티팩트 등은 이미 자식들에게 상속이 거의 마무리된 상태다.
하지만 카이엔이 받은 아티팩트 중에는 원하는 물건이 없었다. 그는 허공에 손짓하여 용의 몸집에 맞춘 거대한 문서를 꺼냈다.
“로드의 유산 목록이야.”
고룡들 중개하에 누가 무엇을 상속받았는지 모두 기록된 리스트였다.
아시스파엘과 카이엔은 그것을 집요한 시선으로 뒤졌고, 시간을 들인 탐색 끝에 기어코 찾아냈다. 드래곤 하트마저 잘라 낼 진귀한 공간간섭 아티팩트를 누가 상속받았는지.
상속자의 이름을 확인한 카이엔의 얼굴에는 상반된 두 감정이 동시에 일렁였다.
불안과 안도.
복잡한 표정을 띄운 그의 입이 열린다.
“···켄티우스!”
***
드래곤 로드의 첫째, 삼색룡(三色龍) 켄티우스는 본래 또래 사이에서 우두머리 같은 역할을 하던 자다.
그런 그가 최근 들어 이상한 낌새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체 뭐에 꽂혔는지 모르겠는데, 하루 종일 레어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를 않는단 말이지.’
켄티우스의 그런 급격한 변화는 카이엔에게 이득을 주었다..
카이엔은 지금도 자문한다. 켄티우스가 갑자기 은둔형 드래곤으로 전향하지 않았다면, 과연 조력자들이 자신을 골랐을까?
켄티우스가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카이엔 대신 그에게 선거를 지연시키는 역할을 맡겼을지도 모른다. 한때 그는 또래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니까. 그럼 드래곤 하트는 켄티우스에게 넘어갔을 터다. 그렇게 되지 않아 다행이었다.
“켄티우스, 문 열어!”
다음 날. 카이엔과 아시스파엘은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켄티우스의 레어 앞에 와 있었다.
그들 능력으로는 이런 먼 거리를 텔레포트로 건너뛸 수 없기에, 바로 퍼스트 클래스 티켓을 사서 날아온 것이다.
비행 중에도 카이엔은 통신 마법을 통해 켄티우스에게 집요하게 면담을 요청했지만, 상대는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는 반응을 보였다.
씹었다는 뜻이다.
“켄티우스! 나야, 카이엔이라고! 거기 안에 있는 거 아니까 대답해. 정말 우리 사이에 이럴 거야? 우린 형제들 중에 가장 사이가 좋았잖아!”
마지막 말은 사실이기도 했고, 사실이 아니기도 했다.
두 드래곤은 표면적으로는 긴 시간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서로 지닌 힘이 비슷했기에 싸우면 둘 다 크게 다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래곤의 특성상 누구 하나가 약점을 보이면 바로 목덜미를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둘 다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형제라도 예외는 없다.
카이엔이 입구에서 한참 난동을 부리자, 그제서야 레어 안에서 느릿한 대답이 돌아왔다.
=···난 지금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카이엔, 돌아가. 게다가 난 지금 선약이 있어.=
카이엔은 콧방귀를 뀌었다. 말의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도 만나기 싫다면서, 선약은 왜 잡아 놨는가?
“이러지 말고 문 좀 열어. 잠깐이면 돼!”
실랑이는 한참 이어졌다.
카이엔이 물러날 기미 없이 집요하게 굴자, 켄티우스는 결국 포기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거래를 요청하러 왔어. 형도 절대 손해 볼 딜은 아니야!”
한숨 같은 정신파가 울려 퍼진 후 레어 입구가 열렸다.
통로를 따라 들어간 연인은 소문보다도 훨씬 큰 레어의 규모에 놀랐다. 그리고 내부에 가득 찬 어두침침하고 우울한 기운에도.
‘왜 마법 조명은 다 꺼 놨어?’
그렇게 나아가던 두 사람은 켄티우스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이채로운 비늘 색은 눈에 띄었다. 금색, 적갈색, 붉은색으로 반짝이는 용린이 구역을 나눠 몸 위를 장식하고 있었다. 세 종류의 퇴적층이 조화를 이뤄 겹친 듯한 모습.
축축하고도 어두운 목소리가 울렸다.
“···대체 무슨 거래를 하자는 거야?”
“자세한 건 묻지 말고 아티팩트 하나만 빌려줘. 대가는 치를 테니.”
설명을 들은 켄티우스는 침묵을 지켰다. 그 눈빛을 본 카이엔은 상황애 급함에도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복 형의 두 눈에는 지독한 절망과 무기력이 서려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당당하고 오만하며 너무 뻗대서 재수 없던 드래곤의 모습이 아니었다.
