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57
57. 21세기 로빈 후드 (11) >
***
“회장님, 위원회 지구대표소에서 보낸 문서입니다.”
비서가 들어왔을 때 젠킨슨은 인간의 몸으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위원회가?”
“네, 저번에 은행 쪽에 요청하신 건에 대한 회신입니다.”
블레어가 건넨 서류를 받다 말고 젠킨슨은 몸을 움찔했다. 그녀가 손가락에 낀 반지가 은은한 빛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시선을 알아차린 엘프도 반지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서류에서 손을 뗐다. 그대로 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감싼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이게 제가 통제할 수 없는 거라서···.”
‘등에 촉수 달린 여자’가 사죄의 선물로 남긴 반지는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가락에 감겨서 고정되었고 아무리 애를 써도 빠지지 않았다.
가끔씩 지금처럼 이해할 수 없는 타이밍에 맞춰 빛을 발하는 통에 더욱 신경이 쓰인다. 특히 젠킨슨과 바짝 붙었을 때는 거의 100% 확률로 지금처럼 광채를 발했다.
회장은 어색하게 목청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괜찮네. 내 마법으로도 분리할 수 없었으니··· 자넨들 방도가 있겠나?”
그가 저 반지를 꺼림칙하게 여기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출처가 고대 종족, 엔델리온이라는 민준의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드래곤이 그렇듯 젠킨슨은 고대 종족에 대한 적대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엔델리온이면 기괴한 물건을 만들어 내기로 유명한 자들인데···.’
고대 종족이라는 이름에는 지칭 대상이 현대에 속하지 않는다는 뉘앙스가 숨어 있다.
사실 그들 모두는 한때 모든 차원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던 자들이다.
유물과 기록을 통해서만 구전되던 자들이 갑자기 돌아와서 ‘위원회’라는 조직을 구성하고, 당시만해도 제기능을 했던 차원 도약 마법을 능가하는 기술을 자랑하며 차원 곳곳을 쑤시고 다니자 가장 먼저 불쾌감을 표한 이들은 당연히 용족이었다.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전쟁이 벌어졌고, 드래곤은 패배했으며, 모두가 위원회의 규율에 묶인 채 살아가게 되었다.
젠킨슨은 전쟁 당시에는 아직 힘을 키워가던 젊은 용이었고 그의 눈에 비친 엔델리온의 무기는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다.
‘저것도 평범한 반지 같지만··· 알고 보면 무슨 기능이 장착되어 있을지 몰라. 조심해야 한다. 어떤 사소한 행동이 트리거로 작동할지 알 수 없다. 그 작자들은 나 같은 선량한 드래곤과 가치관이 전혀 다르니까!’
그렇게 다짐하며 위원회에서 보낸 서류를 꺼냈다.
겉보기엔 평범한 종이처럼 보였지만 그의 손에 닿자 빛자락이 공중에 펼쳐지며 문서열을 만들었다.
“음?!”
외계의 문자를 읽던 젠킨슨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다.
“이 놈들이 진짜?!”
블레어가 조심스레 묻는다.
“왜 그러십니까?”
그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내가 이번에 요청한 내용을 자네도 알지?”
엘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회장님 명의로 이계 은행에 예치된 달란트를 소액 출금하겠다는 요청이었지요.”
창천이 백만 달란트나 출금했음을 들은 것이 계기였다.
젠킨슨은 민준에게 몸으로 30만 달란트를 갚아야 하는 처지인데, 고블린 DNA 분석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대안을 마련하고 싶었다. 탈세와 절세 사이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말이다.
그러던 중 창천이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이었다. 수형자인 민준은 불가능하지만 자유인인 젠킨슨에게는 가능한 일. 민준이 달란트로 뭘 실험해 보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그걸 자신도 제공하여 부채를 차감하는 딜을 꾀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걸 다 작성해서 보내라고?”
위원회가 보낸 긴 답장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어지간하면 출금하지 마라.
