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33
33. Princess Run (8)
공주는 이젠 눈동자를 민준 쪽으로 다시 돌리지도 못했다. 보고 있지만 보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한 창 밖의 풍경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여전히 수치심을 숨기지 못한 표정으로, 악어를 닮은 공주가 말했다.
“부끄러운 꼴을 보였다. 방금 한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말거라.”
그러고 싶었지만 다른 이유 때문에 기억에서 쉽게 지울 수 없을 것 같았다. 공주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또 말했다. 변명하듯이.
“내 미숙함이 낳은 실수다. 숙녀로서 도리를 아는 여타 슈탄 여인네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지금까지 외간 슈탄 남성과 같은 장소에 있어 본 적 없으니. 단 한 번도.”
민준의 어떤 부분이 다시 머릿속에서 속삭였다. 저게 무슨 헛소리야?
‘정숙한 슈탄 여성이라고?’
그런 도덕과 가치관은 그들 종족에게 낯선 것이어야 했다. 정절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본래, 설사 공주의 침실이라고 해도 그곳에 밤마다 다른 남성들이 오가는 것이 흠이 되지 않는 사회였다. 아비가 누가 되었든 공주가 낳은 것만 확인되면 왕실 혈통을 잇는 것으로 인정되었으니까.
‘아니, 잠깐만. 이게 정말 맞나?’
부표처럼 떠오르는 지식 때문에 민준은 혼란스러웠다. 그 중 많은 것이 요즘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명백했다.
“동족 남성을 가까이한 적 없다 보니 많은 슈탄 여성들이 이따금 혼동하곤 하지. 오늘 나의 태도도 그런 헷갈림으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내가 느낀 감정적 혼란 때문에 그대까지 불편했다면 사과하겠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얼버무린 뒤 계속 신경 쓰였던 부분을 물었다.
“슈탄인에겐 여성의 정절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있는 것 같군요.”
“그러하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오래된 전통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공주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별 걸 다 묻는다는 표정이라기 보다는··· 그런 것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비늘로 덮인 파충류의 얼굴이었지만 민준은 상세하고도 깊은 의미를 건져낼 수 있었다. 너무도 쉽게.
“글쎄. 슈탄의 기록 중 종족 전쟁 이전의 것은 대부분 소실되었으니 유래까지는 알 수 없군.”
‘종족 전쟁’이라는 키워드는 삭제된 인격의 메아리 같은 기억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공주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추측하여 말하건대, 최소한으로 잡아도 800년 이상 이어진 유서 깊은 전통이라고 해야겠구나.”
겔랑코 차원의 종족 전쟁에 대한 정보는 모두 ‘예민준’이 최근에 공부한 내용뿐이었다.
그녀가 속한 국가는 각양각색 종족이 모인 연합체이며 슈탄인의 정치적 지위는 구성원 중 가장 낮다. 연합왕국의 출범 계기가 된 종족 전쟁에서 그들이 패했기 때문이다.
패전 종족으로서 연합에 참여한다는 개념은 전범국이나 식민지로서 합류하는 것에 가까웠다.
‘슈탄은 가장 압도적인 전투능력을 가졌지만 그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고 했지. 그 외 모든 종족이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싸웠다고 했던가?’
쉽게 말해 혼자 왕따 당한 상태로 다구리를 당한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말했다.
“많은 지구인들은 이번 방문이 슈탄인의 지구이민을 위한 포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방금 전 고향으로 자신을 데려가고 싶다는 투로 말한 걸 보면 그런 것 같지가 않았다. 공주는 빠르게 수긍했다.
“소문이 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우리를 너무도 모르기에 품을 법한 오해로구나. 지구의 기후는 우리에게 맞지 않아.”
“그렇긴 하지요.”
“날씨도 날씨지만, 이 몸을 보아라. 나는 종족 평균을 고려하면 체격이 ‘매우’ 왜소한 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말하는 공주의 신장은 2.5미터 정도였다. 종족 평균치 보다 일 미터가 작다.
“이 세계에는 우리를 받아들일 여력이 없어. 마음먹고 준비를 하려고 해도 긴 시간과 자원이 소모될 것이야.”
