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50
251. 사람의 자격 (16)
***
해안에 맞닿은 폐허.
한때 용족의 도시였던 그곳에는 잔혹한 전쟁의 여파가 그대로 남았다. 거대한 종족의 몸에 맞춘 건물들은 무너지고 부서진 채 풍화되고 있었다.
한때의 소란과 아비규환을 기억하는 바다는 고요하게 파도쳤다. 해수면 위로 금빛 발자국을 찍으며 아침이 밤을 쓸어낸다. 수평선에서 물러나는 어둠의 끝자락을 잡고 바람이 대지로 끌려 왔다. 그 습하고 부드러운 대류가 해안가의 드래곤에게 닿았다. 엘프로 변신한 그의 앞머리가 흩날리고 퀭한 눈이 드러났다. 새벽녘의 해풍을 정면으로 받으며, 드래곤은 적의 어린 시선을 하늘로 쏘아보냈다.
우우우웅!
머리 위의 상공. 시야가 닿는 모든 곳에 비행체가 있었다. 개중에는 우주 모함도 몇 섞여 있다. 그것들로부터 쉴 새 없이 별똥별 같은 빛알이 떨어져 나왔다.
팟!
광체가 허공에서 터질 때마다 별의 띠 같은 굴레가 하늘을 수놓았다. 그 작은 하나하나의 알갱이가 탐색 마법을 담은 매개였다.
카바이트들은 인질범이 기지를 탈출한 직후부터 총력을 다해 행성을 수색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가 바다를 가로질러 육지를 밟은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다른 침투조원들은 전부 탈출했겠지.’
드래곤은 자신이 발각된 직후 오간 교신을 기억한다. 나머지 네 명은 자신과 달리 멀쩡한 폭탄을 받았음에도 작전 속개를 포기했다. 그들은 교신을 받은 당시 있던 곳에 폭탄을 설치한 뒤 그대로 탈출해버렸다. 그리고 행성 폐쇄가 완료되기 직전 대기권 밖으로 달아난 것이다.
동료 중 누구도 그를 구하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경비병들의 표적이 된 드래곤은 결국 마지막으로 기지를 탈출했지만, 카바이트들은 이미 전례 없는 비상 태세에 돌입한 뒤였다.
‘자력 탈출은 불가능하다. 사전에 약속된 장소까지 이동해야 해.’
작전이 실패하고 행성 밖 도주로까지 막혔을 때를 상정한 픽업 사이트가 있었다. 지금 고룡의 목표는 거기까지 이동하는 것이다.
물론 혼자서 갈 생각은 없다.
‘인질까지 데리고 가야 성공이다.’
드래곤은 해안가의 정찰을 마치고 폐허로 돌아왔다.
으슥한 건물 안, 구속 마법에 묶인 카바이트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의 목에 달린 아티팩트에 고룡의 시선이 멎는다.
원래 인질이 끼고 있던 보호구는 대다수를 해제시킨 상태이지만 저것만은 그대로 두었다. 용혈의 독성으로부터 착용자를 보호하는 종류 같았기 때문이다. 용의 생각에, 저걸 떼는 순간 인질은 즉사할 터다.
‘어깨 위에 들쳐 매고 왔으니 분출되는 용혈을 정면으로 뒤집어썼을 거다. 과하게 많은 양을 말이지.’
그는 인질의 보호구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우리 예상보다 빨리, 효과적으로 대비책을 준비했다. 저 정도면 완벽한 방어라고 봐도 되겠군.’
분명 최근의 전투까지만 해도 카바이트들의 용혈 방어구는 저것에 훨씬 못 미치는 성능이었다. 방독 기술이 저렇게 발전했다면 해독 기술 역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어쩌면 불량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작전에 실패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기지 내에서 생사가 오가는 전투를 벌일 때는 몰랐지만, 지금 보니 보호구에서는 매우 복잡한 마력 파동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혼란스러운 결이 고룡의 감각을 흐렸다.
‘이해할 수 없는 속도다. 놈들의 기술 로드맵은 뒤죽박죽이야.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저런 성과를 또 내놓았지?’
그 시선을 눈치챈 카바이트. 아니, 카바이트로 변장한 이의 두뇌 역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드래곤은 저 인질의 머릿속이 분노와 공포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 추정한다.
하지만 정작 민준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용혈 분수 같은 건 하나뿐인가? 혹시 더 없나? 아쉽군.’
드래곤이 왜 등에 그런 것을 짊어지고 다녔는지 민준은 이제 짐작할 수 있었다.
