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311
312. 업(業) (17)
***
한 해의 마지막을 이레 앞둔 겨울날.
거리엔 캐롤이 울려 퍼지고 행인들은 최근 분위기를 감안하면 의외일 정도로 많았다.
신성력이 입증되며 온갖 종교가 등장하게 된 세상이지만 오랜 전통과 문화는 여전히 명맥을 이어나간다.
물밀듯 몰리는 행인들이, 서로 약속처럼 일제히 거리를 두고 피해가는 곳에 기이한 3인이 대치하듯 섰다.
장발의 남자가 말한다.
“음, 그러니까··· 아, 잠깐.”
신성력 능력자를 부르려다 멈칫한다.
“이름이 뭐였지?”
시간이 촉박한 현재, 아시프-1의 마음은 매우 급했다. 그러다 보니 간과한 부분이었는데, 젠킨슨 타워 직원들 중 능력자의 이름을 마음속에서라도 언급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상대는 소년과 청년의 중간 쯤에 해당하는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냥, 다들 넷째라고 부르는데요?”
목소리에 맺힌 경계심이 짙어진다.
젠킨슨의 사람이라면 이름을 물을 리 없다.
“회장님이 보낸 사람 아니었어요?”
“넷째는 이름이 아니야.”
아시프-1은 질문에 답하는 대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집단 방백같은 대화였다.
“가족 호칭은 이름을 대신할 수 없지.”
아시프-1이 이름이 아닌 것처럼.
‘그러고 보니, 어머니께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는 걸 깜박했군.’
심지어 드래곤도 델에게 이름을 받았다. 그녀는 수고스럽게도 신을 모시던 시절의 고대 경전에 뿌리를 둔 단어를 찾은 것 같다.
제타미엘.
현대 언어로는 죄가 없는, 순수한, 무고한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터다.
아시프-1은 이름이 생긴다면 자유 의지라는 단어에 유래한 것을 받고 싶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소한 문제가 있긴 했다. ‘자유’를 태초의 종족 언어로 번역하면 동명이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창조주가 좋아할 리 없는 이름이며, 향후에는 지옥의 수문장으로 의미가 바뀔 수도 있는 단어였다.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찰나 엇나간 생각을 다시 본래 궤도로 되돌린다.
“뭐, 상관없나? 일단 넷째라고 부르지. 어서 같이 가자고.”
“내가 왜요? 지금 바빠요. 이 형이랑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중인데요.”
흘깃, 시선을 돌린다. 그곳에는 고블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시프-1이 잘 아는 사람이다. 설마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동철 씨에게 허튼 수작 안 부리는 게 좋을 거야. 방금 신성력으로 그에게 뭘 하려 했지 거지? 일단 해를 끼치진 않은 것 같지만···.”
넷째와 고블린이 동시에 반응한다.
“아, 이름이 동철이었어요?”
“날··· 알아··· 요?”
동철의 머릿속이 한층 더 복잡해졌다.
그 역시 저 남자를 아는 것 같다고 느꼈지만, 아무리 기억하려고 애써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저 고블린 잘못 건드리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 아니, 가장 무서운 신에게 바로 알람이 간다고. 아무리 대단한 능력자라도 한 번에 몸이 갈려 나가는 수가 있다.”
“말도 안 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신은 내가 모시는 신인데, 그분이 왜 내 몸을 갈아요?”
“예상했지만 역시 말이 잘 안 통하는군. 아무튼, 종교쟁이 놈들은.”
자신도 종교 집단의 수장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듯한 발언이었다.
“아무튼, 전 못 가요. 지금부터 형이랑 할 일이 많단 말이에요! 우리 교단의 두 번째 교인이 되었으니, 일단 축하 파티부터 하고 이런저런 종교의식도 만들어야 하고. 같이 경전도 써야 하고!”
“아니··· 잠깐··· 만. 난 아직 가입한단··· 이야기··· 안 했는데···.”
“뭐야. 그러고 보니, 너 그만한 신성력을 가지고도 아직 휘하에 성도가 없는 거잖아? 오호라. 이건 생각보다 써먹을 구석이 더 많겠는걸? 아무튼 괜히 저 사람한테 귀찮게 굴다가 괜한 횡액 뒤집어쓰지 말고, 얌전히 따라와. 네가 걸죽한 변사체로 발견되면 나도 곤란해지니까.”
“댁이야 말로 방해하지 마요! 내 교인에 대해서는 내가 더 잘 알아요. 우리 둘은 종교적 사명으로 뭉친 운명 공동체란 말이에요!”
“아니··· 근데, 당신··· 방금 전까지··· 내 이름도 몰랐···.”
