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9
29. Princess Run (4)
***
민준에게는 신조가 몇 가지 있는데 대표적으로 하나를 들자면 이것이었다.
“비서실장님, 전 할 수 있는 일만 합니다.”
엘프는 보기 드물게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푹 숙였다.
“요원님, 부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 달리 믿고 맡길 수 있는 분이 없습니다.”
그녀는 허리를 직각에 가깝게 굽혔다.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 얼마나 똥줄이 타는지 훤히 보이는 태도다.
지금으로서는 상황을 감추거나 에두를 여유도 없는 듯했다. 창고가 털린 사실을 보고하고 젠킨슨에게 달달 볶였을 게 안 봐도 훤했다.
‘그러고 보면 그 친구도 성질 많이 죽었어. 세월은 못 이긴다니까.’
눈 앞의 엘프와 요정 둘 다 일단 사지가 멀쩡해 보이니 말이다.
그래도 지금 이상으로 일을 그르쳤다간 정말 위험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듯 엘프는 필사적이었다. 두 사람은 인권연대가 얽힌 것으로 보이는 이번 사건 해결을 위해 민준이 나서 줄 수 있느냐에 대해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
민준은 즉답하지 않고 팔짱을 꼈다. 블레어는 그가 대답해 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 허리를 펴지 않고 기역자를 그린 상태에서 굳혔다. 라리사는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날개를 파닥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민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엘더 드래곤들이 눈에 불을 켜고 족쳐도 수뇌부를 못 잡은 놈들이에요. 그런 애들과 전면전을 벌이라고요? 저보고?”
“그런 영역은 회장님이 직접 처리하실 예정입니다. 단지, 그분께서 지구에 돌아오실 때까지 어떻게 해서든 흔적을 최대한 찾아내 주십사 하는 겁니다.”
“흐음.”
민준은 젠킨슨이 언제 복귀하는지 물어보았다.
“최소 일주일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용의자들 외계 도주를 막기 위해 차원도약 터미널은 오늘자로 봉쇄되었지만, 회장님이 오실 때까지 손 놓고 있으면 증거 인멸의 기회를 줄 테니까요.”
“터미널을 봉쇄했다고요?”
민준으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아직 언론에도 공개 안 된 사항인 듯싶다. 그는 턱을 긁으며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쉽지 않은 일인 건 아시죠?”
인권연대는 전세계적인 테러 집단이며 몇 차례 소탕을 하는 과정에서 더 깊숙한 음지로 숨어들었다. 현재는 철저한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고 있으며 고위층으로 갈수록 자취를 찾기 힘들다.
한국의 경우도 젠킨슨이 멍청하거나 능력이 안 되어서 지금까지 지부를 뿌리뽑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리턴 대비 코스트가 너무 높기 때문에 적절한 수준에서 멈추기를 반복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은 놈들이 정말 큰 사고를 쳤기 때문에 그도 예전과 입장이 다를 터.
‘그 새끼들을 캐려면 정말 제로에서 시작해야 돼. 말단부터 털면서 올라가야 하는데···.’
민준의 능력으로도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지만, 엄청나게 손이 많이 가고 기절할 정도로 귀찮은 일이다.
그는 자신의 신조 또 한 가지를 입 밖으로 꺼냈다.
“전 받은 만큼만 일합니다.”
혹시라도 엘프가 자신의 결정권으로는 장담할 수 없느니 어쩌니 주절거리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 생각이었는데.
“잘 알겠습니다.”
블레어의 대응은 의외로 칼 같았다.
“요원님을 위해 백지 수표를 준비했습니다. 지구화폐와 달란트를 병기 가능한 종류입니다.”
“?!”
이미 회장의 승인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이 또한 그 엘더 드래곤이 민준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가 터무니없는 값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을 믿기에 이러는 거다.
‘젠장, 이렇게 나오면 진상부리기도 애매해지잖아.’
그렇다면, 정말로 이번 일에 들어갈 품과 노력을 자기 기준대로 환산한 다음 적절한 덤까지 붙여서 청구하리라 엄포를 놓은 뒤.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한번 털어 보죠.”
그제서야 엘프는 죽다 살아난 표정을 지었고 요정 역시 시체 같았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실 그들로서는 짐작 못하겠지만 민준이 수락한 이유가 있었다. 맨땅의 헤딩은 피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을 미리 했기 때문이었다.
‘고위층으로 갈수록 찾기 힘들다는 건 반대로 말해서 말단 정도는 잡아낼 수 있다는 거지. 그 연결고리를 잇는 것은 수사하는 자의 역량에 달려 있고 말이야.’
말단의 말단까지 가면 흔적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민준은 최근에 우연히도 놈들의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엘프와 요정을 앞에 둔 채 민준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
“경위님! 박정팔 경위님! 여기 또 노숙하는 고블린 새끼들 한 무더기 있습니다!”
정팔에게 소리치듯이 보고한 사람은 자경단원이었다. 은행강도 사건 때 예민준의 정체를 캐묻던 바로 그 청년이다.
