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83
284. 나의 가장 소중한 (19)
***
– 삐이이익!
– 위이이이이잉!
위원들이 접속한 가상현실에는 느닷없는 경고음이 가득했다.
제로 포인트에서 터져나온 망령 홍수는 채굴 기지 내부를 순식간에 휩쓸었다. 그곳을 지키던 정예 전사들이 그렇게 빨리 당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제로 포인트가 점령당했습니다!”
채굴 기지를 관리하는 종족은 카바이트다. 새로 선출된 그들 대표의 목소리가 처참하게 떨리며 갈라졌다.
엔델리온의 왕은 당장 저 지렁이가 틀어박힌 현실 공간으로 달려가, 촉수를 휘두르며 으깨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여태 그랬듯 그 갈망을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그녀는 촉수들의 행성 밖으로 나갈 수 없기에.
본인의 강박적 공포 때문만은 아니다. 마침 행성을 중심부로 옮겼으니 잠깐의 회의를 위해서라면 위원회 본부가 있는 별까지 잠시 다녀올 법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자리를 비울 기미가 보이자 국민들의 격렬한 반대와 항의가 이어졌기에 모성 밖으로 행차할 수 없었다.
그들이 불같이 들고 일어난 이유는 간단했다. 혹시 적이 코앞까지 다가온 걸 미리 알아차린 왕이 국민들을 버리고 혼자 도망가려는 시도가 아닌지 의심했던 것이다. 평민들에게는 그 사실 비밀에 부친 채로 말이다.
“그토록 철저히 준비했다고 장담을 하더니, 어떻게 뚫렸단 말입니까?!”
노호하는 그녀의 앞에, 인공 지능이 생성한 긴급 보고문이 송신되었다.
그걸 확인한 엔델리온은 외눈을 부릅뜬다.
“안에서부터··· 점령당했다고?!”
정보의 격차가 전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그녀는 다시금 실감한다.
채굴 기지 중심부의 문. 달란트를 뽑아내는 용도로만 쓰던 그곳에서 우주 공용 화폐 외의 다른 무언가 튀어나올 수 있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적은 그들의 보물창고로 이어지는 게이트를 침입로로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비보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 기지가 감추고 있던 또 하나의 전략 무기, 두 번째 차원 방벽의 동력원이 너무도 빠르게 망가졌다는 보고.
“비상입니다! 방벽 생성기가···!”
그리고 이어진 말에, 촉수왕은 체액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차원 방벽에 구멍이 났습니다!”
“우리 세계의 끝에서 대규모 우주모함의 반응이 연속으로 관측되는 중입니다!”
죄인의 함대가 그들 세계로 넘어와 침공을 시작했다.
“어떻게···?!”
촉수왕은 이해할 수 없었다.
두 겹의 방벽 중 위원회가 만든 것이 사라졌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태초부터 존재하던 벽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았을 터.
아시프-666은 무슨 마법으로 그것을 넘은 것인가?
‘아니, 아니다.’
왕은 방금 떠올린 생각을 스스로 부정한다.
‘그 벽은 태초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야.’
왕가에 전승되는 아주 오래된 지식에 따르면, 그 벽은 어느 날 갑자기 변방부터 차례로 공간을 조각내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인지 선조들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 결과만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
촉수왕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설마, 차원 방벽이라는 것도 태초의 종족 손길이 닿은 창조물이었는가?’
위원회가 만든 인위적인 벽이 무너져 내리고 애초부터 그들의 창조물이었던 한 겹만 남은 시점에서는 그 개폐를 자신들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었단 말인가?
왕은 분노와 허탈감, 증오와 오기가 번갈아 머릿속에 파도치는 것을 느꼈다.
대체 이 세계의 어디부터 어디까지 그 괴물들의 손자국이 묻어 있는 것일까?
세상의 자연스러운 법칙이라고 여기던 것까지 그들의 창조물이었다면.
