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18
219. 마음의 발명(The Invention of Heart) (16)
***
쿵-! 쿵-! 쿵-! 쿵-!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젠킨슨은 여전히 로드의 기억 속에 갇혀 있다. 피부를 감싼 난백은 따스했고 심장 고동은 쉴 새 없이 울렸다. 온기와 소리의 감옥 속에서 보내는 나날.
고룡 입장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지옥이다.
그는 지금 미칠 것 같았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설마 바깥 세상 시간도 같은 속도로 흐르고 있을까? 젠킨슨이 여기서 보내는 하루가 현실의 하루와 일치한다면?
상상만해도 두려운 가정이었다.
지구에서 가장 바쁜 드래곤이던 그가 그토록 바라던 휴식임에도 반길 수 없었다. 당연했다. 이건 휴가라기보다 감금에 가까웠으므로.
‘내 주관적 시간과 현실 시간이 일치한다면 이미 선거가 끝났을 거다!’
처음과 달리 그는 이제 기억 속 시간의 흐름을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다.
알 속에서 전신으로 느끼는 소리 중에는 배아가 아닌 다른 존재의 심장 고동도 있었다. 알을 품은 부모의 것이었다. 배아는 부친과 모친의 심장 소리를 귀신 같이 구분했다. 그리고 배아가 알게 된 것은 당연히 젠킨슨도 알게 되었다.
로드의 부친과 모친은 하루씩 번갈아 가며 알을 품었다. 젠킨슨이 카운팅한 후 그들은 156번 자리를 교체했다. 156일이 지났다는 뜻이다.
로드는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다. 알껍질에 닿지 않고도 마음껏 사지를 버둥거릴 수 있던 예전과 달리 몸을 조금만 움직이면 껍질이 느껴졌다. 당연히 그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날이 오고 있다. 결정적 순간이 임박했다는 건 배아도, 그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젠킨슨도 알고 있었다.
배아는 조바심과 짜증을 분출한다.
‘좁아!’
어린 드래곤 로드는 얼른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좀이 쑤셨다. 부모가 설명한 세상이 보고 싶었다. 만물의 색깔과 형태를 눈에 담고, 냄새를 맡고 싶었다. 땅을 걷고 하늘을 날고 싶었다.
그의 기대와 대조적으로 젠킨슨은 우려를 느꼈다.
‘잠깐. 부화라고? 내가 설마 그 과정까지 같이 경험해야 하나?’
알 깨는 느낌이 어떻더라?
2천 년 전 기억은 희미하다. 다만, 왠지 모르게 엄청나게 힘들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무지막지하게 아팠던 것 같은···.
‘에잇!’
드디어, 배아가 단호하게 결정했다.
‘더는 못 참아!’
그것은 본능적인 충동인 동시에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농밀한 액체 속에서 배아는 자세를 잡았다. 부모는 껍질 너머로 많은 것을 가르쳤지만 정작 알을 어떻게 깨는지는 교육하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이미 방법을 아니까. 그의 피가. 본능이 앞으로 할 일을 속삭이고 있었다. 배아가 전신을 긴장시킨 그때 젠킨슨의 정신 역시 극도의 긴장감을 느꼈다. 그는 2천년 전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려 했다.
‘그래, 아팠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게 이상할 정도로··· 엄청나게···!’
그때.
드래곤 로드가 힘차게, 머리로 알의 내벽을 들이박았다!
쿵!
‘으악!’
‘으아아아아악!’
배아와 젠킨슨은 동시에 절규했다. 소리로 전달되지 않는 외침. 드래곤 로드의 감각을 그대로 함께 느끼는 젠킨슨은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그는 엉겹결에 소리질렀다.
‘야, 이 자식아! 살살 좀 박아!’
그 호통은 형식적으로나 의미적으로나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 이미 수차례 실험해 봤지만 젠킨슨의 말이 기억 속 드래곤 로드에게 전달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알을 깨려는 배아에게 박치기를 살살 하라는 말은 알 속에서 죽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드래곤의 알껍질은 여타 난생동물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경도가 높다. 비슷한 형태로 태어나는 그 어떤 동물보다 크고 무거운 몸을 담고 지탱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단단해야 했고, 그걸 깨는 건 새끼 용에게도 쉽지 않다.
