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309
310. 업(業) (15)
***
급히 소집된 용족 회의.
젠킨슨이 등장한 순간 드래곤들은 모두 얼어붙었다.
그들은 만독불침에다가 대부분의 균과 바이러스에 면역이지만, 그래도 질병에 걸린다. 원형탈린증(圓形脫鱗症)은 대부분 알고는 있는 증상이었다. 전쟁 당시 종종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렇게 위중한 경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드래곤 로드!”
몸 곳곳에 둥근 구멍이 뚫린 것 같다. 누군가 억지로 비늘을 뜯기라도 한 듯 넝마 조각에 가까워진 피부. 모두의 시선을 끈 레드 드래곤이 회장 중심에 섰다.
씁쓸하게, 젠킨슨은 속으로 중얼거린다.
‘치료를 못 받고 와서 좋은 점도 있군. 설마 내가 이 꼴로 거짓말을 할 거라고는 의심치 않을 테니.’
그의 상태를 보고 블레어는 급하게 ‘넷째’를 찾았지만 곧 직원들로부터 기가 막힌 답을 들었다.
차원계 최고(로 추정되는) 그 능력자가 젠킨슨 타워를 몰래 탈출했다는 것이었다. 급하게 사람을 풀었지만 젠킨슨은 그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고, 바로 회의장으로 출발했다.
용족들 사이에는 수근거림이 퍼진다.
“대체 로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에게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근래 지구에서 벌어진 수상한 일들에 로드가 연관되어 있다는소문 때문이었다. 얼마 전 갑자기 외부 출입을 끊고 근신한 것도 수상했다.
성질이 급한 용들은 벌써부터 한마디씩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모습이었다. 감히 말을 내뱉지 못한 것은 젠킨슨의 몰골이 그 정도로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젠킨슨은 장내를 천천히 둘러본다. 그의 태도 역시 여느 때와 달랐다. 그는 갑작스러운 소집에도 재빨리 모여준 동족들에게 감사를 표하지 않았다. 회의 개시를 선언하는 의례적 인사도 생략했다.
그의 첫마디는 이러했다.
“저는 전대(前代) 드래곤 로드를 ‘기억’합니다.”
잠시 눈을 감는다. 젠킨슨이 직접 겪지 않은 기억이 부글거렸다.
한때 뇌내에 동거했던 인격의 유산.
“또한 저는 이 자리 누구보다 그를 잘 이해하는 드래곤일 겁니다.”
여기엔 고인의 전 배우자와 자식들도 모여 있다. 하지만 누구도 젠킨슨만큼 그의 비늘 아래까지 깊숙이 들여다본 적이 없을 것이다. 또한 그의 입장에서 세상을 걸어 본 이도 없을 터다.
젠킨슨은 자신이 그를 제일 잘 안다고 자평한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공유할 내용은 제가 아니라 전대 로드가 겪은 일입니다. 알려도 된다고 고인의 허락을 받지는 못했습니다만, 그가 아직 ‘존재’한다면 분명 승락했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렇지요, 로드?
“이야기는 2차 전쟁 직후부터 시작됩니다.”
피로와 탈진감이 약간 섞였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젠킨슨은 설명을 시작한다.
전대 로드는 생전에 밝혀낸 비밀을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으려고 했다. 적어도 죽음 직전까지는 그리 생각했던 것 같다. 평범한 용족은 진실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단정일 수도 있으나, 젠킨슨은 이제와 생각한다. 그 또한 전대 로드가 탈피 못한 엘리트주의의 산물일 수 있다고.
모든 종족의 평등을 주장한 그마저, 자신이 특별한 드래곤이라는 교육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기억을 후계자에게만 넘기려 했으며, 그나마 자신과 제일 비슷하다고 여긴 젠킨슨을 지목했다.
그런 판단이 옳은 것이었을까?
그때 기준으로는 맞았을지도. 하지만 젠킨슨은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진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전대 로드는 용혈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유전자에 숨겨진 난해한 언어.
그걸 기존 유적과 대조 분석한 골드 드래곤은 깨달음에 도달한다.
“신화처럼 구전되던 그들을 우리는 식룡족이라고 불러왔습니다. 또한 위원회는 그들에게 태초의 종족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전설 속의 식룡족이 실존한다는 폭로.