진정 그들은 ‘신’이라고 불릴 만한 자들이 아닌가?
혹시 세상을 구성하는 더욱 기본적인 법칙··· 예를 들어 입자와 파동, 질량과 중력, 물체와 영체 같은 소소한 규칙까지 모두 그들의 작품인 것은 아닐까?
왕은 곧 그 생각 역시 부정했다.
‘그렇지 않다. 그들은 신이 아니야. 매우 위험한 힘을 지닌 사람일 뿐이다.’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성취를 이루고 더 먼 곳까지 나아간 경험이 있는 자들. 그런 주제에 내면은 사람의 사고방식에 갇혀 있는 기괴한 지성체.
왕은 생각의 닻을 급히 현실로 돌린다.
‘일단, 저 망령들부터 처리해야 한다!’
경악하고 좌절할 때가 아니었다.
이 정도로 포기할 것이었으면, 애초에 ‘종족신’이었던 존재를 납치하여 노예로 부린다는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다.
“채굴기지는 우리가 해결해 보겠습니다. 나머지 종족은 적 함대 추적과 대응에 집중하세요!”
인공지능의 보고에 따르면 지금 채굴 기지를 뒤덮은 것들은 그림자 괴물과 매우 비슷한 성질을 보였다. 물리 공격에도 정신 공격에도 각각 어느 정도의 면역을 가졌다는 뜻.
저런 괴물을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엔델리온은 알고 있었고, 가장 훌륭한 도구 역시 그들의 촉수 안에 있었다.
다만, 그 방법을 택하면 국민들의 저항과 공포가 클 것이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 채굴기지를 포기할 수는 없어! 완전히 붕괴하기 전에, 기능을 살릴 수 있는 부분까지는 살려야 한다!’
왕은 결정을 내리고 정신을 잠시 현실의 집무실 쪽으로 돌린다.
그 사이, 나머지 종족은 함대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세계의 끝에서 대규모 워프 게이트 생성이 관측되었습니다!”
적이 강탈한 우주 모함은 최신 모델이다. 그 기능을 발휘하여 초장거리 텔레포트를 준비하는 전조.
물질계에서 물체가 광속을 넘어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정도 전함이라면 공간을 접합한 지름길, 하이퍼 스페이스(Hyperspace)라고 불리는 통로를 통해 먼 거리를 뛰어넘을 수 있다.
그러한 지름길을 통과 중인 함대가 목적지에 다시 나타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모함의 성능을 고려하면 말이다.
“그들이 우리 성계 안에 바로 워프 게이트를 뚫지는 못합니다.”
위원회는 자신들이 거주하는 성계 내부에 함대 급의 거대 물체가 전이하는 걸 원천 봉쇄하도록 조치를 취한 뒤였다. 잃을 것이 너무 많은 입장에서 자신들의 안마당을 전장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그 덕분에, 다시 생겨난 텔레포트 반응은 그들의 성계 가장 외곽에 위치한 무인 행성에서 고작 50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관측되었다.
***
신의 군대가 초장거리 텔레포트를 마쳤다.
함대 중심에 위치한 지휘선. 신이 부재한 함교에 아시프-1이 서 있었다.
보통의 지휘관 같으면 모든 신경이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 쏠릴 상황이지만, 신의 아들은 사고력의 일부를 할애하여 어떤 생각에 잠겨 있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군.’
차원 #00-001은 고대 종족을 위한 형벌장이다.
이곳으로 넘어오기 직전, 그는 창조주와 어머니 사이에 오간 대화를 들었다. 델은 민준에게 관용과 용서를 청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시프-1 입장에서는 의외였다.
그가 ‘아는’ 바에 따르면, 상대가 아무리 잔혹한 죄인이라도 애착이 있으면 보호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촉수는 안으로 굽는 것이다.
