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88
88. 불신지옥 (16) >
***
‘백만 번대 넘버링.’
다른 차원을 돌다가 이쪽에는 최근에 배치된 수형자인지라 서로 초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준이 번호에 주목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그럼, 적어도 700년 이상 이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뜻인데.’
‘아시프’로 구분되는 수형자가 100년 이상 생존하는 확률은 50%도 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비정규직인 그들은 위원회 정직원들이 꺼려하는 위험한 임무를 맡다가 각종 사고와 재난에 휘말려 비명횡사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현재 천만 번대 자릿수 수형자가 주류임을 감안할 때, 백만 번대면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며 지금까지 살아남을 판단력과 재주를 가졌다는 뜻.
‘정신도 멀쩡해 보이고.’
인간이나 오크 같은 단생종 출신 수형자가 제정신으로 버티는 한계치는 보통 2~300년 정도. 그 이상을 끌면 정신이 붕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눈 앞의 남자는 그 몇 배의 세월을 굴렀을 터인데 이상징후가 안 보인다. 장생종 출신이라는 뜻. 그런 작자들은 대체적으로 상대하기 까다롭다.
‘그리고···.’
상대의 머리 위를 꺼림칙하게 바라보는 마지막 이유는,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눈에 익은 번호였기 때문이다.
민준이 비아냥거린다.
“영계 통신망으로 나한테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했던 그 얼간이로군.”
아시프-1,319,552의 얼굴이 굳는다. 동시에 두 눈에서 섬광이 번득였다.
민준은 비웃음이 가득 담긴 어조로 말했다.
“다른 수형자들과 팀을 짜서 머리를 회수하고 보상을 나눠 먹자고 했었지?”
민준이 독일로 출발하기 직전 컴퓨터로 확인한 메시지가 있었다. 눈 앞의 남자는 그에게 자신의 ‘추적 능력’을 자랑하며 손을 잡자고 제안했었다.
그에 대한 민준의 반응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답장 보낼 생각도 안 들더군.”
읽고 씹었다.
무반응으로 상대에게 확실한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네 도움 따위는 필요 없으며,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이 사실을 몰랐던 수형자들이 당혹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시프-1,319,552는 이를 악물며 외쳤다.
“40만 달란트는 말도 안 되는 거액이야. 그걸 꼭 독식해야겠나?! 어차피 그 오랜 세월 수형자 생활을 해 왔으면 모아 놓은 달란트도 많을 거 아닌가! 아무리 비싼 생존세를 매긴다고 해도 8백년이면 충분히 퇴직금을···!”
“내 계좌 잔액은 너희들이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이런 헛소리 지껄이는 근거가 될 수도 없어. 지금 논점을 흐리는군. 나는 혼자 임무를 성공시킬 자신이 있기 때문에 혼자 움직이는 거다. 그 대가를 왜 너희와 나눠야 하지? 오롯이 내 능력으로 얻은 성과를.”
혼자서도 총대주교의 머리를 회수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어투였고, 그걸 듣는 자들도 감히 반박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시프-1,319,552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났군. 아주 잘나셨어. 그 잘난 능력으로 앞서 나가고 있으니, 다른 수형자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양보할 여유는 없나 보지?”
민준은 저 헛소리를 계속 듣고 있기에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착각하지 마. 우리는 수형자야. 애초에 자발적으로 묶인 관계도 아니고, 서로 처지를 봐 준다고 나아지는 건 아무 것도 없어.”
독재자에 의해 괴멸 직전까지 갔던 차원처럼 특별한 환경이 아닌 이상, 위원회는 대놓고 수형자들 앞에 보상을 흔들면서 경쟁을 유도한다.
뿌리깊은 승자독식의 구도.
민준은 자신이 ‘약자’들을 배려하여 달란트를 재분배한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창출되는 가치가 전혀 없다고 확신했다. 이 확고한 체계에는 수형자들 의지로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전무하므로.
“더군다나.”
입술을 뒤튼다.
“이 상황에 그런 말을 지껄이다니 어지간히 낯짝이 두껍군. 능력 없는 놈들이 단체로 모여서, 능력을 가진 자의 뒤통수 깔 생각이나 하던 와중에 말이야.”
그림자가 끓어올랐다. 그는 포위한 네 명의 수형자에게 차례로 시선을 던진다
처음엔 열 명이 넘었던 게 많이 줄었다. 절반은 하은성을 따라가느라 갈라졌고 몇 명은 이미 전투 불능 상태.
‘백만 번대 놈이 좀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할 만하군.’
그때였다.
꺄아아아악!
