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53
53. 21세기 로빈 후드 (7) >
***
민준이 은행을 방문한 때는 영업 시간 후였으므로 캐시가 다시 연락을 걸어온 시점은 해가 저문 뒤였다. 그녀가 경찰로부터 받은 자료를 요약 설명하자 민준은 약간 놀랐다.
“그럼 경찰은 진작부터 레드 스타 본거지가 어딘지 감을 잡고 있었다는 거야?”
– 네. 인권연대처럼 극비밀주의를 고집하는 자들과 달리 그네들은 공적 영역에서도 사업을 벌이고 있으니까요. 눈 가리고 아웅이긴 하지만···.
“하긴. 그런 훤히 들여다보이는 수작이 의외로 잘 먹히는 경우도 많지.”
– 맞아요. 더군다나 국민들 사이에 워낙 인기가 많다 보니 확실한 증거 없이 압수 수색을 하거나 특공대로 쓸어버릴 수도 없었던 거죠.
레드 스타는 나라가 신경 쓰지 못하는 복지의 사각지대를 대신 메꿔주는 의적 이미지가 강하다.
말로는 혁명을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본격적인 국가전복행위는 저지른 적이 없고 대기업 곳간을 털거나 스캔들 빌미로 협박하는 것이 주된 돈벌이 수단이었다.
따라서 경찰은 이들을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 서민들 역린을 건드리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억압되었던 저항의식에 불꽃을 지피는 꼴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 다시 말해 분노를 쏟아낼 대상을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 빈민들에게 봉기 구실을 제공할 수도 있다고 여긴 거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경찰의 입장이지 민준의 생각은 다르다.
“그래서, 어디야?”
– 아, 그게 말이죠···.
이어진 말을 들은 민준은 저도 모르게 욕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 개새끼들이 진짜···.”
캐시 역시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 저도 처음 봤을 때는 눈을 의심했어요.
“평범한 학교 내부에 본거지를 만들어 놨다고?!”
그들이 위장재단을 통해 운영하는 사립학교는 한두 군데가 아니다. 레드 스타는 그 중 가장 큰 규모의 학교 부지에 본거지를 마련한 것이다.
의도는 뻔했다.
“경찰이 함부로 못 털 이유가 있긴 했군···.”
– 네, 자칫하면 언론에 아주 흉악한 그림이 송출될 수도 있으니까요. 기관단총을 들고 빈민 지구 학교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특수 부대 같은 거요.
“난 혼자 조용히 움직일 테니 언론이 냄새 맡을 일은 없어. 지금 바로 터는 게 낫겠군. 염탐자가 죽은 걸 그쪽에서 알아차리기 전에 말이야. 애들은 어차피 집에 갈 시간 아니야? 설마 24시간 학교에 붙어 있지는···.”
– ······.
“······캐시, 설마?”
– 네, 거긴 기숙학교에요.
민준이 어이없는 투로 되물었다.
“오크 커뮤니티 안에 무슨 기숙형 사립학교가 있어?!”
–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모아 놓고 무료로 먹여주고. 재워주고. 공부도 시켜주는 거죠.
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이런 훌륭한 위인들이 없다. 그러니 인기가 가라앉질 없지.
“어쩔 수 없지. 더 꾸물거리면 눈치채고 튈 수도 있어.”
족치려면 오늘 밖에 기회가 없었다.
단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조심스럽게, 다소의 제약 하에서 족쳐야 한다는 점이 달라졌을 뿐이다.
예를 들어 건물에 통째로 불을 지르고 튀어나오는 놈들 대갈통을 하나씩 터뜨리는 방식은 불가능하다는 것.
“그래도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전화를 끊은 민준은 캐시에게 받은 주소로 향했다. 오크 커뮤니티 내에 있는 기묘할 정도로 규모가 큰 사립학교였다.
건물을 밖에서 본 그는 혀를 찼다.
“대놓고 노렸군.”
기숙사와 교실이 ‘ㅁ’자 구조를 만든 중앙에 그의 목표가 보였다. 레드 스타 간부들이 쓰고 있다는 건물.