하지만 델은 피붙이를 비롯한 가까운 사람들의 선처를 청하지 않았다. 아시프-1은 확신한다. 델의 부탁이라면 민준은 분명 응했으리라고.
그런데, 왜?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그들에게 공감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인가?’
울타리 안을 향한 공감이 얼마나 강렬한 감정인지 아시프-1은 잘 안다. 집단적 복수의 근거가 될 정도니까.
말 그대로다. 나 말고 무리 안의 다른 사람이 흘린 피도 내가 복수할 이유가 된다. 그들의 상처와 고통을 내 것처럼 느낄 수 있기에.
델은 그런 본능을 따르는 걸 거부한 것이다. 대신, 모두에게 공정해야 한다는 이성적 판단을 내린 것 같다.
아시프-1은 그 이유가 될 법한 생각을 또 하나 떠올린다.
‘그래. 공정하지 못한 용서는 피해자를 향한 폭력일 수도 있겠지. 악에 관대한 정의는 또 다른 악의 씨앗이 될 뿐이고.’
폭력은 악이고 용서가 선이라는 관점에 아시프-1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시프-1은 델은 선택을 긍정했다.
‘그럼, 남은 것은 아버지의 징벌뿐이군.’
그렇게 결론을 짓고 쉽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
아시프-1은 해결되지 않은 고민의 조각이, 마금속 재질 두개골 벽 안쪽에 달라붙은 듯한 찜찜한 기분을 느꼈다.
잠시 그 아련한 불쾌감의 꼬리를 쫓아가다가.
비로소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니지. 어쩌면 징벌이 아니라, 복수인가?’
아시프-1의 생각에 징벌은 공적인 복수다. 공공의 대의와 집단적 정의를 추종하며, 악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는 단호한 행위.
그렇다면 자신의 창조주는 만인의 정의를 대표할 수 있는가? 민준은 선악을 구분할 수 있는 흠결 없는 저울인가?
윰투스라면 단호하게 그렇다고 외쳤을 것이다. 신은 절대선이기 때문이다. 논리적 근거는 필요 없다. 다분히 신학적인 해석이었다.
하지만 교단 역사상 가장 신실치 못한 교황인 아시프-1은 신학 이론에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했다. 그저 그런 척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는 게 민준에게 도움이 되므로.
‘내가 아버지에게 충성하는 이유는 그가 나의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라면 델은 모친인 촉수왕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어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깊어지는 아시프-1의 생각을 주교의 목소리가 끊어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 주교가 이상을 보고하기 전 이미 교황은 이변을 눈치챈 상태였다.
“적 함대 접근 중!”
***
조세징수사령부 사령관 직을 맡은 토드는 레이더를 노려보았다.
아시프-666이 이끄는 적함은 총 157대다. 처음 엘라후-프라가 교단 본부로 출정했던 우주 모함이 167대였는데, 민준과 아시프-1이 포획하는 과정에서 9대를 파손시켰다. 그리고 1대는 직전의 차원에서 수형자들의 자폭 공격 때문에 산산조각이 났고.
비록 몇 대를 잃었다고는 하나 아직 위협적인 전력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헌데.
“흐음.”
적의 함렬을 바라보던 사령관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예상대로군.”
대형을 만들 때 우주 전함은 서로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상식이다. 지나치게 가까이 붙으면 각자의 전함이 만들어낸 실드와 중력장이 서로 간섭할 수 있고, 전열을 급하게 바꾸는 과정에서 충돌 위험도 있다. 또한 교전 시 아군을 오발하여 격추할 리스크가 높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더에 잡힌 상대 측의 전열은 전함 간격이 너무도 좁았다.
“그 촉수들 말이 맞아떨어진 것 같다.”
엘라후-프라가 교단이 우주 모함을 강탈한 건 겨우 몇 달 전의 일이다. 더군다나 자폭 위험을 우려하여 인공 지능을 전부 꺼 놓은 상태로 추측된다. 제아무리 아시프-1이라도 영혼이 없는 전뇌(電腦)를 세뇌하는 건 불가능하기에.