멀리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방향으로 볼 때 수형자는 아니다.
거기에 큰 관심을 두는 대신 민준은 제례단검을 움켜쥐었다. 잠시 집중이 깨진 적들 역시 표정이 바뀌며 힘을 끌어올린다.
민준이 자신의 팔꿈치 아래를 잘라낸 찰나, 수형자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
도테스는 의아한 시선으로 복도에서 스쳐 지나간 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모두 고대 종족이다. 그런데 분위기가 묘하게 어수선했다. 복장을 보니 ‘조폐국’ 소속. 위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한다는 자긍심 때문에 항상 오만함에 가까운 당당함을 보이던 자들 답지 않았다.
도테스는 당혹과 황망한 공기를 읽어냈다.
“어이, 이봐. 저기 무슨 일인지 알아?”
마침 누가 지나가기에 붙잡고 묻는다. 턱으로 방금 지나간 조폐국 직원들을 가리키면서.
멈춰선 그 역시 고대 종족은 아니지만 수형자도 아닌, 평범한 정규직 직원이었다. 타이밍이 마침 좋았다. 상대는 귀는 밝고 입은 가볍기로 유명한 남자였으니까.
“이거 정말 특급 비밀인데 말이야···.”
동료는 뭉툭한 손가락으로 왼쪽 눈 각막을 긁으면서 머뭇거린다.
“나 못 믿어? 말 좀 해보라고.”
그러자 동료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몇 번 엄포를 놓고는 속삭였다.
“조폐국 쪽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저기, 나도 눈 있는데. 일단은 두 개 다 멀쩡한 것 같고.”
두 눈 멀쩡하게 뜬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걸 무슨 정보라고 주절거리냐는 비아냥.
동료가 투덜거렸다.
“성미도 급하지. 들어봐. 요즘 조폐국이 보고한 달란트 채굴량이 예상보다 줄어든 모양이야.”
도테스의 두 귀가 번쩍 뜨였다.
“얼마나?”
“추정치 대비 하루에 15% 정도.”
“뭐라고?!”
도테스는 기겁하며 숨을 들이켰다.
“정말이야? 15%?”
“그래. 기이하지? 어차피 정확한 예측은 불가능하다지만 이건 커도 너무 커.”
조폐국의 비밀을 도테스도 완벽하게는 몰랐다. 다만 채굴량을 결정하는 사이클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조폐국 엘리트들은 그 사이클을 시뮬레이션하여 채굴량을 추정하고 대위원에게 보고한다.
물론 연간 합계를 보면 항상 실제 채굴량이 예측치보다 미세하게 낮다는 부분은 조폐국 입장에서 두통거리였지만 대위원들은 그 정도까지 지적하며 문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처럼 15%나 차이가 난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하지만 예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면서? 몇백 년 전인가?”
“3% 정도 줄어든 적이 있었지. 하지만 그때는 바로 다음날 채굴량이 다시 회복되었어. 감소했던 만큼 다시 반등해서 오히려 생산량이 늘었었거든. 조폐국도 대위원들도 그때 경험 때문에 호들갑 떨지 않고 추세를 보고 있었던 거지. 그런데···.”
결국은 인내심에 바닥이 드러난 모양이다.
“기다려도 원복이 안되니 난리가 난 거군?”
동료의 말투가 더 조심스러워졌다.
“벌써 열흘 째야.”
도테스는 그 말뜻을 이해 못한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없어서 되물었다.
“뭐가?”
“채굴량이 줄어든 상태로 열흘이나 시간이 지났다고.”
“······맙소사.”
“대위원들이 격노했어. 조폐국 시뮬레이션이 잘못된 게 아니냐는 거지. 하지만 몇 번이나 재검증을 해도 결과는 똑같다는군.”
도테스가 의아함 속에서 중얼거렸다.
“베이스가 되는 생산량이 감소한 건가? 하지만 위원회가 생긴 이후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동료가 눈꺼풀을 접으면서 말했다.
“뭐, 고대 종족도 아닌 입장에서는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지만. 어차피 우리는 조폐국이 달란트를 어떻게 확보하는지도 모르잖나? 다들 말하는 채굴이라는 단어도 실은 애매하기 짝이 없고. 그들이 정말 어느 행성에서 땅 파고 돌 깎으면서 채취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는 건지 알게 뭐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상식처럼 용인되는 부분은, 생산량이 조폐국의 시뮬레이션 대비 이렇게나 어긋난 적은 없으며 하루라도 생산이 멈춘 적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요 열흘 간 예상 대비 감소한 달란트의 채굴총량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동료는 이번에야말로 진짜 비밀이라면서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예상 대비 누적 오차량을.