교육용지로 등록된 땅이다 보니 교직원 숙소로 신고하긴 했지만 그 용도로만 쓰기엔 지나치게 큰 그 건물은 아이들이 머무는 시설을 방패처럼 주변에 두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상태로 습격할 수는 없지.’
교실 곳곳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고 기숙사 건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민준은 일단 일반인들을 대피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파팟!
허공에 부적을 뿌리자 뿌연 안개를 만들었다. 희미한 기운은 학교 부지 전체를 둘러싸며 결계를 구축한다. 그가 의도하지 않은 누구도 드나들 수 없는 경계선.
날이 어둡다 보니 안에서는 아직 밖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 반응이 없었다.
민준은 오로지 한 곳의 좁은 퇴로만 남겨두었다. 전략 자체는 입구 하나만 뚫어 놓고 굴 안에 연기를 밀어 넣어 튀어나오게 하는 너구리 사냥과 다를 바가 없다.
단, 안의 아이들이 위험해지므로 불을 지르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무슨 방법을 쓰든 그들이 스스로 튀어나올 이유만 만들어 주면 되니까.
촤악!
검은 돌로 만든 단검이 민준의 손목을 긋고 지나간다.
뚝! 뚝!
핏방울이 살결을 따라 흐르고.
스으으으!
나지막이 주문을 외운다.
흑마법 계열 네크로맨시(Necromancy)와는 구분되는 이능력으로 사령술(使靈術)이라는 것이 있다.
지구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젠킨슨 비서처럼 박학다식하고 이계 경험이 긴 이들 말고는 잘 모른다.
전자가 죽은 자의 육신을 조종한다면 후자는 몸 없이 구천을 떠도는 영혼을 통제한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망령에게 힘을 빌려주어 그것이 가능하게 만드는 비술.
“자, 여기로.”
그의 인도에 따라 주변을 떠돌던 망령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오늘 폭사(暴死)당한 여자 영혼처럼 오랫동안 통제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잠시만 조종해도 충분했다.
흑마법사인 민준이 사령술 역시 어설프게나마 다룰 수 있게 된 계기가 있었다.
수형자 생활 극초기, 어떤 세계에서 그는 악명 높은 사령술사를 추적 척살하는 임무를 받았다. 수명 연장을 위해 온 몸을 사이보그로 개조했다가 상황이 급박해지자 뇌만 척출하여 드론에 탑재한 채 도망친 그 수배자를 검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잡았다!’
긴 시간의 추적 끝에 날아다니는 배양액 탱크는 산산 조각나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다만, 그 사령술사가 최후의 순간 모든 힘을 끌어 모아 민준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은 막지 못했다.
‘젠장, 이게 뭐야! 저 새끼가 죽는 마당에 발악을!’
=끼이익! 키키키킥!=
‘으아아악!’
수배자가 권속으로 삼아 끌고 다니던 모든 망령이, 그가 죽음을 맞이한 순간 자유를 되찾는 대신 민준에게 달려들었다. 저주의 목적은 수백의 망령이 민준의 몸을 차지하여 그의 영혼으로부터 통제권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주는 술사 의도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민준의 영혼을 압도하고 의식 밑으로 처박아야 할 망령들이, 어쩐 일인지 그의 혼과 접촉한 순간 불에 데인 것처럼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몸 밖으로 다시 도망쳐 버린 것이다. 어찌나 섬뜩한 절규던지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실패했지만 저주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망령들은 작전을 바꿨다. 이후에도 그를 계속 따라다니며 귓가에 각종 끔찍한 말을 속삭여 정신을 무너뜨리고 몸을 빼앗은 다음 자살하려고 작정한 것.
미치지 않기 위해 매일 독한 술을 마시고 잠을 청하던 민준은 결국 살기 위해 방안을 강구해냈다.
지금까지도, 영력이 아닌 흑마력으로 사령술의 효과를 내는 주문은 전 차원계에서 그 말고 쓰는 이가 없다. 어째서 민준에게만 이런 일이 가능한지는 그 자신도 모른다.
