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32
32. Princess Run (7)
***
그 상태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공주가 갑자기 몸을 긴장시키며 움츠렸다.
“?!”
드워프가 뭔가 눈치챈 듯 다가서자, 그녀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공주는 손을 내밀어 저지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궭탛팕드륵퀙챠뤡귵춀쿕!”
민준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는 뜻이다.
그 말에 대꾸하며 드워프가 비슷한 소음을 냈다. 그러자 공주는 스위트룸 내실 중 가장 큰 방으로 뛰듯이 걸어가버렸다.
쿵! 쿵! 쿵!
호텔 전체를 빌리지 않았으면 아래층에서 꽤나 심한 민원이 들어왔을 법한 소음이 뒤따랐다. 그리고 문을 거칠게 닫는 소리.
그제서야 조용해진 거실에서 드워프가 말했다.
“이상하네요. 공주님께서는 오늘 아침에 이미 한 번 생산에 성공하셨는데.”
“······아, 그럼 지금 저게?”
“맞아요. 갑자기 신호가 오셨다네요.”
공주는 뜬금없이 황금알을 낳으러 간 모양이었다.
“흐음.”
민준은 창 밖을 보았다. 배운 기억이 없는 상식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금 본 장면과 대치되는 내용이었다. 요즘 슈탄인 여성들은 해가 중천에 뜬 시간에도 알을 낳나?
그 상념은 브래들리의 말 때문에 끊겼다.
“어이, 예민준 요원님?”
그는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민국은 그가 파견된다는 정보를 브래들리에게도 마지막까지 비밀에 부쳤던 것이다.
***
“뭐라고? 인권연대?!”
다른 방으로 이동해서 단 둘이 남고 나서야 그 이유를 듣게 된 브래들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놈들이 반기지는 않을 거라 짐작했지만, 구체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오면 이야기가 달라지잖아!”
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탁탁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민준, 지금 너는 한국 이민국을 대표해서 이야기를 전하러 온 거지?”
“그래.”
이것 역시 블레어에게 의뢰받은 내용이다.
“심지어 공주에게는 비밀이라고? 잠깐만. 이렇게 되면 나도 최초 계약된 조건에서···.”
브래들리가 뭐라고 더 말하려는 순간 대화가 끊겼다. 벽을 뚫고 괴수가 포효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근원지는 옆방이었다.
“······.”
식겁한 표정으로 그 방향을 바라보는 민준에게 브래들리가 담담하게 말했다.
“놀랄 것 없어. 공주 알 낳는 소리야.”
“아, 그런가?”
민준은 그 소리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잠시 기억의 서랍을 뒤적거리다가 마침내 그 대상을 떠올렸다. 지구에 오기 직전의 차원에서 ‘크로우 바흐라’를 잡았을 때 놈이 질렀던 비명과 비슷했다.
그는 당시 이미 오천 살을 넘긴 무시무시한 고룡이었으며 위원회에게 수배 당하여 쫓기다가 그 차원으로 숨어들었다. 복구작업이 진행 중이라 엉망 진창이었던 차원은 고룡이 작정하고 숨으려 들면 찾기 쉽지 않은 장소였으니까.
오래 산 만큼 극강의 물리 방어력과 마법 저항력을 함께 지닌 그 용의 체포 과정은 쉽지 않았다. 습격은 몇 번이나 실패하고 용은 그때마다 더 먼 은하계로 달아나 숨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치열한 전투에서 겨우 비늘 한 장이 떨어져 나간 것을 수형자들이 입수했고 그걸 살핀 민준은 저 용이 며칠 안에 탈피를 할 것이라 예견했다. 하지만 동료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게 정말이야? 도무지 믿기 힘든데.’
민준이 말한 것은 위원회의 분석관들조차 장담하지 못하는 정보였다. 인간종으로 분류되는 생물들의 유전자도 차원마다 조금씩 다르듯 용도 서식지에 따라 생물학적 특징이 미묘하게 차이나며 크로우 바흐라 같은 오래되고 강력한 개체에 대한 연구 자료는 위원회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준은 자신했고 그의 예견은 결국 사실로 드러났다. 수형자들은 며칠 후 막 탈피를 마쳐서 비늘이 아직 물렁물렁하고 촉촉한 상태였던 고룡의 몸 위에 3천 톤의 황산을 쏟아 부었다. 긴 도피의 끝이었다.
민준은 당시나 지금이나 자신이 왜 그런 희귀한 지식을 갖고 있는지 이유를 몰랐고, 굳이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검거 이전 기억 중 자신의 정체성과 직결되지 않은 ‘기능성 기억’ 일부가 살아있는 것에 불과하니까.
대신, 이건 가끔씩 궁금했다. 그 드래곤은 지금 무슨 육신을 배정받은 채, 어떤 차원에서 교화노동을 수행 중일까?
