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7
27. Princess Run (2)
요정의 질문을 듣고 엘프는 진저리나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상대의 불안에 공감한다는 표현이 아니라 어떻게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있냐는 항의에 가까웠다.
“라리사!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그런 무도한 말씀을 하시는 거죠?!”
블레어는 자신이 모욕당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상관에게 향하는 무신경한 언어를 자기에 대한 흠집내기로 받아들일 만큼 충성심이 깊은 엘프였다.
예상보다 격한 반응에 놀라며, 요정은 반쯤 맛이 간 눈으로 중얼거렸다.
“목숨 구걸할 만큼 똑똑한 동물은 안 드시나? 그렇다면 다행이네.”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세요. 회장님은 아래사람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죽음으로 징계하는 잔악한 폭군이 아니세요. 옛날 옛적 용들처럼 부하가 일 못하면 잡아먹고 일 잘해도 자기가 배고프면 잡아먹는 사이코패스를 상상하면 곤란해요.”
그러더니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리고 회장님이 고기 끊으신 지도 꽤 되었단 말이에요.”
“그럼 설마 채식주의자인가?”
“재미없는 농담은 그만하시죠.”
몇시간 뒤, 그들은 젠킨슨이 회신을 미뤄왔던 것이 아니라 지구와 이계 간 통신망에 장애가 발생했던 것임을 뒤늦게 알았다.
“이제 다시 연결됩니다. 라리사, 서류 전송 준비하세요.”
블레어 캠벨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이 큰 사고를 쳤어도 합리적 수준을 넘어서는 징계가 닥칠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간신히 통신망이 복구되고 회장과 화상으로 대면하여 상황 보고를 마친 그녀는 자신의 믿음이 제발 깨지지 않도록 속으로 간절하게 빌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들은 내용을 한 번 정리해 보지.”
마법 화상 속의 젠킨슨 회장은 드래곤 형태로 돌아간 상태였다. 지구와 달리 위원회 본부에는 각종 종족을 모두 배려할 수 있는 숙소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몇십 층 높이 빌딩을 옆으로 뉘인 스케일의 탁자 위에 손을 올리고, 학교 운동장 만한 서류를 펼친 채 용은 인상을 찡그렸다. 통신이 복구되자 마자 요정이 지급으로 전송된 자료를 그쪽에서 출력한 것이다. 그의 콧김을 따라 불길이 일렁거렸다.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증거.
엘더 드래곤이 눈동자를 천천히 움직이며 서류를 다시 한번 읽었다. 보안 담당자의 입장에서 써 내려간 문장들. 완독한 뒤에 입을 연다.
“그러니까, 지난 밤에 B-39 구역의 ‘보물’이 모두 털렸다는 것이지?”
“······네, 그렇습니다.”
“심지어 창고 주변에 수상한 기미가 보이는 것을 사전에 파악했는데도 속절 없이 당했다는 것이고?”
“······네, 그렇습니다.”
같은 대답을 되풀이할 때마다 엘프는 자기 자신이 더욱 작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범인의 흔적은 전무하고, 요정의 능력으로도 추적이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이번에도 대꾸할 수 있는 말은 하나 밖에 없었다.
“······네, 그렇습니다.”
고룡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뿜은 열기가 화르륵! 소리를 내며 보던 서류를 태워버린다. 비서실장은 저것이 젠킨슨이 부하에게 보이는 가장 격렬한 분노 표현임을 잘 알았다.
“캠벨. 자네는 알고 있지? 내가 왜 차원 도약을 여섯 번이나 하며 위원회 본부까지 와서 며칠째 머리를 싸매고 고생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 창고 안에 있는 물건 때문이었어. 그런데 그걸 털렸다고? 라리사 안드레예바.”
기습처럼 말꼬리에 자기 이름이 불리자 요정은 잔뜩 긴장하며 대답했다. 약기운은 이미 전부 빠진 상태였다.
“······네, 넵!”
“우리 회사가 당신 한 명을 위해서 쓰는 돈이 얼마나 되는 줄 아나?”
“······.”
대답을 원해서 한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요정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짐작이 맞아떨어진 듯 용은 대답할 여유를 주지 않고 바로 이어 말했다.
“자네 이름으로 된 코스트 센터(Cost center)에 연결된 비용 내역을 난 매달 보고 받지. 기본 급여는 물론이고 상여금, 복리후생비, 접대비, 지급수수료, 소모품비, 임차료 등등··· 다 합해서 한 달에 백억 가까운 금액이 나가고 있어. 우리가 상위 1% 계약 요원에게 지급하는 임무 수당과 비슷한 돈이지만 난 지금까지 그것을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네.”
잠시 침묵한 다음 덧붙인다.
“자네가 그 분야에 있어서 최고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그의 어조는 차분했지만 말하는 내용은 요정의 심장을 날카롭게 후벼 파고 있었다.
