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48
48. 21세기 로빈 후드 (2) >
민준의 시선이 더없이 무거워졌다.
“착각한 거 아닙니까?”
공주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보았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비록 내가 비늘 한 겹 없는 인간에게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우둔하긴 해도 고대 종족을 못 알아보는 천치는 아니야.”
체포의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 인간에게 연심을 품었다는 사실 때문에 공주는 수치스러워했고 단어 하나 하나에 숨길 수 없는 후회와 자기 연민이 묻어 나왔다.
한편 민준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카바이트와 대면했다고?’
믿기 힘든 증언이다. 그 종족이 이민 브로커 따위나 하는 것도 이상하고 슈탄 족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점도 석연치 않았다.
하지만 더 생각해 보니 후자의 이유는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서지 않으면 공주가 안 믿었겠군. 대위원에게도 로비가 가능하다는 말을 허풍으로 취급했을 거야.’
로비스트 역시 고대 종족임을 눈 앞에서 보여주고 신뢰를 산 것이다.
다만 그들은 공주가 허망하게 체포당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며 결과적으로 이 일에 카바이트가 엮인 증거를 남기고 말았다.
저절로 머릿속에 그 종족의 모습이 그려졌다. 갈색 체모에 덮인 뱀 같은 동체와 소용돌이 모양으로 말린 두부(頭部).
민준은 예전부터 그 종족을 싫어했다. 수형자에게 보석을 허락하지 않고 정신이 붕괴될 때까지 부려먹다 제거해야 한다는 극단주의적 주장 때문만은 아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들과 비슷하게 생긴 것은 쳐다보기도 싫을 정도로 지독한 혐오감을 느꼈다.
“화물도 그들이 준비하고 옮긴 겁니까?”
슈탄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게 뭔지도 몰랐다.”
그들은 젠킨슨의 레어 근처는 접근한 적도 없었다. 그저 이민 브로커가 지정한 장소로 가서 픽업한 뒤 도약선에 옮기기만 했을 뿐.
‘내용물 정체도 모르고 밀수 대행이라니··· 철저하게 이용당하다가 토사구팽 당하는 케이스군.’
진짜 절도범들은 레어를 턴 순간 차원이 봉쇄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터미널에서 도약선을 띄우려면 이계 VIP의 교통편 정도는 되어야 먹힐 터.
공주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앞으로도 이런 일이 종종 있을 테니 도와 달라고 했다. 하지만, 첫 시도에 망해버렸군.”
‘젠킨슨 물건은 전부 회수했는데. 불법으로 유출할 물건이 또 있다는 건가?’
“내 목숨까지 걸었건만··· 이렇게 허망하게.”
그녀는 자신을 반기지 않는 지구인들의 존재를 사전에 알았다. 민준은 공주의 내한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경호에 대한 잡음이 유난히 컸다는 뉴스를 기억해냈다. 저 여인은 미리 각오를 하고 온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상대에게 어리석은 짓을 했다느니 하는 일침을 놓을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경호에 붙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테오 크리스티안센이 나섰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랬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관과 함께 젠킨슨의 화물은 겔랑코 차원으로 밀반출 되었으리라.
이 일을 의뢰한 자들은 공주가 시신으로 돌아와도 상관없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살아왔으면 다시 비슷한 일을 시키고 죽으면 다음 대상을 찾으면 그만이니까.
그렇다면 문제는··· ‘그 다음 일’이 대체 뭐냐는 것이다.
“그럼,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필요한 진술을 모두 득한 민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범죄자의 시선이 범죄자를 따라붙었다. 죄를 흉내내서 종족 부활을 꿈꿨던 여인이, 아래에서 위로 눈꺼풀을 깜빡였다. 눈빛에는 모든 기대가 조각난 허망함이 가득했다.
악어가 말했다.
“······이제는 정말 그대를 다시 볼 일이 없겠군.”
