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6
26. Princess Run (1)
이른 봄,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세 가지 사건이 있었다.
첫번째는 두말할 것도 없이 베르미 공주의 내한.
공식 발표와 달리 그 목적이 겔랑코 차원에서 멸시받는 슈탄인(人)의 지구 이민 준비라는 소문은 기묘할 정도로 빠르게 퍼졌다.
연금술업체 및 인간우월주의 단체는 당연히 이 방문을 결사 반대했으며 일반 제조업체와 개방주의자들은 찬성하는 성명을 냈다.
나뉜 국론은 쉽게 봉합될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두번째, 국내 중소규모 연금술업체의 줄도산.
슈탄인이 생산하는 생체합성금을 시장에서 몰아내기 위해 국제 연금술사 협회는 가뜩이나 황금 증산을 이어 나가던 중이었는데, 그들이 지구로 이민 온다는 소문까지 퍼지니 달리는 말 꼬리에 불을 붙인 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한 수순으로 국제 금값은 전년 동기 대비 20% 수준으로 폭락했다. 큰손들 외에는 버틸 체력이 부족했고 운영단가가 도저히 맞지 않자 폐업하는 업체가 속출했다.
업계 전망은 암담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북한산에서 발생한 산불.
늦은 밤 시작된 불은 여섯 시간 동안 타올랐다. 자연발화는 아니었다고 모두가 단언했다. 몇 시간 동안 번지지도 않고 특정 구역만 태우며 쉴 새 없이 색을 바꾸는 불길을 자연의 산물이라 부를 수는 없기에.
여하튼, 덕분에 그날 밤 서울 시민들은 네온 등처럼 휘황찬란한 녹색과 노란색, 푸른색이 번갈아 가며 하늘을 물들이는 장면을 밤새도록 구경할 수 있었다.
더 이상한 점은 출동한 도봉소방서 대원들의 진입을 해당 사유지 주인이 고용한 대리인들이 막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체 역량으로 화재를 진압하겠다며 소방차와 헬기를 돌려보냈다.
한편, 해당 노지의 소유자는 꽤나 유명한 기업이었다.
유한회사 젠킨슨 파더앤선즈 컴퍼니.
그리고 민준은 이 세 가지 소식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슈탄인 이민은 확정되기 전까지는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였고, 금값이 아무리 많이 떨어져 봤자 민준의 지갑사정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젠킨슨의 철없는 아들내미들이 수틀리면 서로에게 불덩이를 쏘아 대는 것이 새로운 소식도 아니었고 산자락 태워 먹은 징벌은 젠킨슨이 출장에서 돌아오면 직접 가할 것이다.
따라서 민준은 그 소식들을 반쯤 잊어버리고 있었다.
저녁 시간에 사무실에 놀러 온 정팔에게 어떤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
“뭐어어? 도로 통제?”
민준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지금이 쌍팔년도도 아니고 그런 발상은 대체 누구 대갈통에서 나온 거냐?”
마주 앉은 정팔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나라님들 대갈통이겠죠. 저는 얼굴 볼 일 없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높으신 제 상관들 역시 거기에 포함될 거고 말입니다.”
하지만 민준은 그 설명에 납득할 수 없었다.
“베르미 공주가 얼마나 대단하다고 서울 시민들 발을 묶어 버려?”
정팔이 전한 소식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외계 사절인 공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동선에 포함된 모든 구역의 차량 및 보행자 통행을 금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해당되는 구역이 서울시 면적 전체의 20%에 가까웠다.
“베르미 공주가 아무리 금을 많이 팔아먹어서 돈이 썩어나더라도 며칠 동안 이 넓은 구역을 다 움직이는 건 불가능해!”
마법사들을 교대로 굴려서 하루에도 수십 번 텔레포트를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동선임을 민준은 지적하고 있었다.
그 질문을 예상한 듯 정팔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디테일한 동선을 특정하기 어렵도록 일부러 넓게 잡은 거죠.”
“끄응.”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자동차가 못 다니면, 버스나 지하철 같은 것도 다 멈춰버리고?”
“어차피 형님이랑 상관없잖아요. 마지막으로 지하철 탄 게 언젭니까?”