여기까지 설명하는 데도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모두가 납득하고 믿을 수 있도록 젠킨슨은 모든 증거를 동원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처음에는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며 불을 뿜던 용들도, 다른 고룡의 제지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많은 용들은 살면서 한 번 정도는 전대 로드와 비슷한 의문을 품어 본 적이 있었다. 또한 경험을 통해 젠킨슨의 이야기가 매우 신빙성 높다는 사실을 직감한 것이다.
설명은 계속된다. 젠킨슨은 꼬박 한나절 동안 쉬지 않고 말을 했다. 드래곤들이 참지 못하고 윽박지를 때마다 레드 드래곤은 준비했다는 듯 증거를 내보였다. 청중은 도저히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용은 본래 목이 쉬지 않는다. 드래곤 피어를 뿜고 산사태를 유발하는 고음을 내도 버틸 정도로 그들의 성대는 단단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젠킨슨의 육성은 심하게 갈라지고 있었다. 그만큼 큰 스트레스로 이미 몸이 망가졌다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설명이 끝난 후.
완전히 쉬어버린 목소리로 젠킨슨은 선언했다.
“이 모든 내용이 진실임을 나는 용언으로 보장합니다. 거짓인 경우 내 육신과 정신의 완전한 소멸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용들은 경악했다.
용언으로 약조할 때 저런 파격적인 조건을 내미는 드래곤은 없다. 정말 죽지는 않더라도 매우 큰 반동이 돌아오기 때문에.
파아아앗!
그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젠킨슨의 몸에 빛이 돌며 마법이 완성된다.
“······.”
젠킨슨은 갑자기 쓰러지거나 피를 토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모든 내용이 진실이라는 증명.
회장에는 오랫동안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몇몇 용들은 도저히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설명 도중에 회장을 박차고 나가버린 뒤였다.
어떤 드래곤은 무의식 중에 어깨를 긁다가 손톱에 끼어 나오는 비늘 때문에 경악했다. 가만히 듣는 것만으로도 용린이 떨어질 정도로 스트레스를 주는 이야기였다.
하물며, 저 비밀을 지켜 온 전대 로드와 젠킨슨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감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게 전부 사실이라면.”
한참의 정적을 깨고, 어떤 고룡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는 아직도 비현실감 속에서 헤엄치는 느낌을 받는 중이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젠킨슨의 답은 준비되어 있었다.
“최대한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지요.”
목소리는 차마 듣기 힘들 정도지만 시선은 매우 명료했다.
그 눈빛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증거인 것 같기도 했고, 반대로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여태 누리던 무한에 가까운 자유는 끝났습니다. 위원회는 우리의 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공조자이자 공생자이기도 했습니다.”
용외종족 입장에서 보면 고대 종족과 드래곤은 같은 지배 체계 내에서 목적을 공유하는 자들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태초의 종족은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할 것입니다. 그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드래곤은 죄인으로, 더 나아가 가축으로 분류될 것입니다. 우주의 모든 드래곤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태초의 종족에 대해 알게 된 용족은 각기 스스로 판단하여 다른 선택을 내릴 것이다.
민준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도 불복하며 오히려 그를 없애버리려는 자들이 분명 있을 터다. 용을 가축으로 부린 자가 살아 숨쉬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종족의 자긍심을 갉아먹으니까. 그 증거를 없앰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할 것이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죄인의 공급으로 연결되며, 민준도 바라는 바였다.
반대로 민준 앞에 바짝 엎드리고 행동을 통제하는 드래곤도 등장할 것이다. 젠킨슨은 앞으로 지구의 용들이 후자에 가까운 태도를 보일 거라 짐작했다. 자신의 노력이 성과를 낳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저 조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젠킨슨은 한 가지 설명을 덧붙인다.
“그리고 나는, 아시프-666에게.”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제 호칭을 바꿔야겠지요. 나는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될 자에게··· 태초의 종족에게 소원을 하나 빌었습니다.”
이미 설명을 들었음에도 납득할 수 없는 단어 때문에 드래곤들은 혼란스러웠다.
용이 다른 종족에게 소원을 빌다니!
