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48
249. 사람의 자격 (14)
***
카바이트들이 행성 ‘아-디-키엘’을 점령하고 용릉을 손에 넣은 뒤 민준은 뒤집힌 피라미드 내부에 머물렀다. 이동의 자유 같은 것은 물론 없었다. 카바이트들은 보호를 명목으로 항상 그를 감시하고 움직이는 곳마다 따라붙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은 그 즈음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내 요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민준은 지금까지 카바이트들에게 협조를 아끼지 않았지만 저들의 태도는 조금씩 변하고 있다.
‘이미 여러 차례 강하게 요청했지만 동족들을 깨우려는 노력이 안 보인다. 계속 핑계를 대면서 미루기만 해. 심지어 이 전쟁을 장기화하려는 움직임마저 느껴진다.’
민준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앞으로 계속 전쟁을 수행하는 것보다 태초의 종족을 깨우는 것이 카바이트들에게는 이득이다. 그럼으로써 고대 종족은 단 한 명의 전사자도 늘리지 않고 드래곤과의 분쟁을 끝낼 테니.
그 후 카바이트는 민준의 백성들로부터 종족 단위의 지원을 받으며 발전의 길을 걸을 터다. 그들이 요청한다면 엔델리온이나 토드에게도 마찬가지로 손을 뻗을 수 있었다.
여러모로 생각해도 이쪽이 양 집단의 행복과 이익을 극대화하는 선택지다.
‘그런데 왜?’
민준은 넘을 수 없는 몰이해의 벽 앞에 선 기분을 느꼈다.
‘왜 최선책을 버리고 잔혹한 차선책을 택하려는 거지?’
카바이트는 배신하려는 것이다.
‘굳이 용과 싸워서 피를 흘리려는 이유가? 여태 내가 준 것만으로도 드래곤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자신이 있기에?’
하지만 카바이트의 희생을 막는 무혈 승전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난관이자 무의미한 전쟁이다. 민준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일단 여기서 도망친 뒤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
용릉에 들어온 뒤 민준은 자신이 가장 깊숙한 중심부로 인도될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예상은 어긋났다. 카바이트들은 천문학적인 드래곤 하트가 쌓여 있는 장소에 절대 민준이 발들일 기회를 주지 않았다. 혹여, 그들의 이해를 초월한 안배가 존재하여 민준이 심장을 탈취할까 걱정한 것이다.
그래서 민준은 그들이 따로 가져온 소량의 하트를 교보재 삼아 마정석 주문을 가르쳐야 했다.
심지어 카바이트는 그 중심부 근처에 드래곤 포로를 가두고 시신을 보관했는데, 민준은 그곳에도 접근하지 못했다.
‘용혈··· 용혈이 더 필요해.’
이 기지를 그 홀로 점령하고 카바이트로부터 드래곤 하트를 빼앗는 것까지 바라는 건 시기상조다.
일단 여기서 탈출할 힘부터 되찾는 게 먼저였다.
‘놈들이 가져다주는 양으로는 부족하다.’
처음 눈 떴을 때보다야 낫지만 혈혈단신으로 감시자들을 따돌리고 행성 밖으로 도주할 단계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흑마법 제물이라는 핑계로 입수한 여러 종족의 혈액에 용혈도 섞여 있었지만 양이 미미했다. 심지어 얼마 전부터는 가져다주는 속도가 느려지거나 품질이 요청에 못 미치는 경우도 흔했다.
넘기 힘든 난관에 부딪힌 그때.
“······?!”
예기치 못한 선물이 도착하여 민준의 감각을 두드렸다.
그의 기대를 넘어선 기적이었다.
‘뭐지?’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다.
민준은 그날도 격리실에 홀로 앉아있었다. 피부에 감기는 대기의 느낌은 그대로다.
외부로 뚫린 창문이 드문 구조 때문에, 이 건물은 내벽을 관통하는 공조 시스템에 환기를 크게 의존했다.
공기는 끊임없이 방과 통로를 넘어 순환한다. 민준이 이상을 느낀 것은 벽의 구석에서 흘러나오는 바람 때문이었다.
‘분명, 똑같은데···.’
감각의 일부는 그것이 평범한 대기 성분과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아래에 깔린 본능은 달리 외쳤다.
‘똑같지만 뭔가 다르다!’
민준이 알아차린 것은 그 몸이 어떤 종족보다 용혈에 민감했으며, 누구보다 그것을 효율적으로 흡수하게 설계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입자를 코팅한 물질을 무시하고 용혈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안개보다 옅은 습기에 닿은 민준의 살결은 여과없이 그것을 흡수해버렸다.
그러자 용족의 예측과 정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용혈이 비활성화 상태로 남는 대신 본래 성질을 드러낸 것이다. 민준의 몸속에서.
‘아아!’
민준은 영혼을 적시는 충만감을 느꼈다. 벽을 타고 새어 들어오는 저것은 분명 용혈이었다.
비록 괴이한 물질과 섞여 본질을 흐리고 있었지만, 민준이 흡수한 순간 순수한 피로 돌아갔다.