부리가 없는 드래곤은 몸에서 가장 단단한 부위를 쉴 새 없이 알 껍질에 들이박았다. 다름아닌, 이마에 돋은 뿔이었다.
쿵!
그때마다 두개골에 퍼지는 끔찍한 고통.
– 여기 좀 봐. 알이 움직여!
– 아가야, 드디어 때가 왔구나! 그래, 어서 나오렴!
부화가 시작된 걸 안 부모는 연신 응원의 말을 건넸다.
쿵! 쿵! 쿵!
세상의 빛을 보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배아 입장에서는 처음 겪는 삶을 향한 투쟁이었다. 그저 알 속에서 웅크리다가 가끔 지루하면 사지를 버둥거리는 것이 다였던 그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낳았지만 태어나지 못한 지금 상태에서 탈피하여, 진짜로 살기 위해서.
고통스러운 시간이 이어졌다. 로드가 알껍질에 박치기할 때마다 젠킨슨은 고문을 받는 느낌이었다. 정신이 으스러지는 아픔. 세상에, 원래 이렇게 힘든 과정이었던가? 어떻게 이런 걸 까먹을 수가 있었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해하기 힘든 것은···.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남의 부화통(孵化痛)까지 함께 경험해야 하는 거냐?!’
이 배아의 미래, 고인이 된 로드를 탓한다.
‘아니, 진짜, 이런 기억을 굳이 차기 로드에게 공유할 필요가 있습니까?!’
차라리, 미완성 마법의 부작용이라는 가설이 그럴싸하다.
‘카이엔! 아시스파엘! 그 개자식들··· 여기서 탈출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
이 난관을 겪게 된 근본적인 원흉은 그 도둑 커플이다. 젠킨슨은 드물게도 동족을 향한 살의를 느꼈다.
쿵! 쿵!
한편, 배아는 자신의 의지로 고통스러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의 내면엔 생각과 감정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고통과 마찬가지로 그것 역시 함께 느끼는 젠킨슨은 기가 질렸다. 아픔을 약간이나마 잊을 정도였다.
선명하고도 강렬한 외침.
나가고 싶어!
경험하고 싶어!
되고 싶어!
부화한 뒤 어디로 갈 것인지, 무엇을 경험할 것인지, 어떤 드래곤이 될 것인지는 아직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천천히 정하고 겪으면 될 일이었다.
일단, 시작해야 한다.
삶을.
쩌적!
알 껍질에 균열이 생긴다. 배아는 그곳을 집요하게 노렸다. 지난한 노력과 시도가 이어진 뒤.
쩌저적!
캄캄했던 세상이 눈부시게 찢어졌다.
그리고 온 몸이 꽁꽁 얼어붙을 듯한 냉기가 엄습했다. 로드의 부모가 화룡이 아니라 빙룡(氷龍)이었는지, 그래서 빙하지대에 레어를 만든 것이 아닌지 젠킨슨이 잠시 의심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곧 온기가 그를 덮었다. 알 속에서 느낀 것과는 다른 종류의 따스함. 바람에 담긴 불의 기운이었다. 부모 중 누군가 주문을 외운 것이다.
알을 깨고 나와 몇 걸음 걷던 로드는, 힘이 부치는지 통통한 엉덩이를 바닥에 깔고 앉아 버렸다.
몇 초 전 배아에서 해츨링으로 급격한 신분상승을 한 드래곤은 힘겹게 눈을 뜬다. 희미했던 시야가 점차 뚜렷해졌다. 그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드래곤 두 명. 해츨링 역시 그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왠지 그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막 부화한 자신을 보는 둘의 눈동자에 맺힌 저 감정이 무엇인지, 어린 드래곤은 아직 모른다. 그저 둘이 자기를 계속 저런 눈으로 봐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후, 바깥에 조금 적응이 되었는지.
