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36
36. Princess Run (11)
***
에고 후라이팬은 남의 말을 들을 때는 접촉하지 않아도 인지하여 해석할 수 있지만 그가 하는 말을 주변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닿은 상태여야 했다. 매번 만져 달라고 웅웅 울어대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후라이팬은 꽤나 수다쟁이였다.
한편, 그 마도구에게 공주의 통역을 맡긴다는 이야기가 나온 뒤에도 동철은 두 손으로 그것을 움켜쥐고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녀에게 몇 걸음 다가가서 건네 주면 되는데 그만 몸이 굳어버린 것이다.
이유를 짐작한 민준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내가 건네 줄···.”
“여, 여기요!”
민준의 말이 끝나기 전에 동철이 한 걸음 내딛었다.
후라이팬의 둥근 모서리를 잡고 손잡이를 공주 쪽으로 내민다. 문화가 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제스처였다. 강철로 만든 돼지 목젖을 따는 듯한 괴성을 지르던 공주가 입을 다물고 동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고블린의 필사적인 눈동자가 비쳤다. 지구에 집단 이민을 온 종족 중 왜소한 것으로 두 손가락 안에 드는 생물과, 키가 2미터가 넘는 거대한 악어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메시지가 있다.
“크퉥?”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동철은 어깨를 움찔거렸지만 손에 쥔 것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비늘로 가득한 거대한 육신이 다가오더니 두 손가락만 뻗어서 가볍게 손잡이를 잡았다.
“······휴우!”
땀에 젖은 고블린이 크게 한 숨을 쉬었다. 그 모습을 엘프가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한편, 공주는 후라이팬과 접촉하자 마자 몸을 굳혔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가늘게 뜬다.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민준이 후라이팬에게 말했다.
“방금 내 질문에 답해 달라고 부탁해. 공주가 말하면 통역해라.”
곧, 공주는 다시 흥분했다. 과거의 기억을 되짚다가 습격당한 사건을 떠올리고 몰입한 것 같다.
“=공주님, 좀 진정하세요.=”
민준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지간히 협조가 안 된다.
그가 다가가서 후라이팬 손잡이 면적 중 공주 손가락이 닿지 않은 부분을 잡았다. 두 사람의 살갗이 매우 가까워졌다. 그러자 공주가 용접하는 소리를 멈추고 이빨을 악물었다. 그대로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투덜거림은 속에 담아두며 후라이팬에게 질문했다.
“공주가 지금 뭐라고 했지?”
영양가 있는 내용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돌아오는 답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아··· 아? 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정신이 좀 혼미해서.=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통역을 맡겨 놨더니 왜 갑자기 경황이 없어?
=이 누님··· 정말 화끈하시네요. 하아. 간만에 불이 붙는데요?=
“······요점만.”
=아 지금 무슨 말씀을 하셨냐고요? 누군가를 매우 거친 표현으로 저주하고 계셨습니다. 정체는 모르겠지만 잡히기만 하면 그 껍데기를 벗겨 살점을 한 올 한 올 씹은 다음 소금물에 데쳐 먹을 것이며, 생식기를 뽑아 구강을 틀어막고 손가락을 뽑아 비강을 뚫어 버릴 것이며, 남은 몸은 녹슨 톱으로 썰어 죽일 것이라고···.=
더 들어 봤자 쓸모 있는 말은 없을 것 같았다.
민준의 옆 자리에서 고향의 정취를 묘사하던 감수성 예민한 여인은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진 것 같다. 대신 그녀와 바톤 터치를 하여 적을 잘게 씹어 먹는 여전사가 등판한 모양이었다.
습격한 원흉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거친 슈탄 족 말이다.
‘쓸데없이 복합적인 성격이군.’
후라이팬은 황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 누님 저랑 너무 잘 맞으시는데···. 저한테도 이런 말 한 번 해 주셨으면···.=
인격을 복사당한 쉐프의 피가학적 성향은 육체적 고통에만 반응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어떤 이들은 언어로 모욕당하고 거친 표현으로 협박당하는 것에서 성적 도취감을 느낀다. 이상성욕의 세계는 넓고도 깊었다.