“그렇게 믿은 이유는 최고의 실력을 가졌다고 당신이 내 앞에서 스스로 자신했기 때문이지. 드래곤은 진입할 수도, 엿볼 수도 없는 영계를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그 능력 말이야.“
드래곤의 눈동자에 무거운 빛이 서린다.
“금고가 뚫린 것을 가지고 책망할 생각은 없다네. 그 안의 결계 중 상당 부분은 내가 직접 설치한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 문제는 그들을 추적할 방법이 전혀 없다고 보고하는 당신의 태도야. 내가 그런 말을 들으려고 그만한 돈을 지불하고 있나?”
“······죄송합니다.”
“그리고, 블레어 캠벨.”
“네, 회장님.”
“지구의 이계 통신망에 며칠 간 장애가 생겼다는 건 나도 알고 있네. 헌데, 오직 그 이유 때문에 내게 직접 보고하지 못했다고? 수상한 낌새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해 보게. 정말로 방법이 없었나?”
“······.”
“내외부 환경적 조건이 어떻게 흘러가든 절대로 영향을 받지 않는 통신망의 존재를 나도 알고 자네도 알지. 지구에 소재한 위원회 지부를 찾아가서 긴급 지원 요청을 했다면 그들의 영계통신망을 빌려 쓸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자네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
사실이었다.
“왜냐고? 간단해. 민감한 정보가 새어 나갈까 무서웠던 거야. 그들은 젠킨슨 컴퍼니의 일부가 아니고 신뢰할 수 없는 타인이니까.”
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자네는 ‘그’에게 연락을 하지도 않았어. 내가 부재한 상태에서 제일 믿을 만한 조력자에게 말이야. 이유는 똑같지. 그는 어디까지나 계약 요원이니까. 일시적인 거래 조건에 묶인 상대일 뿐 완벽하게 믿을 수 없는 타인이니까.”
“······죄송합니다.”
“지금 그 사과는 매우 위험하네. 해석하기에 따라 앞으로도 같은 일이 반복될 수도 있다고 여길 수 있는 말이니까.”
“그, 그렇지는!”
“나도 엘프의 심리적 특징은 잘 알고 있네. 자네들에겐 ‘신뢰’에 대한 이슈가 있지. 어지간하면 자기가 그어 놓은 선 안으로 상대를 들여 놓지 않아.”
블레어는 인정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가 자네를 고용한 이유는 앞으로도 계속 엘프처럼 생각하고 움직일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 아니야. 자네가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에 고용한 걸세. 타고난 종족의 한계, 평범함, 평균에 구속되는 수준이라면 나와 함께 일할 이유가 없네.”
요정과 엘프는 말을 잃고 고개를 숙였다. 젠킨슨은 그 두 사람이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준 다음에 자기가 계획하는 바를 말했다.
“통화를 종료하고 나는 바로 위원회에 이 사실을 공유할 걸세.”
그 말은 요정으로서는 의외였다. 젠킨슨이 일단은 위원회에게 이 사실을 숨기고 부하들을 더 지독하게 닦달하는 경우까지 각오했기 때문이다. 위원회가 눈치채기 전까지 물건을 찾아오라고 말이다.
용은 바로 그 이유를 입 밖에 꺼냈다.
“그 도둑놈들이 어떤 배경을 가졌고 어떤 목적으로 움직이든 한 가지는 확실하네. 그들은 최대한 빨리 지구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떠나려고 할 거야. 다행히 그 사이 차원을 잇는 여객선이나 화물선의 지구 출항 기록은 없네. 난 위원회와 협력해서 지구의 모든 ‘터미널’을 닫아버릴 거야.”
그는 차원 봉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내가 지구로 출발해도 도착까지 며칠은 걸려. 그 사이에 최대한 흔적과 실마리를 찾아놨으면 좋겠군.”
드래곤은 비서에게 지시한다.
“캠벨, 그에게 연락하게. 원하는 조건은 다 맞춰준다고 그래.”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안드레예바.”
“······네!”
“앞으로 이런 식의 보고는 삼가는 편이 좋을 걸세. 그렇지 않으면 닥터 예브도스가 내게 했던 충고를 재고하게 될 것 같거든.”
“닥터··· 예브도스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용족은 친절하게 요정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 세계에 오기 전까지 나를 담당하던 주치의 이름이네. 그의 충언을 받아들여 단백질을 끊었지. 내가 기대하는 수준으로 장수하려면 그렇게 하라고 하더군.”
별 사고가 없으면 수천 년도 살 수 있는 드래곤이 대체 얼마나 오래 살려고 유난을 피우나 속으로 투덜거리던 요정은.
“!”
곧 그 말이 품은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몸을 굳혔다.
용은 그 주치의 덕에 안 먹고 있는 고기를 라리사 때문에 다시 입에 댈까 고민해 보겠다고 말한 것이다.