‘무기였군. 카바이트를 제압하기 위한.’
용혈은 식량이라는 고정관념과 굶주림이 한때 그의 상상력을 제한했지만, 여유를 되찾자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짐작컨대 드래곤들은 기지 내에 용혈을 퍼뜨리려는 작전을 짰던 것 같다.
‘그 정도로 희석해서 살포했으니 살상력을 기대하진 않았을 거다. 마비가 목적인가? 하지만 기지 내 인원을 전부 무력화시켜도 외부의 경계 병력이나 모함 내 카바이트들은 멀쩡할 텐데. 오래 끌면 지원군이 와서 제압했을 거다. 결국은 시간 벌기에 불과해.’
더 효과적인 방법은 기지에 폭격을 퍼붓는 것이다. 그러는 대신 왜 시간을 벌었는가?
떠오르는 답은 하나였다.
‘포로 구출이군.’
그들은 딱 포로들을 빼낼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얼마 전 벽을 타고 용혈이 스며든 기적 역시 드래곤의 소행임이 분명했다.
민준은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드래곤들의 전략 무기를 내가 전부 먹어 치운 셈이 되었어.’
현실성 없는 가정이지만, 민준이 그것을 안 먹고 그냥 두면 어떻게 되었을까?
‘설사 용들이 포로 구출에 성공했더라도, 나는 여전히 격리실에 방치되었겠지. 용릉 중심부의 결계는 물론 날 가둔 벽조차 부술 힘이 없는 무기력한 상태로.’
혹시라도 우연에 우연이 겹쳐, 드래곤 구출조가 자신을 발견했더라면?
역시나 긍정적인 미래를 그릴 수 없었다.
“이봐.”
생각이 거기서 멈췄다.
거신의 엘프로 변신한 남자가 땅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름이 뭐지? 신분은?”
지금까지 추적에 쫓기며 바다를 가로지르느라 심문 비슷한 것도 하지 못했다. 이제서야 여유를 찾고 입을 뗀 드래곤을 보며 민준은 잠시 고민한다.
결정은 빨랐다. 어설픈 거짓말을 들키느니 침묵을 지키는 편이 좋을 터다.
“······.”
고룡이 집요하게 정보를 캐내려고 했지만 포로는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드래곤은 생각한다.
‘흥, 몸을 갸눌 힘도 없으면서, 버티기는.’
카바이트는 구속구에 묶여 축 늘어진 것처럼 보였다.
정작 그 실상은, 간만의 과식 때문에 세상 편하게 드러누운 자세라는 것을 고룡은 알지 못했다.
전성기 때와 비교하면 간의 기별도 안 되는 양이지만 민준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입에 피칠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소화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만족감과 포만감 역시 적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서 잠시 그 느낌에 심취할 정도로.
계속 대꾸가 없자 드래곤은 자신의 짐작을 굳혔다.
‘괜한 고집 부리는 것을 보니 입을 털면 잃을 게 많긴 한가 보군. 고위층이 확실해.’
어차피 부대로 돌아가면 다양한 방법이 기다리고 있다.
“시간 문제라는 걸 모르나 본데, 결국은 전부 털어놓게 될 거야.”
카바이트는 여전히 답이 없다.
고룡은 포기하고 자리에 앉아 잠시 회복할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대기 중에 퍼진 마나를 끌어모으며 정신을 집중한다. 그러는 동시에 카바이트를 감시하는 한편, 추적 마법을 교란하고 적의 접근도 경계해야 했다.
다시 말해, 지금 하는 여러 작업 중 무엇에도 100% 집중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
그때 민준의 감각에 묘한 것이 잡혔다.
‘위험해. 놈들이다!’
타이밍이 기묘하게 엇갈렸다.
용이 바깥을 염탐하고 돌어오자마자 카바이트 수색선이 은밀히 해변에 상륙했다.
탑승자들은 고룡이 심은 경계 마법을 피해 폐허로 숨어들었다. 사냥감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발걸음은 신중했다.
그런 추적자들을 감지한 것은 민준이 폐허 곳곳에 뿌려 놓은 그림자였다. 그것은 드래곤이나 카바이트의 마법보다 훨씬 적은 힘을 소모하며 더 넓은 커버리지를 감시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모르는 드래곤은 눈을 감고 엉뚱한 데 집중하고 있었다.
민준은 애가 탔다.
‘야, 이 자식아.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일어나라고!’
