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58
58. 21세기 로빈 후드 (12) >
***
민준은 간단하게 말했지만 실제로 시작하자 보통 힘든 일이 아님을 하은성은 깨닫게 되었다. 젠킨슨과 비서진이 뭔가 심각하게 의논할 때마다 대사가 늘어나고 촬영분량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연기를 지도하는 민준은 매우 깐깐한 디렉터였다.
“야! 말투가 너무 싼티나잖아. 다시!”
“아니, 거기서는 한 템포 쉬고. 여기 이 영상을 봐. 이게 김광우 회장 평소 말투야.”
“손바닥 비비지 좀 마. 초조해 보이잖아. 눈동자 그만 굴리고.”
“야, 다리 떨지 말고!”
“어깨 좀 펴! 표정 관리하고. 아니, 웃지 마. 왜 웃어? 사진 찍냐?”
생각보다 긴 시간이 지난 뒤에야 촬영이 끝났다.
“수··· 수고하셨습니다.”
누군가의 몸에 이만큼 오래 빙의한 것도 처음이고 이런 식으로 연기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정신적 피로를 느끼며 하은성은 한숨을 쉬었다.
다만 몸은 매우 멀쩡했다.
‘그러고 보니 왜 이렇게 가뿐하지? 아무리 뛰어난 영매도 이 정도면 거부 반응이 나타나야 할텐데?’
김광우의 몸이 이질적인 영혼을 밀어내는 기미는 전혀 없었고 덕분에 억지로 버틸 필요도 없었다.
몸이 얼마나 적응을 잘 하는지 생리현상이 느껴질 정도였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민준이 마치 자기 집처럼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이야. 간 김에 옷도 갈아입고 와. 김광우가 여기 올 때 입은 걸로.”
그들은 이 영상을 몇 달 전 촬영된 것처럼 조작할 거라 했다. 하은성은 그의 지시대로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긴 뒤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감탄했다.
“와!”
살아서나 죽어서나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모든 벽면이 통유리창으로 된 화장실이라니. 서울 시내 스카이라인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가까운 구조였다.
‘옛날 집 생각하면 여긴 궁전이네.’
다섯 세대가 쓰던 악취 가득한 공용화장실을 떠올리며 하은성은 약간 침울해졌다.
세상에는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었구나.
“헐!”
변기 앞에 서니 구조상 전면에 바로 유리창이 위치했고 눈부신 서울의 야경이 펼쳐졌다. 탄성을 지르던 하은성은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곳을 내려다보고는 다른 이유에서 또 감탄했다.
‘우와···. 오크는 진짜··· 우와···. 역시 오크···.’
감탄을 금치 못하며 집무실로 돌아오자 민준을 비롯한 이들은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다음은 알지?”
하은성은 약간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사이 CCTV는 김광우(하은성)의 동선을 성실하게 기록했다. 수행원들은 이미 제압당한 상태. 회장이 왔을 때와 같은 차량을 타고 젠킨슨 본사를 빠져나가는 장면 역시 그대로 찍혔다.
이 만남을 비밀로 하고 싶었으면 녹화를 중단하거나 영상을 삭제할 수도 있었겠지만 드래곤은 그러지 않았다.
하은성이 탄 검은 세단이 건물을 빠져나가고 몇십 분 뒤 한국 언론은 일제히 한 가지 속보를 떠들기 시작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화물 트럭과 고급 세단이 충돌하여 폭발했다는 뉴스였다.
***
– 서울시 문래2지구 교차로에서 화물 트럭 충돌··· 탑승자 네 명 전원 사망.
늦은 시간이라 도로는 한산했고 두 차량 탑승자 외 사망자는 없었다. 경찰이 주목한 부분은 폭발 규모가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조사 결과 트럭에 폭발물이 적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명백한 테러.
시신이 끔찍하게 훼손되었지만 탑승자 신분은 결국 밝혀졌다. 세단에서는 한국에서 가장 돈 많은 오크로 알려진 기업인의 DNA가 검출되었고 CCTV 대조 결과 그 차를 타고 움직인 게 맞다고 확인되었다.
남은 것은 트럭 운전자인데, 경찰의 범죄자 리스트에 등록되지 않은 평범한 오크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갱단은 자체적으로 수소문했고, 그가 레드 스타 소속임을 알아내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만 끝까지 알 수 없었던 것도 있었다.
