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93
294. 나의 가장 소중한 (29)
“기쁜 날입니다. 오늘만큼은 아낌없이 즐기자고요!”
촉수왕은 마법 영상 속 위원들을 보았다.
전쟁 직전까지만 해도 묘한 기류가 돌았던 각 종족은 언제 반목했냐는 듯 어울리며 기쁨을 표하고 있었다.
엔델리온의 왕도 그 연회장에 물리적으로 참석하진 않았지만 영상으로나마 흥을 공유했다.
문뜩 과거를 돌이켜본다.
‘쉽지 않은 싸움이었지.’
엔델리온의 위기는 전쟁 초기에 집중되었다.
온 몸에 드래곤 하트 폭탄을 두른 아시프-1의 테러는 지금 생각해도 끔찍했다.
기억만 해도 절로 표피가 식고 돌기가 오그라들 정도.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놈들의 계략이었던 거다.’
결국 그들의 별은 채굴 기지와 근접한 궤도를 돌게 되었다.
따라서 그 인공 행성에 망령 군단이 침공했을 때 직접 모성을 움직여 급한 불을 끄러 갈 수 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테스트 중이던 신형 처형탑이 필요했으니.
‘설마 아시프-666이 중력 제어 마법의 주도권을 노릴 줄이야.’
당시엔 정말 정신이 아찔해졌다.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어야 할 인공 행성이 움직일 수도 있었던 위기.
‘중력의 폭주가 이어졌다면 결국 두 별이 충돌했을 거다.’
아무리 강대한 결계도 막아낼 수 없는 재앙.
‘미리 파악하길 천만 다행이었지.’
동족 마법사와 엔지니어들이 모두 달려들어 촉수를 거들었고, 그들은 인공 행성이 제로 포인트에서 이탈하기 전 간신히 주도권을 빼앗아 올 수 있었다.
그 결과, 행성 충돌은 없었다.
급파한 골렘들은 아시프-666을 쫓아냈고, 조세징수사령부 휘하 200여척의 전함들은 다양한 포메이션을 구축 못 하는 적 함대를 압도했다.
‘그 교전에 놈들을 전멸시켰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꿈’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밀려난 아시프-666의 함대는 우주 구석구석으로 흩어져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허나, 이 또한 왕이 상정한 시나리오 중 하나.
전쟁은 성계 표준 시간으로 1년 넘게 이어졌다.
‘어쨌든, 우리가 이겼으니 되었다.’
긴 고난 끝의 승리는 달콤했다.
아시프-666은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지옥’ 같은 장소에 갇혔다. 죄수가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아시프-1은 그의 창조주가 알아서 조각을 모아준 덕에 완전체 상태로 입수할 수 있었다.
그 괴이한 부자 중 한쪽은 영생의 실마리를 푸는 열쇠가 될 것이며, 다른 한쪽은 촉수들이 이 세계를 더 나은 장소로 만드는 원동력으로 기능할 터다.
그들이 오래 꿈꾼 완벽한 미래가 한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 선조들께서는 어찌나 현명하셨던지!’
초반의 테러 후 엔델리온 측 전사자는 전무했다.
하지만 토드와 카바이트 쪽은 상황이 달랐다.
채굴 기지 사건을 계기로 별을 도로 꽁꽁 숨겨버린 엔델리온과 달리, 본부 행성 위치는 노출된 상태.
아시프-666은 수차례 광자포로 공습을 시도했고 많은 이들이 먼지로 산화했다.
‘우리 대신 태초의 종족과 첫대면할 종을 선택하여 문명화시키는 발상은 정말 천재적이었다.’
그런 선조들의 계획을 왕을 비롯한 후손들은 발전시켰다.
카바이트들은 아직도 아시프-666을 발견한 것이 우연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를 다른 누군가 먼저 발견했고, 나중에 카바이트가 찾은 것처럼 유도했으리라고는 상상 못하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최소한의 희생으로 원하던 모든 것을 얻었다.’
용족 전쟁에서도, 아시프-666과의 전쟁에서도 촉수들은 안전한 후방에 머물 수 있었다.
“그럼, 오늘은 다들 쉬시고 다음 회의 때 나머지를 논의하시지요.”
