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77
278. 나의 가장 소중한 (13)
***
아시프-1이 주목한 것은 적 진영 후방의 모함들, 정확히는 그 배의 탑승자들이었다.
어차피 자폭시킬 전함에는 굳이 많은 승무원이 필요없다. 필수 오퍼레이션 인력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투기에 태워 출격시키는 것이 효율적이다.
전함은 앞서 보낸 전투기들이 교단의 실드를 갉아 먹기를 기다렸다가, 마지막으로 전력의 질주만 펼치면 되기 때문에.
그런데.
‘남은 80여 척의 배··· 전부 승무원이 너무 많은데?’
곧 터질 모함에 왜 그리 많은 사람이 필요한가?
떠오르는 답은 하나였다.
‘눈속임?’
거기에 타고 있는 중요한 누군가를 숨기기 위해 위장을 깔아 놓은 것이라면?
아시프-1은 정신파를 넓게 펼쳤다.
전함 탑승자들의 상태는 전부 비슷비슷하게 보였다 암시에 지배당하고, 가공된 분노에 활활 불타오른다.
하지만 아시프-1은 더 이상 속지 않았다. 민준의 말을 떠올리며 더욱 면밀히 들여다본다.
저 중에 누군가는 암시를 당하는 쪽이 아니라, 암시를 심어놓고 조작하는 쪽이 분명했으므로.
“······!”
그리고 발견했다.
그 배의 외견은 다른 전함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옛 전쟁 때 쓰던 구시대적인 모델.
하지만 그 내부에는 독특한 정신파를 내뿜는 존재가 있었다. 그 자신도 암시에 당한 것처럼 뒤틀린 정신파를 덧씌웠기에 아시프-1이 한 번 놓쳤던 것이다.
그가 읊은 좌표를 따라 민준은 바로 텔레포트했다.
파앗!
민준의 시야가 하얗게 바뀌고, 시간이 흐느적거리며 녹아내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묘한 부유감. 일렁이는 공간의 틈 사이로 몸을 날린다.
그는 지금 까마득한 거리를 넘어, 적측 전함 내부로 건너가려 한다. 그의 몸에는 이미 충분한 ‘연료’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일그러졌던 공간이 다시 맞물리며 접합한다. 제자리를 되찾으며 안정화되는 시공간의 틈. 그 사이로 민준이 뛰쳐나가려던 찰나.
“······!”
그는 위화감을 느낀다.
그리고 위화감은 곧 위기감으로 탈바꿈했다.
‘함정!’
분명 안정화된 좌표에 닿기 직전이라 생각했는데.
아직 닿지 않았다.
목적지에 기묘한 왜곡장이 숨어 있었음을 민준은 깨달았다. 멀리서 지성체들의 정신세계만 훑어본 아시프-1은 몰랐을 터.
출렁이는 공간은 흉기처럼 날을 세워, 민준을 찢어 버릴 듯이 쇄도했다.
이대로면 공간의 틈바구니에 끼어 동강난 채 흩어질 것이다. 설사 재생한들 차원계의 쓰레기장, 어비스까지 휘말려 갈 위기.
하지만.
‘허튼 수작을!’
민준이 노호하며 눈을 부릅떴다.
—!
덫처럼 자신을 끌어당기려던 공간의 장악력을 단호하게 뿌리쳤다. 용혈에서 흡수한 힘이 전신에 들끓었다. 찰나에 좌표를 재계산한 민준은 주문을 다시 완성했다.
팟!
그는 왜곡장의 경계 밖으로 다시 한 번 텔레포트했다.
그런 직후 느낀 것은, 피부 위로 쏟아지는 적의어린 시선들이었다.
‘여긴?’
빠르게 상황 파악을 끝낸다.
타깃에서 아주 조금 틀어진 좌표.
일단 전함 내 진입에는 성공했다. 여기 어딘가에 그가 목표로 하는 이능력자, 즉 아시프-1의 열화판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먼저 이 장애물들을 치워야 할 것이다.
“크르르르···!”
그를 둘러싼 백여 명의 전사들.
고대 종족은 없다. 민준은 그들 모두 수형자임을 쉽게 알아보았다.
아시프-1이 본 바에 따르면 저들은 조작된 기억에 붙들려 있다. 동공은 충혈되어 번뜩이고 얼굴은 귀신처럼 일그러졌다.
‘완전히 잠식당했군.’
저토록 격렬하게 분노할 수 있는 이유는 그 가짜 기억이 진짜를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수형자가 되며 지워졌던 중요한 기억. 그 파편이 비논리적인 갈망으로 조립되어, 적을 공격하라고 부추기는 것.
‘꼭두각시들이다.’
민준은 마치 무시하듯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저 너머, 진로를 가로막은 벽을 마주하게 어깨를 돌렸다.
그가 발걸음을 내딛은 것과 수형자들이 벼락처럼 몸을 쏘아 보낸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파지지직!
오러 마스터의 검기가, 마법사의 불꽃과 뇌전이, 염동력자의 역장이 촘촘한 빗줄기를 만들며 쏟아졌다.