트럭을 몬 오크가 이미 죽은 상태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는 것. 그가 이미 ‘학교’에서 민준에게 살해당한 자이며 비교적 시신이 온전하게 남아 언데드로 부림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경찰은 물론이고 갱단이 알아낼 수 있는 영역 밖이었으니까.
“레드 스타라고?”
김광우의 사망이 기정사실화되자 실권은 자식들에게 넘어갔다.
갱단의 머리가 허망하게 테러를 당해 죽었다. 제대로 복수하지 않으면 조직의 기강과 근본이 흔들릴 수 있는 일.
“하지만, 레드 스타 새끼들이 갑자기 왜? 저희는 휴전 중이었잖습니까!”
대책 회의를 위해 모인 일부는 범인의 정체 때문에 혼란스러워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이 자리의 모두가 김광우의 최근 행적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장남이 으르렁 거리는 소리와 함께 말했다.
“더 이상 우리와 손잡을 필요가 없어진 거지!”
“네?”
장남은 몇몇만 아는 내용을 설명했다. 사고 당일 김광우는 엘더 드래곤을 만나러 갔다. 그 이유가 라이벌 드래곤의 치부 밀고라는 걸 지금 알게 된 오크들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버지는 젠킨슨이 몸 성히 돌려보내 줄 거라 확신하셨다. 현명하신 분이지. 그 예측은 맞아 떨어졌어.”
고룡의 회사 지하주차장까지 김광우가 멀쩡하게 걸어 내려가서 차를 타고 나가는 장면은 CCTV에 선명하게 촬영되었다.
“레드 스타 놈들은 아버지가 그곳에서 실종되거나 살해당하기를 기대했을 거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경우도 대비한 거지.”
밀고가 완료되었으니 빈민가 사업을 위협하던 창천은 곧 제거될 터다. 생태계 교란종이 사라지는 것.
그렇다면 본래부터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온 두 조직은 계속 화평을 이어 나갈 것인가?
상대는 그럴 필요 없다고 판단을 내린 모양이다.
“애초부터 오랫동안 협력할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줄이야.”
그는 이를 갈았다.
“어차피 그 공산당 새끼들 눈에는 우리도 척결할 자본가 집단이라 이거지. 하지만··· 너희는 상대를 잘못 건드렸다.”
이 치욕을 갚을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입은 상처를 그대로 돌려주는 것.
전쟁이 시작되었다.
***
오크 갱단의 반격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시궁창 속에 숨은 자들의 세력과 배치를 가장 잘 아는 자들은, 마찬가지로 그 시궁창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자들이다.
레드 스타는 당연히 자기들 짓이 아니라 주장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그들이 그렸던 가장 완벽한 미래는 김광우 회장이 드래곤에 의해 제거당하고 갱단은 복수도 못한 채 혼란에 빠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뜻대로 굴러가지 않았고, 갱단에 의한 피해가 속출하자 그들은 결국 계획을 바꾸게 된다.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갱단 세력권을 완전히 먹어 치우고 빈민가를 장악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창천이 곧 사라질 마당에 남은 라이벌은 그들 밖에 없으니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급류에 휘말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한 쪽이 화해의 손길을 내밀 시점은 지나갔다.
전쟁을 끝낼 방법은 한 쪽이 완전히 패배해서 사라지는 것밖에 없어 보였다.
투두두!
쾅! 쾅쾅!
거리 곳곳에 무거운 폭음이 울린다.
골목에 가득했던 썩은 내는 화약 냄새에 묻혀 버렸다. 중화기와 마법이 건물을 박살내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 사이를 채우는 어수선한 발자국 소리. 비명.
산발적 접전 때문에 오크 커뮤니티 내에는 이제 민간인이 돌아다니지 않았다. 지금 시점에 외출하는 자들은 조직원 밖에 없다.
그런 그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젠장, 쏴! 쏘라고!”
이번 전투도 오크 갱단이 레드 스타 소굴을 습격하며 시작되었다.
방어선을 구축하고 대응하는 이들 뒤에는 반쯤 무너진 빌딩이 아슬아슬하게 서 버티고 서 있었다. 이미 창문이라는 창문은 다 박살이 났고, 가운데는 큰 구멍이 뚫렸는데 그곳을 중심으로 불이 사방에 번지고 있었다. 로켓포 세례를 받은 흔적.