창천이 ‘시비 걸기에 가까웠다’라고 표현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걸 다 검토하고 위원회와 맺은 계약에 어긋나는 부분이 없는지, 절차상 실수 때문에 차후 소송에 걸릴 위험은 없는지 다 확인하려면 이계 로펌까지 동원해야 할 것이다.
수천 개 주의사항과 체크리스트를 속독하던 젠킨슨의 눈이 한 군데에 멎었다.
– 수형자와 혈연, 지연, 학연, 고용 등 가까운 관계로 여겨지는 자유인이 달란트를 출금할 시 자동적으로 세무조사 대상이 됩니다.
젠킨슨이 이대로 출금에 성공하더라도 조사를 받을 거라는 뜻.
– 해당 금액이 수형자에게 불법적으로 증여되지 않았음을 입증할 책임은 당사자에게 있으며 무혐의 입증을 실패하면 탈세로 간주됩니다. 그에 따라 연루된 수형자 및 자유인은 조세징수사령부의 척살 대상이 될 수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
그의 이빨 사이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악마보다 더 한 새끼들.”
한편으로는 의문이 든다.
왜 이렇게까지 까다롭게 구는가?
수형자가 달란트 실물을 손에 쥐고 있으면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기에···.
젠킨슨이 생각에 잠긴 사이 블레어 밑에서 일하는 직원이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그녀와 짧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엘프의 표정이 확 변했다. 다급하게 젠킨슨에게 다가와서 말을 전한다.
“회장님. 갑자기 면담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고룡과 독대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자는 드물다.
“누군데?”
상대방의 이름을 들은 순간 젠킨슨의 눈동자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의외군. 지구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애초에 이계로 휴가를 떠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를 만나고 싶다고?”
즉시 그는 민준에게 마법으로 통신을 보냈고 서로 알아낸 정보를 교환하는 동안 하나의 시나리오를 그려낼 수 있었다. 통신을 마친 젠킨슨은 블레어에게 말했다.
“내일 만나 보지.”
***
“위대한 종족을 뵙습니다. 영광입니다, 회장님.”
젠킨슨의 집무실에 들어선 늙은 오크는 몸을 바짝 숙이면서 예를 표했다.
“일어나게.”
그를 대하는 젠킨슨의 목소리는 묘하게 건조했다.
“내게 보여줄 것이 있다고?”
면담자, 김광우는 폴리모프 한 드래곤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폈다.
“네, 여기 자료를···.”
가지고 온 서류를 젠킨슨이 읽는 사이 오크는 긴장한 상태로 기다렸다.
‘분노하겠지.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를 거다.’
창천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적으로 돌아섰다는 소문이 맞다면 그렇게 나올 수 밖에.
그런데, 반응이 좀 이상했다.
‘?!’
처음부터 냉기가 흘렀던 드래곤의 얼굴은 남은 페이지가 줄어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크 앞이라고 티를 안 내는 건가?’
마지막 페이지까지 완독한 젠킨슨이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김광우 회장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어디 가서 심력(心力)과 오기, 대담함으로는 뒤쳐지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오크로 태어나서 지금과 같은 재산을 모으고 뒷골목의 제왕 자리에 오르기까지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더러운 일, 천륜에 어긋난 일, 피비린내 나는 일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계획했고, 사주했고, 실행했다. 심장에 굳은 살이 배기는 걸 넘어 철판을 깔았다고 자부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룡과 독대하는 이 순간에는 위축되는 자신을 느낀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깊은 눈동자. 폴리모프한 외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숨막히는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이 정보, 출처는 어디인가?”
날카로운 어감을 담은 목소리.
오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저 같이 쓰레기통에 구르면서 밥 벌어먹는 종자도··· 존중해야 할 약속이 있습니다.”
정보원을 보호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물론 김광우는 레드 스타를 위해 의리를 지킬 생각 따위는 없었다. 드래곤을 사회악으로 치부하는 단체와 엮인 걸 밝히는 순간 저 용이 자신을 통째로 씹어 먹고도 남을 터. 그걸 알기에 입을 열지 않으려는 거다.