‘그 꼴을 한 번 보고 싶긴 하군.’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옛 기억을 몰아내며, 민준은 공주가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정말 끔찍한 고통인 모양이야.”
“슈탄인 여성은 거의 날마다 겪어야 하는 저것을 ‘자연의 저주’라고 부른다더군.”
‘날마다? 원래부터 그랬나?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말이 샜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브래들리가 이야기의 물꼬를 틀었다.
“어쨌거나, 기존에 파견된 이능력자 열 둘의 지휘권은 내가 계속 쥐고 있으라는 소리지? 너는 내 지시를 받지 않고 개별적으로 움직일 것이고.”
“정확해.”
민준은 젠킨슨과 블레어를 대신해서, 브래들리를 포함한 그들 열 셋에게 변경된 임무를 받아들일 것을 제안하러 온 것이다. 이민국의 메신저 역할.
“그럼 우리끼리 논의를 좀 해 봐야겠어.”
“좋아, 시간은 충분하니까.”
브래들리는 그 자리에서 바로 호텔 곳곳에서 경계 중인 다른 경호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머지않아 합의된 내용을 민준에게 통보했다.
“리스크가 분명해지고 더 커졌으니, 다들 본래 약속된 보수의 세 배를 원한다. 그리고 나는 계약 조건에 지구 화폐 말고 달란트도 요구했는데, 그것 역시 세 배를 원해.”
민준은 블레어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들의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그러자 그녀는 비밀을 엄수하라는 주의사항을 강조하는 동시에, 계속 남아줘서 고맙다는 뜻을 전하며 세 배가 아니라 네 배를 지불할 것을 약속했다.
브래들리는 이럴 줄 알았으면 다섯 배를 부를 걸 그랬다며 투덜거렸다.
***
베르미 공주의 공식 일정이 시작된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그녀는 무척이나 화려한 모습으로 경호원들 앞에 나타났다.
“큭!”
브래들리가 눈을 찡그렸다. 방문을 열고 악어 외계인이 나타난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크리스마스 트리 전등을 수천 개 켠 듯한 눈부신 후광이 번쩍였기 때문이다.
손톱 위에 염료를 칠하거나 각종 소재를 덧씌우는 것을 ‘네일 아트’라고 부른다. 그럼, 비늘을 비슷하게 장식하는 행위는 ‘스케일 아트’라고 불러야 할까?
그녀는 휘황찬란한 보석과 금속을 얇게 편 장신구를 모든 비늘 위에 한 장씩 덮고 있었다. 유정란을 낳은 적 없는 여인들이 입는 전통의상이다. 고향인 겔랑코 차원에서 경호 인원은 안 데려오고 몸치장을 담당하는 시녀들은 수십 명이 함께 움직이는 이유가 있었다.
드워프, 올가가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의상에 힘을 단단히 주셨네? 오늘은 연회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 종일 비즈니스 미팅만 하는 날인데 왜 그러셨지?”
“······.”
왠지 답을 알 것 같은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드워프가 통역한 공주의 선언은 민준과 브래들리를 당황시켰다.
“네? 텔레포트 대신 차량으로 이동하신다고요?”
“마음이 바뀌셨답니다. 거리 구경도 좀 해보고 싶으시다네요. 유사시를 대비해서 슈탄인 체형에 맞춘 차량도 준비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건 그렇지만.”
민준과 조용히 눈빛을 주고받은 브래들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차로 이동하시죠.”
그러면서 민준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정말 집단 이민을 준비하긴 하는 모양이야. 이주할 차원의 모습을 직접 두 눈에 담고 싶은가 본데?”
민준은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호텔 주차장으로 이동한 브래들리는 오늘 미팅에 참석할 사절단과 경호 인원을 나눠서 차에 배치했다. 가장 큰 공주의 차량에는 그녀와 통역사 올가, 경호 총책임자 브래들리와 민준이 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들은 공주에게서 또 한 번 묘한 반응이 돌아왔다. 드워프가 공주의 질문을 옮겼다.
“몹시 실례되지만 두 분 중 누가 더 강한 요원이신지 하문하시는군요.”
둘은 다시 시선을 교환했다. 뭔가를 짐작한 브래들리가 자처하여 답했다. 민준을 가리키면서.
“이 친구가 저보다 뛰어납니다.”
그러자 올가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슈탄인과 체격 차이가 나는 종족이라고 해도 여러분까지 뒷좌석에 네 명이나 앉으면 답답할 것 같다고 하셔요. 브래들리 요원님은 죄송하지만 다른 차량으로 이동해 주시겠어요?”
“······.”
결국 공주가 탄 차량의 뒷좌석에는 그들 셋만 타게 되었다.
출발한 차 안에는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거리를 구경하고 싶다던 베르미 공주는 그 말을 증명하듯 창 쪽으로 고개를 고정했지만 그 눈동자는 몹시도 바쁘게 움직였다. 건너편에 마주보고 앉은 민준을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 눈치를 보던 공주가 드디어 입을 열고 올가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그렇게 쇠 씹는 소리를 서로에게 뱉던 중에 올가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러다가 결국은 수긍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공주와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이번에는 민준에게 말했다.