탐욕스럽게, 민준은 온몸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감시 영상에 찍힌 그의 모습은 평소 같이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긴 듯했다. 하지만 외부에서 볼 수 없는 몸속에는 엄청난 변화가 진행 중이었다.
‘더, 조금만 더!’
벽 틈에서 흘러 들어오는 용혈의 흐름은 멈출 줄을 몰랐다.
말라붙었던 흙바닥이 조금은 적셔졌다고 판단 내린 뒤, 민준은 조용히 주문 하나를 만들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종족 입장에서는 정체를 알 턱이 없는 스펠이었다.
스으으!
주문은 벽과 벽 사이의 공조관을 잠식하여 흘렀다. 그리고는 먼 곳의 대기 속 흩뿌려진 용혈 입자마저 조금씩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 입자가 카바이트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고, 미력한 힘에도 요동칠 정도로 가벼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먼 옛날에 구축된 공조 시스템이 민준의 마법을 도왔다.
태초의 종족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몸속을 용혈로 채워 나갔다.
***
“그 용혈 폭탄, 완전 불량이었습니다!”
작전은 실패했다.
구출조는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기며 행성을 탈출했다. 골드 드래곤 젠킨슨을 비롯한 용족들은 격양된 어조로 개발자에게 따졌다.
그들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종족의 명운과 승리, 생존자의 목숨, 전사자들의 위엄을 담보로 한 작전에··· 그런 쓰레기 같은 아티팩트를 들려 보내다니!”
연락선을 타고 온, 고위직으로 추정되는 카바이트들이 건물 내로 모습을 감춘 뒤 드래곤들은 간신히 그 안으로 침투했다.
그들은 나아갈 수 있는 가장 깊숙한 영역, 그나마 가장 중심부에 가까운 지점에서 폭탄을 가동했다.
이대로 며칠이 지나면 고대 종족들은 무력화될 것이다. 침투조의 임무는 그때까지 참을성 있게 적진 한가운데 잠복하여 기다리다가, 때를 봐서 동료들과 시신을 회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며칠이 지나도 쌩쌩하더이다! 다들 그토록 건강할 수가 없더란 말입니다!”
마비되기는커녕 카바이트들은 가벼운 증상마저 나타내지 않았다.
“간신히 빠져나왔기에 망정이지, 자칫 잘못하면 우리 다 거기서 개죽음 당할 뻔한 거요!”
흥분한 용들이 비난을 쏟아냈다. 지휘관 및 개발자 드래곤들은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간신히 분위기가 수그러든 뒤, 개발 책임자가 변명했다.
“첫 시도다 보니 예기치 못한 변수가 작용한 듯싶습니다.”
그의 말대로 당시는 용혈 무기를 연구하고 생산하는 초입 단계였으며 좌충우돌이 이어지던 때였다.
항의하는 그들을 돌려보낸 뒤, 개발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실패 원인을 추정했다.
“예상 가능한 이유는 세 가지 정도 있습니다.”
하나, 용혈이 대기 중에 과도하게 희석되어 카바이트의 반응이 없었다. 둘, 저 기괴한 건물 내부 공조 시스템이 용혈의 확산을 제한했다. 셋, 용혈 입자를 감싼 거품(코팅)이 너무 오래 사라지지 않고 버텨서 그 사이 피의 독성이 증발했다.
이 세 가지 가능성에 착안하여 드래곤들은 작전을 바꾸고 무기도 개량했다.
기지에 갇힌 민준이 깜짝 선물을 전부 다 흡입해 버린 것을 아쉬워하며, 두 번째 기적 따위를 바라는 대신 탈출 계획을 짜느라 한창 바빴던 그때, 드래곤들은 2차 구출작전 회의를 시작했다.
“개량한 무기는 초기 모델의 2배에 달하는 용혈을 저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용혈 입자를 코팅한 성분 역시 저번보다 약한 수준으로 조정했고요.”
“이번에는 틀림없겠소?”
구출조의 미심쩍은 눈빛이 쏟아졌지만, 개발자는 믿어 달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또한 이번에는 구출조 수에 맞춰 폭탄을 다섯 개 준비할 겁니다.”
설명이 이어진다.
구출조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결국은··· 우리 더러 살충제 살포하는 드론 역할을 하라는 거잖아?”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을 때는 단순무식한 방법이 효과적일 때가 많지요.”
용혈 입자가 공조 시스템의 벽을 넘지 못한다면, 침입자들이 직접 카바이트가 다니는 길목마다 그걸 뿌리고 다니면 된다.
기지에 침입할 수 있을 정도로 작게 폴리모프하는 것까지는 동일했다. 그 직후는, 등에 짊어진 생화학무기를 가동시키고 경계병들 눈을 피해 용혈을 살포하면서 건물 내부를 누비는 것이다.
충분히 뿌렸다고 판단된 뒤에는 1차 작전 때처럼 한곳에 모이고, 그대로 적이 무력화되길 기다린 후 구출을 개시.
개발자 브리핑이 끝나자 지휘관이 한 가지를 지시했다. 다른 종족이었으면 죽으라는 소리로 해석될 명령이었다.