밖으로 대피한 레드 스타를 기다린 것은 무차별 사격이었다.
투두두두두!
총구에서 불꽃이 튀었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굉음. 폭우처럼 촘촘하게 쏟아지는 총알이 벽과 바닥에 구멍을 만들었다. 바리케이트는 그걸 모두 막아낼 만큼 튼튼하지도, 빼곡하지도 못했다.
피슝!
후방에서 불을 뿜던 레드 스타 마법사 머리에 갱단의 총탄이 박혔다. 턱 위가 통째로 날아간 시신 위로 늑대 수인(獸人)이 뛰쳐나갔다.
꺄우우우우우!
총알도 막아내는 두꺼운 가죽을 방패 삼아 적진에 달려든다. 웨어울프는 손에 잡히는 모든 오크를 찢고 조각냈다. 살점과 피가 거칠게 뿌려졌다.
“으악!”
“막아! 이능력자다! 이쪽에 이능력자 지원을!”
늑대가 또 한 명의 오크 갱 목덜미를 물어 뜯은 순간 그의 등에 푸른 검이 박힌다.
콰직!
검을 쥔 오크의 몸에는 갱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문신이 가득했다. 그는 시린 검기가 일렁이는 무기를 뽑아냈다. 검날을 휘둘러 허공에 피를 털어내는 순간 늑대는 이미 쓰러져 있었다.
검사가 시체 위에 퉷, 침을 뱉는다.
“씨발, 이 개같은 빨갱이 새끼들!”
심장이 뚫린 늑대는 수화 상태가 풀리며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의 정체 또한 오크였다. 레드 스타나 갱단이나 전력에서 오크가 다수를 차지했다. 덕분에 얼핏 보면 이 전쟁은 오크들의 내분처럼 비쳐졌다.
“죽여! 다 죽여!”
대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누가 이기고 있는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잠입해서 취재할 간 큰 언론은 없었고 관은 매우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경찰은 일반인을 보호하고 두 조직의 전투가 거주 구역에서 벌어지지 않도록 막고 쫓아내는 것에 집중했다. 레드 스타나 갱단을 경찰이 직접 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의도는 명백해 보였다.
한편, 경찰은 이례적으로 홈리스들을 임시 거주지로 대피시키라는 지시도 받았는데 결과적으로 그럴 필요는 없게 되었다.
창천 휘하의 복지재단이 그들을 모두 의료원에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기존 시설로는 부족하자 오크 커뮤니티 외부 건물까지 임대해서 그들을 받아들였다. 드래곤을 못 믿겠다는 이유로 망설이던 빈민들조차 이번에는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싸움에 휘말려 비명횡사할 판이었으니까.
그러는 사이 하은성은 지선경이 요구한 날짜에 맞춰 위장 사무실에 방문했지만 그녀는 없고 암호화된 메모 한 장만 남겨져 있었다. 급한 일이 생겼다며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설마 눈치챈 것 아닐까요?=
불안한 듯 묻는 하은성에게 민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갱단 때문에 은신처를 새로 마련했겠지. 레드 스타 쪽도 안달이 났을 테니 널 만나러 나타날 수밖에 없을 거다.”
창천의 재단은 빈민구제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예상과 달리 젠킨슨이 창천을 처분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쯤 똥줄이 탈 거거든.”
그들의 계획은 창천이 사라진다는 가정 하에서 유효하기 때문.
“고룡들 사이 벌어지는 일을 염탐할 수단을 포기할 리 없지.”
그가 장담한 대로였다.
메모에 남겨진 장소로 찾아간 하은성 앞에 지선경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
“다음 타겟은 젠킨슨입니다.”
다시 만난 지선경이 그렇게 말했을 때 하은성은 당혹한 표정을 연기하려고 애썼다.
‘요원님이 말한 그대로잖아?’
이미 김광우 회장 몸에서 빠져나온 영체 상태로 그는 정신파를 흘렸다.
=또 고룡 레어에 침투하라구요?!=
지선경은 전보다 훨씬 해쓱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피곤과 스트레스가 묻어 나오는 말투로 말했다.
“아니, 굳이 레어에 국한되지 않는 편이 좋겠군요. 그 고룡 곁을 바짝 따라다니세요. 누구와 만나고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모든 것을 기억해서 내게 보고해요.”
대놓고 지시하는 말투.
하은성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외쳤다.