“꺄아아아악!”
잠시 기다리자, 민준의 기억 속에 울려 퍼지던 정신파와 비슷한 울림이 현실에서 재현되었다.
=키키키킥! 키키키···.=
“뭐, 뭐야 이거! 씨발!”
=괴로워··· 살려줘··· 괴로워···!=
“선생니이임!”
학교 곳곳에 밀어 넣은 망령들이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리고 위협하자 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레드 스타가 운영하는 학교라고 해서 전원 세뇌된 상태는 아니다. 아직 그들에게 선별되지 않은 평범한 학생들을 자발적으로 도망치게 만들려는 민준의 속셈이었다.
“여긴 막혀 있어!”
기숙사에서, 교실에서 뛰쳐나온 학생들이 뿌연 안개 때문에 발을 딛을 수 없는 구역을 우회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의도적으로 뚫어 놓은 퇴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발이 빠른 아이들부터 교문 밖으로 도주하던 순간이었다.
– 학생들에게 알립니다. 학생들에게 알립니다. 밖은 위험하니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전원 기숙사로 돌아가서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도록···. 반복합니다! 전원 움직이지 말고 기숙사 내에서···.!
민준이 저도 모르게 또 한 번 욕을 뱉었다.
“개새끼들···!”
이런 상황에서 대피를 막는 이유는 하나 밖에 없었다.
학교 부지 내 학생들이 최대한 많이 남아있어야 적의 가용 수단이 적어지는 걸 아는 것이다. 하다 못해, 건물에 대뜸 로켓포를 날리는 일은 못할 테니 말이다.
다시 말해 아이들을 고기 방패로 삼으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꺄아아악!”
“어떡해, 나 따라와! 계속 따라온다고! 엄마아!”
기숙사에 남아 있으라는 방송도 공포에 질리고 패닉에 빠진 학생들에게는 소용없었다.
망령들은 지시를 따라 양떼를 몰 듯 아이들을 퇴로로 인도했다. 민준은 어둠 속에 숨어 조용히 대피하는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대부분 오크와 인간이었다. 이쯤 되면 교직원들도 섞여서 함께 대피할 법도 한데 성인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느 정도 대피가 완료된 후 민준은 학교로 진입했다.
목표물은 물론 부지 중앙에 위치한 건물, 레드 스타의 본거지로 판단되는 그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뒤 거침없이 지하로 향했다.
쾅!
숨겨진 문을 부수자 학교에 왜 있어야 하는지 의문인, 벙커에 가까운 내부 구조가 드러났다.
그리고 가장 먼저 민준 앞을 막아선 것은 예상치 못한 상대였다.
“죽어어엇!”
교복 차림의 오크가 달려 든다.
그 복장을 본 순간 민준은 머리 끝까지 차오르는 분노와 짜증을 느꼈다. 들끓는 내심을 억누르며 공격을 피했다. 미성년자가 분명한 오크의 손에는 이런 동네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마검형 아티팩트가 들려 있었다. 날을 따라 흐르는 선명한 오러.
소년은 이능력자였다. 웨폰 마스터(Weapon Master.)
팟!
“크읍!”
이미 세뇌된 것이 확실했으나 민준은 소년을 죽이는 대신 가벼운 저주를 걸었다. 무기는 받았지만 항마력이 깃든 아티팩트 같은 것은 전혀 갖추지 못한 듯 단숨에 기절하여 쓰러진다. 저주 효과는 경미한 뇌진탕. 돌아보지 않고, 이를 악문 채 민준은 계속 계단을 내려간다.
그가 내려가는 동안 막아 세우려는 시도가 몇 번 더 있었고 나름의 격렬한 저항이 그를 덮쳤다.
그때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고 민준의 표정은 점점 더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막아서는 이들은 하나 같이 미성년자였으며 이능력자였다. 이 학교가 곳곳에서 발굴된 능력자들을 집합시키고 훈련하는 장소라는 것을 드러내는 밀집도였다.
하지만 누가 되었든 애초에 일초지적도 되지 못했다. 명령을 내린 간부들도 그 사실을 알 것이다.
