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95
296. 업(業) (1)
***
이 일을 하기 싫었다. 처음부터, 미치도록.
목적과 방법은 명확했다. 헤아리기 힘든 시간을 버티고 또 버틴다. 다른 모두를 위해 홀로 아스라한 의식이나마 유지한다.
누구도 자처하기 힘든 고행. 그런 일이 곧 삶이 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직 일을 위해 존재하는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작과 끝을 잇는 긴 과정. 그것은 태산이 이슬에 깎여 모래알이 되고, 그 알알이 모여 드넓은 모래사장이 될 때까지 견디는 일이었다.
끔찍하고 공포스러웠지만, 하지 않을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이 내 업(業)이었으니까.
***
아시프-1은 산책을 나섰다.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물거품처럼 부글거렸다.
고독한 사유(思惟)는 익숙했다.
후라이팬 시절, 간혹 주인과 주인 사이 연결고리가 끊기면 인적이 없는 곳에서 홀로 오랜 나날을 버텨야 했기 때문이다. 웅웅거리는 공명음이 외부에 닿지 않을 때도 있었다.
예를 들어, 우주선의 산소 탱크가 박살나서 조종간의 주인은 질식사 하고 선체는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못한 채 수십 년 우주를 떠돌 때가 그러했다.
‘나도 이 육신에 어지간히 익숙해졌나 보군. 생각을 정리하려고 굳이 몸을 움직이다니.’
사실 재조립된 영혼 파편 중엔 사물 대신 사람에게 기생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아시프-1은 과거를 떠올릴 때 후라이팬을 중심으로 생각한다. 합체된 인격의 주도권을 그가 가져갔기에.
‘그것도 희한한 일이야. 왜 내가 이겼을까?’
그 과정의 기억은 흐릿하다.
자아를 손에 넣기 위한 파편 간의 치열한 싸움.
‘아버지와 가장 오래 함께했기 때문일까?’
장태준의 부엌에서 민준이 발견한 당시, 그 도구의 업은 세상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업, 사람으로서의 업은?
아시프-1은 자신이 무얼 위해 존재하는지 고민한다.
‘창조주는 나를 사람의 왕으로 임명하려 한다.’
신을 대신하여 우주를 다스리는 자.
‘그럼, 나의 새 업은 이미 정해진 것일까?’
타인이 정해 준 삶의 목적과 의미.
‘나는 그 일을, 그 자리를 원하는가?’
지금까지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창조주의 명은 따르는 것이 당연하니까. 자신의 희망이나 호오(好惡)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같은 질문을 다시 뇌까린다.
‘그 일을 하고 싶은가?’
그대로 계속 걸었다. 주변의 풍경이 바뀐다. 마주친 몇몇 신자가 고개를 조아리며 예를 표했지만 아시프-1은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그렇게 몇 킬로미터를 걸은 끝에.
그는 답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문장을 중얼거렸다.
‘해야 한다.’
그는 이미 창조주의 대계를 들었다.
그들 종족은 우주의 멸망을 유예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아시프-1이 감히 상상하기 힘든 아득한 여정을.
그리고 태초의 종족을 대표하여 창조주는 이미 긴 시간 고통을 겪었다.
아시프-1이 후라이팬에 갇혀 어둠 속에서 보낸 고통 따위는 비교할 수 없을 터.
‘어쩌면 이 역시 우주의 자연스러운 발전 과정일지도 모른다.’
끝이 정해진 물질계에 그걸 막을 능력을 지닌 종족이 탄생한다. 그들의 주도하는 길을 걷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 설사 다른 종족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아시프-1은 민준의 명령을 수행함으로써 대계에 일조할 터다.
간단한 문제였다.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
그렇게 잠정적 결론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맺힌 답답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분명 맞는 결론이지만.
뭔가 잘못된 것 같은.
‘알 수가 없군.’
혼잡한 머리를 정리할 겸, 내면에 매몰된 감각을 밖으로 돌렸다.
그러자 너무도 집중한 탓에 듣지 못했던 소음이 감각을 두드렸다.
“이 더러운 것들! 여기 숨어 있었구나!”
“캬아아아악!”
“잡아! 자비를 허락하지 마라!”
대단한 소란이었다. 지금까지 듣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로.
아시프-1은 고대 종족 도시 외곽의 으슥한 곳까지 걸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시끄러운 저편을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매우 폭력적인 의념 덩어리들이 떠돈다.
신도들이 저곳에 있다. 그들 머릿속에는 환희와 적의, 사명감과 파괴욕구가 가득하다.
그리고 정신을 쉽게 읽을 수 없는 종족도 그들과 함께 있는 듯하다.
아시프-1은 텔레포트를 하지 않았다. 여태와 같이 묵묵히 걸음을 옮겨 다가간다.
