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9
9. 직장상사를 살해하는 세 가지 방법 (6)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서류를 편지 봉투 안에 다시 집어넣는데, 거실 소파에서 뭔가 꾸물거리는 것이 보였다.
잠긴 목소리.
“······저 어제 여기서 잤어요?”
“그런가봐.”
덮었던 담요를 내리면서 부석해진 얼굴로 캐시가 일어났다.
정신을 쉽게 못 차리는 듯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다가 읊조린다.
“아이고··· 두야.”
민준은 그녀를 등진 채 서랍을 연다. 그리고 며칠 전 의사에게 새로 처방받은 약병을 꺼냈다. 마지막으로 먹은 지 24시간이 지난 참이었다. 파란 알약을 손바닥에 털어내자 캐시가 말했다.
“혹시 숙취해소제 같은 거에요? 그럼 저도 나눠줘요.”
민준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변비약이야.”
“······.”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다시 묻는다.
“······심해요?”
“위중한 편이야.”
그러자 캐시는 진지한 얼굴이 되어서 혼잣말을 한다. ‘변비에는 고구마가 좋다던데···.’
민준은 그녀가 조만간 고구마 한 박스를 들고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선물이었다.
냉장고를 열면서 말한다.
“해장국 끓여 줄게. 먹고 가.”
민준은 그녀를 자택근무 전제로 고용했기에 매일 상가 사무실에 얼굴도장 찍을 필요는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업무상 여기 보다는 이민국에 들락거릴 일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시는 하루에 한두 번은 꼭 들리는 편이다.
그녀가 힘없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저 쓰던 칫솔 있죠?”
“욕실 찬장에. 그런데, 먹기 전에 이부터 닦으려고?”
“전 그래야 개운해지는 체질이에요.”
그녀가 욕실에 들어가자 마자 “꺅!”하는 짧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어지는 말소리.
“뭐야, 정팔 아저씨 왜 여기서 자요!”
캐시는 욕조 안에서 사지가 뒤틀린 채 잠든 정팔을 깨웠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눈을 뜬 오크는 지옥의 용광로에 몸을 담근 듯한 섬뜩한 신음소리를 냈다.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중얼거린다.
“······머릿속을 수돗물로 헹구고 싶은 심정이야.”
초췌한 정팔이 거실로 나오다가, 아침밥 차리는 민준을 발견했다.
“일어나셨습니까?”
“다음부터는 적당히들 먹자.”
“······그래야죠.”
익숙하게 식탁 앞에 앉아 TV를 틀었다. 아침 뉴스 방송이 흐른다.
-베르미 공주의 방한 일정 조율 과정에서 당사자들 간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경호 문제라고 전해지며···.
-연예계 소식입니다. 한국에서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엘프 배우, 아렌타 세레피 씨가 에르메스의 뮤즈로 선정되어 향수 광고 촬영을 마쳤습니다. 쟈르뎅 데 엘페스(Jardin des Elfes)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신제품은 엘프 고유의 체향(體香)을 고혹적이면서도 무겁지 않은 감각으로 재현했다는 설명이며, 국내에는 다음 달에 출시 예정······.
넋이 나간 표정으로 TV를 보는 정팔 곁에, 이를 닦고 머리까지 묶은 캐시가 다가왔다. 함께 뉴스를 보더니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쥔다. ‘저거나 한 번 뿌려 볼까?’ 바로 담당 셀러에게 보낼 카톡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한국에는 내달 출시라고 하지만, 향수 같이 싼 아이템은 미리 챙겨줄 법도 했다.
그런데, 뉴스를 듣고 있었는지 부엌에서 민준이 중얼거렸다.
“엘프 냄새 나는 향수라고? 그게 뭐가 좋아서 향수까지 만드는지 모르겠네. 난 별로던데.”
캐시는 셀러에게 보내려고 입력하던 메시지를 도로 지우면서 대꾸했다.
“그러고 보니 민준 씨한테는 왜 그런 향기가 안 나요? 1층 서점 사장님은 연세가 있으시니까 그렇다고 치고, 민준 씨는 엘프 나이로 한창 때잖아요.”
도마 위에 칼질을 하던 민준의 손이 잠깐 멈췄다. 곧,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꾸한다.
“쿼터 정도까지 희석되면 그런 건 발현이 잘 안 된다더라고.”
“흐음, 그런가?”
캐시의 시선이 대답을 한 민준 쪽으로 옮겨갔다. 그는 양지살을 썰고 있었다. 손에 들린 칼을 보고 그녀의 표정이 굳는다.