그러자 젠킨슨은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나도 자네에 대해 좀 아네.”
오크는 마음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비천한 오크를 알아 준다니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정말로 그랬다간 분노를 살 것이기에 그는 그저 고개를 숙였다. 드래곤의 말이 이어졌다.
“오크 커뮤니티의 양지와 음지를 통틀어 자네 손을 안 거치면 되는 일이 없다지?”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고룡의 레어를 털 정도로 재주가 좋지는 못한다는 것도 아네.”
“······.”
“말하게. 누구와 손을 잡은 건가?”
그의 눈동자에서 옅은 불꽃이 튀었다.
“창천을 칠 수 있는 증거라고? 이런 자료를 출처도 없이 들고 와서 내밀면 칭찬받을 거라 생각했나? 나 또한 드래곤일세. 이런 식으로 굴고도 무사히 걸어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그러자 오크는 이렇게 말했다.
“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
젠킨슨은 더 말해보라는 듯 턱을 까닥거렸다.
“회장님께서는 성군이시니까요.”
그 말을 들은 젠킨슨의 입가에 처음으로, 아주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걸 본 오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과 함께 환호성을 내질렀다.
‘역시!’
늙은 오크는 준비해 온 말을 쉴 새 없이 이어 나갔다.
“회장님은 창천과는 다릅니다. 용을 제외한 모든 종족을 한 번 쓰고 버리는 부품으로 여기는··· 그 분과는요. 젠킨슨 회장님은 이 나라에 살아가는 모든 종족이 각자의 재능과 가치에 따라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십니다.”
“창천의 행보를 보면 오로지 악독하게, 깨끗한 일 더러운 일 가리지 않고 재산을 끌어 모으는 데에 집중되었습니다. 보통 용족이 품위 때문에 꺼리는 업종까지 건드리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하지만 회장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전후 폐허가 되었던 이 나라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건 회장님 덕분이라는 것, 알 사람은 압니다. 회장님의 사재까지 출연한 과감한 투자가 없었다면 한국의 마법공학은 지금 수준에 이르지 못했을 겁니다. 회장님은 이 나라의 자원을 착취하는 대신 경제규모를 키우고 다른 종족과 열매를 공유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들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동업자들은 아마도··· 제가 이곳에 한 번 발을 딛으면 멀쩡한 몸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오판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서류는 드래곤의 품위를 손상시킬 풍문 재료가 되기에 충분하지요. 인정합니다. 평범한 용이라면 ‘더러운 오크’ 따위가 존귀한 종족의 비밀을 알았다며 절 살해했을 겁니다.”
“하지만 회장님은 다르십니다. 회장님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도 인격적 교류가 가능하다고 믿는 분이십니다. 용족의 존엄을 위해 다른 생물을 희생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기는 분입니다.”
다음 말은 마음 속으로만 중얼거린다.
‘가축을 존중하는 농장주? 흥! 오크든 인간이든 저 드래곤이 사육하는 경제 동물에 불과하다. 결국에는 위선자야.’
그러자 젠킨슨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내가 성군이라고? 자네를 해하지 않을 이유로는 모자란 것 같은데. 오로지 내 도덕관에 목숨을 걸었다는 건가?”
“회장님, 사실은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이지?”
“회장님은 피지배자를 존중하는 동시에, 그 기준이 될 선을 긋는 것에 주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양을 존중하는 목동이되, 존중받을 자격을 엄격하게 판정한다.
“회장님께서는 오크 커뮤니티에 한 번도 관심을 기울이신 적 없습니다. 그곳 주민들은 이 나라의 경제를 성장시킬 재능도 능력도 없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두 나눠야 할 열매를 키우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자들이라 여기시지요.”
“······.”
“한 마디로, 회장님 농장에 함부로 들여서는 안 될 병든 짐승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비루먹은 자들에게도 목동은 필요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그 역할을 해 왔습니다.”
오크 갱단이 눈에 거슬린다면 진작에 처리할 능력이 젠킨슨에게는 있었다.