알고 싶지 않은 분야의 디테일을 한 귀로 흘리며, 민준은 후라이팬에게 선포했다.
“3분 준다. 책임 지고 내 질문에 대해 대답을 받아 내. 그렇지 않으면···.”
뭐라고 협박해야 할지 애매했다. 후라이팬 본체를 거칠게 던져 버린다? 망치로 두들겨 버린다? 인정사정없이 용접해버린다?
전부 다 좋아할 것이 틀림없었다.
민준은 기어코 답을 찾아냈다.
“······일이 마무리되고 나서 평생 널 방치할 줄 알아!”
발등에 불이 떨어진 후라이팬이 다급하게 공주에게 정신파를 쏟아내며 애원하는 것을 듣고 민준은 손을 뗐다. 그리고 결계를 보강하느라 확인 못한 핸드폰을 확인한다.
그러는 사이 엘프는 영 신경이 쓰이는 듯 황금색 결계 너머로 충돌을 반복하는 언데드 곤충 떼를 바라보았고 고블린도 그 옆을 지켰다.
‘음?’
그 짧은 시간에 캐시로부터 부재 중 전화가 73통이 와 있었다.
‘언론에 보도된 모양이군.’
그가 임무를 수행 중일 때는 함부로 연락하지 않는 편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수만 마리 곤충 떼가 몰려들고 평소에 잘 펼칠 일이 없는 최고급 결계까지 가동된 상황이니 걱정되었을 것이다. 어떤 마법은 술사가 죽거나 크게 다친 상태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니까.
‘문자도 엄청 보냈네. 있다가 생존신고를 짧게라도 해야겠어.’
받은 문자를 시간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시선이 긴 메시지 몇 통에 멎었다. 그것은 벌레 떼 습격이 시작되기 전에 그녀가 보낸 것이었다. 경호에 집중하며 함께 움직이는 동안 확인 못했던 것을 이제 본 것이다.
아직도 011로 시작하는 전화번호를 쓰는 민준의 2G폰에서 MMS를 확인하려면 절차가 좀 귀찮기에 그걸 배려해서 여러 개로 쪼개서 보낸 문자.
가장 먼저 온 것부터 읽던 민준의 표정이 굳었다.
– 고려정밀연금이요, 부채 문제 때문에 그런거죠? 그런데 정부 지원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이 회사··· 윗사람들에게 단단히 미움을 샀어요.
그 다음 문자에서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 매년 벌금을 꽤 많이 내고 있더라고요. 계속 동일한 문제 때문에 시정 조치를 받았는데 ‘너흰 짖어라. 우린 갈 길 가겠다’라는 식으로 군 모양이에요. 그 태도 때문에 미운 털이 박힌 거죠.
매년 시정 조치를 통보받고 벌금을 징수 당할 만한 행태란···.
– ‘종족배려 고용쿼터할당제’ 아시죠?
집단 이민의 형태로 지구에 이주한 일곱 종족 중 ‘다양한 사유’로 정부가 배려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네 종족은 이 법령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렇게 되면 남는 세 종족은 드워프와 오크, 그리고 트롤.
각각 가장 큰 이유만 꼽자면 순서대로 키가 작아서 차별받으며, 번식을 너무 빨리해서 차별받으며, 덩치가 지나치게 커서 차별받는 종족이다.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은 이 세 종족을 정해진 비율에 맞춰 고용해야 하며 업종에 따라 쿼터도 달라진다.
– 이 회사가 공시한 내용을 봤는데··· 피고용인 중 인간이 97.2%, 엘프가 2.8%에요. ‘기타’가 없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이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은 인간과 엘프 밖에 없다니까요! 요즘 세상에 아직도 이런 회사가 있다니.