왕은 가상현실과 연결을 끊었다. 먼 행성 연회장에 투영되었던 아바타도 사라졌다.
그 후 그녀는 지친 자신에게 작은 사치를 허락하기로 했다.
어디로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인공지능은 방금 전까지 원격회의실이었던 물리 공간을 재조립했다. 내부가 요동치며 장비가 배치된다.
치이이익!
실내에는 특별한 화학물질의 증기가 피어 올랐다.
다른 종족은 닿으면 즉사할 성분. 온도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엔델리온은 따스한 물에 몸을 담근 듯한 안락한 쾌감을 느꼈다. 천천히 전신을 펴고 꼬물거린다. 저린 17번 촉수를 8번 촉수로 부드럽게 주물렀다.
‘살겠군.’
오랜만의 망중한을 즐기던 찰나.
밖에서 정신파가 도달했다.
=폐하, 회의 중에 죄송합니다. 한 가지 윤허를 얻을 부분이 있어서···.=
신하는 왕이 일과를 마친 걸 모르고 실수했다.
그에겐 다행히도, 왕은 지금 느긋한 즐거움에 도취되었다. 너그럽게 용서하며 대꾸해 주기로 했다.
‘무슨 일이냐?’
=광신도 교단에서 회수한 마정석 재배치 건입니다.=
용릉이 털린 탓에 그들 성계 전역에는 마정석 부족 상태가 이어졌었다.
전후 처리 첫 단계는 적들로부터 다시 빼앗은 그것을 필요한 곳에 분배하는 일이었다.
=이제 대부분 정리되었습니다만, 폐하의 비밀 창고가 남은 터라···.=
아, 그렇군.
그녀는 납득했다.
비밀 금고 중 몇몇의 위치는 오직 왕만이 안다. 상당수는 심지어 그들 모성 내에 위치해 있지도 않다.
전파를 방출하거나 영계 통신으로 엮여 있지도 않기 때문에 그녀의 머릿속 정보 없이는 누구도 못 닿을 터다. 최측근 신하들조차.
‘그렇군. 좌표를 불러 주겠다.’
몇 군데 위치를 정신파에 실어 전달하던 왕은.
‘······!’
순간 위화감을 느낀다.
‘잠깐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게 자연스럽게 느껴졌지만.
이제와 생각하니 뭔가 어긋난 것 같다.
그녀가 정신을 걸어 막은 것은, 개중에서도 ‘아시프-666’과 관련된 무언가를 보관하던 장소를 언급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굳이 그 좌표를 물어볼 필요가 있나?’
그런 창고의 마정석 재충전은 대부분 왕이 직접 골렘을 보내거나 기타 은밀한 방법으로 처리한다.
더군다나.
‘대부분 100년 이상 충전 없이 버티게 해 두었는데?’
기억을 더듬는다.
벌써 그 정도로 시간이 지났던가?
고민하는 사이, 얼굴이 보이지 않는 신하가 재촉했다.
=왕이시여, 아직 하나가 남아있지 않습니까?=
촉수왕은 그 어투에서 묘한 느낌을 받는다.
치이이익!
‘잠깐. 이건 좀 뜨겁군.’
점막에 스며드는 화학물 증기.
그 온도가 급상승하고 있었다. 엔델리온조차 고통을 느낄 정도로.
그녀는 인공지능에게 조치를 지시했다. 하지만 연산 에러라도 일으킨 것인지 응답이 없다.
왕은 정신파를 주고 받던 신하에게 외쳤다.
‘여, 여봐라! 설비 담당에게 연락해라. 뭔가 잘못되었다. 즉시 시정을···!’
=즉시 조치하겠나이다. 하온데 폐하, 나머지 금고 좌표는···.=
왕이 절규했다.
‘지금 좌표가 문제가 아니라니까!’
온도는 더 버틸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가 있었다. 온 몸이 붉게 달아오른다. 본래의 청동색 피부는 온데간데없다.
이론적으로는 이해하던 현상이지만 실제로 보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도 자신의 몸이 이리 될 줄은.
‘대체 밖에서는 뭘하고 있는 거냐?!’
그렇게 노호하던 왕은.
‘······!’
순간 영혼을 망치질 당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래!’
그녀는 이 장면을 본 적 있다.