의식의 일정 부분은 자신을 감시하고 있기에, 낌새를 보이면 주의를 돌릴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귀띔하느냐가 문제였다.
‘인질이 인질범에게 경고하는 것도 웃긴 이야기잖아.’
자칫했다간 인질로서의 가치를 의심받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정체를 밝힐 생각 또한 없었다. 민준은 태초의 종족이라는 개념이 드래곤에게 알려지면 안 된다고 결정을 내렸다. 미래의 일까지 고려한 결론이었다.
저 이름도 용종도 모를 드래곤은 자신을 카바이트 고위직으로 계속 오해하는 편이 좋다.
‘젠장, 내가 처리해야겠군.’
저들을 몰살시킬 능력은 없었다. 하지만 간단한 주의 환기 정도는 가능하다.
민준은 도시 곳곳에 뿌려진 그림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슥!
스스슥!
그러자 이지가 없는 파편들은 검은 빗줄기처럼 폐허의 어둠을 스치며 흘렀다. 그리고는 실개천이 모여 굵은 강줄기를 만들듯 응집하여 바다로 향했다.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아직 밤의 흔적이 남아있는 시간대이기에 이동은 매우 은밀했다.
이윽고, 바닷물 아래로 잠수한 그림자 파편들의 응집체는 부피를 불렸다.
민준의 지시에 따라 그려낸 형상은 매우 거대한 드래곤의 것이었다.
특정한 용의 생김새를 고민하여 흉내낼 필요는 없었다. 민준도 아직 이 인질범의 본체를 못 봤고, 그건 카바이트들 역시 마찬가지일 터다.
민준이 소환한 그림자 괴물은 술사에게 친근한 길잡이 용을 현대의 드래곤 크기에 맞게 확대한 듯한 모습이 되었다. 그것은 해안 인근의 바다에서 묵직하게 이동을 시작했다.
그러자 난리가 난 쪽은 물속에 사는 생물들이었다. 이 행성에서 벌어진 전쟁은 육지 동물을 괴멸에 가깝게 몰아갔지만 그나마 수중은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어류를 비롯한 각종 동물들이 기겁하며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그 소란을 고대 종족들이 감지했다.
***
태초의 종족이 납치당한 후 카바이트들이 한바탕 뒤집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다수의 수색대는 이 사건을 카바이트 지도부의 납치 정도로 인지했지만, 극히 소수의 인원들은 인질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자네는 대체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용릉을 관리하라는 건 마정석 생산에만 신경을 쓰라는 뜻이 아니야. 그 정도의 병력을 붙여 놓았는데도··· 방어가 뚫리는 걸 넘어서 ‘그’를 빼앗겼다고?!”
마법 영상 너머로 늙은 카바이트의 노호가 쏟아졌다.
이 사건 때문에 며칠 후 결국 용릉 관리인 역할을 잃게 될 카바이트는 노인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염치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는 절망했다.
동시에, 몹시 억울하기도 했다.
‘젠장, 설마 놈들이 용혈에 그런 장난을 쳐 놨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불량 폭탄이 쏟아낸 용혈이 너무 빨리 활성화하여 결국 발각되었지만, 그전까지 뿌려 놓은 양이 꽤 된지라 카바이트의 초기 대응이 늦었다. 곳곳에 중독되어 바들거리는 자들이 상당수라 추격에 전력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사정을 변명하듯 말했지만 상대의 심기를 오히려 자극한 모양이었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나? 기지 안이 오염되었다고는 하지만, 정보가 전달된 후로는 내외부 병력들이 전부 방독 아티팩트로 무장했지 않은가? 또, 혼자도 아니고 인질까지 달고 다니는 놈을 아직 못 잡은 이유가 대체 뭐야?!”
“죄송합니다.”
관리인은 입이 세 개라도 할 말이 없을 듯 했다.
왜냐면 그조차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제아무리 고룡이라도 이 정도 인원을 풀었으면 수백 번 붙잡히고도 남았다. 그런데도 아직 소식이 없다. 용 한 명의 재주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뛰어나고 신출귀몰했다.
“설마 이미 별 밖으로 탈출한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닙니다. 행성 내에서 움직인 흔적이 계속 발견되고 있습니다!”
사색이 된 그를 보며, 훗날 대위원이라고 불리게 되는 카바이트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가늠했다.
“······놈들이 ‘그’의 정체를 알아내고 노렸을 확률은?”
말하는 본인도 가능성이 영(0)에 가까운 걸 안다.