다시 말해 민준의 실력이 서툴거나 더 냉혹한 성격이었다면 아이들은 전부 살아남지 못했을 터였다. 간부들은 저들의 생명을 내던지라고 지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번 쓰고 버리는 목숨.
쾅!
민준이 마지막 철문을 걷어 찼을 때. 드디어 지금까지 찾아 헤매던 이들을 발견했다.
그의 두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뭐야?!”
“벌써 여기까지!”
세뇌시킨 아이들로 하여금 바깥에서 항전하도록 내몬 동안 간부들은 지하 비밀통로 앞에서 도주를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래라면 뻥 뚫려 있어야 할 비밀문 뒤는 민준이 펼쳐 놓은 뿌연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그가 ‘퇴로’로 인정하지 않은 이상 어떤 방향이든, 지상이든 지하든 폐쇄 효과는 동일하다.
“——-!”
간부 중 이능력자로 보이는 오크가 전투 함성을 질렀다. 그대로 민준에게 달려든다.
“이 반동분ㅈ···!”
민준의 두 팔은 이번엔 움직이지도 않았다.
콰직!
대신, 등에서 뻗어 나온 검은 그림자가 괴물의 형상을 만들었고 그대로 거대한 주먹을 날렸다. 검은 섬광이 공간을 찢은 뒤, 다시 드러난 오크의 얼굴은 끔찍한 모양으로 함몰되어 있었다.
“으악! 빨리, 빨리!”
간부들의 표정이 그제야 공포로 물든다. 안개 속을 뚫고 도망치려고 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듯 닫힌 공간은 그들을 허락하지 않았다.
캬아아아아악!
민준이 한 걸음 더 내딛었고, 괴물이 포효했다.
검은 바람이 불고 사방에 피가 튀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 으스러지는 소리, 살을 쥐어짜는 소리, 흐느낌. 누군가는 목에 무엇이 걸린 듯 꺽꺽거리다 멎는다. 누군가는 마지막까지 목숨을 구걸하다가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조용해졌다.
잠시 후, 민준이 선별한 간부 몇 명을 제외한 모두가 끔찍한 모습이 되어 곳곳에 흩뿌려져 있었다.
그는 발목까지 차오르는 핏물 속을 걸었다.
“아, 아··· 아···!”
그 중에 가장 늙어 보이는 남자를 응시한다.
민준이 질문했다.
평온한 어조.
“달란트 어딨어?”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 레드 스타의 간부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모두 함축되어 있는 짧은 질문.
상대 역시 그 의도를 단숨에 파악했다. 그리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그··· 그건 사고였소!”
***
=네? 유령이··· 은행 금고 속에 갇혀 있을 수도 있다고요?=
며칠 전. 유령, 하은성은 여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동생들을 생각하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그녀가 말한 사연이 하은성의 연민을 자극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애초에 굳이 참여할 수도 없는 고스트 시위를 따라다닐 정도로 그는 유령으로서의 연대의식이 강했다.
그런 하은성에게 여자가 부탁한 것은 갇혀 있는 동료, 그 불쌍한 고스트의 위치를 찾아 달라는 것이었다.
다른 목적이라면 거절했을 수도 있었다.
‘이미 죽었는데 또 죽을 수도 없으니, 그 유령 양반은 앞으로 수천 년 용에게 붙잡힌 채 있어야 할 수도···. 아니, 그냥 갇혀 있기만 하면 오히려 행운이지.’
그런데, 하은성이 수락하자 마자 여자가 꺼낸 말은 의외였다.
대뜸 어떤 은행 본점의 금고를 수색해 달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들어보니 그럴 듯했다.
‘유령은 숨쉴 필요도, 먹을 필요도, 배설할 필요도, 햇빛을 쬐어야 할 필요도, 운동을 할 필요도 없지요. 즉, 외부공간과 완전히 격리되고 폐쇄된 공간에도 가둬 놓을 수 있어요.’
그런 조건을 감안하면 창천은행 본점 금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 네. 알겠어요.=
결국 하은성은 졸지에 창천은행으로 향하게 되었다.