그가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답했다.
“2호선 개통했을 때였나? 집 근처에 지나간다길래 한 번 타보고 말았어.”
‘그럼 그렇지.’ 정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습관적으로 송곳니를 긁적이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묻는다.
“아, 참. 그러고 보니 형님도 지하철 공짜로 탈 수 있어요? 실험해 본 적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안 돼. 난 쿼터 엘프라고 주민센터에 이미 등록이 되어 있단 말이야. 내 또래 순혈 인간들이 다 누리는 것들도 난 제외야. 연금도 안 나온다니까?”
현대인들이 연금에 보이는 열의와 집착은 대단했다. 해당 나이를 넘기면 중위소득 200%부터 시작되는 금액이 다달이 입금되니까.
물론 함정도 있었다. 범죄를 저질렀거나 반체제, 반사회적 언행을 보였다는 기록이 확인되면 연금이 깎이거나 사라진다.
반대로 말해 그런 경우만 아니라면 최소로 잡아도 통계 허리 지점 두 배에 달하는 돈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지금 삶이 아무리 괴롭고 끔찍해도 그 나이까지 살아 남기만 하면 꽤 괜찮은 돈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먹고 살았다.
민준은 이것이 종교적 세계관과 비슷하다고 느끼곤 한다. 특정 조건을 만족시키며 율법에 맞추어 살면 사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믿음처럼, 국가가 시키는 대로 순종적으로 살면 노후에 경제적인 걱정 없이 살 수 있다.
물론, 인간의 경우 만 75세에 해당하는 그 연령을 넘기면 종족을 막론하고 사망률이 급증하는 것은 언론에서 잘 다루지 않는 주제였다.
“형님도 그런 거 신경 쓰세요? 돈도 많이 버시는 양반이.”
“그냥. 남들 다 받는 거 못 받으면 억울하잖아.”
“대신 오래 사시잖아요. 쿼터 엘프는 수명은 대체 얼마나 되는 겁니까?”
“······나도 몰라.”
“아무튼 그것 때문에 지금 셋째 형이 아주 울상이에요. 요즘 아무래도 벌이도 시원찮은데 가게 문도 강제로 닫아 걸게 생겼다고.”
“정삼이 가게가 거기 있나 보지?”
저 집안 형제들 이름은 헷갈릴 일이 없다.
“네. 거기가 하필이면 봉쇄 구역에 포함되거든요.”
오크는 한배에 6~8명의 아기를 낳는다. 인간으로 치면 다란성 다둥이인 셈. 그 시대 오크들이 그렇듯 정팔의 부모도 이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은 탓에 8남매는 첫째 정일부터 막내 정팔까지 단순 명료한 넘버링으로 작명되었다.
그렇기에 정팔이네 넷째 형과 여섯째 누이의 학창생활을 상상할 때면 민준은 복받치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곤 했다. 가뜩이나 오크로 살기 힘든 시대였는데.
“그건 그렇고.”
정팔이 많이 봐 줬다는 듯이 화제를 바꿨다.
“다음 수는 대체 언제 두실 겁니까? 언제까지 말 돌리실 거에요?”
두 사람 앞에는 바둑판이 놓여 있고 지금은 민준이 둘 차례였다. 끊임없이 다른 대화거리를 꺼내면서 시간을 끌어온 민준은 결국 포기했다.
“한 수만 물러줘라.”
“전 그런 거 모릅니다.”
“넌 범인은 안 잡고 하루 종일 바둑만 두냐? 왜 이렇게 잘해!”
“살아온 시간을 고려하면 저보다는 형님이 훨씬 많이 두셨겠죠.”
“이런, 젠장.”
투덜거리며 지갑에서 5만원짜리 지폐를 꺼낸다. 정팔은 껄껄대며 냉큼 낚아챘다.
“다음에는 카드 어때? 아니면 화투도 좋고.”
“마법사랑 패 까는 게임을 해요? 제가 머리에 총 맞지 않은 이상 어림없습니다.”
카드 뒷면을 보는 일 따위는 민준 정도 되는 마법사에게 손쉬운 일임을 정팔은 잘 알았다.