=위험해요! 실종된 고스트도 고룡을 만난 날 사라졌다면서요!=
사실 그런 유령은 존재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연기를 했다.
=고룡이면 따라다니는 영체감응력자 경호원 한 명쯤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래놓고 엘더 드래곤을 미행하라니요.=
그러자 지선경이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그래서, 못하겠다는 건가요?”
=······.=
지선경은 현재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안다. 창천은 아직 건재했다. 이대로면 그들이 노렸던 것은 무엇 하나 손에 쥐지 못하고 갱단과 소모전만 벌이다가 세력이 축소되는 결과에 이를 수 있었다.
이 계획을 착안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그녀였다. 따라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자도 물론 지선경이다.
대체 그 레드 드래곤이 무슨 이유로 여태까지 꿈적거리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창천은 언제 처리할 것인지··· 아니, 처리할 계획이 있기는 한지 알아내라는 상부 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아니, 그래도 이건 좀.=
하은성이 계속 뜸을 들이며 미적거리자 지선경은 이렇게 말했다.
“동생들을 참 아끼는 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보죠?”
그 순간 하은성은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번에는 연기가 아니었다.
“지금 여기는 외부에서 모니터링하고 있어요.”
=?!=
“제게 조금만 이상한 기미가 보여도 동료들에게 자동으로 신호가 갈 것이고, 하은성씨 동생들은 거친 꼴을 봐야할 겁니다. 이해했죠?”
=당신!=
“그러니 혹여라도 제게 강제 빙의할 생각은 포기하세요.”
지선경 역시 영체감응력자였고 하은성이 마음만 먹으면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 잘 알았다.
“카메라 너머에서 여길 보는 동료들이 빙의를 눈치 못 챌 리 없어요. 그런 시도를 한 순간 바로 당신 동생들을···.”
지선경은 말을 멈췄다. 아랫층에서 굉음과 비명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설마?!”
하은성은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는 걸 알았다. 민준이 1층에서 지선경의 호위를 처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그녀는 뭔가 눈치챘는지 표독스러운 눈빛을 던졌다.
“너, 설마?!”
하은성이 이판사판으로 정보를 흘렸다고 생각했는지 이를 갈며 소리쳤다. 한 손에는 텔레포트 스크롤을 든 채.
“이러고도 걔네들이 무사할 것 같아?!”
민준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동생들이 대피했다는 신호라는 걸 설명하는 대신, 하은성은 지선경을 향해 뛰어들었다. 영체가 상대의 몸 속으로 파고든 것은 스크롤이 찢어지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꺄아아악!”
지선경은 필사적으로 반항했다.
그 모습이 영상으로 송출되고 있었지만 손쓸 방법이 없을 터다. 그녀의 동료들은 이미 젠킨슨이 보낸 요원들에 의해 제압이 완료되었으니까.
“나가! 내 몸에서··· 나가!”
하은성은 김광우 몸을 빼앗을 때와 전혀 다른 반응 때문에 애를 먹었다.
=아니, 무슨 정신력이···!=
주도권을 가로채기 어려운 이유는 두 가지였다. 일단 지선경은 김광우처럼 뛰어난 영매가 아니다. 영체에 기름칠이라도 한 듯이 매끄럽게 쑥! 흡수되었던 그때와 달리 이 몸은 저항이 심했다.
또한, 대체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지선경의 의지와 정신력은 지독하게도 강했다. 긴 세월동안 더러운 짓을 저지른 오크보다도 더!
“으으···! 이 미친 귀신이··· 나가! 나가라고!”
지선경은 저항하며 손톱으로 몸을 긁고 데굴데굴 굴렀다. 주도권 싸움을 벌이는 하은성도 이미 죽었지만 죽을 맛이었다.
=포기해! 포기하라고!=
민준이 오기 전까지 도망 못 치도록 붙잡아 놓아야 했다. 하은성은 지선경의 영혼을 짓눌렀다. 전력을 다해 집중했다. 빼앗아야 한다. 이 몸의 주도권을 자신이 가져와야 한다. 그래서 민준이 이 여자를 심문할 수 있게!
=으윽!=
영력을 총동원하느라 정신이 부글부글 끓는 느낌이었다. 영체가 터질 것 같다. 반항은 그만큼 거셌다. 정신적인 실랑이가 길게 이어졌다. 그는 속으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버텨야 해!