“그가 기억을 잃고 수형자로 살던 시절··· 이제와 생각하면 노동교화형조차 그의 의도가 아닐까 의심스럽지만. 아무튼 그때 나는 그와 벗으로 지냈습니다. 덕분에 업보가 쌓인 모양입니다. 예상치 못한 인과는 내게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원하는 바를 간청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소원 내용을 한 번 바꾸기도 했습니다.”
누군가 물었다.
“그래서, 그 내용이 뭐였소?”
지구의 드래곤만이라도 먹지 말라고 애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젠킨슨은 그러지 않았다.
어쩌면 거듭되는 절망 때문에, 이제 악밖에 남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바다에서 소원을 바꾸기 전, 난 지성체가 된 드래곤을 그가 가축으로 부리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
모두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이미 아는 내용을 왜 물었는가?
짐작한 답이 이어졌다.
“그는 용혈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어째서 그들의 자유 의지를 빼앗고 채혈해야 하는지. 이 답도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그는 답했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원치 않아하기 때문이라고요.”
그리고 다음 설명을 들었을 때.
청중은 젠킨슨이 왜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용혈은 생명력의 근원이지요. 누구도 기꺼이 내놓으려 하지 않기에 세뇌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어떤 드래곤도 자원하여 희생하려 하지 않기에, 죄인의 피를 형벌의 형태로 뽑을 수밖에 없다고.”
레드 드래곤은 힘 빠진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한 일이 전혀 자랑스럽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바로 말했습니다.”
젠킨슨은 민준에게 선언했다.
“나는 내 피를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자유 의지로, 기꺼이.”
“······.”
“그 후의 대화 역시 여러분들은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민준은 형언하기 힘든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그는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냐고 대꾸했다. 젠킨슨의 피를 받아가지 않겠다고도.
민준은 한 명의 드래곤이 내놓는 피로는 자신의 길고 긴 계획, 우주의 종말을 막는 대계를 이룰 수 없음을 지적했다.
그러자 젠킨슨은 다시 질문했다. 만약, 나 말고 다른 용까지 합류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리고 용이 스스로 피를 제공한다는 새로운 개념이, 먼 미래까지 이어진다면?
“긴 논쟁이었습니다. 그가 나와 어울려 준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기적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태평양 위의 대화는 모함의 사제들이 불안해할 정도로 길어졌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는 우리를 믿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쯤에서 그만할까도 생각했습니다.”
다시, 씁쓸한 무언가. 웃음이라 단정하기 힘든 일그러짐이 입가를 스친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난 드래곤으로 태어났으니까요. 그리고 어째서인지, 난 이 부족하고 결함투성이에, 죄로 얼룩진 종족을···.”
잠시 말을 고르더니.
“···엉망진창인데다가 잘못된 선택만 반복하는 이 종족을, 난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페르센이 갈려버리기 전.
대다수의 동족을 상징하는 듯한 그에게 분노하여 증오와 저주를 퍼부은 직후임에도.
젠킨슨 역시 용이기에, 용을 놓아버릴 수 없었다.
“다시 그를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민준··· 태초의 종족마저 드래곤의 호의 덕에 위기를 극복했던 사건이 있음을 언급했습니다. 세상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한 가지 방향으로만 영향을 주지는 않습니다. 업보는 복잡하게 얽히기 마련입니다. 또한 그 거미줄은 시간이 지날수록 촘촘해집니다. 모든 경우의 수를 닫아 놓는 것보다는, 아주 작은 문이라도 열어 놓아야 선(善)의 업이 쌓일 가능성 또한 높아질 터입니다.”
그리하여 민준은 결국 또 하나의 가능성이 싹틔울 기회를 허락했다.
그것이 젠킨슨의 소원이었다.
“그에게 약속했습니다. 난 앞으로 내 손으로 내 피를 공급할 것입니다. 가축으로서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직접 택한 행위입니다. 수명이 깎일 정도로 한꺼번에 채혈 당하는 대신 매일 일정한 양을 공헌하겠습니다.”
민준 입장에서 지금은 한 번에 대량을 뽑는 게 효율적이다.
허나 이 방식의 단점은 홍콩의 영주, 레이먼드 웡이 그러했듯 용이 금방 건강을 잃으며 신성력으로도 치유가 어렵다는 것이다.
“내가 그리 약속한 대가로, 그는 한 명의 죄인을 가축에서 사람으로 원복시켜 주기로 했습니다.”