식단을 바꾸고 육식을 다시 시작하게 되면 그의 접시에 오른 재료가 소고기이든, 돼지고기이든, 양고기이든······. 그렇지 않으면 요정 고기이든 드래곤에게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드래곤은 다시 열 두개의 눈동자를 돌려서 엘프에게 말한다.
“캠벨, 명심하게. 통신을 종료하면 바로 민준에게 연락해.”
그렇게 엄포를 놓은 뒤 젠킨슨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상황이 참 고약하게 되었군. 이 이상으로 빚을 달아 놓고 싶지는 않았는데.’
에델리네스와 장태준 건 때문에 민준이 그를 도와줬던 일은 서로 똑같이 주고받는 거래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실상은 젠킨슨 쪽이 아쉬운 부탁을 한 것에 가까웠다. 두 건 모두 그가 외부에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민준에게 의뢰를 넣은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이 저울이 더 민준의 방향으로 기우는 것을 젠킨슨은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를 찾게 되는 것은 그만큼 상대를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드래곤은 실낱같은 기대 속에서 생각한다.
‘그래. 그라면··· 무슨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
“이건 안 돼요. 이런 식으로는 방법이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제 눈에도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민준이 그렇게 선언한 것은 비서의 급한 호출을 받고 다음날 잿더미가 된 북한산에 도착한 직후의 시점이었다.
비서는 입술을 짓이긴다.
“역시 그렇군요···.”
젠킨슨의 명령대로 그들은 민준에게 의뢰를 넣었다. 혹시라도 단서가 나올까 싶어 화재 현장은 물론 외부인 출입이 엄금된 창고 내부까지 실사를 진행한 참이었다. 어차피 안이 다 털려서 비어 있었기에 걱정할 거리도 없었다.
“흐음.”
주의 깊게 현장을 살피던 민준이 라리사에게 묻는다. 두 사람은 이번이 초면이었다.
“영계 탐색은 이미 했겠죠?”
요정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도 다 타버려서 아무 것도 없었어.”
“영계에 직접 건너갈 수 있는 요정 눈에도 안 보이는 게 제 눈에 보일 리는 없잖습니까.”
그렇게 단언하며 민준은 두 눈에 감싸 놓았던 백색 불꽃을 바로 꺼버렸다. 엘프가 주저하며 말했다.
“그럼··· 정말 방법이 아무것도 없을까요?”
민준은 용이라는 뒷배에 도취되어 자신의 진짜 정체도 모른 채 땍땍거리던 비서가 이렇게 쩔쩔매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는 이대로 좀 더 약을 올리며 저열한 기쁨에 취해볼까 하다가 다 부질없는 짓 같아서 관두기로 했다. 그런다고 달란트 한 푼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영계 탐색 말고는 무슨 방법으로 수색을 해 봤습니까?”
“화재가 진압된 지 겨우 24시간 조금 지나서 많은 방법을 시도하진 못했어요. 일단 사이코메트리 능력자들은 동원했고···.”
“그래 봤자 아무것도 안 나왔겠죠. 잔류사념은 마법으로 간단하게 지울 수 있습니다. 이런 대규모 주문이면 더더욱 흔적이 안 남아요.”
“맞습니다. 그리고, 회사에서 고용한 영체감응력자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어요.”
“당연합니다. 저 금고에 설치된 퇴마진을 보니 원래부터 고스트는 이 주변에 얼씬도 못했을 겁니다. 설사 한 둘 기웃거리다가도 불이 타오르는 순간 휩쓸려서 사라졌겠죠. 지금 이 근방 3km 이내에는 영체 한 위(位)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군요.”
망령과는 달리 멀쩡하게 자아를 유지하고 논리적 증언도 가능한 유령과 인터뷰하는 방법도 쓸 수 없을 것 같다. 민준은 잠시 턱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긴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요정이 아이디어를 냈다.
“저기··· 오빠. 드루이드를 초빙해 보면 어떨까? 여긴 산이잖아. 야생 동물도 좀 있는 편이고. 걔들이 혹시 그날 밤 수상한 놈들을 봤는지 드루이드를 시켜서 캐 보면?”
“그들은 희귀한 능력자에요. 당장 수배하기도 힘들고··· 애초에 산불 속에서 살아남은 동물들은 전부 멀리 도망가서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을 겁니다. 많이 놀라고 지쳤을 거에요.”
거기까지 말하던 민준은.
“!”
뭔가에 생각이 미친 듯 눈을 반짝인다.
‘어? 잠깐만. 이거···. 그러고 보니!’
사이코메트리스트도, 영체감응력자도, 드루이드에게도 불가능하지만 자신에게는 가능한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그래, 80년대 이전과 비교해서 요즘 오히려 이런 산에 사는 동물 개체 수가 늘어난 편이라고 했지.’
그 야생동물들이 전부 화재를 피해서 도망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살아남은 동물들은 멀리 도망가서 주변에 없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미 죽은 동물은 도처에 널려 있을 것이다.
숨을 거둔 지 3일도 채 지나지 않은 생물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