그 말 대로였다. 그것이 민준이 본 베르미 공주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
취조실에서 나온 민준은 바로 젠킨슨 본사 최상층으로 올라가 폴리모프를 한 레드 드래곤과 대면했다.
“카바이트?! 끄응··· 일이 너무 커졌군.”
이 이상 음모를 파헤치는 것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었다. 민준은 계약 직원의 자세로 성실하게 진술 내용을 보고한 뒤, 이번엔 채권자의 자세로 돌아가서 달란트 상환 계획을 추궁했다.
그러자 용의 표정이 바뀌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그러자 민준은 못마땅하게 젠킨슨을 노려보다가 한 가지를 제안했다. 당장 돈 나올 구석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때우라는 뜻을 담아서.
고룡의 노동력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그 드래곤이 한 나라의 7대 재벌 중 하나로 꼽히는 기업집단 수장이라면 더더욱.
“뭐? 데모닉 고블린?”
터미널에서 델이 준 힌트는 위원회가 DNA를 입수하기를 원하는 멸종생물에 대한 것이었다.
죄수들에게도 특수 임무 형태로 의뢰를 넣어 놓기는 했지만 사실상 희망 고문에 가까웠고 위원회에서 직접고용한 몇 안되는 정규직, 그러니까 ‘진짜 직원’들 역시 그 일에 착수했다고 한다.
들어보니 그들은 손상되지 않은 완전무결 상태의 순혈종 DNA를 구하는 걸 반쯤 포기한 상태였고 아주 최근에 들어서는 전략을 수정했다.
델의 말을 떠올렸다.
‘요약하면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아종(亞種) DNA를 분석하고 퍼즐 맞추기처럼 유전자를 그려내자는 거야.’
부단한 노력 끝에 그들은 의미 있는 발견을 했다. 먼 옛날 어떤 차원에 살던 고블린에게 그 피가 섞여 들어갔다는 증거가 나온 거다.
하지만 너무 늦은 발견이었다. 많은 차원이 그렇듯 그쪽에도 각종 문제가 겹쳐서 범차원적 디아스포라가 발생한 터라 고블린 들이 살 길을 찾아 곳곳으로 이민 떠난 지 오래라는 것.
그 중 한 군데가 바로 지구였다.
“이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 아닌가?”
젠킨슨이 투덜거렸다.
“지구에 사는 고블린 전원의 DNA를 채취해서 검사를 돌리라고? 자네, 당장 한국만 해도 고블린의 85%에게 건강보험이 없는 건 아나?”
“알지.”
“그래! 그 치 중에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병원에 가 본 적 없는 자들도 많아! 더군다나 우리 그룹에는 의료나 보험 관련 회사가 단 하나도 없지 않는가? 그 악독한 여자 때문에!”
민준은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겠군. 어려운 문제야.”
“그래!”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
“···뭐?”
“그 고민을 이제부터 네가 하라는 거야. 나 대신에.”
“아, 아니. 잠깐만!”
그렇게 까다로운 문제는 젠킨슨에게 던져 버리고 민준은 일상으로 복귀했다.
후로는 며칠간 별일 없는 특별하지 않은 나날이 이어졌다.
민준은 임무가 들어오면 한 번씩 외계인 뚝배기를 깨고, 사무실에서 술도 들이켜고, 언젠가는 이기리라는 집념으로 바둑 TV를 애청하고, 델의 연락을 기다리고, 후라이팬의 대여기간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정팔과 캐시를 중재하고 (‘내놔요! 난 이미 중독되었다구요! 집밥도 식당밥도 다 안 넘어가요!’ ‘젠장, 나도 마찬가지야! 이 변태가 아니면 밥 못 먹는 몸이 되었다고!’), 그도 나름의 정보망을 돌려서 특수 임무 중 손을 댈 수 있을 만한 것을 찾았다.