“내가 그렇게 치사한 놈으로 보여?”
“치사한 건 모르겠고 제가 아는 마법사 중에 제일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긴 하죠. 맥주 다 드셨죠? 냉장고에서 좀 더 꺼내 올 게요.”
정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기를 하는 듯 바둑판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민준이 눈을 돌리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래, 가서 캐시가 무슨 사고 안 쳤는지 한 번 쓱 보고 와라.”
“걔는 대체 뭘 하길래 이렇게 오래 틀어박혀 있어요?”
정팔이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2층 복도 건너 편에 있는 민준의 집에 가 있었다. 그의 질문에 민준은 더욱 침울해진 표정으로 답했다.
“우리에게 선보일 새로운 레시피가 있대.”
눈동자를 살짝 올린 민준은 공포에 질린 오크라는 보기 드문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왜? 하필 지금? 어째서요? 갑자기?”
“······유튜브 그거 빨리 없애 버려야 돼.”
한숨을 쉬며 우울하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안 그러면 걔가 언젠가는 우릴 다 독살하고 말 거야.”
잠시 후 민준의 집 현관문을 열자 마자 정팔이 감지한 것은 지독한 탄내였다.
“야, 서린아! 너 설마 불냈냐?!”
퉁명한 대답이 돌아왔다.
“호들갑 좀 떨지 마세요. 그냥 좀 태운 거에요.”
후각이 둔감한 오크 코에 이 정도로 강렬하게 느껴졌다면 인간 기준으로는 119를 호출할 충동과 싸울 정도일 터.
뭔가를 볶는 건지 고문하는 건지 모를 움직임으로 열중하는 캐시를 지나쳐 냉장고로 가다가 정팔은 쓰레기통 안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한때는 식재료였을 숯덩어리를 내려다보며 중년의 오크는 말한다.
“화장을 해도 이렇게 야무지게는 못 태우겠네.”
혀를 끌끌 차다가.
“!”
기가 막힌 생각이 난 듯이 그녀에게 말했다.
“저기, 이럴 거면 아예 형님한테 그 후라이팬 좀 빌려 달라고 하는 건 어떠냐?”
손잡이를 잡기만 하면 인공지능이 쏟아내는 자기 PR을 정팔은 잊지 않고 있었다. 자체 내장된 레시피가 200만개에 달할 뿐만 아니라 누가 사용해도 걸작 요리가 나온다는 후라이팬.
그 말이 사실이라면 캐시 역시 구원해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자칭, 주부들의 비밀병기이자 주방의 마법사라던데? 솔깃하지 않아?”
캐시가 못마땅한 듯이 대꾸했다.
“저도 당연히 부탁해 봤죠. 그런데 절대 안된다고 하던데요?”
“왜?”
“그 후라이팬 완전 상변태에 개또라이라고··· 그런 텔레파시에 장기간 노출되면 정신이 오염된다고요. 내가 앤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정팔은 말한다.
“좀 더 간곡하게 부탁해 봐. 정성이 부족한 거 아니였을까? 그걸 간절하게 원한다는 필사적인 호소를 표출하라고.”
그 의도를 알아 차렸는지 아니면 흘려들었는지 캐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양손에 맥주 캔을 든 채 문 밖으로 향한다. 이번 시도는 실패인 모양이다.
그때 그의 등을 향해 캐시가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혹시··· 아저씨는 알고 있었어요?”
그가 고개를 돌리며 되묻는다.
“뭘?”
그녀는 잠시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싱겁기는.”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맥주캔을 민준에게 내밀었다. 승부욕이 타오르기 시작한 (자칭) 쿼터 엘프는 이대로는 끝낼 수 없다며 체스 판을 꺼낸 상태였다. 말을 판 위에 정렬하고 있는데 민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누구야, 이 중요한 순간에!”
폴더폰 바깥 액정 디스플레이를 확인한 민준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누군데요?”
“있어, 재수 털리는 엘프.”
‘블레어 캠벨 (젠킨슨 왕비서)’라고 표시된 폴더폰 덮개를 열며 퉁명스럽게 말한다.
“여보세요?”
수화기에서 몇 마디 말이 흘러나오나 싶더니.
“!”