오늘 하루 종일 정팔은 그를 비롯한 자경단원 셋을 이끌고 오크 커뮤니티 외곽을 순찰하고 있었다. 범죄 예방 목적의 일상적 순찰이 아니라 까마득한 윗선에서 내려온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공문서 수십장으로 내려온 그 지침을 한 단어로 요악하면 이것이었다.
환경미화.
“끄륵! 저··· 저희··· 여기서··· 계속···. 끄르륵!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용서··· 해주세요······.”
으슥한 골목 안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악취가 났다. 하수구 냄새와 썩은 음식물 냄새, 몇 달간 제대로 씻지 못한 끔찍한 체취가 코를 찔렀다.
“우웩! 씨발, 더러운 새끼들 진짜!”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모퉁이를 돌자 서른 명이 넘는 고블린이 모여 노숙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 골목은 오크 커뮤니티 내에서도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이들 같은 홈리스들이 주로 모여 사는 구역이다. 오크 동네라고 꼭 오크만 사는 것은 아니었다. 그 말의 유의어로는 우범지역, 슬럼가, 위험한 동네, 기피지역 등을 들 수 있으며 밑바닥 인생이라면 종족을 가리지 않고 몰려들었다.
“끄륵··· 끄륵!”
그들은 상대가 경찰이라는 걸 알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 거리 생활 때문에 몸에 밴 습관이 그것인지 쉴 새 없이 용서를 빌면서 바닥에 엎드리고 벌벌 떨었다. 자경단원은 그 몸에 손을 대기도 싫다는 듯 팔을 쳐들고 한 곳을 가리켰다.
“빨리 못 일어나? 저기 버스 보이지. 저기 타라고!”
“죄··· 죄송··· 죄송해요···.”
“아, 이 병신 새끼들!”
자경단원이 욕을 뱉으며 진압봉을 든 순간.
“야, 너 뭐하냐?”
정팔이 싸늘하게 뱉자 자경단원이 몸을 움찔했다. 변명하듯 웅얼거린다.
“아니, 이 저능아들이 말을 안듣잖아요···.”
오크는 한숨을 깊게 내쉰다. 오늘 하루 종일 반복된 일이라 청년들도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일어나십시오. 저기까지 같이 걸읍시다.”
정팔은 엎드린 노숙자의 어깨를 부축하고 일으키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대체 뭣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고.
그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해치지 않을 겁니다. 무서운 일도 아니에요. 저 버스 타고 수용소로 가서 공짜로 주는 밥 먹고, 깨끗하게 씻고, 따뜻한 곳에서 며칠 자면 됩니다. 그럼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고블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울먹인다.
“아··· 아?”
사실은 마지막 말이 핵심이었다.
수용소에서 며칠을 보낸 뒤, 국가는 노숙자들을 다시 거리로 돌려보낼 것이다. 예산이 무한정 있지는 않기에.
국가에서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슬럼가에 관심을 가지고 깨끗하게 ‘정리’하려고 마음먹은 이유는 며칠 뒤 시작될 베르미 공주의 서울 시내 관광 및 업무 미팅을 위한 이동을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그녀가 여기까지 걸어 들어올 확률이 0%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며 통행 금지령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실행에 있어 가장 큰 문제로 예상되는 것은 자숙하며 처박혀 있을 지붕 달린 거처가 없는 이들. 그들이 혹시라도 외계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수치라고 생각한 정부는 공주의 공식 일정이 끝날 때까지 격리시키려는 계획이었다.
그것이 지금 정팔과 자경단원들이 슬럼가 곳곳을 돌아다니는 이유다.
‘어제는 터미널에서 호텔까지 이어지는 도로 40km 내내 차량통제를 했다더니··· 갈수록 더하는군.’
버스에 고블린을 모두 태운 뒤 그들은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오크 옆자리에 앉은 자경단원이 짜증 섞인 투로 중얼거렸다.
“쟤들은 진짜 ‘실수’ 아닌가요?”
정팔이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또 내 앞에서 말실수할 테냐?’ 라는 뜻을 담아서. 자경단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니 솔직히 다른 종족들은 다··· 음, 뭐라고 해야하나? 빡대가리라서 말이 잘 생각 안 나네. 할 일을 한다? 활약한다? 역할? 그래, 역할. 다 역할을 하고 있잖아요.”
그래도 초등학교까지는 수업을 열심히 들었는지 딱 그 수준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읊는다.
“엘프는 마법 가르치고, 오크는 인구 늘리고, 트롤은 아픈 사람 살리고, 드워프는 명품 가방 만들고···. 에이, 씨발 마지막 건 나한테는 좆도 도움 안 되네.”
그렇게 투덜거린 다음 항변하듯 말한다.
“근데 고블린 저 새끼들은 도무지 세상에 도움이 안 되잖아요. 사기당해서 원양어선 타고 염전 노예로 굴리는 애들은 그렇다고 쳐도··· 나머지는 어디 써먹을 데가 없지 않아요? 멍청해도 어지간히 멍청해야지.”