“그런 이유로 예상보다 고농축의 용혈이 다량 필요하게 되었으니, 전 부대원은 체중의 15%에 해당하는 용혈을 오늘 내로 제출하길 바랍니다.”
“······?!”
곳곳에 불평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젠킨슨은 결연한 표정으로 피를 뽑았다.
“오히려 1차 시도때보다 리스크는 커졌군.”
그나마 저번 침투 때 내부 구조를 파악한 것이 다행이었다.
2차 작전조 구성원에는 약간의 변동이 있었지만, 골드 드래곤 젠킨슨은 이번에도 지원하여 남았다. 이들 중 손에 꼽힐 정도로 전투력이 뛰어나다는 것 외에도 그가 나선 이유가 있었다.
그는 1차 침투 덕분에 확신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드래곤 하트는, 분명 저곳에 있다!’
***
“이것을 좀 봐주시겠습니까? 당신이 가르쳐 준 주문이 통하지 않는 드래곤 하트가 나왔습니다.”
고위직 카바이트가 민준에게 다가온다. 그는 드래곤 하트 두 개를 내밀었다.
그것들은 태초의 종족이 먼 옛날 모아 놓은 비축품이 아니다. 고대 종족이 전쟁터에서 새로 수급해 왔다고 했다.
요즘 카바이트들은 전쟁터에서 사망한 드래곤 시신을 적극적으로 강탈하여 훔쳐오고 있었다. 이곳에서 철저한 방독 체계 하에 분리 작업을 진행한 뒤, 드래곤 하트는 마정석 생산 라인에 투입된다.
태초의 종족이 남긴 유산만 까먹는 대신, 자력 조달을 병행하는 게 장기적으로 바람직하다 여긴 지휘부의 대계(大計)에 따른 것이다.
‘어라?!’
민준이 살짝 동요했다.
한 쌍의 드래곤 하트를 살피던 그가 말했다.
“이건··· 그렇군. 내가 가르쳐 준 주문에는 반응하지 않았겠군.”
드래곤이라고 불리는 종족은 아종(亞種) 분류에 따라 실로 다양한 형태와 권능을 자랑하며, 그 특성에 맞게 드래곤 하트의 구성도 가지가지다.
‘이건 길잡이 용의 드래곤 하트다.’
먼 옛날, 사람에게 유달리 잘 공감하며 다른 용들을 이끄는 길잡이 역할을 한 용종(龍種)이 있었다.
태초의 종족은 그들에게 도축 당하지 않을 권리를, 가축이 아니라 사람의 ‘벗’으로 인정받을 자격을 주었다.
따라서 용릉에는 본래 길잡이 용의 드래곤 하트가 없었다.
그런데 카바이트가 전장에서 구해 온 것이다.
‘아직 멸종하지 않고 혈통을 지켜온 모양이군. 하긴, 드래곤 중에서도 유별나게 우수한 종이었으니까.’
민준은 이런 종류의 하트를 마정석으로 만들기에 적합한 주문식을 구상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문을 읊기 직전에 주저했다.
계속 순순히 협조할 것인가? 머릿속 저울질이 이어진다. 결론은 빨랐다. 기적 덕에 힘을 약간이나마 되찾은 사실을 저들은 모른다. 앞으로도 비밀에 부쳐야 한다.
‘갑자기 협조를 멈추면 당연히 의심하겠지.’
아직은 속내를 감추고 태도를 유지하는 게 좋을 것이다.
“자, 보고 배우십시오.”
민준이 한 쌍의 드래곤 하트를 마정석으로 바꾸려던 그 순간.
콰콰쾅!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이 울렸다.
카바이트가 당황하며 통신기를 찾았다.
“무슨 일이냐?!”
민준의 주문도 저절로 멎었다.
카바이트는 드래곤 하트를 도로 품에 갈무리했다. 그리고는 통신기를 통해 급하게 몇 마디를 지껄였다. 민준은 양쪽에 오간 말을 전부 알아들었다.
그의 눈이 서늘하게 빛난다.
쿵! 쿵!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이것은 두 번째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의 예민한 청력은 방금 통신기에서 새어 나온 단어를 선명하게 포착했다.
‘침입자라고?!’
또 한 번의 기적이 다가와, 민준의 등을 힘차게 떠밀고 있었다.
***
쾅! 콰콰쾅!
작전은 또 실패했다.
골드 드래곤 젠킨슨은 울부짖었다.
“쓰레기 불량품만 만들어내는 개발자 새끼들··· 살아 돌아가면 가만히 안 둘 테다!”
엘프로 폴리모프를 한 채 벽을 부수며 돌진하는 그의 뒤에, 카바이트들이 모든 구멍에서 피를 토하며 뒹굴었다. 놈들은 무언가에 중독된 듯이 발작하며 몸을 떤다.
그리고 더 먼 곳에서는, 온몸을 방독과 제독 아티팩트로 꽁꽁 싸매고 쫓아오는 경계병들이 보였다.
젠킨슨은 포효했다.
“이번에는··· 독성이 발현되는 속도가 너무 빠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