종족차별주의자라는 말은 종종 인간우월주의자라는 단어와 동의어로 쓰인다.
하지만 그 말의 본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인간 외 종족 역시 우열을 판단하고 서로 비교하며 순위를 매긴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도움이 되는 종족과 그렇지 않은 종족.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종족과 그렇지 않은 종족.
대표적인 종족차별적 발언에 다음 문장이 포함되는 이유다. ‘엘프는 인간이 아니지만 착하고 쓸모가 많아!’
민준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은 그 때.
우웅! 우우웅!
후라이팬이 거칠게 몸을 진동했다. 민준이 다가가서 손잡이를 잡았다.
=답을 주셨습니다! 오늘 호텔에서 나와서 회사 세 군데 순회하는 동안 이상한 걸 만진 적은 없으시답니다! 기껏해야 의자나 서류 같은 것인데 사전에 철저하게 검사가 끝난 물건들이라고···!=
인공지능이 다급하게 텔레파시를 이어서 쏟아냈다.
=하지만 다른 ‘인간’과 접촉하신 적은 있다고 하는군요! 대표적으로 주인님이 오늘 여러 번 찐하게 접촉하셨고···.=
여기까지만 해도 들을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리고 또 딱 한 사람! 공주님과 접촉한 인간이 있었다는군요!=
“누구지? 설마.”
후라이팬이 한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민준이 이미 염두에 둔 상대의 이름을.
=다른 회사 사장들은 왕족에 대한 예를 표하면서도 무릎만 꿇고 손을 잡지도 않았답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만··· 공주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면서 예를 표했다고 하네요!=
민준의 머릿속에 당시 풍경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다.
‘그’가 회의실에 들어선 순간은 내부에 남겨진 마법적 흔적을 조사한 다음의 시점이었다. 물론, 뒤늦게 등장한 그의 온 몸에 시약을 뿌리며 화학 물질 반응 검사를 하지도 않았다.
‘잠깐만, 만약 그게 맞다면··· 그런 사람이 왜 변호사는 트롤을 고용한 거지?’
자신이 직접 본 장면이 있으니 그런 성향을 가졌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상대.
‘하지만 정부에 꼬박꼬박 벌금을 내고 미운 털 박히면서까지 뒤틀린 신념을 지키는 남자가, 다른 회사 사장들은 접촉하기도 꺼려했던 슈탄인 손을 잡고 입을 맞춘다는 것은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거야.’
감정적인 거부감을 억누르고라도 그렇게 해야 할 명백한 동기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예를 들어, 그 접촉을 통해 공주의 피부에 어떤 물질을 스며들게 만든다거나!
“······젠장!”
민준은 즉시 전화를 걸었다.
***
민준이 공주를 데리고 대피한 후 현장에 남겨진 브래들리와 열 두 명의 이능력자들은 두 그룹으로 찢어졌다. 민준이 브래들리에게 다급하게 송출한 정신파는, 자신이 공주의 안전을 확보할 테니 그들은 어딘가에 숨어서 이 현장을 관찰하고 있을 배후를 추적하라는 것이었다.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공격해 오긴 했지만, 추적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잖아? 특히 네 능력을 발휘하면 말이야!”
몇 명은 혼란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슈탄인 수행원들을 인도하여 호텔로 돌아갔고, 브래들리를 비롯한 나머지는 암살을 기도한 상대를 찾아 역추적에 나섰다. 네 배의 보수를 약속 받은 순간 그들 임무에는 경호 이상의 것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브래들리는 힘을 끌어올리며 생각했다.
‘무조건 추적해서 잡는다!’
이대로 인권 연대 상층부를 얼마나 깊게 파헤치느냐에 추가 보너스가 걸려있다.
다른 경호원이 운전하는 차량의 앞좌석에 앉은 브래들리의 두 눈은 다른 이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있었다. 다중 능력자만이 펼칠 수 있는, 클레어보이언스와 사이코메트리가 결합된 복합 능력. 비접촉식 감응이었다.