고블린을 ‘위원회의 실수’라고 부르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정팔도 잘 알았다. 옛 시절을 겪지 못한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정팔은 그에게 목소리를 낮추라는 손짓을 하면서 점잖게 말했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지하에서 생활하던 고블린의 습성은 광산에 최적화되었고 이민 초기까지만 해도 탄광노동자로서의 고용 수요가 높았다. 광산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당연히 석탄광이었기 때문.
그런 그들 삶에 문제가 생긴 것은 7차 집단이민의 대가로 마정석이 보급되고 석탄 시장이 붕괴한 이후부터다.
본능에 맞게 탄광 근처에 수천 명씩 모여서 집단거주 및 공동보육을 하던 그들은 일자리와 집, 커뮤니티를 모두 잃고 거리를 헤매기 시작했다. 탄광을 떠난 그들이 우수한 퍼포먼스를 보이는 직종은 극히 드물었다.
이런 결과는 위원회도 뻔히 예상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독 난항을 겪었던 7차 이민 조건을 교섭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결국은 마정석을 들이밀고 말았다. 고블린이 사실상 위원회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이야기가 돈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종족 입장에서 위원회는 본래 차원에서 탈출할 수 있게 해준 구원자인 동시에, 지구에서의 삶을 처참하게 몰락시킨 원수이기도 하다. 더 씁쓸한 부분은 대부분의 고블린이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부분이다.
“끄륵··· 끄륵!”
정팔은 뒤를 쓱 둘러보았다.
버스에 탄 노숙자들은 불안에 떨며 눈치를 살피고 있다. 그들 중엔 청소년이나 어린아이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다른 종족 홈리스와 구분되는 특징. 집 없이 텐트를 치고 살아도 아이는 낳는 오크와는 확연히 다르다.
‘고블린 여성은 환경이 불안하다고 느끼면 일시적인 불임상태가 된다고 했지.’
그 결과 현대 고블린의 합계출산율은 0.3명.
학자들은 이대로 추가 유입이 없다면 5세대 안에 지구의 고블린이 사실상 멸종할 것으로 예상한다. 원인은 총과 칼도, 극심한 자연환경 변화 때문도 아니었다. 어쩌면 지구 역사상 최초로 기록될지 모를 사회적 멸종이었다. 변화된 사회경제를 쫓아가지 못해 일어난 극단적인 개체 감소.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 시기가 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띠리리리!
정팔의 핸드폰이 울렸다.
“음?”
발신인을 확인하고 바로 응답한다.
“네, 형님.”
전화를 건 것은 민준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그가 묻는다.
“정팔아, 바쁘냐?”
“잠깐 통화할 정도는 됩니다. 말씀하세요, 형님.”
“지금 뭐 하는데?”
“환경미화요.”
“으잉?”
내막을 들은 민준은 한숨을 푹 내쉰다.
“······정부가 정말 별의 별 짓을 다 하는구만. 저기, 바쁜데 미안하지만 한 가지만 확인해 줘라. 우리 저번에 오크 커뮤니티 갔을 때 말이야. 소사이어티 새끼 잡은 날.”
“네.”
장태준의 집에서 누군가 워프한 흔적을 쫓다가 정팔의 관할구역이기도 한 슬럼가로 들어섰었다.
“그때 놀이터에서 만난 불량배 중에 제일 덩치 큰 놈 있잖냐? 이름이 잘 생각 안나는데···. 강감찬이었나?”
누굴 말하는지 금방 눈치챘다.
“아, 김유신이요?”
놀이터에서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보내던 20대들. 그 중 얼굴과 빡빡 민 두피까지 이어지는 문신을 새긴 청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팔의 표정이 금방 굳었다.
“형님이 걔를 왜 찾으십니까? 무슨 큰 사고라도?”
이민국 요원이 오크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심상치 않은 일이다. 그 목소리에 담긴 심려를 느꼈는지 민준이 얼른 말했다.
“아, 걔한테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그 문신 말이야.”
김유신을 처음 봤을 때 민준의 두 눈을 사로잡았던 문신.
그가 관심을 둔 것은 새겨진 위치가 대범하다거나 색이 특이하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너희들 사이에서 말 나온 적은 없지? 경찰서 내부적으로나, 오크들 사이에서나.”
“네? 그 문신에 대해서요? 그냥 특이하다는 생각만 했지 저도 잘···. 왜 그러시는데요?”
“하긴··· 아무도 모르니 걔도 그러고 다녔겠지. 새긴 놈도 그걸 아니까 그랬을 거고.”
“?”
“걔한테 전화해서 그거 어디서 했는지 좀 물어볼래?”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으려다 말고 묻는다.
“그런데··· 그 문신이 뭔데 그러십니까?”
왠지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러자 민준이 잠깐 주저하다가 말했다.
“······음, 걔도 모르고 골랐을 거야. 문신 새겨준 새끼가 분명 유도를 했겠지. 요즘 지구인 중에 그거 읽을 줄 아는 사람 거의 없긴 하거든. 드래곤도 모를 걸? 내가 보니까 억지로 사전 찾아가면서 어설프게 만든 문장이라 문법도 많이 틀렸고.”
“잉? 그게 그림이 아니라 문자였어요? 무슨 뜻인데요?”
잠시 후, 민준의 대답을 들은 오크의 표정은 악귀처럼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