“······잠깐만요, 민준씨 칼 다른 거 쓰면 안 돼요?”
그가 고기를 썰며 잡고 있는 것은 흑마력을 충전할 때마다 손에 상처를 내던 돌칼이었다.
“설거지하기 귀찮아서. 그리고 이게 제일 잘 들어.”
“그거 옛날에 멕시코인가 어디에서 노예들 인신공양할 때 쓰던 유물이라면서요!”
사실이었다.
이 세계에 온 뒤 적당한 마도구를 찾던 민준이 이 칼을 찾았을 때 얼마나 환호했는지 모른다. 과거 먼 대륙의 원주민들이 수천, 수만의 인간을 공물로 바치며 산 채로 심장을 뜯어내는 데 쓴 이 칼에는 진득한 원한과 사념이 담겨 있어 흑마법에 안성맞춤이었다.
“내가 개조를 잘 해서, 여기 검날에는 항상 미세한 마력이 흐르고 있어. 자동으로 살균이 된다고. 아마 수술실 메스보다 이게 더 깨끗할 걸?”
“······.”
캐시는 설득을 포기했다. 밥 차려주는 사람에게 도구를 따지며 항의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한 것이다.
“참, 정팔아. 너 오늘 서로 돌아갈 생각이었지?”
“네. 접는다고 보고를 해야죠.”
“음? 뭘 접어요?”
“그거 잠시 미뤄 둬야겠다. 오늘 본사에서 편지가 왔는데···.”
설명을 듣던 캐시와 정팔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기 시작했다. 그 표정을 보며 민준은 후회했다. ‘밥 먹고 나서 말할 것을 그랬나?’
“그럼, 오늘 바로 본사로 들어가실 거에요?”
“응.”
민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냄비에 고기를 왕창 넣었다.
기를 빨릴 일정이 있으니 든든하게 속을 채워 둬야 했다.
***
“예민준 요원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는 젠킨슨 컴퍼니 본사 직원을 따라 회의실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 상큼한 풀냄새와 은은한 꽃향기가 뒤섞인 체향이 물씬 풍겼다.
엘프의 모든 것을 닮고 싶어 하는 인간들은 이 향기를 어떤 인공적인 향수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하지만, 민준의 취향에는 잘 맞지 않는 편이었다.
회의실 안에는 미리 자리를 잡고 앉은 정장 차림의 엘프 여성이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젠킨슨 회장의 비서실장이다. 안면을 튼 지는 레이크필드 만큼이나 오래 되었지만 민준은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왜 부르셨죠?”
“회장님께서 하달하신 말씀 전하겠습니다.”
민준이 앉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젠킨슨 회장님께서는 현재 요원님이 수사중인 효성실업 장태준 사장 실종 사건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젠장, 속으로 욕을 삼켰다.
예상했던 흐름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회장비서는 사무적인 언어를 나열한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시선은 고요하기만 했다.
“어제 체포된 헝 클라운 소사이어티의 조직원과, 그 의뢰를 넣은 클라이언트의 정체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뒤 회장님은 바로 요원님을 호출할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오크 커뮤니티에서 그 마법쟁이가 체포된 것은 어제 오후의 일이다. 그때까지 입장을 정하지 못한 민준은 일부러 이민국 쪽에 별도 보고를 하지 않았지만, 신변을 인수한 경찰 내부에서는 공유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결국, 젠킨슨 회장은 공식적으로 완전히 별개 조직인 경찰 내부 정보를 입수하고 바로 움직인 것이다. 그 결과가 오늘 아침에 우편함에 꽂혀 있던 편지.
이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드래곤들이란 그런 존재였다.
“요원님께서는 범죄조직에 의뢰를 넣은 용족이 누구라고 추정하시지요?”
떠보듯이 묻는다. 민준은 큰 고민 없이 답했다.
“아유델타스 아닐까요?”
엘프는 표정의 미동도 없이 답했다.
“소식이 좀 느리시군요. 그녀는 얼마 전 알을 낳았습니다.”
“벌써?!”
아유델타스가 몇 살이더라? 기억을 더듬는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외계로 놀러갔다가 만난 남자와 사고를 친 모양이다.
“아무튼, 출산 휴가에 들어갔으니 다른 종족들 일 따위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는 없을 겁니다.”
그럼 후보는 세 명이 남는다.
엘프가 말했다.
“회장님께서는 베트라비아, 할리스파드, 에델리네스. 이 셋을 유력한 용의자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민준의 생각과 일치하는 명단이었다.
