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8
28. Princess Run (3)
촥!
요정과 엘프가 지켜보는 가운데 민준은 돌칼을 꺼내 빠르게 손목을 그었다.
“으악!”
늙은 요정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지만 옆에 선 블레어는 담담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스으으!
손목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뿌연 안개를 만들며 낮게 깔렸다. 재가 된 풀과 그을린 흙을 옅게 덮으며 빠르게 퍼진다. 민준의 의도는 이 혈무를 최대한 멀리 보내는 것이었다.
물론 생피만으로 광범위한 지역을 전부 커버하면 아무리 그라도 과다출혈로 죽고 말 것이다. 흑마력과 결합한 피는 공중에서 증식하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뭐야, 나 기분이 좀 이상한데?”
먼저 변화를 눈치챈 것은 육감이 예민한 요정이었다. 처음에는 이유 없는 불쾌감이었지만 그녀가 그 기분 변화에 적합한 이유를 붙일 수 있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역한 냄새가 나.”
머뭇거리더니 한 마디를 덧붙인다.
“점점 다가오고 있어.”
잠시 뒤, 눈이 좋은 엘프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방금 그거, 대체 얼마나 멀리 퍼뜨린 거죠?”
피안개의 도포 범위를 묻는 것이었다. 민준은 담담하게 답했다.
“반경 3킬로미터 정도?”
재투성이 폐허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작은 소리.
“우웁!”
요정이 인상을 찌푸리며 헛구역질을 했다.
타고 꺾여서 쓰러진 나무 사이로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는 무리 중에는 무엇 하나 몸 성한 것이 없었다. 산불에 휘말려 죽어버린 생물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피부가 녹으며 앞다리가 가슴에 붙은 고라니는 꿈틀거리면서 기어서 다가왔다. 깃털이 사라지고 날개에 뼈대만 남은 부엉이도, 주둥이가 오그라들어 이빨이 그대로 드러난 청설모도, 안구가 녹아내려 눈물자국 같은 흔적이 남은 멧돼지도 구르거나 간신히 비틀거리며 걸어온다.
사체 손상을 따지기 이전에, 죽었으니 당연히 움직일 수 없는 몸의 원동력은 흑마력이 대신하고 있었다.
아그작!
정신적 충격이 심했는지 요정은 품에서 사탕 한줌을 꺼내더니 거칠게 포장지를 벗겨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빨이 부러질까 걱정될 정도로 과격하게 씹는다. 반면 엘프의 얼굴은 여전히 잔잔한 호수 표면과 같았다.
“이건 엄밀히 말하면 사령술 아닌가요?”
심지어 궁금증을 드러내기까지 한다.
“결과물만 보면 똑같지만 근원이 되는 힘이 다릅니다.”
그 이상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고 그녀도 묻지 않았다. 산짐승의 언데드 무리가 다가올수록 민준의 표정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역시, 쩌릿쩌릿하군.’
부름에 응한 동물 사체엔 갑작스러운 죽음의 충격과 원한 때문에 이승을 떠나지 못한 망령이 붙어 있었다.
망령은 흔히 고스트라고 불리는 영체와는 구분된다. 그들과 달리 아주 제한적인 기억만 보유하며 이성적인 사고를 못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망령은 죽음을 맞이했던 순간, 혹은 죽음이 임박했던 나날의 기억에 매몰되어 의미 없는 반복행동에 몰두한다. 고통 속에 죽은 만큼 서린 원한은 지독했다. 잔류 사념과 고스트까지 모두 날려버린 마법적 산불에도 휩쓸려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언데드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민준은 그 잔혹한 기억이 머릿속으로 짙게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이런 걸 보면 역시, 인간보다 지능이 낮다고 해서 절대 공포심이 옅거나 통증을 적게 느끼는 것은 아니라니까!’
오히려 그렇기에 더 증폭되는 감정도 있다.