그 역시 민준이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트롤의 집단 이민 때에도 사이즈 때문에 온 사회가 진통을 겪었고, 당시 각국은 위원회의 압박 때문에 건축법 및 도로교통법을 중심으로 중요 법령을 뜯어고쳐야 했다. 그 난리를 일으킨 트롤의 평균 신장은 인간의 1.5배다. 3미터가 넘는다면 사회적 비용이 얼마나 더 들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럼 정말로 사업을 위해 오신 것이군요.”
그러자 공주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괴롭히던 자책감과 수치심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많이 가신 눈치였다.
“그래, 이번 일을 잘 처리하면··· 어쩌면 내게도 출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지도 몰라. 다른 공주들을 제치고 말이다.”
민준의 삭제된 인격에서 유래한 기억은 말하고 있었다. 슈탄 여성은 한 번 유정란을 낳고 나면 수십 년 간 배란이 멈춰 버린다. 태어난 아이들이 성체가 될 때까지 기르는 데에 모든 자원과 힘을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슈탄인에게 출산의 권리가 제한되는 것은 어떤 의도일까?
금을 낳는 생물이라고 해서 그 개체 수를 무작정 늘릴 거라는 짐작은 현실에 맞지 않다. 양파가 호황이라고 해서 너도나도 밭에 양파만 심은 결과는 다음 년도 양파 가격의 폭락으로 이어진다. 누군가는 슈탄의 개체 수를, 갓 태어난 여아가 성체가 되는 시간까지 고려하여 컨트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먼 과거에 슈탄이 무정란을 한 달에 겨우 한 번 낳는 것을 만족스럽지 않다고 생각한 이들과 동일한 자들일 수도 있다.
그자들은 또한 유정란을 한 번 낳으면 수십 년간 무정란을 낳을 수 없는 슈탄의 생물학적 특성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익!
그때 민준의 무전기에서 브래들리가 보낸 음성이 울렸다. 내용을 인지한 뒤 공주에게 질문했다.
“말씀하신 공덕역 부근에 거의 다 왔습니다. 이제 슬슬 정확한 목적지를 말씀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베르미 공주가 움직이는 방식은 묘할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무엇을 그리도 두려워하는 것인지, 정보가 새어 나갈지도 모른다면서 행선지의 방향만 대충 알려준 뒤 상세 내용은 직전에 통보하는 식이었다.
공주가 때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경호원과 운전사를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내 말을 전하거라. 지금 우리는 ‘고려정밀연금’이라는 회사로 가고 있는 중이다.”
그 이름을 들은 민준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었다. 하지만 곧 담담한 얼굴을 회복하며 무전기로 그녀의 말을 전파했다. 무전기를 끈 뒤에 다시 공주에게 묻는다.
“제가 신경 쓸 일은 아닙니다만 혹시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습니까? 갑자기 이렇게 들이닥치면 그들도···.”
“의도한 것이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네?”
“그들이 당황하도록 계획한 것이라고 하였다.”
“?”
“궁금한 모양이구나. 하긴, 그대들은 내가 지구에 왜 왔는지 그 이유를 모르니 그럴 수 밖에.”
그 다음 순간.
공주의 입이 길게 찢어지며 톱니 같은 이빨을 드러냈다.
“!”
그러자 암녹색 비늘 위에 맴돌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몇 분 전까지 민준의 얼굴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수줍어 하던 공주는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맨 손으로 강철을 찢는 괴력을 자랑하며 사냥감은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가서 숨통을 물어뜯는 것으로 유명한 슈탄인의 덕목을 온 몸으로 표현하는 한 명의 여전사였다.
공주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 세계에 장기악성 부실채권을 회수하러 방문한 것이다.”
그제서야 민준은 베르미 공주가 지구를 방문한 진정한 목적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8차 집단 이민의 사전 조율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곳에 빚 독촉을 하기 위해 온 거였다.
***
공주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허를 찔렀다.
애초에 공덕역 부근은 정부에 제출한 예상 동선에서 벗어난 지역이었고 이동 금지령이 내려져 있지도 않았다. 따라서 고려정밀연금의 직원 대부분은 정상적으로 출근을 한 상태였다.