그때였다.
“맙소사, 교황 예하?!”
번화가 한복판에 나타난 예복 차림의 남자는, 보통의 행인 입장에서는 멀리 피해서 돌아가면 되는 화려한 장애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교인들이 그 옷을 몰라볼 리 없는 일.
결국 사제 한 명이 그를 발견한 것이다.
소식은 급속히 퍼졌고 주교들은 즉시 하던 일을 멈추고 천막 밖으로 달려나왔다.
문제는 당황한 나머지 공용어 대신 레파탐 족 고유 언어로 신성한 경구를 외치며, 이마에 피까지 흘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교황을 환영하고 예를 표하기 위해 허겁지겁 뛰었다. 두 팔을 하늘로 높이 들며, 목이 터져라 외친다.
“오! 신의 아들께서 여기 강림하셨다! 우리의 위대한 영도자여!”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넷째에겐, 그들이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이 신과 교황을 위한 찬송이 아니라 ‘당장 저 혼혈 드래곤을 잡아서 우리의 신께 제물로 바치자!’ 정도의 의미로 들렸다.
비록 여러 단계를 뛰어넘은 비약적 상상이었지만, 적어도 검은 머리의 남자가 저 종교와 연관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순순히 따라가지 않으려 하니 부하들을 부른 것일까?
넷째는 결심을 했다.
“어이, 이봐.”
아시프-1은 골치 아픈 표정을 짓는다.
우우웅!
넷째의 두 팔에 황금빛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는 해본 적 없지만···!’
아시프-1의 얼굴을 겨냥하며.
‘간신히 처음 전도한 교인인데, 안전하게 데리고 도망쳐야 해! 여기서 종교 전쟁을 벌이면 내 손해야.’
1:1로 싸우면 모를까, 상대편 쪽수가 너무 많고 여기는 시내 한복판이다.
문제가 생기면 넷째가 ‘사람’ 중 유일하게 무섭게 여기는 드래곤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다.
서울은 그의 영지니까.
‘실패하면 안 돼! 기회는 한 번이다!’
평소처럼 치유와 회복의 힘을 발휘하는 대신, 상대의 두개골 안에 큼지막한 종양을 만들기 위해 겨냥하던 그때.
—!
“참, 나.”
아시프-1은 혀를 찼고.
화아아아악!
“어··· 어?!”
갑작스럽게, 넷째는 알게 되었다.
자신이 저 주교들 몰래 신성력을 숨겼던 것처럼.
눈앞의 남자도, 여태 힘을 숨겨왔다는 것을.
처음으로 넷째에게 닥친 것은 견디기 힘든 흔들림이었다.
갑자기 땅이 왜 이러지? 아니, 땅만 문제가 아니었다. 그를 둘러싼 모든 공간이 통째로 요동치며 회전하고 있었다.
반년 조금 넘는 생애 통틀어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현기증.
참기 힘든 두통이 이어진다. 속이 미식거리며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기도 했다.
털썩!
넷째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가까스로 몸의 균형을 잡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빙글빙글 돌았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흐릿하게 퍼졌다가 다시 모이기를 반복했다.
‘안··· 돼!’
멀어지는 의식을 잡으려 애쓰지만.
결국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며.
어둠이 그의 안면을 후려치듯 덮쳤다.
“으··· 읍!”
철푸덕!
콰직!
안면이 바닥에 충돌하며 엎어진 순간, 그가 쓴 썬글라스가 깨져나갔다.
“어··· 어, 괜찮아요?!”
고블린은 그를 부축하려고 하지만, 아시프-1이 만류한다.
“괜찮습니다. 잠깐 기절한 것뿐이니.”
“···기절?”
“능력을 감안하면 빠른 세뇌가 힘들 것 같아서, 지주막하출혈의 저주를 걸었습니다. 정말 끈질기게 버티더군요. 평범한 인간이라면 죽을 수도 있지만, 저 정도 능력자라면 가만히 둬도 천천히 회복할 겁니다.”
다가오는 주교들에게 손짓하며 명한다.
“어이, 이 녀석을 좀 한적한 곳으로 치우자.”
“······?!”
아차, 또 평소 말투가 나와 버렸다.
다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신분에 맞는 언어를 구사하려던 순간.
화앗!
아시프-1의 표정이 굳는다.
“···어라?”
바닥에 쓰러진 넷째의 몸에 황금 섬광이 번뜩였다.
그 직후.
“으··· 으으! 아오, 머리야.”
분명 한 시간은 기절시키려고 작정하여 힘을 썼는데도, 상대는 벌써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심지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펼친 힘이 저 정도.