코너를 돈 순간.
콰직!
골목벽에 적갈색 체액이 튀었다.
등껍질이 박살이 난 채 쓰러지는 토드가 보였다. 그 발치에는 목이 뽑히거나 으스러진 시신들이 나뒹굴었다. 좁은 길목에 열기와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을 다지듯이 내려치는 주교들.
전면전 당시 만큼의 대량 출혈은 아니지만, 이마의 세 번째 눈에는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린다.
그들 뇌리에 거칠게 떠도는 기억을 아시프-1은 읽어냈다.
‘추격전이 있었군.’
위원회 지도부가 궤멸했지만 정식적인 항복은 없었다. 지상에는 아직 소수의 저항군이 남아 있다.
어느 시점부터 도시 단위 폭격을 민준이 금했기 때문이다.
광자포 몇 방이면 전멸시킬 수 있을 텐데도 허하지 않자, 신도들은 그걸 신의 자비로 생각했다.
진짜 이유를 아는 아시프-1 입장에서는 웃지 못할 오해였다.
“아, 교황이시여!”
뒤늦게 눈치챈 사제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아시프-1은 존재의 의미를 고민하며 방황하던 사람에서, 모든 것을 확신하며 한 점의 망설임도 없는 사람의 왕으로 변신한다.
“저항군 잔당인가?”
그는 추격전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하옵니다! 이 더러운 놈들의 흔적을 찾아 일망타진하고 있었습니다!”
아시프-1은 눈썹을 찡그렸다.
“필요 이상의 살상은 금했을 텐데.”
질책을 받은 주교가 죽을 죄를 지었다는 듯 이마를 쾅! 쾅! 바닥에 찧었다.
아시프-1은 새삼 감각이 연결될 정도로 정신을 깊이 읽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상상하기 싫은 고통이었다.
“소, 송구스럽습니다! 요즘 들어 저희의 신성력이···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강해진 탓에!”
아시프-1은 그들 몸에 감도는 황금빛 기류를 보았다.
세눈박이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살짝 쳐서 기절시키려 했는데도, 토드는 뒤통수가 단방에 푹 가라앉으며 절명했다.
성전에서 승리한 뒤 그들의 신앙심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엘라후-프라가 사제들은 아마도 우주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신성력 능력자 집단일 것이다.
‘정작 수장인 나는 한 줌의 신성력도 없는데.’
신도들 누구도 그 사실에 의문을 표하지 않는다.
‘저 능력의 원천은 아버지도 확신하지 못하신다고 했다.’
2차 전쟁 당시, 잠에서 깬 민준은 신앙에 근거한 이능력의 존재에 매우 놀랐다.
태초의 종족이 우주를 다스리던 시절에는 신성력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랬다면 민준을 신으로 모신 먼 옛날의 엔델리온 중에서도 신성력 능력자들이 탄생했어야 한다.
그렇지 않았기에, 그 촉수들은 쉽게 무신론자로 전향할 수 있었다.
‘저것은 진정 신의 힘일까, 아니면 사람의···.’
아시프-1은 사제들에게 말했다.
“좀 더 주의하도록.”
“넷! 알겠습니다!”
주교들은 골목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구호를 붙이듯 대답했다.
그들을 뒤로하고 아시프-1은 계속 걸었다.
도시 밖으로 나오자 멀리 구축 중인 거대한 건물이 보였다.
완파되지 않고 남은 고대 종족의 설비와 신도들의 헌신적인 노동, 민준의 지식이 합세한 결과 저것은 놀라운 속도로 완성되고 있다.
저 공사가 끝난 뒤의 일에 대해 아시프-1은 생각했다.
“······.”
애써 시선을 돌린다.
그 곁에는 짓는 김에 동시에 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마련된 거처가 있었다.
카바이트 수용소와 인접한 그것은, 광산 행성에서 구조된 고블린들을 위한 임시 숙소다.
그들은 나중에 다른 차원으로 보내질 것이다. 신은 그런 사소한 안건은 자신에게 일임했다.
아시프-1은 고블린의 새로운 터전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대다수의 별은 저 종족에게 호의적이지 않거나, 이미 그들을 경제적 노예로 인식했거나, 심지어 사회적 멸종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저들만 사는 행성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별은 드래곤들이 지배자였던 시절 이미 사라졌단 말이지.’
그것이 바른 답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지능이 다소 떨어지는 지성체는 다른 종족과 섞이는 걸 막는 게 옳은가?
사람의 왕으로서 결정할 일은 그 외에도 수두룩했다.
좀 더 먼 곳으로, 건물 대신 푸른 숲과 호수가 이어진 구역까지 걷던 와중.
쿵! 쿵! 쿵!