민준은 여전히 그들을 보지 않았다. 몸은 여전히 벽을 향한 채다. 그가 허공에 내민 발이 다시 땅을 닫기 직전, 수형자들의 공격이 민준의 살갗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빛이 있었다.
—!
섬광이 번뜩인 순간에도 민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발을 차례로 딛는 속도 역시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일정한 보폭.
그런 그의 뒤에, 전신에 피칠갑을 한 수형자들이 뒹굴고 있었다.
신은 자문했다.
‘지금, 난 왜 저들을 죽이지 않았지?’
조금의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는 수형자들이지만 모두 숨은 붙어 있었다.
물론 수형자들이 자의로 공격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조종당했다는 이유가 있긴 하다. 하지만 민준은 이 선택에 감정적인 원인 역시 영향을 끼친 걸 알았다.
곧 자아의 저 밑에서 답이 떠올랐다.
‘그렇군.’
민준은 옛날에 이미 수형자 시스템과의 연결을 끊어 놓았다. 그렇기에 당시처럼 저들 머리 위에 인식 번호가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준은 개중 몇몇을 알아보았다. 영혼이 보이기 때문이다.
비록 육신은 그때와 달라졌으나 정신의 근원에는 변함이 없다.
‘아시프-1, 892. 아시프-5,300. 아시프-100,970···.’
그 외에도 몇 개의 번호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위원회는 저들을 전투기에 태워 일회용 방패로 쓰는 대신 여길 지키도록 배치했다. 수형자 중에서도 특별히 강력한 자들이자, 그만큼 오래 살아남은 자들이다. 개중엔 본래 장생종이었던 이들이 대다수일 터고.
그리고 노역을 오래 버텼다는 것은, 최장수 수형자였던 아시프-666과 어떤 방식으로든 엮인 적이 있다는 뜻이다.
“······.”
신은 내면에 존속한 수형자의 자아, ‘아시프-666’의 그것이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새삼 자각한다.
당시 엮였던 이들이 아직도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채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존재감이 강한 이는···.
콰지지직!
상념을 끊어 내고, 계속 걸어나가며 민준은 벽에 손가락을 박아 넣었다. 그 순간 그의 육신은 물질계와 영계에 동시에 존재했다. 코끝에 용혈의 향이 감돌고 손가락에는 백광색 불꽃이 타오른다. 민준은 두 손을 양쪽으로 젖히는 동시에 활짝 펼친다.
그 힘의 방향을 따라, 공간이 찢어졌다.
물리적인 벽뿐만 아니라 그에 딸린 마법적인 결계 역시 함께 튕겨나간다.
그 뒤로 드러난 공간을 향해 민준은 망설임 없이 들어섰다.
***
진입하고 나니 더욱 확실해졌다.
이 배의 낡은 껍데기는 위장에 불과했다는 것이.
‘이건···.’
위원회 기준으로는 최신식이라고 해야 할 장비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들이 발휘할 수 있는 마도기술의 정점, 다시 말해 민준이 전해준 지식의 최신 해독판을 보며, 신은 짐승들이 어디까지 따라왔는지 쉽게 읽어냈다.
또한 잠시 눈길을 주는 것만으로도 민준은 이곳이 어떤 시설의 일부를 그대로 옮겨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천장을 타고 이어지는 수많은 갈래의 파이프. 그 안에는 심상치 않은 액체가 흐른다. 짙은 마법의 기운. 하지만 용혈처럼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을 탄 것이다.
민준은 검지를 치켜올려 허공에다 대고 그었다.
파앗!
파이프가 갈라지며 안에 흐르던 액체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물줄기는 민준의 옷자락을 적시는 대신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는 의도적으로 한 방울만 손가락 위에 얹었다.
‘이건···.’
이 마법 용액을 만들기 위해 쓰인 다양한 성분을 짚어낸다.
그러는 사이에도 또각, 또각. 발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오덴스 족의 독액.’
신은 다시 한번 아시프-666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최근에 마주친 오덴스는 지구에서 본 은행 강도였기 때문이다.
노파로 폴리모프를 했던 그 수배자는 어설픈 인질극을 벌이다가 민준의 소환수에게 대가리가 깨져 죽었다.
그 종족은 대상과 신체접촉을 한 뒤, 살갗에 구멍을 뚫고 독액을 투입하여 자신의 인형처럼 조종한다.
‘오베르 거미의 페로몬.’
다른 종족 수컷의 정소를 먹어 치운 다음 똑같이 생긴 병정을 낳는 괴물.
암컷 거미는 먹잇감이자 씨 공급원이 되는 수컷을 유혹하기 위해 독특한 페로몬을 분비한다. 역시나 그것에 당한 이는 거미의 꼭두각시로 전락하는 것이고.
‘ISP 발현자의 혈액.’
앞서 언급된 것만큼 강력하지는 않지만, 원래 불가능했던 것을 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정신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유전적으로 매력을 느낄 수 없는 종족까지 매력을 느끼게 만드는 매혹의 유전자.