‘처음이 아니야. 난 이걸 겪은 적이 있어!’
그리 되뇐 찰나.
쩌어어억!
세상이 찢어졌다.
주변이 갈래갈래 쪼개지며 틈이 드러났다.
그 사이로 지옥 같은 풍경이 부푼다. 동시에 그녀 뇌리에 흘러들던 정신파의 선율이 바뀌었다.
=뜨··· 뜨거워! 너무 뜨거워!=
=왕이시여, 살려 주십시오!=
=이 미친 왕! 멍청하고 무능한 왕! 지금 뭘 하고 있는거야? 우리가 죽어가고 있잖아! 어서 방법을 찾아내라고!=
이곳 또한 현실이 아님을 왕은 깨달았다.
이 뜨거운 폐쇄 공간은 기억 속 풍경이다.
하지만 방금 본 것과는 달리 완벽한 허구는 아니었다. 이미 현실로 구현된 적 있는 사건이기에.
치이이익!
눈길이 닿는 곳곳에 신하들이 익어가고 있다. 연분홍색의 살점이 흐물거린다.
‘여긴 지하 벙커다!’
왕실에서 준비한, 이 행성에서 가장 안전한 피신처.
냉방은 이미 의미를 잃었다. 행성 표면의 암석 증기는 수만 도까지 들끓으며 모든 걸 불태웠다. 그 열기가 종국엔 금속층을 뚫고 지하로 침투한 것.
그 결과 벙커 벽과 천장, 각종 계기마저 녹아내리고 있다.
지금 그들을 버티게 만드는 건 신하들이 외우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며칠이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최초 충돌면 근처 벙커는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지하의 다른 피신처에서, 죽어가는 국민들이 정신파를 토하고 있었다.
=아아! 아파! 너무 뜨거워! 구해줘=
=왕이여··· 당신은 왜··· 이기지도 못할 전쟁을···!=
=살려줘! 우리를 살려 내라고!=
=저주한다! 당신을··· 그리고 우릴 이렇게 만든 모두를 저주할 거야!=
그들은 무작위의 방향으로 텔레파시를 발산했다. 그 일부가 그녀에게 닿은 것이다.
“아··· 아!”
깊은 절망감이 차오르던 그때.
누군가의 울림이 섞여 들었다. 절규하는 백성들의 의념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담아.
=그래서··· 좌표는?=
화아앗!
주변 풍경이 또 바뀌었다.
이번에는 왕실 벙커가 아니다.
그리고 전보다 훨씬 큰 고통이 그녀를 엄습했다.
화르르르!
물은 끓어 봤자 섭씨 백도를 넘지 못하지만.
금속은 다르다.
치이익!
콰아아아아!
왕은 자신이 들끓는 마금속에 잠겨 천천히 ‘삶아지는’ 중임을 깨달았다.
=······!=
언어로 치환할 수 없는 끔찍한 정신파를 토한다. 발악하며 몸부림쳤다. 신경계가 모조리 타버릴 것 같은 아픔.
왜 기절하지 않는지 납득할 수 없다. 생물이 이런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설계 오류로 치부해야 한다고 분노하게 되는 괴로움.
견디다 못해 스스로를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촉수를 휘두를 수도 없었다. 몸이 바닥에 단단하게 못 박히듯 고정되었기에.
머릿속에 정신파가 파고든다.
=“좌표를 말해라. 쉘터(Shelter)를··· 어디에 숨겼지?”=
그제서야 깨닫는다.
같은 질문을 계속 던진 상대는 신하가 아니었다.
아시프-1이 그녀 머릿속 정보를 캐내려고 한다.
‘그럼··· 방금 전까지 내가 봤던 것은!’
환상과 현실이 허무하게 교차하며 재정의된다.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승자는 아시프-666이다.
‘아아, 아아··· 아아아아악!’
그녀는 울부짖었다.
어째서 미치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촉수를 들썩일 때마다, 체액이 들끓는 고통에 살결이 갈라지는 아픔이 더해졌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이런.”
부글부글!
차아아아아!
금속 증기가 가득한 상공.
아시프-1이 혀를 찬다.
“죄송합니다. 또 실패했습니다.”
곁에서는 아시프-666이 냉랭한 표정으로 아래를 보고 있었다.