그는 땅으로 전해지는 진동과 재잘거리는 소리를 느꼈다.
“야! 너 왜 이렇게 빨라졌어!”
“으악! 잡혔다!”
이번에 펼쳐진 풍경도 어떤 종류의 추격전이 마무리 되어가는 모습이었다.
다만,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크르릉! 크라라라라!”
유려한 궤도로 하늘을 나는 드래곤.
묘기에 가까운 화려한 비행에, 평범한 사람들은 눈으로 좇기도 힘든 속도다.
그는 염동력으로 부유하는 촉수 생물들 근처까지 날쌔게 접근하더니.
입을 쩍 벌렸다.
“악!”
용이 촉수를 물었다.
“으아! 아아아아!”
물린 아이는 죽겠다는 듯 비명을 질렀지만, 아시프-1은 그게 장난임을 알았다.
“으씨! 한 번 더 해!”
드래곤의 다문 입 사이에서 4번 촉수와 5번 촉수를 꺼내며 아이가 투덜거린다. 공중에 휙휙 털며침을 닦아낸다.
용은 이빨을 세우지 않고 살짝 문 것이었다.
“···어?”
그때 아이들이 아시프-1을 발견했다.
“그 사람이다!”
아이들도 이젠 아시프-1의 직업이 뭔지 안다.
“윰투스네 대장이야!”
총대주교가 지겹게 설명한 덕에 아이들도 개념을 확실히 잡았다.
“···모두 얌전히 굴어!”
아시프-1은 권력자다.
‘신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로 애들을 협박하는 대가로 윰투스에게 의식주를 제공하는 고용주라는 뜻이다.
“우리가 잘못하면 불쌍한 윰투스는 실직자가 될 거야.”
촉수들이 크기를 줄이며, 사사삭! 재빨리 드래곤 등 뒤로 숨는다.
하지만 교황은 엔델리온들에겐 관심이 없었다. 그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너.”
그가 내민 손가락은 아시프-500을 가리킨다.
드래곤은 극도로 긴장했다.
“···어머니에게 이름을 받았다며?”
“네, 그렇습니다.”
아시프-1은 비로소 답 안나오는 생각에서 벗어나, 다소 유치하고도 개인적인 주제에 몰입할 수 있었다.
‘내게도 주지 않으신 이름을 왜 저 용에게?’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쩌다가?”
저 제법 강력한 텔레파시스트의 기억을 읽는 건 귀찮은 일이었다.
용은 잘못을 지은 듯 주춤거리다가 말했다.
“···제가, 하나 지어달라고 부탁 드렸습니다.”
아시프-1은 둘 사이에 오간 대화 내용을 듣고는, 아까와는 결이 달라진 표정을 지었다.
오묘한 얼굴.
“그래서, 받은 이름이 뭐지?”
“제타미엘. 제타미엘입니다.”
“왜 하필? 아··· 됐다.”
아시프-1은 말을 하다 말고 다시 하늘을 보았다.
“직접 여쭤보면 되겠군.”
“네?”
“어머니가 돌아오고 계신다.”
다른 행성으로 출타 중이던 공주님-성모님-할머니가 귀환한다는 소식에 촉수들도 관심을 보였다. 우주까지 내다볼 수 있는 눈으로 위를 응시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아시프-1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새 몸으로 갈아탄 순간부터, 아시프-1은 거리와 상관없이 그녀의 위치를 정확하게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유는 짐작 가능했다. 자신의 몸 역시 본래는 아버지를 위한 의체였던 걸 생각하면 뻔했다.
델은 계획했던 플랜B··· 그러니까 두 사람만의 도주 중에 그녀가 어디에 있든 민준이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두 사람이 다시는 떨어지지 않도록.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역시나 너무 과하다고 해야 할지.’
혀를 차며 상공을 응시하니.
저 멀리, 우주선이 접근하는 광경이 그제서야 엔델리온들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
“쉘터의 위치를 찾은 것 같아.”
돌아오자마자 민준과 대면한 델이 말했다.
“어디지?”
그곳은 델도 예상치 못한 곳이었다. 이 성계 내를 아무리 뒤져도 찾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애초에 왕은 그걸 이 차원에 숨기지 않았으니.
“‘왕’은 지금까지 금고 위치를 일곱 번이나 옮겼어. 그때마다 다른 차원으로.”
일곱 번의 차원 이동?
그 횟수가 묘하게 자신의 기억과 겹친다고 민준이 생각한 그때.
델이 말했다.
“왕은 지금까지··· 카인, 당신이 수형자로 배치된 차원에 쉘터를 숨겨놓았어. 그리고 재배치 될 때마다 따라서 위치를 옮겼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놓았던 곳은···.”
“설마?”
“그래.”
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쉘터는 지구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