내부 구조 염탐을 막기 위해 강력한 퇴마진으로 보호되는 장소였지만 이미 입증된 것처럼 그를 막아 세울 수 있는 장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생전 처음으로 은행 금고에 들어선 그는 혹시라도 영체감응력자와 마주칠 위험을 피하기 위해 벽 안에 숨어서 곳곳을 수색했다.
그러던 중, 지금까지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결계의 흔적을 발견했다.
=와··· 저건 진짜. 나 아니었으면 닿기만 해도 미국까지 튕겨나가겠는데?=
물론 대단한 물리결계도 함께 구비되어 있을 격리 금고였으나 하은성은 알아볼 능력이 없었고 오로지 엄청난 퇴마진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금고 안의 금고를 뚫고 들어섰을 때.
=······!=
하은성은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채를 보았다.
그 섬광이 존재를 홀리기 마련이라는 상식을 대부분의 지구인들처럼 하은성은 몰랐다.
영계의 정령들이 증발된 달란트를 보면 환장을 하고 달려 드는 것처럼, 지성체로 분류되는 그마저 그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그것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더 무서운 점은 정신을 차리고 나서도 움직임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상식으로는 어차피 만질 수도 없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그런데, 그 상식이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어?!=
달란트에 하은성의 손이 ‘닿은’ 순간.
그 끝에서 잔잔한 파동이 일더니 격렬한 흐름을 만들며 순식간에 한 곳으로 응집되었다. 그 움직임을 외부에서 봤을 때는 허공에 녹듯 사라지는 것으로만 보였다. 하지만 접촉한 하은성은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 어?!=
다음 순간 그 거대한 광체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은행에 경보가 울리고 소란스러워진 뒤에도 하은성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이점을 십분 활용하여 곳곳을 탐색했지만 결국 갇힌 고스트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대로 레드 스타로 돌아와서 보고하자 그녀는 크게 놀라지 않고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 묘사하신 모습과 특성, 엄중히 보관되어 있었다는 상태까지 감안하면··· 그건 아마도 달란트였던 것 같군요.’
=달란트요?=
‘네. 외계인들이 쓰는 화폐 같은 것인데··· 약간의 충격을 받아도 영계로 증발되어 버린다고 해요. 그걸 대체 왜 인출해 놨는지 모르겠네요. 몇천 달란트 정도만 연구 용으로 보관 중이었나?’
그 뒤로 이어지는 말을 하은성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요약하면, 접촉한 순간 달란트라는 것을 보관하던 결계의 균형이 깨지고 그 우주 화폐가 영계로 통째로 튕겨 나간 것 같다는 추측이었다.
지식이 없으니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뭔가 찜찜한 기분을 느꼈다.
결국 여자에게 전하지 못하고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던 말은 이것이었다.
그 광체가 사라지는 순간 자신의 영체 속으로 무언가 흡수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하지만 말해 봤자 여자가 믿을 것 같지 않기에 굳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지 않기로 했다.
그가 스스로 자신을 관찰해 봐도 달라진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튼 은행에는 확실히 없었어요. 이제 어떡하죠? 그 유령분은···.=
‘걱정 마세요. 애초에 은행 말고도 저희가 지목한 장소가 몇 군데 더 있으니까요.’
웃으며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철통 같은 보안을 자랑하는 은행 본점을 자유자재로 드나들며 하은성의 능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으니, 다음에는 유령이 갇혀 있을 확률이 좀 더 높은 곳에 침입해 보자고.
다시 말해서 좀 더 위험한 곳으로 보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곳이 어디냐는 질문에 여자는 이렇게 답했다.
‘어디겠어요? 당연히··· 그 드래곤의 레어이지요.’
하은성이 다음으로 침투해야 할 장소는 창천, 그 고룡의 레어였다.
‘하지만 그 전에.’
여자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하은성에게 말했다.
‘그 은행 안을 샅샅이 수색하고 오셨지요? 돌발적인 사고가 없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어쨌든 그곳 내부 구조를, 기억하는 대로 모두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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