그들이 죽기 직전 느낀 혼란과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것도 여러 동물의 것이 섞여서 한꺼번에 쏟아진다. 같은 원인으로 맞이했고, 각자 다른 기억 속에 새겨진, 하지만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공평하게 끔찍한 죽음. 경험이 적은 술사라면 미쳐버리기에 충분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민준은 이마에 약간 땀방울이 맺혔을 뿐, 외면하거나 시간을 끄는 대신 그것을 똑바로 직시했다.
기억 속 풍경은 아수라장이었다. 폐가 익을 정도로 뜨거운 공기. 모든 것을 게워내고 싶은 매캐한 연기. 털을, 부리를, 수염을, 살껍질을 통째로 뜯는 듯한 아픔. 몸부림. 거친 울부짖음을 버티다 못해 결국은 찢어진 성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덮친, 시간이 지날 수록 심해지기만 했던 통증.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순간 몸을 짓눌렀던 무거운 어둠.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을 되돌리자.’
그의 의지가 전달되고 나서도 몇몇은 여전히 끔찍한 기억을 계속 쏘아 댈 뿐이었지만 시키는 대로 오래된 기억을 보내주는 망령도 있었다.
오감이 뒤섞여 쏟아지는 감각의 홍수. 그 혼란스러운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며 민준은 차례로 흔적을 살핀다.
불이 나기 직전, 깊은 밤의 기억.
민준은 동물들의 시각적 기억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야생동물은 한밤중 등장한 사람에게 호기심을 보이며 따라가서 구경하는 모험가들이 아니다.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멀리 도망갔을 것이다.
그렇다, ‘소리.’
‘야행성 동물 눈으로 바라보는 해상도는 나와 튜닝이 안 맞고 의미 있는 정보도 건지기 어렵다. 하지만 청각은 나보다 월등히 우수하지.’
민준은 어젯밤 그들이 들은 소리에 대한 기억에 집중했다. 그렇게 한참을 골몰히 집중하다가.
“휴우.”
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털썩!
그의 곁을 둘러싸고 있던 동물 사체들이 힘을 잃고 하나 둘 도미노처럼 연속으로 쓰러졌다.
“끝났어?”
도저히 볼 수 없다는 듯 눈을 감고 사탕을 으적거리던 요정이 물었다. 약기운이 도는지 혀가 살짝 꼬인 상태. 엘프가 그녀에게 답해 주었다.
“라리사, 아직 사체들이 주변에 널려 있으니 눈을 뜨지 않는 게 좋겠어요.”
약에 취한 요정이 쇼크에 빠질 경우 얼마나 골치아파 질 수 있는지 잘 알기에 선수를 친 것이었다.
“요원님, 뭔가 발견하셨습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등산로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을 서성거리던 자들 소리를 들은 동물이 있었습니다.”
침입자들이 주고받은 말은 대부분 금고를 털러 온 자들이 할 법한 개성 없는 대사들이었다. ‘조심해.’ ‘주문 준비해.’ ‘이쪽은 완료되었다.’ ‘빨리 움직여.’ 같은.
하지만 그 속에서 민준은 상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는 단어 하나를 포착했다.
“침입자 중에 서로를 ‘형제’라고 호칭한 자가 있더군요.”
엘프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늙은 약쟁이 요정이 묻는다.
“왜? 그게 뭔데? 누군데?”
약기운 때문에 머리가 빨리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민준이 부연설명을 한다.
“북한산과 맞물린 물질계와 영계를 통째로 태워버린 마법입니다. 돈이 꽤 많이 들었을 거고, 마법사들 실력도 보통이 아니에요. 엘더 드래곤의 금고를 털 능력과 동기를 가진 집단 중 서로를 그런 식으로 부르는 조직은 제 머릿속에는 하나 밖에 안 떠오르는군요.”
엘프는 말로 사람을 죽여버릴 수 있을 듯한 냉랭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 미개한 인간우월주의자들이!”
“인간우월주의자? 그 ‘인간중심당’인가 뭔가 하는 정치쟁이들 말이야?”
민준은 그녀의 추측을 부정했다.