‘해냈다!’
해츨링은 기쁨에 도취되었다. 아주 의기양양하다. 뇌 속에는 도파민이 폭주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뭔가를 성취했다. 해츨링이 되었다.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가 되기 위해선 이리도 험난한 과정이 필요하구나. 어쨌거나 끝났으니 되었다.
아기 드래곤은 확신한다. 앞으로 이렇게 힘든 일이 설마 또 있지는 않겠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야. 암, 그렇고 말고. 산다는 게 방금 이것만큼 큰 일은 아닐 거야.
그렇게 확신한 순간 드래곤은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것을 느꼈다. 감정은 더 격렬하고 다채로워졌다 기쁨과 기대, 세상을 향해 선언을 내지르고 싶은 충동, 후련함과 통쾌함, 이제서와 완벽하게 완성된 것 같은 뿌듯함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간질간질한 가슴과는 대조되게, 뱃속은 누가 긁은 듯 아리고 불쾌했다. 새끼 드래곤은 그 감각을 허기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부모는 계속 말을 걸었다. 혀로 비늘을 핥아주며, 그가 얼마나 장한 일을 해냈는지 칭찬했다. 하지만 해츨링은 대꾸할 경황이 없었다. 용의 언어를 발음하는 법을 아직 모를뿐더러, 거기까지 가기도 전에 지금은 폐로 호흡하는 법에 익숙해지느라 바빴다. 남의 사정도 모르고 부모는 계속 말을 건다. 정신이 없다. 뱃속은 계속 아리고 감정은 끓어올랐다. 새끼 드래곤은 고민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지?
에라, 모르겠다. 일단 울자.
삐이이익!
드래곤 로드는 (주관적인) 위엄을 담아 포효했다.
패기와 기세는 좋았지만 뿜어 나오는 소리는 드래곤의 그것이라기보다 박쥐 울음에 가까웠다. 하지만 로드는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이 또 무언가를 해 낸 것이다. 처음으로!
두 성룡이 그를 머리로 덮으며 속삭였다. ‘우리에게 와 줘서 고맙다.’ 해츨링은 만족감 속에서 눈을 감고 그릉거렸다.
그 광경을, 젠킨슨도 함께 보고 있었다. 그리고 드래곤 로드의 생각과 감정을 조금의 여과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나이를 먹으면서 감정이 예리함을 잃고 둔탁해진 지 오래인 젠킨슨 입장에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날 것의 분출이었다. 충만한 감동과 폭발하는 희열. 로드의 알껍질 뿐만 아니라, 젠킨슨의 이성과 자의식을 보호하던 두꺼운 껍질도 함께 부서져 내린 느낌이었다.
그만큼 강렬했다.
너무도 강렬했기에.
‘······.’
지금 이 순간, 젠킨슨은 이 감정이 로드와 자신 중 누구의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었다.
***
“우리가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지요. 비유하자면 그 사람의 살갗 속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 세상을 걸어야 한다고요.”
여당 의원들이 모인 회의실에서 그 말을 꺼낸 이는 엘프였다.
그는 방금 미국 소설을 인용했다. 다른 이민자 1세대 엘프처럼 그도 처음 지구 땅을 밟을 때는 미국 국적을 취득했기에, 최초로 접한 지구 문화도 영미문화권의 것이었다. 그후 다사다난한 사건을 거쳐 한국의 의원이 되었지만 문화적 배경은 서양에 가깝다.
갑자기 소설 속 대사를 들먹인 원내대표의 의도를, 이 자리에 모인 다른 의원들도 짐작하고 있었다.
“많은 유권자들이 오크 입장에서 세상을 보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덕분에 우리당 지지율이 오르고 있습니다. 오크 의원들이 추진하던 법안의 여론 조사 결과도 호의적입니다.”
이번 테러 사건은 정치판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대중들은 비극의 주인공에게 관대해지기 마련이다. 대낮에 호텔에서 벌어진 학살극은 오크에게 적대적이던 사람들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고룡이 막판에 개입했지만 그가 데려온 신비의 성직자도 이미 죽은 자를 되살리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사망자 면면을 보면 오크 외 종족도 많습니다.”
