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67
67. 용성애자, 용혐오자, 용도축자 (1) >
블레어 캠벨에게는 확고한 신념이 있다.
전 차원계를 통틀어 가장 사랑스러운 생물은 드래곤이다.
그녀는 유튜브에서 용과 관련된 채널은 모조리 구독하고 있으며 드래곤이 등장하는 창작물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사 모은다. 심지어 가명으로 만든 SNS 계정에 자작 용 일러스트를 정기적으로 업로드 하는, 그쪽 세계에서는 나름의 네임드이기도 하다.
그녀가 용을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름다우니까. 그리고, 위대하니까.
이런 점을 고려하면 한국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용을 곁에서 보필하게 된 그녀의 성취는 말그대로 덕업일치라고 할 만했다.
“회장님, 젠킨슨 복지재단의 오크 커뮤니티 내 신사업 추진 품의서입니다.”
인상을 살짝 찡그린 채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던 젠킨슨이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손을 내민다.
서류를 그에게 넘기며 블레어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사옥에도 회장님이 본체로 업무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좋을 텐데.’
물론 레어에 그런 공간이 있지만 젠킨슨은 부하들을 함부로 자기 집에 부르는 대신 근로계약서에 명시된 업무 공간에서만 마주하는 것을 선호했다. 공과 사의 구분이 확실한 고용주인 것이다.
때문에 블레어는 젠킨슨의 웅장한 본체를 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용덕후로서는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서류를 뒤적이던 젠킨슨이 물었다.
“레드 스타가 운영하던 학교와 회사를 우리가 전부 사들여도 예산이 이것밖에 안 든다고?”
젠킨슨은 자신이 소유한 복지재단을 앞세워 이미 붕괴해버린 레드 스타의 빈자리를 채울 생각이었다. 설립된 후 본래의 목적대로 운영된 적이 거의 없는 그 재단이 드디어 제자리를 찾아가려 하는 것이다.
그가 재단을 설립한 진짜 이유는 비영리재단의 정치후원금에 한도를 두지 않는 국내법의 맹점을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젠킨슨은 통치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취임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 어떠냐는 수하들의 권유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 자리만 지켜도 충분히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네. 오히려 대통령직보다 낫지 않나? 5년 마다 악수를 구걸하면서 시장 바닥을 돌아다닐 필요도 없고 말이야.’
탐나지 않았다. 현재의 회장직은 임기도, 탄핵도, 재선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매력적인 왕좌이니 더더욱.
그런 그가 정계에 출마하지 않아도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수단 중 하나가 앞서 언급한 재단이었다.
유력한 대선, 총선 후보자 중 레드 드래곤의 정치후원금 맛을 못 본 자는 드물다. 이미 5선째인 대통령 역시 젠킨슨의 요구라면 쉽게 거절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했다.
그런 목적으로 잘 굴리고 있던 재단의 돈 일부가 이제부터는 오크 커뮤니티에도 흘러 들어갈 예정이었다.
목장의 울타리 너머 방치되던 병든 양들을 드디어 직접 돌보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들을 홀리는 위험한 선동자가 또 나타나기 전에 말이다.
“기존의 학교와 구호품 공급망을 인수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돼. 그 몇 배가 되는 물량을 쏟아 부어야 하네. 옛날이 더 좋았다는 말이 흘러나올 일이 없도록.”
오크들 사이에서 레드 스타의 평판은 이미 추락했지만 별 반감을 못 느끼는 인간 빈민들도 존재한다.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고 레드 스타를 그리워하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 심리적인 틈을 파고 드는 제2의 레드 스타가 등장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젠킨슨은 페이지를 넘긴다.
“김광우의 회사들은?”
레드 스타를 몰아내고 빈민가의 맹주가 된 그들은 삼일천하를 누리고 물러났다.
김광우가 죽기 전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비디오가 유포된 것이다. 늙은 오크는 초췌한 얼굴로 양심고백을 하고 있었다. 영상으로 기록된 유언장 내용은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대중이 경악한 것은 그가 운영하던 합법적 회사들이 오크 갱단 돈줄이라는 고백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건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 내용이니까.
갱단 돈을 먹인 정부 관계자의 저지 없이 영상이 자유롭게 유포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놀랐다.
그 이면에는 당연히 드래곤의 입김이 작용했다.
더 이상 오크 갱단이 필요 없다고 여긴 레드 드래곤의 의지에 따라 그들을 방관하던 경찰이 수사를 시작했고 위장회사 중역들을 차례로 구속시키고 법인들을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돈줄이 끊긴 오크 갱단은 서서히 와해되는 중이다.