‘그렇군.’
민준은 이 마법 용액이 무얼 위한 것인지 확신했다.
‘가용한 재료는 다 가져다 쓴 거군. 불완전한 기술과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서.’
민준은 수형자 시절 위원회에서 공급하는 파란 알약을 정기적으로 복용한 바 있다. 그 말고 다른 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신 붕괴를 막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하지만 그게 과연 그걸 목적으로 한 약이 맞았을까? 아니면, 그저 다들 그냥 그렇게 믿고 있었을 뿐이 아닐까?
이어서 민준은 교단 지휘선에 있는 엔델리온 아이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암시에 걸리기 직전 송곳 같은 도구를 통해 몸에 어떤 주사액을 주입 받았다고 했다. 그 액체 역시 알약과 비슷한 푸른색이었다고.
그리고 방금 전, 그에게 달려들다가 순식간에 제압당한 수형자들. 민준은 그들이 입고 있던 전투복에 특이한 장치가 숨겨진 것을 알아차렸다. 목덜미에 파고든 뾰족한 바늘과, 그것과 연결된 실린더 형태의 관.
모든 사실이 맞물리며 한 가지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 원료가 여기에 있었군.’
위원회는 완전체 아시프-1처럼 매개 없이 상대를 조종하는 단계까지는 오지 못했다.
일단 이 약물로 이지를 흐려 놓은 다음에야 통제가 가능한 것이다. 아마 노동교화형 때 제공되는 육신도 미리 이것에 절여진 상태이리라.
그리 판단하며 민준은 계속 걸었다. 그러고 나서 가로막은 또 한 겹의 벽을.
파지직!
거침없이 잡아 뜯었다.
그러자 눈앞에 그것이 나타났다.
“······!”
전함 내로 텔레포트 한 뒤로 한 번도 멈추지 않았던 걸음이 드디어 멎었다.
민준은 살짝 눈을 찡그리며 중얼거린다.
“···이런 형태였나?”
상대는 반응이 없다.
그는 ‘저것’이 지금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침입자를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민준은 스스로의 정신을 보호하던 두터운 보호막을 살짝 열었다. 그제서야 상대도 그의 존재를 감지했다.
=거기, 누구지?=
우주선 내, 가장 깊숙한 곳에 펼쳐진 드넓은 공간.
그리고 그 중심부에 한 마리의 드래곤이 기괴한 자세로 널브러져 있었다.
그 자세는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벽에서 튀어나온 각종 관과 기계 팔이 용의 온몸을 감쌌다. 날개와 양다리는 먼 옛날에 잘려 나간 것처럼 뭉툭했다.
두 눈이 있던 자리 역시 오래전에 파낸 듯 텅 빈 구멍 두 개만 남아 있었다. 코와 입에는 호흡기 역할을 하는 관이 연결되었고, 영양 공급은 머리가 아니라 배를 통하는 것 같다. 옆구리에 꽂힌 관에 걸죽한 영양액이 흘러 들어가는 장면이 보였다.
그 외에 몸 곳곳에 꽂힌 크고 작은 관에는 오면서 본 푸른 액체가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민준은 드래곤의 연령을 가늠한다.
‘몸 크기를 보면 천살 내외.’
드래곤과 고대 종족 사이 전쟁 때 태어났다는 뜻이다.
용이 이어서 텔레파시를 보냈다. 매우 묵직하고 날카로운 의념이었다. 정신계열 능력자 특유의 파동.
=이상해. 읽을 수 없어.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 왔지?=
그 용을 바로 죽이는 대신.
민준은 의념을 발했다.
‘넌 누구지?’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용은 당황하다가, 다시 의심하고, 마지막으로는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갖는 듯한 의념을 보냈다.
=아··· 난 당신을 알아.=
횡설수설에 가까운 정신파가 흐르더니.
용은 다시 명징한 파동을 울렸다.
=난 기억을 지울 때 잊으라는 암시를 걸지. 당연히 다들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 그래서 시간이 꽤 오래 걸려. 그런데··· 여태 딱 한 명만은 너무 쉽게 암시에 걸렸어. 마치 자기가 원하는 것처럼.=
몸의 두드러지는 굴곡이라고는 어깨 위 밖에 남지 않은 용은 웃음에 가까운 정신파를 보냈다.
=그래, 그게 바로 당신이었어.=
민준은 관심이 없다는 듯 다시 한번 묻는다.
‘넌 누구지?’
그러자 드래곤이 답했다.
=난··· 아시프-500.=
‘수형자?’
드래곤은 상대가 의문을 읽어냈다.
=그래, 난 죄인이야.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인식 번호를 보면 알겠지만 당신보다도 먼저 노역을 시작했지. 내 죄는···.=
부화하자마자 안구를 척출당한 드래곤은 어둠 너머로 미소 비슷한 의미를 던졌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한 진실을 말하듯이 속삭인다.
=내 죄는··· ‘드래곤’으로 태어났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