슈탄인 공주의 방문 사실은 차량 도착 5분 전에 통보되었고, 그들 일행이 주차장에서 내려 로비에 들어선 순간 발칵 뒤집힌 회사 분위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급하게 뛰어내려 온 것이 분명한 이사진들이 공주를 맞이했다.
베르미 공주는 그 모습을 느긋한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유리 조각 위에 철 구슬 굴리는 소리를 냈다.
통역사, 올가가 담담한 어조로 그 말을 통역했다.
“사장 나오라고 그래.”
외부 미팅 때문에 자리를 비운 대표이사는 급하게 복귀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 사이 안내된 회의실에서 민준을 비롯한 경호요원들은 보안 점검을 했고 마법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는 도중 민준의 표정은 계속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이 회사의 이름을 처음 들은 이후로 눈빛이 묘하게 바뀐 상태였다.
그리고 잠시 후.
직원의 부축을 받으면서 노쇠한 남자가 들어섰다.
“오래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베르미 공주님. 제가 이 회사의 대표이사···.”
말을 하다 말고 노인이 몸을 굳힌다.
그의 눈길은 공주 옆에 선 경호원 중에서도 유난히 젊어 보이는 한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차갑고도 짧은 침묵이 흐른 뒤, 사장은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번에는 며칠 전처럼 말실수를 하지 않았다.
“예민준 선생님?”
“······.”
민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오만식에게 말했다.
“정말로 또 뵙게 되는 군요.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고려정밀연금의 대표이사는 민준이 얼마 전 마녀협동조합에서 마주쳤던 옛 동료였다.
오만식은 베르미 공주와 민준을 번갈아 보더니 중얼거렸다.
“아, 그렇군요. 이민국 요원이시니까. ······그렇지요. 요원께서 외계 VIP를 호위하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는 일이지요.”
그러더니 쓴 웃음을 띄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생략된 말이 신경 쓰였지만 베르미 공주가 보는 앞에서 사적 대화를 이어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 반응에 공주는 호기심을 보였고, 둘이 아는 사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베르미 공주는 공사구분이 확실한 여성이었던 것이다.
“이미 안전을 확인하였으니 경호원들은 회의실 밖에서 대기하라고 하시는군요.”
그들은 통역사의 말을 따랐다. 민준은 밖에서 조용히 미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내부의 대화를 엿들으려고 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그러지 않았다.
호기심을 주체 못하는 시절도 지났고, 어떤 일들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상태로 두는 편이 낫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공주가 빌려준 돈의 액수와 오만식의 채무상환계획을 유심히 듣는다고 해서 인권연대의 테러 계획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필 저 양반이 공주의 채무자 중 한 명이었군.’
입맛이 씁쓸했다.
지구의 황금시장을 두고 벌이는 생체합성금과 마법연성금 간의 치열한 경쟁 때문에, 빅 파이브를 제외한 연금술 업체들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자신과 상관없는 뉴스라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궁금하다기 보다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있었다.
‘생체합성금 시장을 주도하는 슈탄인의 공주가 지구의 연금술업체에게 돈을 빌려줬다?’
외계인투자법 개정안에 따르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만식을 비롯한 이 회사 임직원들이 바보도 아니고, 경쟁 업체의 채무자가 되는 선택을 왜 한 것일까?
가뜩이나 지구의 큰손들이 시장에서 겔랑코산(産) 황금을 몰아내기 위해 치킨 게임을 벌이는 이 상황에 말이다.
‘순수한 선의가 아니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모르고 빌렸거나, 채권자가 도중에 바뀐 것이다.
‘공주가 배후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로 빌렸거나, 최초의 채권자가 공주에게 채권을 매각해버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겠군.’
그 어떤 경우든 선하지 않은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 확실하다.
‘슈탄인이 지구의 연금술업체 채권을 들고 있어야 하는 동기는 결국···.’
이 회사를 이대로 망하게 유도하려는 의도는 아닐 터.
지구의 황금 시장에서 생체합성금 파이를 키우고 싶다면 미국이나 유럽의 회사를 무너뜨려야 하며, 한국 업체가 아무리 커 봤자 국제적 기준으로 보면 세컨드 티어에 불과하다. 이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결국, 그건가?’
베르미 공주를 비롯한 슈탄인들은 황금 생산 공정과 관련하여 포트폴리오 다각화를 노리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