그러는 사이 위원회 본부와 인접한 몇몇 차원에서는 어떤 뉴스가 잠시 화제가 되었다.
***
“······정말인가?”
뒤늦게 소식을 전달받은 젠킨슨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의 책상 위에 있던 고블린 관련 서류를 밀어내고 비서가 새로 들고 온 문서를 집중하여 읽는다.
서류는 아직 이곳에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지구는 사건 발생 차원으로부터 꽤 멀 뿐만 아니라 이해 당사자인 겔랑코 차원과 단교 중이기 때문에 언론에 방영되지도 않았고 앞으로 다룰 확률도 없었다.
그렇게 말없이 앉아 있던 그가 뒤늦게 생각난 듯 축객령을 내린다.
“그래, 알겠네.”
고개를 꾸벅 숙인 블레어가 물러나고 나서도 레드 드래곤은 차가운 표정으로 보고서를 노려보았다.
그것은 한 극오지 변방차원에서 출발한 도약선과 관련된 사고 소식이었다.
그 배가 출발지를 떠나 여섯 번의 차원 도약 중 네 번째를 시도하던 순간 차원장벽에서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급작스러운 거부반응이 나타났다. 봉쇄령도 내려지지 않았고 위원회의 도약 코드를 제대로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약선은 예기치 못한 저항력과 압력에 노출되었다. 외피를 감싼 결계마저 버텨내지 못할 정도로.
결국 슈탄 인으로 알려진 범죄자들을 호송 중이던 그 도약선은 차원 방벽이 밀어내는 힘에 휘말려 으스러졌다.
생존자는 없다고 전해졌다.
***
“저, 실례합니다.”
이번주에도 광화문에 시위를 구경을 나온 유령, 하은성은 자신에게 접근하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무당이네.’
정식 용어로는 영체감응력자.
그들이 유령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유령도 영체감응력자를 보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냥 보면 구분이 되었다. 이렇게 굳이 티 내고 말을 걸지 않아도.
3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고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얼굴을 보니 지난 번에 시위 현장에서 눈 마주친 그 무당은 아니었다.
“여기 계실 거라고 생각했긴 한데 한 번에 마주치다니 운이 좋았네요.”
물체를 만질 수 없으니 당연히 핸드폰도 못 들고 다니는 유령과 접선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를 쑤시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저 찾으셨어요?”
“네. 하은성씨 맞으시죠?”
유령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다. 이름을 알고 있다.
‘뭐··· 다른 귀신들한테 물어봤겠지.’
펭귄 옷 입고 목에 칼 꽂고 다니는 유령이 흔하지는 않으니까.
“괜찮으시면 조용한 곳에서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신입 귀신들에게 선배들이 수없이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산 사람’은 함부로 따라가면 안 된다는 것.
귀신에게 고통을 주고 억압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소위 ‘퇴마계’라고 불리는 영체간섭파동을 활용한 마법을 쓰거나, 속성은 상관없이 영계와 물질계가 동시에 요동칠 정도로 강력한··· 고룡들이 서로 싸울 때나 쓰는 궁극의 주문을 발동하는 것.
당연히 애용되는 것은 전자였고 그런 주문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귀신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부르길래 멋 모르고 따라갔다가 퇴마진에 갇히고 평생 모르모트가 되어 고통받는 귀신에 대한 도시괴담은 하은성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법률로 보호받지 못하는 죽은 자들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죽음보다 끔찍한 미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가시죠.”
하은성이 그녀를 따라 나선 이유는 두 가지다.
첫번째는 지난주에 새로 발견한 자신의 특성.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나한테는 안 통하니까.’
지난 주 충격파 때문에 수백의 유령들이 모두 날려가는 와중에도 하은성은 멀쩡했다. 그 현상을 이상하게 여긴 그는 용기를 끌어 모아 퇴마진이 설치된 다른 건물에도 가 보았다.
결과는 똑같았다.
‘어? 이번에도 아무··· 느낌 없네?’