아시프-1은 놀람과 반가움을 동시에 느꼈다.
“이야! 진짜 제대로 된 녀석이구나?”
찾기는 제대로 찾았다고 판단하며.
다시 한번 저주를 쓰려고 하는데.
“아··· 자··· 잠깐만!”
넷째와 교황의 시선이 동시에 고블린에게 닿는다.
“나··· 이제··· 알 것 같아요. 당신··· 누구인지!”
상대의 ‘근본’을 볼 수 있는 능력은 아시프-1을 상대로도 발동된 상태.
그런데 그 결과물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동철은 지금까지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한 가지 형상으로 시각화되는 반면, 저 장발의 남자 등 뒤에는 수만 가지 형상이 나타났다 스러지기를 반복했다.
예를 들자면 인간, 엘프, 고블린, 드워프, 트롤, 오크 등의 종족은 물론이고 동철이 알지 못하는 별의별 기괴한 외계인들의 실루엣이 꽃잎처럼 모여 만개했다.
심지어 사람이 아닌 물건도 많았다. 칼부터 시작하여 총기나 우주선, 거기에 무기라고 볼 수 없는 도구들··· 필기구나 알 수 없는 기계의 부품, 부르릉거리며 진동하는 용도를 짐작하기 힘든 막대기, 핸드폰과 비슷한 통신 기기 등. 셀 수 없이 많은 형상.
그 모두는 무언가의 파편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철이 관찰을 계속하자, 각각의 파편들은 한곳에 모여 거대한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완성된 퍼즐 조각처럼 나타난 것은 검은 원 아래 마찬가지로 검은 막대기가 수직으로 연결된 형태였다. 동철은 처음엔 그걸 열쇠구멍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윤곽을 자세히 살피니, 그것은 원형 철판에 긴 손잡이가 달린 사물이었다.
동철도 잘 아는 조리도구.
그제서야, 고블린은 낯선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어조가 왜 친근하게 느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외쳤다.
“후라이··· 팬?!”
“생각보다 빨리 알아차렸군요. 요즘도 매운 음식을 못 먹습니까?”
이번에는 넷째가 바보가 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주변의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상식에도 어긋났지만, 동철은 확신했다.
저 남자는 후라이팬이다.
그가 살면서 경험한 것 중에 가장 감동적인 음식들을 만들어냈던 마법의 도구.
그런데··· 어쩌다가 사람이 되었지?
“에이, 씨. 당신이 후라이팬이든 양푼 냄비든 간에 난 모르겠고! 우리 교인들을 핍박할 거면 가만히 있을 수 없···!”
“잠깐!”
고블린이 그를 멈춰 세운다.
넷째는 이 상황 역시 예상하지 못한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왜요?”
“일단··· 저 후라이··· 아니, 저 사람··· 시키는 대로··· 해요.”
“······?!”
고블린은 생각한다.
후라이팬은 본래 민준의 소유물이었다. 또한, 민준이 사라질 때 함께 없어졌다.
그리고 민준이 돌아온 지금, 그가 사람이 되어 나타났다는 것은 그가 여전히 민준의 편이라는 뜻으로 여겨졌다.
고블린은 질문한다.
“이게 주인님··· 에게 필요한··· 일이야?”
그가 말하는 주인님이 ‘상가 주인,’ 즉, 민준을 말하는 것임을 잘 아는 아시프-1은.
망설임 없이 끄덕인다.
“네, 아버지께 필요한 일입니다.”
“···아버지?”
턱이 떨어질 것처럼 입을 쩍 벌린다.
민준이··· 후라이팬의 아버지라고?
아시프-1은 뒷통수를 긁적였다.
“얼마 전 우리 둘 사이에 좀 극적인 관계 재설정이 있었거든요.”
고블린은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일단 민준이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아는 사람 중 가장 착한 사람인 동시에 은인이기 때문이다.
그 정체가 외계인임을 알게 된 지금도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민준이 레이크필드에게 그를 소개시켜 주지 않았다면, 동철은 아직도 노숙 생활을 하거나, 친구들과 함께 못된 용에게 붙잡혀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을 터다.
“저 사람··· 믿을 수··· 있어요.”
고블린은 넷째를 설득하면서도, 자신에게 말재주가 없다는 사실이 원통스러웠다.
이 한 마디에 상대가 납득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긴 사정을 설명하기에, 지구의 언어는 너무도 발음하기가 어려우···.
“아, 그래요? 그럼 알았어요.”
“······.?!”
“······?!”
막내는 바로 손에 맺혔던 빛을 지워버린다.