“꺼··· 져!”
지선경이 입에서 피를 흘리며 외쳤다. 몸이 이물질이나 다름없는 하은성의 영체를 쫓아내려 하고 있었다. 결국 육신과 완전히 겹쳐졌던 영체가 다시 분리되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몸 밖으로 튕겨 나갈 것이다.
지선경이 절규했다.
“제발··· 그냥, 좀 꺼지라고!”
하은성은 필사적으로 버텼다.
영력을 전부 끌어다 쓴 악다구니와 함께 유령이 외쳤다.
=너나··· 꺼져!=
“!”
그 찰나. 하은성은 보았다.
반투명한 그의 영체 속에서 찬란한 섬광이 퍼져 나갔다.
그는 이 빛을 지금까지 두 번 본적이 있다. 은행 금고 안에서 한 번, 용의 망령이 갇힌 마법진과 공명할 때 한 번.
그리고 지금이 세 번째였다.
영롱하고도 아름다운 광채가 그의 영혼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아니?!=
당혹감을 느낀 순간.
=!=
하은성은 섬뜩한 비명소리를 들었다. 지선경의 성대를 통해 울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자신 말고 다른 존재가 터뜨린 정신적인 절규였다.
그리고는.
쑥!
정체되었던 혼란 속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하은성은 영체를 짓누르던 압박감이 약해지는 것을 감지했다.
직후 그의 정신을 휩쓴 것은 시원한 개방감이었다. 지금까지 좁은 몸 안에서 영혼 둘이 치고 박고 싸우던 스트레스가 갑자기 사라졌다. 가파른 등산 끝에 펼쳐진 고원, 그곳을 잔잔하게 감싸는 시원한 바람을 마주하는 청량감.
무어라 비유하기 힘든 안락함 속에서 하은성은 숨을 헐떡였다.
“어?”
그랬다. 하은성은 숨을 쉬고 있었다.
“빼앗았다!”
탄성을 내질렀다. 몸이 움직였다. 지선경의 육신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직전에 행한 자해 때문에 손톱에 살점이 박힌 채 떨리는 손.
쾅!
문이 날아가고, 타이밍 좋게 민준이 들어섰다. 몸 곳곳에 선명한 피가 묻어 있었다.
“음?”
민준은 하은성의 영체가 보이지 않는 사실과, 도망치지 않고 기묘한 자세로 앉아 있는 지선경 때문에 상황을 바로 알아차렸다.
“좋아, 빙의에 성공했군?”
지선경의 몸을 조종하며 유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좋아, 잠깐 몸을 묶는 동안 기다려. 완전히 제압이 끝나면 밖으로 나와도 돼. 심문은 내가 할 테니까.”
그것이 둘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아, 저···.”
“뭐?”
민준은 지선경의 손목을 묶다 말고 그(그녀)를 보았다.
“아마 안 묶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뭐? 설마 그 안에서 영혼들끼리 심문하겠다고? 네가 물어보면 그 여자가 솔직하게 다 대답을 해 주겠대?”
빙의라는 것은 몸 하나에 두 개의 영혼이 깃든 상태를 말한다. 하은성이 김광우를 지배했을 때도 오크의 혼은 어디에 가지 않고 계속 그 몸 안에 남아 있었다.
문제는, 이 상태에서 육신은 본능적으로 침입자에게 저항한다는 것. 인체의 면역계처럼 말이다.
이것이 빙의 상태가 오래 못 가는 이유다. 시간의 문제일 뿐 결국은 주인에게 몸을 돌려줄 수 밖에 없다.
원래는 말이다.
“저기, 제가요.”
유령은 여자의 목소리를 빌려서 말했다.
“뭐?”
하은성은 예상치 못한 현상을 목격했다. 그의 영혼에서 찬란한 빛이 휘몰아친 순간 지선경의 영혼이 몸 밖으로 튕겨 나가는 장면이었다. 원래는 반대여야 했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
주변을 둘러봐도 주변에는 망령도 다른 유령도 없었다.
지선경의 혼은 밖으로 튕겨 나가자 마자 증발했다. 죽음을 맞이한 대부분의 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영계로 사라져 버린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아마 다시는 물질계로 돌아올 수는 없으리라.
이 현상을 간단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요원님, 저기. 제가 방금 이 여자 영혼을··· 성불시켜 버린 것 같은데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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