“그 정당은 파편에 불과하죠. 그들 뒤에서 조종하고 있으리라 추측되는 비밀결사가 있잖습니까. 엘더 드래곤들조차 아직까지 완전히 뿌리 뽑지 못한 지독한 자들 말입니다.”
“······아아! 설마?”
그제서야 눈치를 챈 요정이 그 조직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
“우리, ‘행동하는 인권투쟁연대’에 새로 합류한 형제들이여! 진심을 담은 환영의 인사를 바칩니다!”
줄여서 ‘인권연대’라고 불리는 비밀 결사의 서울지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연단에 서서 힘찬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관중석에 앉은 열 명 남짓한 신입 회원 한 명 한 명과 차례로 눈을 마주쳤다. 남자의 눈동자에는 기묘하게 일그러진 열의가 가득했다.
“여기 계신 분들 중 우리가 무엇을 위해 뭉쳤고 어떤 미래를 꿈꾸는 이들인지 모를 형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잠깐의 여유를 허락하신다면 앞으로의 투쟁에 도움 될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우리 연대의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묘한 리듬과 함께 출렁였다. 청중의 귀에 끊임없이 묵직한 억양과 강세를 박아 넣는다.
“간단하고 쉬운 방식으로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짧게 말해서 ‘사전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영사기가 쏘아낸 화면에 국어사전의 한 페이지가 펼쳐진다.
“형제들과 저는 인권을 투쟁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인간의 권리 말입니다. 권리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무엇인지 먼저 정의해 봅시다. 사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인간. 명사.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학명으로 분류되는 영장류 동물.’ 이상입니다. 짧습니다. 간단하죠? 명료하기도 합니다. 뭐, 좋습니다. 나쁘지 않아요. 이 정도는요.”
그는 의미를 읽기 힘든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사람’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볼까요?”
프레젠터 버튼을 눌렀다. 슬라이드가 다음으로 넘어가며 국어 사전의 다른 장이 펼쳐졌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화면에 뜬 내용을 읽었다.
“’사람. 명사.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는 사회화된 동물.’”
연사는 관중 표정을 유심히 살핀다.
“뭐, 약간 애매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이 정도도 받아들일 만합니다. 제일 큰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아랫부분입니다!”
슬라이드가 또 넘어간다. 사전 속 단어의 정의 바로 밑에는 그것의 유의어가 끝도 없이 나열되어 있었다.
“사람이라는 단어의 유의어! 보시죠. 인간, 엘프, 오크, 드워프, 고블린, 트롤······.”
남자는 숨도 쉬지 않고 단어를 뱉었다. 그 목소리에는 비릿하고도 눅눅한 감정이 묻어나왔다. 눈에 핏발이 선 채, 사전에 등재된 유의어를 하나 하나 침을 뱉듯 읊는다.
그 속도에 맞추어 슬라이드는 사전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목록을 확대했다. 관중들이 남자의 호흡곤란과 실신을 걱정할 무렵이 되어야 그의 나열이 끝났다.
“길었죠? 네, 길었습니다. 그렇지요? 사전에 등재된 사람의 유의어는 정확하게 112개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단 한 개체라도 지구에서 시민권을 얻은 적 있는 종족이 인간을 포함 112종 존재한다는 소리입니다! 집단이민과 개별이민을 모두 합해서 말입니다! 한국어는 물론 그 어떤 사전을 펼쳐서 사람 항목을 펴 봐도 저 부분은 똑같습니다. 왜? 그 모든 종족을 나열하지 않으면 종족차별법에 위배되니까요!”
실내에 차오르는 열기가 더욱 짙어졌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사전을 바꾸려는 사람들입니다.”
슬라이드의 유의어 목록에 길게 빨간 줄이 그어지더니 단어들이 하나씩 먼지처럼 분해되어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그 자리에 남은 사람의 유의어는 하나 밖에 없었다.
인간.