관리인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곁에서 호위하던 병사들조차 그의 진짜 정체를 모른 채 죽었습니다. 더군다나 그 드래곤은 태초의 종족과 마주해 놓고도, 곁의 관리가 운반하던 드래곤 하트부터 노렸습니다.”
문답이 오가고 여러 가능성이 논의되었지만 가장 그럴싸한 가설은 인질범이 드래곤 하트를 노리러 갔다가 마침 거기 있던 ‘고위직 카바이트’를 납치했다는 것이었다.
“납치범 놈은 지금쯤 그의 진짜 정체를 알아차렸을까?”
인질은 자신의 종족이 뭔지 밝혔을까?
자문한 노인은 그 가능성 역시 낮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드래곤을 적으로 간주하지. 그 비늘 달린 짐승들이 전 우주를 지배한 뒤 다른 종족을 착취하고 노예로 만들며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 사실을 아니까.”
태초의 종족을 처음 만난 뒤, 카바이트는 용족의 악독한 행태에 대해 주입교육에 가깝게 설명했다.
–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자유를 선물합시다. 지배와 착취밖에 모르는 괴물들의 압제에서 벗어나, 모든 종족의 가능성을 꽃피우도록 도와줍시다. 긴 겨울을 끝내고 자유와 평화의 봄을 싹트게 합시다.
절대 거짓말은 아니었다.
심지어 전쟁이 시작된 뒤 드래곤들의 패악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다는 평가가 고대 종족 사이에서도 흘러 나올 정도였다. 용들이 그러는 이유는 군수물자 공급 때문이기도 했지만, 신성력 능력자 수요도 영향을 미쳤다.
부상자의 빠르고 부작용 없는 치료를 위한 더 많은 능력자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삶이 어렵고 환경이 지옥 같을수록 사람들은 종교에 의존하기 마련이다.
“그가 납치범에게 비밀을 털어놓지 않을 거야. 그랬다간 드래곤들이 절대 자신을 다시 놓아주지 않을 게 뻔하니까.”
그래도 불안감은 남았다. 태초의 종족이 드래곤과 접촉했다는 사건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카바이트는 관리인을 닦달했다. 인질범이 ‘그’와 접촉하여 얻은 정보를, 설사 그것이 가짜든 진짜든 많든 적든 그 일체를 부대에 전달할 틈을 줘서는 안 된다.
인질을 되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인질범 척살 역시 필수적이다.
띠링!
그때 관리인에게 어떤 신호가 들어왔다.
그의 표정이 급변하는 걸 보고, 미래에 대위원이 될 자가 묻는다.
“무슨 일인가?”
관리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드래곤을··· 찾은 것 같습니다!”
***
– 이상 반응 감지. 좌표 24-070-4989! 인근 병력 긴급 소집 요망!
육지를 수색하던 보병들은 물론, 가장 가까이 있던 우주 모함까지 바다 위로 날아들었다.
그들은 물속을 향해 대뜸 광자포를 퍼붓지는 않았다. 당연히도, 그랬다가는 인질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바다 밑의 적을 어떻게 포획할 것인가?
우주 모함에는 적합한 방법이 있었다. 바닥의 포문이 열리더니, 미사일이나 빛줄기 대신에 무형의 파동이 퍼져 나온다.
그것이 해수면에 닿은 순간.
쏴아아아!
민준의 조언 덕에 탄생한 기술이 행성의 중력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드래곤 윤곽을 닮은 바닷물의 파장과, 해저 생물들의 이상 반응이 집중된 그 부근에서.
바다가 갈라졌다.
콰르르르르!
산더미 같은 파도가 일더니 원을 그리며 물러났다. 폭포와 다름없는 이랑 아래 해저면이 드러난다. 수만 년간 물 밖 공기와 직접 닿은 적이 없는 은밀한 속살이 햇볕 아래에 노출되었다.
하지만 민준이 소환했던 가짜 용은 이미 바닷속 음영 사이로 흩어져 소멸된 후였다.
“······뭐지?”
진짜 고룡은 이변을 알아차렸다. 바다가 갈라지는 소리에 앞서, 그 원동력이 되는 강대한 마력의 움직임을.
“젠장, 뭔진 모르겠지만 주변에 있으면 안 될 것 같군.”
그는 인질을 다시 들쳐 맸다.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쥐어짜서 이동을 준비한다. 여전히 텔레포트는 막혀 있으니 은닉과 가속 마법을 총동원하여 빠져나가야 했다.
가까스로 위기를 피했음을 실감하며, 민준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거, 참.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