다른 귀신들이 기겁을 하며 도망치게 되는 그 벽을 하은성은 너무도 쉽게 통과했다. 고통은 없었고 알람 같은 것도 울리지 않았다. 대(對) 유령 방어 시스템은 아예 그를 인지조차 못한 것이다.
“아, 정말···.”
그리고 그녀를 따라 나선 두 번째 이유.
“정말 훌륭한 일을 하시는 분이군요!”
무당은 남들이 보지 못하게 슬쩍 명함을 내밀어 보인 것이다.
그녀를 따라 엉뚱한 위장 간판이 걸린 사무실로 들어간 뒤 그는 선망의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여자가 웃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쁘네요.”
“어휴, 말도 마세요. 저도 살아 있을 때 ‘레드 스타’ 분들 덕 많이 봤는걸요!”
그것이 명함에 적힌 진짜 정체였다.
그녀는 핸드폰을 내밀며 각종 영상 증거까지 보여주었고 하은성은 이제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다.
레드 스타(Red Star)의 정체성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현대판 의적단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 있을 때 찢어지게 가난했던 하은성과 동생들도 정말 굶어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가 그들 도움으로 겨우 살아났던 경험이 있었다.
‘그땐 진짜 죽다 살아났지!’
당연히 호감도가 높을 수 밖에.
각종 핑계를 붙여 법인세 할인 혜택은 누리면서 사회환원은 한 푼도 하지 않는 유통 대기업의 신선제품 물류 창고를 털고, 정부 관료 및 사업가들의 추악한 사생활을 폭로하겠다는 빌미로 협박을 해서 돈을 뜯어내고, 치안이 최악에 달한 빈민촌 대신 부유층 밀집지역에 집중된 공공방어시설을 통째로 훔쳐가는 일은 분명 범죄였고 언론에서는 이들을 끔찍한 테러집단이라며 비난했다.
하지만 그들이 범죄로 얻은 이득을 어떻게 분배하느냐에 대한 문제를 뉴스에서 다루는 일은 드물었다.
‘아무리 숨겨 봤자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아!’
레드 스타는 사회안전망이 사실상 무너진 이 나라 저소득층에게 식량을 뿌리고 학교를 못 가는 재능 있는 아이들을 교육시켰으며, 국가의 하청조직에 불과한 자경단 대신 ‘진짜 자경단’을 조직하여 경찰이 순찰을 돌지도 않는 동네에서 규율을 세우고 치안을 관리하는 등 행보를 보였다.
다만 하은성의 옛 이웃 중에서도 그들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이들이 소수 존재하기는 했다. 특히 오크들이 그랬는데 레드 스타가 ‘인권연대’와 관련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난 그런 풍문 안 믿어.’
생전 레드 스타에게 도움을 받은 그 역시 오크 커뮤니티에 살던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우월주의자들이 오크 동네에 식량을 왜 뿌리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반응이 몹시 호의적인 것을 눈치챈 여자는 차분하게 자신의 조직을 소개했다. 이미 대부분 알고 있던 내용이었지만 그는 있지도 않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경청했다.
“전세계의 부(富) 50% 이상은 국가를 초월하여 군림하는 한 줌의 소수가 독점했죠. 우린 그것을 공정하고 정의로운 방법으로 재분배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에요.”
하은성은 홀린 듯 그녀의 말에 빠져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상에 젖은 원론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이 아니에요. 국가를 무너뜨리는 대신 개혁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지요.”
“······그렇군요!”
“네, 이 나라는 이미 국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어요. 그 뒤에서 막대한 돈으로 모든 것을 쥐고 뒤흔드는 소수의 자본가들에게 먹혀 버렸지요. 제가 누굴 말하는지 아시겠어요?”
짧은 침묵을 두고 말했다.
“우리의 적. 서민들을 쥐어짜는 악마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드래곤 같은 자들 말이에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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