그리고는 어이 없을 정도로 산뜻하게 말했다.
“그래서, 어딜 가요? 거기서 뭘 하는데요? 너무 오래 걸리면 내가 도망친 게 들킬 건데. 젠킨슨 타워에 연락을 좀 해줄 수 있나요? 이건 좀 골치 아프네.”
“이렇게, 바로···?”
고블린은 자신이 상대를 설득했다는 사실이 믿겨 지지 않았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고블린을 향해 넷째는 어깨를 으쓱한다.
“제가 말했잖아요. 우리는 운명 공동체라니까요? 형이 믿을 수 있다면 믿을 수 있는 거겠죠.”
아니, 너··· 저 사람도 나도 오늘 처음 만났잖아.
멍한 표정의 고블린에게 넷째는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제가 말했잖아요? 이렇게 영혼이 맑은 사람은 처음 본다니까요. 그런 사람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죠.”
***
“그러니까···.”
대략 한 시간 뒤.
고블린과 넷째, 아시프-1은 태평양 상공의 모함 선내에 와 있었다.
넷째의 행방에 대해서는 교황이 블레어 쪽에 직접 연락을 취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그가 민준의 오른팔 겸 교단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잘 아는 엘프는 감히 불만을 표할 수가 없었다. 아직 젠킨슨도 용족 회의에서 돌아오지 않은 상태라 달리 수를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고블린이 기다리던 친구는 교단 쪽에서 알아서 챙겨주기로 약조한 뒤, 아시프-1은 동철까지 모함으로 데려왔다. 넷째가 무조건 그와 함께 가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기 때문이다.
아시프-1의 설명을 들은 넷째가 의아한듯 묻는다.
그는 부러진 선글라스를 버리고 온 김에 답답한 마스크와 모자까지 전부 벗은 상태였다.
“신성력을 최대로 방출을 해보라구요? 그거 마지막으로 한 게 두 달 전인가 그런데.”
아시프-1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가 넷째의 마음을 바로 읽거나 조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신성력이 본능적으로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최대치까지 신성력을 방출하면 자연스레 빈틈이 생길 것이다. 그 틈을 타 정신을 분석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힌트가 보일지도 모른다. 그를 그토록 강력한 능력자로 만드는 요인이 무엇일지.
‘제발, 정신 쪽 요소였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배양하기 쉽도록.’
넷째는 생각보다 간단한 부탁이었다고 중얼거리며, 몸을 푸는 제스처를 취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혹시, 치료할 사람 없어요? 그냥 허공에 방출하기는 아까운데.”
아시프-1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드래곤들마저 완벽하게 전부 회복시킨 상태다.
“아까우면 그냥 사방으로 뿌리는 대신, 지표면을 따라 옅게 퍼뜨려 봐. 극적인 효과는 없겠지만, 전 지구인들에게 아주 조금씩의 효과라도 돌아가겠지.”
“음··· 그렇게는 안 해봤는데. 뭐, 한번 해 볼게요.”
신성력으로 지구를 덮을 수 있는 만큼 덮어 보라는, 실로 까다롭기 짝이 없는 요구였지만 넷째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는 지금부터 할 일이 태산이라면서, 얼른 이 일을 끝내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바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다.
잠시 후.
—-!
구르르르르릉!
그의 몸에서 강렬한 섬광이 터져 나오고.
넷째는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외부 자극에 일체 반응하지 않은 채 오로지 빛을 토해내는 데에만 열중했다.
동철은 시내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맨눈으로 직시하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돌렸다.
한편, 아시프-1은.
‘와···. 이 자식. 뭐야?’
신성력은 마력과 반발한다.
그를 겨냥하여 내뿜는 것도 아니라, 사방에 옅게 덮는 형태로 방출 중임에도.
그의 체내 마력이 저항하려는 기미를 보였다. 그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었기에.
마냥 감탄할 수는 없었다. 그는 바로 넷째의 정신을 살피기 위해 침투한다. 방금 전과는 달리,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벽을 뚫고 그 아래 표면의식··· 더 나아가 기저에 깔린 무의식까지 둘러보려 한다.
“······!”
아시프-1은 현실과 의식의 두 층위를 함께 주시했다.
기억과 의식, 자아와 본능이 뒤섞인 해류를 거스르며 분석한다. 이미 사제들의 정신은 수백 번 넘게 분석해 본 적이 있었다. 그들에 비해, 이 뛰어난 능력자의 어떤 부분이 다른 것인지 관찰한다.
그 속을 한참 들여다보던 아시프-1의 입에서.
“······이게, 뭐야?!”
당혹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온 시점은,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