용해된 금속이 만든 웅덩이. 그 안에서 고통받는 촉수의 왕.
민준은 눈썹을 찡그렸다.
“엄청난 집념이군. 그 정도로 감추고 싶다는 건가.”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윰투스가 계기판을 만지도록.
민준은 지시하면서도 일부러 그쪽을 보지 않았다. 주교 곁에는 델이 있기에.
그는 지금 이순간만큼은 전처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차아아아아악!
움푹 패인 냄비 같은 공간. 바닥 곳곳의 구멍을 통해 액화 금속이 빨려들어갔다.
‘······!’
원래 타서 없어져야 할 촉수왕의 안구는 고문관의 배려 덕에 남아있었다.
구륵, 힘겹게 눈동자를 굴리고. 민준과 엔델리온의 시선이 교차한다.
그는 건조한 목소리로 묻는다. 아들이 여태 던진 것과 같은 내용.
“어디에 숨겼지?”
왕이 스스로의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참으로 오랜 시간, 지독한 수준으로 준비했음을 실감한다.
그래봤자 시간 문제일 뿐이다. 오랜 공을 들이면 뚫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민준은 그 기간을 단축시키고 싶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순간이 말 그대로 손끝 가까이 잡힐듯 아른거리는 이 시점에서 말이다.
그런 민준을 보며 왕은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뇌까렸다.
‘쉘터···!’
그것은 태초의 종족이 빈사 상태로 발견되었을 때, 그의 몸을 숨기고 있던 마도구의 이름이다.
카바이트는 그걸 연구할 능력이 없었고 결국 엔델리온에게 넘겼다.
촉수왕이 흥미를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태초의 종족은 그 안에서 가늠하기도 힘든 오랜 시간 동안 생존한 것 같다. 다른 동족들처럼 영육이 섞이지 않고··· 그나마 정상적인 ‘생물’에 가까운 형태로 말이다.
어쩌면 쉘터라는 것에도 영생의 비밀이 숨어있지 않을까 왕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는 간신히 입을 연다.
“굳이 고문까지 해가며, 그것의 위치를 묻는다는 건···.”
미칠 듯한 고문 속에서, 한 줄기의 독기가 피어났다.
“그것이 네게 있어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라는 뜻이구나, 이 괴물아!”
왕은 생각한다. 전쟁이 패배로 끝나고 역전의 가능성도 전무한 이 시점에서.
조금이라도 상대에게 복수할 방법이 무엇일까?
사실 분풀이에 가깝고 저 괴물에게 실질적 피해를 줄지도 불확실하다. 어쩌면 아시프-666이 약간의 신경질을 내는 데 그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고 엔델리온은 생각했다.
“···끝까지.”
그리고 민준은 왕의 그런 속내를 짐작해낸다.
그는 분노하거나 짜증내지 않는다.
대신, 길바닥에 널브러진 오물을 보는 듯한 얼굴로 응시했다.
“끝까지 뉘우칠 줄을 모르는군.”
그러자 왕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설마 저런 힘이 남아있었는가, 아시프-1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뉘우치다니··· 내가 무슨 죄라도 지었다는 말이냐?! 감히 네가 정당한 재판관이자 징벌자라도 된다는 듯 말하는구나!”
민준은 팔짱을 끼고 지긋이 바라보았다.
더 지껄여 보라는 듯.
“대체 무엇이 죄라는 거냐? 우주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낸 것? 미숙하고 쓸모가 적은 자들을 희생하여 사회에 크게 기여할 자들의 생명을 연장시킨 것? 통제할 수 없는 위험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보호한 것?!”
위원회의 압제, 몸갈이 시스템의 정립, 태초의 종족을 향한 배신.
그 모든 행적을 스스로 나열하며 왕은 악을 썼다.
“이 모든 것이, 결국 너희 태초의 종족이 깬 뒤 하려던 짓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러자 민준은 정말로 이해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왕의 시선이 이글거렸다.
“시치미 뗄 생각하지 마라. 카바이트나 토드, 그 머저리들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난 알고 있었다. 제로 포인트 너머의 그곳.”
왕은 엘라후-프라가를 언급한다.
우주를 관통하는 한 줄기의 핏줄.