그저, 필요하기에 그대로 뒀을 뿐이다.
“비록 회장님은 지금까지 제게 한 번도 손을 뻗으신 적 없으나, 저는 회장님께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허해 주십시오. 여태처럼 병든 짐승이 울타리를 넘는 일이 없도록··· 또는 굶어 죽어서 악취를 풍기는 일이 없도록 잘 관리하고 있겠습니다.”
오크는 드래곤에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시험하는 일을 멈추라고.
자신은 드래곤에게 필요한 존재이니 함부로 죽이지 못할 것을 안다고.
자료의 출처를 밝히지는 않겠다고.
“그런가?”
시큰둥하게, 드래곤은 이렇게 말했다.
“확실히··· 그 논리에 따르자면 나도 이 정도에서 그칠 수 있었지.”
“!”
오크의 몸이 굳었다.
그럴 수도 있었다?
결국 그러지 않을 거라는 소리다.
당혹감 속에서 상황을 판단하려는 그에게 드래곤이 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손잡은 대상이 레드 스타가 아니었다면 말이야.”
“아··· 아니, 그건!”
지금까지 평정을 유지하던 오크의 목소리가 떨렸다.
“레드 스타는 인권연대와 비교하면 위험성과 시급성 측면에서 뒤로 밀려나 있었지. 하지만 어제부터 순위가 좀 바뀌었어. 하필이면 그런 자들과 이 시점에 엮인 것도··· 자네의 운명이겠지.”
김광우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저 드래곤은 그가 레드 스타와 손잡은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저, 본인 입으로 털어 놓을 기회를 줬을 뿐이다.
벌컥!
집무실 문이 열리고 김광우의 눈에 살아있는 인간 하나와 죽은 인간 하나가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민준과, 사법거래에 응하여 당분간 지시대로 움직이기로 한 하은성이었다.
둘 중 유령을 본 오크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서렸다.
‘어떻게 여기에?!’
이곳은 드래곤의 집무실이다.
당연히 각종 기밀을 지키기 위해 퇴마진이 구축되어 있다. 지금 그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이곳에 들어왔다는 것은···.
“아!”
그의 머릿속에서 지금까지의 사건과 단서가 조각을 맞추며 그림을 그려냈다.
드래곤은 레드 스타와 자신의 관계를 알고 있다.
저 유령은 퇴마진에 면역인 것으로 보인다.
레드 스타는 고룡의 레어에 침입하여 망령을 확인했다.
“그랬군!”
그 모든 요소가 얽힌 중심에는 저 유령이 있었다!
“네가··· 네가!”
오크를 노려보며 민준이 외쳤다.
“덮쳐!”
즉시, 하은성이 뭔가 각오한 표정을 지으며 오크에게 뛰어들었다.
“으악!”
영체감응력자는 빙의에 일반인 보다 취약하다. 그 사실을 알기에 온 몸에 덕지덕지 퇴마부적과 아티팩트로 도배를 해 놓았지만 하은성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우으으으!”
영체가 오크의 육신에 흡수된다. 그 상태로 잠시 땅에 쓰러져서 부들거리던 김광우는.
“!”
이내 경련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민준이 눈을 마주치며 묻는다.
“어때?”
팔 다리 관절을 실험삼아 움직여 보는 오크의 눈빛과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완벽하게김광우 회장의 몸을 빼앗은 하은성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와, 이 할아버지 완전 타고난 영맨데요?”
“얼마나 오래 붙어 있을 수 있겠어?”
자원봉사자 몸에 빙의할 때는 상호 합의가 이루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30분 정도 버티는 것이 한계였는데, 뛰어난 능력자인 김광우의 몸은 수준이 달랐다.
“하루? 이틀? 모르겠어요. 꽤 오랫동안 조종해도 가뿐할 것 같은데···.”
하은성이 감탄하며 몸 곳곳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민준과 젠킨슨은 앞으로의 일을 상의했다.