민준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
민준이 전화를 받기 몇 시간 전.
엘프 비서실장, 블레어 캠벨은 자신의 사무실에 있었다.
혼자는 아니었다. 당초의 달달한 연기를 사무실 가득히 뿜어내고 있는 요정과 함께다. 방 안 공기는 달달했지만 분위기는 그렇지 못했다. 두 사람은 방금 접한 충격적인 소식 때문에 말을 잇지 못하는 상태였다.
무겁고도 진득한 침묵을 뚫고 블레어가 다시 물었다.
“정말··· 정말로 다 털렸다고요?”
이미 다섯 번을 반복한 질문이었다. 둘은 침착을 잃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항상 사무적인 표정과 말투를 유지하는 그녀 답지 않게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고 얼굴도 미세하게 무너져 내렸다.
요정이 엘프의 질문에 답한다. 이것 또한 다섯 번째,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대꾸였다.
“그래, B-39 구역에 들어있던 모든 것이··· 전부 사라졌어. 다른 구역 결계는 손도 대지 않았어. 거기에 있는 것만 딱 털어갔다니까.”
북한산 창고 내부는 수많은 셀(Cell)로 구분되어 있는데, 최근 정체 불명 화물이 대량으로 들어온 B-39 구역만 봉인이 깨지고 깡그리 도난당한 것이다.
언론에 보도된 어젯밤의 북한산 산불은 거대한 주문을 발동시키기 위한 제례(祭禮)였다. 그 불은 용이 직접 설치한 결계도 깨 버렸으며 물질계와 영계를 동시에 태워서 침입자들의 흔적까지 없애 버렸다.
도저히 평범한 자들의 소행이라고는 볼 수 없는 스케일과 배짱이며, 그 정체를 추측하는 것이 무서울 정도의 실력이다.
몸을 으스러뜨릴 듯한 두려움을 느끼며 부동산 보안관리 총책임자인 라리사가 묻는다.
“저기, 언니야. 나도 무서워 죽겠으니까 제발 말해 줄래? 거기에 뭐가 들어가 있었는지?”
본래 금고지기는 금고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라리사도 그 본분에 충실한 편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잠시 망설이던 비서실장은 오래 미뤄왔던 대답을 돌려준다.
“······지금 회장님이 이계로 출장가신 이유가 그곳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뭐라고?!”
요정의 머릿속에 저절로 악몽과 같은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회장이 직접 이차원으로 건너갈 정도면 매우 중요한 비즈니스일 터다. 서로 쥔 패를 쉽게 보여주지 않고 마지막 일 전 한 푼까지 흥정하며 조건을 조율하는 치열한 거래.
그런데 회장이 며칠째 통신에도 잘 응하지 않을 정도로 몰두 중인 그 건이 갑자기 중간에 수포로 돌아가 버린다. ‘아, 고객님들. 어쩌지요? 제가 팔려고 했던 물건이 그 사이에 털려버렸답니다. 제 우수한 직원들 덕분입니다. 하하! 하하하!’
“······미쳤어. 미쳤어!”
마음을 진정시키기엔 약빨이 모자랐는지 라리사는 피우던 당초를 허공에 던져버렸다. 그리곤 품에서 투명한 비닐 지퍼백을 꺼낸다. 안에 든 것은 새햐얀 가루. 머핀 등 제빵류에 뿌리는 고운 입자, 달달한 프로스팅 가루였다.
거친 숨소리를 흘리며 손등에 솔솔 뿌린다. 동요 때문에 몸이 흔들렸지만 손등에 굵게 튀어나온 핏줄과 말린 닭 껍질 같은 주름 덕에 흘리지 않았다. 코를 들이대고 흡! 단숨에 빨아들였다.
“휴우.”
코 점막에 당분이 스며드는 황홀감을 느끼며 간신히 공황을 억누른 요정은 몇 초 침묵을 지킨다. 그리고 간신히 다시 물었다.
“언니야.”
“네?”
이어서 입에 올린 것은 아직도 불안에 잔뜩 젖은 질문이었다.
“젠킨슨 그 양반 식단에 마지막으로 엘프나 요정이 올라갔던 게 언제적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