“우리는 미쳐버린 사회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위원회와 세계 지도부가 저지른 최악의 범죄는 사람의 범위를 인류 대부분의 동의도 없이 폭력적으로 확대한 행위입니다. 우리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네, 동의하지 않았어요! 이 세계에 사는 사람은 본래 인간뿐이었습니다. 1945년 가을까지만 해도 유의어 목록은 지금 보시는 화면처럼 짧고도 간단했습니다. 그 때는 모든 것이 지금보다 간단했죠.”
남자는 연단 밖으로 몸을 드러내며 말을 이어나갔다.
“다시 강조합니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상 유례없는 광기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어둠이 짙고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때는 달리 없었습니다. 괴물이 우리의 이웃집에 살고 떳떳하게 거리를 활보합니다. 놈들은 인간의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빼앗아갑니다. 강탈해 버립니다. 우리의 돈을, 우리의 복지를, 우리의 일자리를, 우리의 권리를!”
지부장의 목소리는 살갗에 닿으면 벨 듯 날카로웠다.
“이제, 이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 놓읍시다. 사전을 수정합시다. 사람이 오직 인간을 의미하던 옛 시대로 돌려 놓읍시다. 인간의 권리를 위해 투쟁합시다. ‘인권’은 오직 인간만을 위한 단어로 존재해야 합니다!”
남자는 한숨을 돌리며, 연단에 놓인 물컵을 손에 쥐고는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 사이 슬라이드가 바뀌고 화면에 두 종족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보십시오. 지금까지 우리 결사의 형제들은 사회 각층에 퍼져 은밀하게 공작을 펼쳐 왔습니다. 지구를 침략한 수많은 이종족 중에서도 가장 위협적인 두 종에게 우리의 활동이 집중되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드래곤과 오크입니다.”
실루엣이 사라지고 혐오스러운 터치가 가미된 두 종족의 일러스트가 나타난다.
“용은, 그 비늘 달린 악마들은 모든 것을 배후에서 조종하려 드는 사회학적 재앙이기에 저항하고 전복해야 합니다. 오크는, 한 번에 여덟 마리씩 새끼를 까는 그 역겨운 돼지들은 이대로 있으면 인간을 초월하여 수를 불릴 생물학적 재앙이기에 격리하고 말살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숨을 돌리고.
“그런데······ 최근에 우리는 이 두 종족에 버금가는 새로운 이종족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시선에 묵직한 살기가 섞여 들었다.
“지금은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새로 합류한 형제들에게 이 자리에서 꼭 언급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우리의 단기목표는 수정되었습니다. 이대로 손을 놓고 있다가 제8차 집단이민이라는 끔찍한 악몽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방치할 수 없습니다.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충격을 금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슬라이드가 바뀐다.
“여러분은 이들의 생물학적 특징을 잘 아십니까?”
일그러진 입술 사이로 걸레 조각처럼 씹힌 말이 흘러나왔다.
“지금 거론되고 있는 이 종족은 거의 매일 배란을 합니다. 착상에 성공하면 한 번에 알을 열 개 이상 낳지요. 더군다나 신체 조건도 압도적입니다. 성체 평균 신장은 3.5미터. 여기에 맞춰서 사회 인프라를 개조하려면 또 얼마나 큰 돈이 들까요? 더군다나 그들의 근력은 트롤에 버금간다고 하니 통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 종족이 오크와 같은 저급스러운 생활방식을 택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맨손으로 철강을 찢어버리는 괴물이 집단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다면?”
지부장은 선언했다.
“그렇기에 우리 결사는 조직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위원회가 계획하고 있는 8차 집단이민을 저지할 것입니다. 그 첫 단계로, 우리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외계인이 있습니다.”
슬라이드가 넘어가며 한 외계인의 사진과 이름이 떠올랐다.
지부장이 선언하듯 말했다.
“그 외계인은 바로······!”
***
“베르미 공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민준의 수형자 동료, 브래들리는 오늘 처음으로 경호 대상자와 대면하게 되었다.