“이건 인권연대도 예상 못한 상황일 겁니다.”
행사 주최 측은 참석 인원에 제한을 두었다. 미성년자는 참석이 불가능했고 동반 가능한 가족도 직계와 그들 배우자로 한정되었다. 사돈의 팔촌까지 참석하는 관행과 다르게 말이다. 당연히 공간이 남았는데, 공교롭게도 그 자리는 오크 외 종족의 초빙 인사로 채워졌다.
인권연대가 상상한 행사 풍경은 대충 총을 쏴도 오크가 맞아 죽는 공기 반 오크 반의 밀집 공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판을 까 보니 그렇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눈먼 총탄과 마법에 희생된 이들 중에는 다른 종족도 수두룩했다.
그 때문에 대중은 깨닫게 되었다. 오크를 타깃으로 한 테러에 꼭 오크만 희생되는 건 아니라는 당연한 진리를. 운이 나쁘면 다른 종족도 얼마든지 휘말려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대로면 특별법 의결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군요. 야당도 여론 때문에 계속 재 뿌리는 데 부담을 느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엘프가 응시한 이는 최판석 의원이었다. 늙은 오크는 밝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의가 깃든 눈빛.
그를 비롯한 동족 의원들은 오크의 권익 증대를 목표로 한 법안 몇 가지를 추진하던 중이었다.
“이번에 세상을 뜬 일곱 명의 의원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꼭 입법까지 마치겠습니다.”
대중의 반응은 테러 주모자들도 예상을 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이렇게 해서라도 현장에 모인 예순 명 남짓의 오크 의원들을 사살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예상 외의 강자들과 드래곤의 개입 때문에 목표에 훨씬 못 미치는 수를 죽이는 데 그친 것.
“그리고, 이번 사건 때문에 젠킨슨 회장님께서 큰 마음을 먹으신 모양입니다. 인권 연대를 뿌리 뽑기 위해서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조하셨습니다. 돈이라면 기부 형태로 얼마든지 지원할 테니 예산 걱정하지 말고 필요한 법안 상정에 착수하라고 격려하시더군요.”
이쯤 되니 의원들은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테러는 인권연대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수였다.
말 그대로 잠자는 드래곤의 코털을 뽑아버린 것이다.
“듣기로, 회장님이 차기 드래곤 로드가 될 가능성이 높다지요?”
“그런 고룡의 심기를 거스르다니··· 인권 연대는 자폭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완전히 박멸될 날이 멀지 않았군요.”
여당 의원들은 긴 시간 향후 전략을 논의했다.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자리를 뜰 무렵, 원내대표를 맡은 엘프가 최판석에게 다가갔다.
“요양 중인 의원들 상황은 어떻습니까?”
대다수의 오크 의원들은 오늘 회의에 불참했다. 테러 당시 현장에 있던 그들의 몸은 완벽하게 회복했지만 정신적인 충격은 그대로 남았기에 당 차원에서 배려한 것이다. 최판석이 대표로 그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오크 의원 대부분이 요양 중인 지금, 최판석만 회의에 참석한 이유가 있었다. 이 5선 의원은 그날 테러 현장에 없었다.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불참했기 때문이다.
“다음주부터는 다들 의정활동을 재개할 것 같습니다. 충격이 큰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더군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동족인 최판석의 격려가 큰 도움이 될 테니 꾸준히 연락해 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원내대표는 떠났다.
그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량 안. 오크는 전화를 건다. 휴대폰 액정에 수신인 이름이 표시되었다.
박정팔 의원.
“박의원, 나 최판석일세.”
수화기 너머로 대답이 들리고.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미안하고 조심스럽네만, 자네가 국회에 복귀하기 전에 얼굴 보고 논의하고 싶은 부분이 있네. 이번주 내로 잠깐 만날 수 있겠나?”
짧은 답을 들은 뒤 덧붙인다.
“기자들 눈이 없는 곳에서, 가급적 조용히 봤으면 싶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