켄티우스가 중얼거렸다.
“···내가 상속받은 물건 중에 그런 게 있었나?”
“······?!”
카이엔은 입을 쩍 벌리고 싶은 걸 참았다.
재산이 흘러넘치는 고룡이면 몰라도 켄티우스가 할 말은 아니었다.
드래곤 로드의 유산은 젊은 용이 재산을 증식시킬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이다. 하나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눈에 핏발을 세운 채 형제들과 다투고, 자신이 차지한 유산은 또렷하게 기억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지금 켄티우스의 말은 더 이상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자의 중얼거림으로 들렸다.
“왜 빌려 달라는 거지?”
카이엔이 이유는 묻지 말라고 재차 말하려던 차에, 켄티우스가 먼저 웅얼거렸다.
“아니,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카이엔은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왜 저 지경이 된 거지?’
어쨌든 잘 하면 넘어올 것도 같다.
“잠깐이면 돼. 빌려줄 거지? 담보도 준비했다.”
카이엔의 자산 대부분은 동결되어 있기에, 담보는 아시스파엘이 준비했다.
“······.”
켄티우스는 바로 답하는 대신 침묵했다.
카이엔은 초조함을 느꼈다. 재물에 연연하지 않는 듯한 말투더니 빌려주는 건 아깝다는 건가? 아니면 돌려받지 못할까 무섭나?
그때 이복 형의 입이 열렸다. 사실 그는 지금까지 카이엔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주의를 돌리고 있던 참이었다.
“···손님이 오셨군.”
저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
“뭐라고?”
“내가 말했잖아. 선약이 있다고. 그리고 너··· 지금이라도 빨리 사라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헛소리 좀 그만해. 그런다고 내가 포기할 것 같아?”
“내 말 듣는 게 좋을걸. 그 엘프 비서 말이 진짜라면··· 지금 그가 여기 오는 이유는 아마, 카이엔 네가 한 짓의 수습을 나더러 도와 달라고···.”
그 순간 그들이 있던 레어의 허공에 환한 빛이 번쩍였다.
카이엔과 아시스파엘의 두 눈이 커졌다. 레어 내부로 직접 이어지는 텔레포트의 전조를 그들은 보고 있었다. 입구를 거칠 필요도 없게, 켄티우스가 상대에게 좌표를 공개하고 공간 이동을 허락했다는 뜻이었다.
형제에게도 공유를 거부했던 그가 말이다.
‘설마 진짜 선약이 있었다고?!’
대룡(對龍) 관계를 모두 끊고 은둔한다더니, 다른 드래곤은 잘도 만나고 다닌 건가?
팟!
섬광이 크게 번뜩이고 사라진 순간.
카이엔은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
그들 앞에 텔레포트로 나타난 또 한 명의 드래곤.
그를 본 순간 카이엔은 머릿속 퍼즐이 불쾌하게 조립되는 것을 느꼈다.
‘아무도 만나기 싫은데··· 선약은 만든 이유가!’
켄티우스 입장에서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약속이었던 것이다.
그를 귀찮게 한 카이엔과는 다른 의미로.
“…….”
카이엔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방문객이 목소리를 울렸다.
“흠?”
고룡 특유의 묵직한 음성이 실내에 울린다.
그의 차분한 시선이 세 명의 어린 드래곤에게 차례로 닿더니 켄티우스 앞에서 멈췄다.
방문객이 말했다.
“면담 요청을 받아 줘서 고맙네, 켄티우스.”
“···천만에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기력하게 대꾸하는 켄티우스와 인사를 나눈 뒤, 고룡의 시선은 곁의 형제 쪽으로 이동했다.
그 순간 카이엔은 간절하게 바랐다.
제발 지금 느끼는 감정이 얼굴과 몸으로 표출되지 않기를!
“그리고.”
매우 흥미롭다는 표정을 담아, 고룡은 카이엔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차라리 잘되었군. 어쩌면 켄티우스보다 자네와 이야기하는 게 빠를지도 모르겠어. 생각해 보면 애초에 그와 만나기로 한 이유를, 자네가 제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어린 드래곤들을 선동하여, 로드 선거에 큰 잡음을 만드는 원흉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고룡은 여유로운 어조로 인사를 건넨다.
“이렇게 만나서 반갑네, 카이엔.”
피가 식는 기분을 느끼며, 카이엔은 간신히 대답했다. 차마 반갑다는 말은 하지 못한 채.
“···저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젠킨슨.”
한국을 영지로 둔 고룡은, 자신의 계획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 괘씸한 어린 용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