“······!”
용들은 이 대화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것 같았다.
“로드, 설마?!”
“네.”
젠킨슨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청중은 그의 처참한 외모를 잠시 잊어버렸다.
“나는 나 외에도 지원자가 분명 존재할 것이라 설득했습니다. 그리하여 내 소원이 받아들여지고 또 하나의 약속이 체결되었습니다. 앞으로 한 명의 자발적 공혈룡(供血龍)이 탄생할 때마다 그는 한 명의 용족 죄인을 구원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죄의 씻김이나 벌의 면제가 아니라, 오로지 가축 신세를 면하는 것이었다.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죄를 범한 용의 자유 의지를 허락하는 일.
“그리고 나는 이 자리 모두가 나와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정신적 자기 위안일 뿐이라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젠킨슨은 진심으로 그리 소망했다.
누군가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가 왜 내 피를···.”
“완벽하지 않고 세뇌를 당하지 않은 모두가 죄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후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품은 악의 편향을 부인할 수 없다면 죄 역시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린 서로의 안전망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
“이기적이기로 유명한 드래곤이지만, 그런 우리에게도 선을 긋지 않고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대상은 바로 해츨링입니다. 우리는 오직 후손들 앞에서는 좀 더 관대해지고 이타적인 사람이 됩니다.”
물론 여기에도 소수의 예외는 있으나, 그런 자는 드래곤 사이에도 괴물로 취급받았다.
“이미 언급하였듯 공혈은 그런 우리의 자식들과 그들의 자식들, 더 먼 후손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우주의 영생이 달린 문제이니까요. 물론 선택은 자유이며, 난 차원계 모든 동족에게 이 약조 내용을 전할 생각입니다.”
쇳소리에 가까운 목소리는 단단한 신념을 전한다.
“어떤 이들은 내게 드래곤의 운명을 결정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난 우리의 운명을 정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을 계기로,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운명을 제한적인 범위에서나마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젠킨슨의 소원이었다.
드래곤이 종족의 명운을 직접 정하게 물꼬를 터 주는 것.
“이대로 긴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사람은 남지 않고 모두가 가축이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지금과 마찬가지로 일정 비율로 섞여 있을 수도. 그도 아니면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두가 사람의 자격을 인정받을지도 모릅니다.”
그 답은, 그 비율은 의로운 뜻을 지닌 드래곤이 얼마나 많이 나서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어쩌면 젠킨슨 사후로 지원자가 끊길 수도 있다.
혹은 반대로, 용이라면 당연하게 동참하는 분위기가 먼 미래에는 조성될지도.
잠들 수 없던 수많은 밤, 젠킨슨은 고민했다.
과연 용족에게 희망은 있는가? 약속이 허무로 돌아가지 않을까? 소원을 또 한 번 바꾸겠다고 이제라도 간청하면 안 될까? 한 번 바꿨다면 두 번도 가능하지 않을까?
비늘 빠지는 고뇌 끝에 그는 결론을 냈다.
“저는 믿기로 했습니다.”
소원을 들어준 것과는 별개로, 민준은 그것이 이룰 수 없는 희망이라 말했다. 어떤 꿈은 허무하게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레드 드래곤은 꿈꾸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것에 남은 생을 바치기로 한 고룡은 회장을 둘러보았다. 청중은 그의 눈에서 별빛이 반짝이는 듯한 착시를 느꼈다.
“못마땅할 수도 있습니다. 왜 드래곤만 이런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지? 이것은 종족에 근거한 원죄에 가깝지 않은지? 나도 그리 생각합니다. 용은 불공평한 입장에 몰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이건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주에 양분을 제공하는 공헌 말입니다.”
덧붙여.
많은 이들이 동의하지 않겠지만, 젠킨슨은 이렇게 생각한다.
“또한 이를 통해 긴 세월 드래곤이 다른 종족에게 저지른 만행을··· 그 업보를 갚을 수 있겠지요. 그렇기에 난 시작하려 합니다.”
그들의 후손이 선조의 죄업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음에 젠킨슨은 슬픔을 느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를 통해 후손이 멸종하지 않게 도울 수 있기에 그는 기꺼이 나서려고 한다.
젠킨슨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것이 나의 업(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