“그건 아직 완성체가 아니다. 모든 차원을 실로 꿰듯 연결한 그 핏줄은 싹 트기 전의 뿌리에 불과해. 언젠가 그것이 틔운 줄기로부터 무수한 정맥과 모세혈관이 가지를 치고 우주 곳곳을 연결시킬 것이다. 너희는 왜 하필 그런 형태로 만들었지?!”
왕은 거칠게 말을 쏟아냈다.
끔찍한 고통도 분노 섞인 발악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우주에 존재하는 이 많은 차원들! 먼 옛날 공간은 벽이 없는 한 개의 차원이었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이 ‘신’과 연결을 잃은 순간부터 조각나며 파편화되기 시작했지. 나는 이제 안다. 그 차원벽 역시 너희 작품이라는 걸!”
신 행세를 하던 태초의 종족은 왜 우주에 울타리를 세웠는가?
지성체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교류하는 걸 막은 이유는?
어째서 ‘힘’을 가진 종족만이 그 울타리를 넘도록 질서를 바꿔놓았는가?
왕은 이유를 짐작했다.
“결국 너희는, 잠에서 깨고 나서 이 우주를 지배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아니냐?!”
민준의 대꾸가 없자, 왕은 더욱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이동의 제한은 피지배자들을 쪼개 놓는다. 그들이 연대하고 단결하는 걸 막아. 지배자를 향한 저항을 막는 차단벽. 그게 차원벽이지! 하지만 지배자들만큼은 울타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수단을 확보해야 한다. 전 차원계에 가지를 뻗은 혈관이 바로 그 통로야! 너희는 결국, 위원회가 지금 하는 일을 먼저 실행한 것에 불과해!”
위원회는 기존의 차원벽에 또 하나의 벽을 세워 덧댔다.
그리고 터미널과 도약선을 독점하여 이동 수단을 통제했다.
그 후 용들로부터는 차원 도약 주문을 빼앗았고, 저항하는 종족과 민족은 분열시켜 차원계 곳곳에 격리했다.
이런 지배 체계를 태초의 종족 역시 미리 준비한 게 아니냐는 질문.
“잠에서 깬 뒤 모든 종족을 지배하려는 의도였지?! 너 역시 결국은 역겨운 위선자에 불과하다!”
너희도 결국 우리와 다를 바가 무엇이냐고.
그리 물으면서 노려보는 촉수왕을 향해.
‘······?!’
민준은 차가운 조소를 지어 보였다.
그 입꼬리에 매달린 감정은 잠깐이나마 왕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우리가 만민 위에 군림할 준비를 했다고? 그걸 위해 세포벽을 만들고 동맥간까지 구축했다고?”
그 목소리에는, 왕 입장에서는 믿기 힘들었지만, 약간의 연민조차 배어 있었다.
엔델리온의 동공은 혼란으로 흔들린다.
민준이 물었다.
“우리가 너희로부터 무슨 이득과 가치를 얻겠다고?”
순간 촉수왕은 대답할 말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지금 이 차원에 존재하는 종족은, 딱 두 종만 제외하면 우리에게 가축으로서의 가치조차 없다. 그런데 왜 굳이 우리가···.”
민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덧붙인다.
“그래, 우리가 잠깐 깨고 다시 잠든 다음에는 통제가 필요하겠지.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그 준비이기도 하고.”
종교와 세뇌를 통한 지배.
다시 잠든 동족들에게 그 누구도 피해를 줄 수 없도록, 철저한 금기를 세우는 행위.
“하지만 그 과정마저 끝나고 우리가 완벽히 깬 다음에도··· 그 단계에서도 너희를 지배해야 할 것 같으냐?”
왕은 이해할 수 없었다.
살짝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군림하지··· 않겠다고?”
민준은 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애초에 세균 따위를 노예와 가축으로 삼아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배욕과 가학성을 충족시키는 의도 외에는.”
이어서 중얼거린다.
“하물며 그 세균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완벽한 면역계가 갖춰진 단계라면.”
아시프-1은 창조주의 그 비유를 주의 깊게 머릿속에 담아두었다.
민준이 더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손짓했다.
“다시 시작해.”
끓는 금속과 열의 지옥이 지하에 재소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