“기업체 정리는 거의 끝났습니다만 갱단에 소속되었던 오크들 거취가 문제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전부 감옥에 집어넣을 수는 없었고 젠킨슨의 사설경비업체에서 고용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지금까지 지은 죄가 지나치게 무겁지도 않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대부분의 오크들.
빈민가 각 가정의 실질적 가장 역할을 하고 있던 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젠킨슨은 고민하고 있었다.
“이 부분은 당장 뾰족한 수가 없군. 시간을 두고 생각을 해 보지.”
“네, 회장님.”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시킨 일은?”
젠킨슨은 복지재단에 관련된 보고서를 밀어 둔다.
그러자 블레어는 굳은 얼굴로, 스파이를 찾아내기 위한 그동안의 조사 진척 상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
하은성은 용을 혐오한다.
지금까지 직접 대면한 용이라고 해 봤자 딱 둘이지만 그 중 하나가 너무도 고약한 품성과 언행을 보였기에 드래곤에 대한 그의 인식은 ‘극혐’으로 고정되고 말았다.
그런 하은성이 지금 하필이면 용의 몸에 갇혀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거울을 볼 때마다 당혹스러웠지만 이제는 슬슬 적응이 되어 가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슬라임 침대에 편하게 몸을 뉘인 채 더 이상 리모콘을 부수지 않고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을 만큼 적응했다.
=아, 이것도 다 봤네.=
튀긴 소정강이 뼈를 으적거리며 리모콘 버튼을 누른다.
그는 민준의 상가 지하 비밀의 방에서 일주일 넘게 꼼짝 못하고 갇혀 있었다. 영체 상태로 도망가는 선택지는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민준이 시킨 대로 얌전히 지하실에서 매일을 보낼 뿐이다.
그 요원은 매몰찬 사람은 아니어서 이곳에 TV 한 대를 설치해주었다. 심지어 스마트 TV였다. 덕분에 하은성은 넷플릭스로 12시즌짜리 미드를 완결까지 정주행 할 수 있었다.
뼈를 씹으며 하은성은 방금 봤던 작품을 평가했다. 이능력자로 구성된 경찰특수부대의 활약을 그린 드라마는 현실에 존재하는 마법과 초능력을 세심하게 고증한 하이퍼 리얼리즘으로 찬양받곤 했다. 그런 것 치고는 유령에 대한 고증은 영 형편없었다고 하은성은 생각했다.
특히 살인 범죄의 유일한 목격자인 유령이 영매도 아닌 평범한 변호사에게 빙의되어 재판장에서 10분 넘게 증언하는 장면은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참, 나. 세상에 어떤 유령이 10분 넘게 일반인한테 빙의를 하냐?=
그렇게 혼잣말 같은 정신파를 울린 직후 하은성은 말의 모순을 깨달았다.
어, 그거. 나잖아?
=흐음.=
달란트의 힘을 빌려 영매도 아닌 몸을 차지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거부반응은 없다. 하은성은 이러다가 지선경 때 꼴이 날까 무서웠다. 이 혐오스러운 용의 몸으로 오랫동안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사람들의 착각과는 달리 모든 유령이 부활을 열망하지는 않는다. 죽는 순간 식욕, 성욕, 수면욕을 잃어버리니 몸을 움직이는 욕구보다는 더 재미있는 것을 보고 싶은 욕구,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고 싶은 욕구, 영체를 계속 유지하여 소멸되고 싶지 않은 욕구 등이 앞서는 것이다.
하은성은 망설이다가 내면을 향해 말을 걸었다.
=저기, 아저씨?=
하은성은 육신을 공유하고 있는 드래곤의 영혼을 불렀다.
민준이 말한 기한은 아직 많이 남았지만 혹시라도 빠르게 회복을 했을까 싶어서.
=아저씨. 정신이 좀 들어요? 아저씨!=
몸이 이 정도로 성장했으면 적어도 쉰은 넘겼을 거라고 했다. 하은성 입장에서는 아저씨다.
인간 기준으로는 중년, 동족 기준으로서는 새파랗게 어린 드래곤은 여전히 깨어나지 못했고 당연히 대답도 없었다.
하은성은 포기했다.
=에이, 모르겠다. 별 일 없겠지 뭐.=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적어도 지선경 때처럼 몸에 갇혀버릴 징조는 없었다.