터미널에서 호텔까지 공주를 보좌했던 겔랑코 차원의 경호원들은 여기에서 지구인들과 바톤 터치를 하고 바로 본래 차원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고향 차원에서 슈탄인들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드러나는 행태였다.
공주가 머무는 방으로 향하기 전 브래들리를 맞이한 것은 중년의 여성 드워프였다. 영어와 한국어, 슈탄인들 언어에 능통하여 통역을 맡은 자였다.
“그럼, 일정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인사를 나눈 후, 함께 걸음을 옮기며 브래들리가 묻는다.
“공주님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이 드워프는 몇 달 전 겔랑코 차원으로 미리 건너가서 그때부터 공주를 모셨다고 했다. 지구와 화상 회의를 할 때 통역해 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올가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좋지는 않아요. 공주님은··· 몹시 불안해하고 계십니다. 경호 수준 때문에 위원회와 한국 정부, 겔랑코 연합왕국 간 협의 과정이 좀 삐걱댄 건 아시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덕분에 브래들리 요원님 같은 우수한 분을 경호 책임자로 모실 수 있게 되었지만···.”
말꼬리를 흐린다. 브래들리는 그녀의 말에서 생략된 부분을 지적했다.
“지금도 모자라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뭐, 기분 나쁘게 여기지는 마시고요.”
공주의 방 앞에서 도착해서 노크를 한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드워프는 문을 벌컥 열었다. 흔한 일인 듯했다.
객실 천장 높이 때문에 선택된 이 호텔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안에서 짙은 비린내가 흘러나왔다. 둘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쇼파에 앉아있는 공주와 브래들리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진녹색 비늘이 오밀조밀하게 덮인 주둥이를 열었다. 슈탄인의 입은 몹시도 길었다. 울퉁불퉁한 판자 두개를 겹친 듯한 그것이 벌어지자 공업용 톱날을 연상케 하는 날카로운 이빨이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어디까지나 말을 하려는 의도 밖에 없겠지만, 인간 머리 하나는 단숨에 씹어버릴 기세라고 착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공주는 그 상태로 세절기에 숟가락을 집어넣은 듯한 소리를 냈다.
올가가 그 말을 해석했다.
“만나서 반갑고, 최선을 다해 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는군요.”
“······네, 걱정 마십시오.”
올가는 세절기에서 꺼낸 숟가락을 다시 칠판에 긁어 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브래들리의 말을 공주에게 다시 통역했다. 그 뒤로도 신경을 갉아먹는 소음이 양방향으로 몇 번 연주된 뒤 공주는 다시 읽던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올가가 바로 브래들리에게 주의사항을 일러줬다.
“베르미 공주님은 하루에 여섯 차례, 한 번에 20kg의 생육을 진지로 잡수십니다. 독극물 검사는 경호 총책임자이신 브래들리 요원님께서 직접 해 주셔야 하고요. 이미 전해 들으셨겠지만 앞으로 며칠은 차원 멀미를 다스리기 위해서 호텔에만 계실 것이니 참고해 주세요.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녀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하루에 한 번, 공주님이 생산에 임하시는 순간에는 반경 십 미터 안에 그 누구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아시죠?”
“대충 몇 시쯤입니까?”
“지구 시간으로 오전 8시 정도이긴 한데 시차가 뒤엉킨 상태라 한동안 불규칙적일 수도 있어요.”
“그렇군요.”
“그때 공주님은 심리상태가 매우 불안정해지니 깊은 주의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슈탄인 여성은 거의 매일 배란을 하며 짝이 없을 때에는 정기적으로 무정란을 낳는다.
그 알의 껍질을 간단하게 가공하면 매우 높은 전성과 연성을 지닌 금속을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은 수많은 차원에 수출되는 효자 상품이다.
“네,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주의하지요.”
생각보다 성격이 까다로운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브래들리는 앞으로 며칠 간 자신이 지켜야 할 베르미 공주, 다르게 표현하여 ‘황금알을 낳는 악어’를 흘깃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