“창천의 혐의를 확인하는 건 미뤄 둘 거지?”
“그래야 하지 않겠나? 자네가 데려온 유령 진술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할망구를 먼저 치면 레드 스타가 원하는 대로 판을 깔아줄 뿐이니까.”
일을 진행할 순서는 명확해졌다.
이제 레드 스타는 인권연대와 동급 조직으로 분류된다. 그러니, 그들은 물론이고 손을 잡은 김광우의 세력도 일망타진한다. 민준에게 있어서도 레드 스타 소탕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들이 백만 달란트짜리 유령을 손에 잡고 뒤흔드는 것을 멈춰야 하니까.
창천은 그 다음이다.
젠킨슨은 레어 안의 망령이 사실 용이 아닐 경우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드래곤이 망령이 되어 갇혀 있다는 개념 자체가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하은성과 김광우가 착각한 것이라면, 민준은 백만 달란트를 회수할 방법을 강구하고 창천에게 수고비라도 최대한 털어낼 생각이었다. 물론 고블린 DNA 분석에 대한 협조도 얻어내고.
반대로, 창천이 정말로 드래고닉 코드를 위반했다면? 젠킨슨은 민준에게 또 한 번 백지수표를 날려야 할 것이다. 그 혼자서는 피해 없이 창천을 죽일 수 없을 테니.
한편, 두 사람의 이런 대화를 듣던 하은성은···.
‘아니, 저 사람은 대체 뭐길래··· 드래곤 한테 말을 까지?’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상대가 누군지 눈치를 챘다. 고룡으로 보이는 이와 서슴없이 대화하는 민준의 모습은 두려움과 경외심을 함께 불러 일으켰다.
“야.”
“네, 넷!”
망령을 조종하는 것도 심상치 않았지만 흘러가는 상황을 보니 정말 대단한 사람 같았다. 민준의 부름에 하은성은 잔뜩 긴장하며 답했다.
“너, 살아있을 때 연기 좀 했냐?”
“연기요? 인형 탈 쓰고 하는 것 말고는··· 헉? 설마?!”
오크 노인의 몸으로, 하은성은 울상을 짓는다.
“설마 이대로 이 할아버지 흉내 내면서 살라고요?”
살았을 때 사회 경험이라고는 아르바이트 밖에 없는 자신이 몇 개나 되는지도 모를 기업체를 운영하며 오크 갱단까지 지휘하라는 뜻인가?
하은성은 기겁하며 그렇게 되물었지만 민준은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너,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구나? 껍데기가 똑같아도 알맹이가 20대 인간인데 그게 안 들킬 것 같아?”
“······.”
“페이스 투 페이스에 라이브로 진행하면 100% 들통나지. 그러니까···.”
젠킨슨이 수화기를 들자 집무실 문이 다시 한번 열리고 블레어를 비롯한 비서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
하은성이 당황한 사이 그들은 집무실 안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배경이 드러나지 않도록 스크린을 치고, 의자를 가져다 놓고, 하은성에게 달려 들어 메이크업을 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메이크업의 목적과는 정반대로 그를 몹시도 초췌하게 보이게 만드는 터치였다.
“이, 이게 다 뭐···?”
하은성은 몰랐지만 젠킨슨은 오크를 만나기 전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지금까지 방치했던 ‘병든 양떼’ 역시 앞으로는 그가 직접 관리해야겠다고.
젠킨슨의 관심 밖에서 세력을 키우는 집단이 얼마나 귀찮은 짓을 벌일 수가 있는지 최근 몇 가지 사건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양떼를 통제하는 집단들을 거기에서 쫓아 내는 일이 먼저였다.
물리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혹은 사회적으로든 말이다.
그리고 이럴 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젠킨슨과 민준은 알고 있었다.
일단은 서로 싸우게 만들어 수를 미리 줄여 놓고 시작하는 것이다.
“자, 이리로.”
김광우의 몸을 지배한 하은성을 의자에 앉히며 민준은 말했다.
“우리, 이대로 영상 하나 찍자.”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