아직 하은성은 이 몸에 저장된 드래곤의 기억에 전혀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갑자기 겪어 보지도 않은 추억이 떠오르지 않는 이상 안심해도 될 거야.=
사법거래로 동생들 안전과 생계 역시 보장받은 이상 달리 걱정거리도 없다.
그렇게 생각한 하은성은 리모콘을 움직이며 다음 영상을 고르기 시작했다.
한 리얼리티 쇼가 눈에 띄었다. 발정기에 진입한 젊은 오크 남녀를 초호화 리조트에 몰아넣은 뒤 벌어지는 일을 촬영하는 관찰 예능이었다. 파트너를 빼앗기 위해 벌어지는 패싸움과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화끈한 애정행각, 거기에 시즌 중반에 갑자기 난입하여 판도와 서열을 뒤엎어 버리는 타종족 미남 미녀들까지.
예고편만 봐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하은성은 1편을 재생했다. 그리고 곧 방금 전까지의 걱정은 까맣게 잊은 채 몰입했다.
***
민준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억을 잃기 전 그는 용을 도축하여 파는 일을 한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혼란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게는 슈탄 인의 모계 왕정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그들이 그런 문화를 형성한 것은 대략 천 년 전의 일이다. 그 말은, 민준은 천 년 전까지도 멀쩡하게 활동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민준은 역사가 시작되기 전의 기억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이건 대체 얼마나 오래된 기억일까? 기준을 삼을 기록이 없으니 시간을 가늠할 수도 없다.
이렇게 되면 또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자신은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존재해 온 자일까?
‘시대가 맞지가 않아···.’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리고 선글라스를 낀 청년이 고개를 내민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실례합니다, 예민준 요원님 되십니까···?”
“맞습니다. 여기 앉으시죠.”
애매하게 뾰족 튀어나온 귀가 눈에 들어온다.
하프 엘프.
오늘 약속을 잡고 만나기로 한 의뢰인이다.
민준은 보통 관외 의뢰를 받지 않지만 예외는 있었다. 의뢰자가 그의 지인이거나 지인을 통해 청탁이 들어올 경우다. 예전의 오만식 역시 결과적으로는 비극으로 끝나긴 했지만 의뢰를 정식 요청했다면 못 이기는 척 들어줬을 터다.
수십 년 전 인연도 챙기는 그인데, 청탁을 의뢰한 자가 현재 같이 일하는 캐시라면 바로 거절하지 않을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부연하자면 민준이 요즘 꽤나 한가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블린 DNA 수집은 창천의 자료를 낚아 챈 젠킨슨이 진행하는 중이고 달란트 추출 마법진은 민준이 넘긴 설계도에 따라 고룡 휘하 연구진이 제작 중이다. 물론 기계로 따지면 부품에 해당하는 단편적인 것이고 그들은 자기가 뭘 만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걸 나중에 조합하는 건 민준의 몫이었다.
어쨌거나 그들에게 하청을 준 파트들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딱히 할 일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상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의뢰인을 소개하던 캐시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같이 유치원 다니던 소꿉친구라더니···.’
승낙한 뒤 걸려 온 전화를 통해 의뢰인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지금 그와 마주보고 앉은 남자는 한국의 7대 재벌··· 아니, 창천이 죽었으니 이제 6대 재벌이라고 불릴 기업 집단의 후계자다.
에드워드 미첨.
엘프 답게 한국으로 귀화하고 나서도 미국에서 받은 이름을 고수하는 가문의 장남이었다.
‘그만한 가문 도련님이 대체 뭘 의뢰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지?’
에드워드는 예를 표하려는 듯 선글라스를 벗으려다 머뭇거린다.
그 행동의 의미를 이해한 민준이 말했다.
“전 남자한테 관심 없습니다. 그러니까 안심하고 벗으시죠.”
“네, 알겠습니다.”
목소리만 들으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대화가 오간 뒤에야 의뢰인은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러자 민준은 뱀파이어 특성자 특유의 오묘한 눈빛을 마주하게 되었다. 물론 그에게는 ‘매혹’ 효과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 설사 에드워드가 여자였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의뢰하실 내용은?”
그러자 하프 엘프는 이렇게 말했다.
들어올 때 주춤거리던 모습과는 딴판으로 명확한 의지와 의미를 담아서.
민준이 듣자 마자 지인 청탁이고 뭐고 이 도련님을 사무실 밖으로 쫓아낼까 고민하게 만든 말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지명하는 외계인 한 명과··· 그녀가 낳은 아이들을 찾아서 죽여주셨으면 합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