“저기서 우회전!”
그가 보는 것은 영계에 영향을 끼치는 마법적 흔적이 아니라 수만 마리 벌레가 날아온 물리적 경로였다. 허공에 남겨진 흔적을 쫓아서 확인한다.
언데드 벌레 떼가 잔류 사념마저 지워 버리는 마법을 펼치며 날아왔을 리는 없었고 그의 초능력은 쉽게 경로를 역추적했다. 죽음에서 돌아온 곤충들의 사고는 단순하고 거칠었지만 그런 만큼 더 파악하기 쉬웠다.
‘확실히 매노바 벌레를 언데드로 만들어서 돌격시킨다는 발상은 신선했어. 성공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겠지. 인권연대 소속원이 직접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으니 안전하다고 여긴 거야.’
실제로 민준이 현장에 없었다면 공주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오만한 발상이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며칠째 호위로 붙어 있는 브래들리에게 탐지 계열 초능력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겠지만 그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저 건물이다!”
그러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어쩔 수 없이 들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번 일이 성공하면 보너스까지 합해서 5천 달란트 정도는 받아낼 수 있을 거야!’
그에게 남겨진 퇴직금은 대략 1만 달란트. 그 중 반에 해당하는 거금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것이다.
자유가 손에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는 민준이나 델 같은 동료 수형자에 비해 무력이 약했지만, 텔레시아의 사례가 말하듯 전투력이 꼭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았다. 브래들리 역시 본연의 능력을 발휘하여 끈질기게 한 몫을 하고 임무를 수행하며 악착같이 달란트를 모아 왔다.
그의 동료처럼 예상치 못한 일로 거액의 달란트를 잃은 적도 없이, 차곡차곡!
그 결과 이제 정말로 멀지 않았다.
‘나는 절대로 텔레시아처럼 되지 않아!’
민준이 했던 다짐을 브래들리도 똑같이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다른 수형자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기억이 소거되기 전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7만 달란트라는 비교적 낮은 금액을 감안할 때 스스로 죽음을 택할 정도로 끔찍한 범죄는 아닐 터다.
브래들리는 자신이 아마도 경제 사범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의 능력은 누군가를 공격해서 죽이는 것 보다도 숨겨진 보물을 찾고 암호를 풀어내는 것에 최적화되어 있으니까.
그러니 기억을 되찾는다고 해서 스스로를 죽이고 싶어질 만큼 공황에 빠질 일은 없을 것이다.
‘왠지 예감이 아주 좋아!’
그는 잔류사념을 쫓아 이능력자들을 어떤 건물 지하 주차장에 인도했다.
그리고.
“!”
운전석에 앉은 경호원이 거칠게 소리쳤다.
“어, 뭐야 저 새끼!”
끼이이익!
거칠게 차를 세운다. 문이 열리고 대원들이 우르르 내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아니?”
어두컴컴한 암흑 속, 그림자가 가린 얼굴.
브래들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추적은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인근에서 벌레를 풀어 놓아야 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장본인이 도주하지 않고 이곳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그의 머릿속에 위험신호가 시끄럽게 울렸다.
‘설마, 벌레를 푼 것이 오만한 실수가 아니라···!’
그들을 이곳에 유인하기 위한 술책이었다면?
“!”
어둠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선 존재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각자의 능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려고 준비하던 찰나.
“······너?!”
파리한 조명 아래 상대의 얼굴이 드러났다.
브래들리는 순간 얼어붙었다. 곧 굳었던 입이 열리고 경악에 가득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네가 왜 여기에···?”
갑작스럽게 반전된 분위기.
그의 떨리는 동공이 전방에 고정되었다. 얼굴 위에 공포와 경악이 번갈아 스친다. 그리고 그는 뭔가 각오한 듯이 동료들에게 외쳤다.
“도, 도망가! 전원 퇴각! 지금 당장···!”
그가 문장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콰직!
뭔가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브래들리의 세계가 둘로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