그것을 들은 즉시 도테스는 온 몸 깃털을 곤두세웠다. 이어진 그의 목소리는 경악과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250만 달란트라고?!”
***
항구도시의 밤은 이제 완벽한 어둠에 휩싸였다.
요하임은 양부를 바라본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의 부활은 완전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일단 목 아래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정상적인 생물 기능 대부분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총대주교는 밤이 오면 절대 깨지 않는 깊은 잠 속에 빠졌다. 마치 기절하듯이.
저 기면증이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필수 조건이 아닐까 요하임은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그리고 기이한 사건들은 항상 이 시간에 벌어진다.
요하임은 양부를 바라본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대체, 이 거룩한 빛은 무엇일까?’
처음 부활했던 순간처럼 목은 찬란한 빛을 뿜고 있었다.
정신을 잃은 뒤 흘러나오는 황홀한 서광. 이미 몇 번이나 목격했음에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아름답다!’
요하임은 생각한다. 저것이야 말로 완전한 신의 증명이다. ‘드림랜드’에 잠들어 있는 신들의 존재를 입증하는 증거다.
사제는 두 손을 뻗어 양부를 들어올렸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소유욕 속에서, 요하임은 광체를 망막에 담는다.
이미 머리를 손에 쥐고 있음에도 탐욕이 솟아올랐다. 이 머리를 깨 버리면 그 안의 빛을 직접 움켜쥘 수 있을 것인가?
‘···안된다. 그래서는 안 돼.’
본단 연락을 받은 뒤 머리를 가지고 도망치는 행위는 당시에는 지극히 이성적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니 요하임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 동기가 된 마음 중, 저 빛을 탐하고자 하는 충동이 전무하다 단정지을 수 있는가?
사제는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을 털어냈다.
‘이건 개인적인 욕망이 아니다. 신의 증거를 지구인들 곁에 두기 위함이야. 그리고 외계인이 숨긴 진리를 캐내기 위한 한 걸음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
꺄아아아악!
밖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내다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점점 빨라지고 있군.’
처음 머물었던 도시는 그들이 떠나고 며칠 뒤 살인 사건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간격이 점차 줄어서, 오늘은 이곳에서 처음 밤을 보내는 데에도 불구하고 이미 살육과 광란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 또한, 잠든 신의 권능을 빌린 당신의 소행이겠지요?”
총대주교가 머무는 장소에서 악몽을 꾸고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
그리고 ‘아시프의 서’에 적힌 경구.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지구 교인들은 잠든 신들이 악몽을 꾸게 만들기 위해 온갖 기괴한 행위를 저질렀다. 그것이 총대주교의 가르침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쩌면··· 신들에게 악몽을 선사하고 각성시키는 데 훨씬 직접적인 방법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당신이 했던 말들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습니다.”
한때 모든 것을 바쳐서 믿었지만, 이제 두 눈에는 불신의 빛이 가득하다.
머리를 탁자 위에 내려 놓던 요하임의 시선이 한 곳에 닿았다. 총대주교의 목과 턱이 연결된 부분. 민준이 만든 날카로운 절단면에서 반 뼘 정도 떨어진 곳. 정면에서 볼 때는 그림자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 부분에 날붙이에 찔린 듯한 오랜 흉터가 있었다. 죽기 훨씬 전에 만들어 진 것이 분명했다.
신성력으로 상처를 회복할 수 있는 고위 사제 몸에 남겨진 섬뜩한 자국.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비롯한 양자들이 어쩌다가 생긴 상처인지 물었지만 총대주교는 단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었다. 대충 얼버무리거나 적당한 거짓말을 던져도 될 텐데 입을 꾹 다물기만 한 것이다. 그때는 안 좋은 기억이 있는가 보다 생각하며 넘어갔지만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것이 수상하다.
요하임은 흉터를 손가락으로 쓸며 중얼거렸다.
“대체 우리에게 숨긴 비밀들이 얼마나 더 있는 거지요?”
그때였다.
“!”
이상을 감지한 요하임은 두 눈을 부릅뜬다.
파지직!
신성력으로 구축한 결계가 강제로 뜯겨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은신처 보호를 위해 그가 혼신의 힘을 다 해 만들어 낸 보호장치가 한 순간에.
그것을 뚫으며 개입한 힘은 요하임에게 너무도 익숙한 종류의 것이었다.
“안 돼! 하필이면 지금···!”
요하임은 이를 악물면서 일어선다. 그리고 거친 손짓으로 총대주교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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