그럼 저 거대하고도 정교한 전함이 오로지 인력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말이 된다.
토드는 그들을 비웃었다.
“저건 종교쟁이들이 하루아침에 베테랑처럼 다룰 만만한 전함이 아니란 말이지. 평소에 밥 먹고 하던 짓이라고는 경전 글줄이나 외우고 질질 짜면서 기도하는 것밖에 세눈박이들이 말이야!”
비숙련 전투인원들의 미숙함과 무경험을 대신한 것은, 포로들의 기억을 복사한 아시프-1인 것 같다.
고블린들의 행성이 폭발할 당시 민준의 함대가 움직이는 양상을 관찰한 엔델리온은 가설을 제시했다. 중앙의 지휘선에서 아시프-1이 다른 전함의 조타수들의 정신을 조종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백 척이 넘는 전함이 한 몸이 된 것처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그 어떤 뛰어난 지휘관도 재현할 수 없는 함대의 유연한 반응과 기동성이 장점이기는 하나, 반대급부로 치명적 단점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였다.
“정신적 연결을 유지하려면 저 정도로 물리적 거리를 좁힐 수밖에 없는 거다.”
함대가 원하는 만큼 산개할 수 없다면 탄막의 넓이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미사일이야 가속에 의존하여 계속 날아가겠지만 광자포 따위의 무기에는 사정거리가 존재하므로.
또한 밀집 대형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포위전에 취약하다는 부분이다.
토드 사령관은 지시했다.
“전 함대, 3-5 대형으로!”
고대 종족이 택한 전장은 전투 여파가 거주지와 경제 거점까지 미치지 않을 정도로 먼 동시에, 아시프-666의 양동작전을 대비하여 긴급 상황에는 성계 중심으로 돌아올 수 있는 적당한 거리의 좌표였다.
토드와 카바이트가 탑승한 이백여 척의 함대가 진형을 구축했다. 완전히 동일한 성능을 지닌 양측의 함대는 관측거리도 사정거리도 동일했다. 항속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이 텔레포트로 등장한 지점에서 움직일 때 붙는 가속까지 계산하여 위원회는 함대를 전진시켰다.
그리고 적에 근접한 뒤 형성한 대형은 전면이 넓고 후면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원통 비슷한 포메이션이었다. 수평으로 눕힌 깔때기를 닮은 그 진형은 앞쪽에 전함이 모여 있기에 초반에 화력을 집중시키기 유리하다. 또한 브이(V)자 대형을 3차원적으로 펼친 것처럼, 아군의 사격이 서로를 타격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함렬이었다.
사방이 뚫린 우주 공간에서, 바다 위의 함전처럼 좌우만 막거나 적의 허리를 직선으로 끊는 작전은 큰 의미가 없다. 적이 360도를 모두 활용하여 우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드는 진형을 넓게 펼칠 수 없는 약점을 지닌 적들을 완전히 포위하는 방법을 택했다.
사령관은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자, 와라!”
***
사령관의 예상대로, 아시프-1은 다른 전함의 주교들과도 정신을 연결시킨 상태였다.
교황은 거대한 스크린 너머 원통의 별자리가 다가오는 장면을 보는 한편, 사제들의 시선을 공유하여 같은 광경을 다각도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가 외쳤다.
=“전 함대 전투태세!”=
각 함선의 함포 장교와 휘하 사제들은 숨을 죽인 채 기다렸다. 인공지능을 꺼버린 함교에는 적들의 전개 속도와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사제들의 목소리만 들렸다.
마침내 적이 사정거리에 도달한 그때.
아시프-1은 팔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발사!”=
명령이 통신기로 전달되기도 전, 각 함대의 함포병들은 생각의 속도에 가깝게 반응했다.
그 찰나 작열하는 수만 가닥의 창이 암흑 공간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