“······공주님께도 같은 말씀 드렸지만 요원님에게도 그대로 이야기하겠어요. 전 통역사로서의 근무윤리를 준수합니다. 지금부터 베르미 공주님과 예민준 요원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가든 전 이 자리에서 싹 다 잊어버릴 거고 절대 외부에 말을 옮기는 일이 없을 거니 그 부분은 안심하셔도 좋아요.”
그 표정은 살짝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걸 본 민준은 소리치고 싶었다. 야! 하지마, 그냥 통역하지 마! 민감하고 부적절한 이야기 같으면 그냥 옮기지 말라고!
하지만···.
‘돈이 웬수지.’
지구 화폐든 달란트든 남의 돈을 먹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일단 이 자리에서는 공주의 비위를 적당히 맞춰주는 편이 좋았다. 물론 선을 넘는다 싶으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그리고 올가를 사이에 둔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름이 민준이라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공주님.”
다시 이어지는 불편한 침묵.
공주는 한참 뒤에 다시 어색하게 물었다.
“······겔랑코 차원에는 가 본 적 있는가?”
민준은 일단 이민국 요원이라는 신분에 충실하여 계속 예의를 갖추기로 했다.
“아쉽게도 기회가 닿지 않았습니다. 어떤 곳입니까?”
기억을 잃기 전에 가 봤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장담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공주는 여전히 민준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고개를 밖으로 향한 상태로 답했다.
“매우 아름다운 곳이지.”
그 뒤로 공주는 십여 분 넘게 겔랑코의 자연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두 개의 달이 은청색 밤하늘을 물들이는 풍경이 얼마나 숨 막히는지, 늪지에 포근하게 감도는 바람은 어찌나 부드러운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봄이 다가오면 수초와 양서류들이 산뜻하게 기지개펴는 풍경과, 꽃향기에 취한 사익조(四翼鳥)가 부르는 아름다운 곡조를 정성 들여 묘사했다.
민준은 그저 적당한 추임새를 얹으며 대꾸할 뿐이었다. 올가는 이미 그가 성의 없게 답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터다. 하지만 공주에게만 전달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게 고향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공주가 물었다.
“그대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자랐다고 들었다.”
“네, 그렇습니다.”
“엘프의 피가 섞여 있다고? 나이가 어떻게 되지?”
민준은 대외적인 서류에 기록된 것처럼 자신이 1945년생 광복둥이임을 밝혔고, 1차 집단 이민 때 임신을 한 채로 지구에 온 하프 엘프에게서 태어났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통역된 말을 들은 공주는 처음으로 고개를 휙! 돌려서 민준을 바라보았다. 충격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렇게나 어리다고?!”
“네, 그렇습니다.”
“지금 내 나이의 반도 되지 않는군. 그렇다면, 쿼터 엘프의 수명은 얼마나 되나?”
“저도 확실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군.”
공주는 망설이는 듯하다가 다시 묻는다.
“그대는 혹시, 지구 말고 다른 차원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은 생각은 없는가?”
민준은 생각했다. 그래, 바로 여기군.
이쯤에서 대화를 끊기로 했다.
“공주님, 죄송하지만······.”
하지만 그가 문장을 끝맺기도 전에 공주가 다시 몸을 움츠렸다. 민준의 시선은 슈탄인의 표정과 제스처를 해석했다. 그것은 방금 자신이 뱉은 말을 후회하며 수치스러워하는 자의 표정이었다.
“······.”
공주는 다급하게 고개를 다시 돌리며 창 밖을 응시했다. 널빤지 같은 입이 벌어지고 이빨이 드러난다. 그녀의 말을 올가가 동시통역에 가깝게 옮겼다.
“미안하다. 방금 한 말은 잊어 줬으면 좋겠군.”
“······.”
잠시 그렇게 소리 없이 입모양만 만들다가, 공주는 어색한 어조로 말했다.
“그저··· 그대와 같이 아름다운 생물은 태어나서 처음 보아서 그랬다.”
“?!”
어처구니가 없는 동시에, 결이 다른 어떤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역시나 체포 전에 얻었을 그 상식은 민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럴 리가? 슈탄인이 생물학적으로 이런 외모에 끌릴 리가 없는데. 인간이나 엘프가 악어에게 끌릴 일이 없듯 말이야.’
그리고 이어서 또 하나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무정란을 매일 낳는다고 하질 않나, 인간형 종족 외모를 보고 페로몬을 뿜어 대지를 않나,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공주가 아직 미혼에 유정란을 한 번도 안 낳아봤다고 하질 않나··· 지금 슈탄인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그 직후 민준은 또다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난 대체 왜 지금 상황과 배치되는 지식들을 알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