그는 애초부터 젠킨슨 회장이 소사이어티와 접촉했다는 허무맹랑한 망상 같은 것은 떠올린 적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거물이니까.
용족이 지구의 최상위 계층인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가 동등한 레벨은 아니다. 그 중에서도 능력이 뒤쳐지는 이도 있고, 자산 규모가 상대적으로 적은 자도 있고, 사고뭉치도 있다. 그런 용이나 되어야 범죄 조직을 통해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저 셋 같은 어리고 미숙한 부류 말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이렇게까지 회장이 전면에 나서는 이유는 뭘까?
“젠킨슨 회장님은 그들과 혈연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엘프는 짧은 침묵 후에 답한다.
“효성실업이 어떤 회사인지 아십니까, 요원님?”
민준은 서류에서 읽은 내용을 읊는다.
“제약사로 압니다.”
“회장님께서는 믿을 만한 경로를 통해, 그 회사에 비밀 태스크(Task)가 있었다는 정황을 파악하셨습니다. 장태준 사장이 실종 전까지 직접 운영했다고 하고요.”
“뭐, 기업이니까 그런 게 있을 법도 하지요.”
“그런데 태스크의 연구 주제가 문제입니다.”
“뭐였는데요?”
“실험 상세 데이터까지는 파악하지 못하였으나, 주된 테마 중 하나는 용족의 유전자 연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민준은 속으로 혀를 찬다. 이런 중요한 정보는 파일에서 쏙 빼 놨겠다?
용은 전염병에 걸리지 않고, 어지간한 외상도 놔두면 감염 없이 자연 회복되며, 알려진 유전병도 없고, 만독불침지체다. 따라서 용을 위한 약품을 개발할 필요성은 전무하며, 어떤 용들도 자신들의 유전자를 연구하라고 기업에 투자하지 않는다. 분명, 그 회사는 용들의 윤허를 받지 않은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한 젊고 치기 어린 용이 분노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감히 고귀한 종족의 유전자를 무단으로 연구하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괘씸하게 느껴졌겠죠. 아시잖아요? 그 나이 때 용의 심리상태. 자기를 치장할 재료가 종족 밖에 없으니 그것에 더 집착하죠.”
손에 넣기 위해 노력 한 줌 들인 적 없는 자산을, 자신의 유일한 자긍심으로 삼는 족속은 어딜 가나 있다.
“그래서 소사이어티까지 동원해서 깽판을 친다?”
이름 모를 클라이언트의 동기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만약 그가 어른들의 암묵적 충고를 무시하고 망나니 짓을 꾸민다고 하면, 회장님은 그걸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다.”
대부분의 엘더 드래곤은 이 세상을 뒤에서 움직이는 용의 존재가 매스 미디어에 부각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가장 효과적인 지배방식은, 피지배자들이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상태로 지배하는 것이니까.
혹시라도 어린 용이 범죄조직과 결탁해서 회사 하나를 망가뜨리려 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면 여론이 나빠질 것이다. 언론 통제가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자, 민준은 이제 젠킨슨 회장의 동기까지 이해했다. 드래고닉 코드(Dragonic Code) 때문에 그가 직접 나서서 어린 용들을 취조하며 때려잡을 수 없으니, 요원을 활용하려는 것이다.
그럼 마지막 의문이 남는다.
“혹시, 장태준 사장이 외계인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어떻게···?”
“확증은 없지만, 그의 히스토리를 되짚다 보니 정말 뜬금없이 등장하여 회사를 일으킨 점이 의심되었습니다.”
민준은 행간의 공백을 읽었다.
정부와 이민국이 효성실업의 주식을 원하는 이유는, 그 비밀 태스크 연구 자료까지 꿀꺽하고 여차하면 완전히 폐기하려는 거다. 그런 그림을 그리려면 장태준이 외계인이었다는 시나리오가 제일 깔끔하다.
“그리고 장태준 사장이 실종된 이 상황에서, 요원님께 도움이 될 만한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연이어 민준이 예상치 못한 내용을 말한다.
“며칠 전, 회장님께서는 증권사 몇 개를 동원하여 효성실업 주식을 대량 매입하려고 시도하셨습니다. 장태준 사장이 이미 실종된 뒤의 일이었죠. 수장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반응이 느릴 수밖에 없으리라 판단하신 겁니다.”
대주주 장태준이 보유한 주식은 당장 건드릴 수 없지만, 시장에 풀린 매물을 주워담으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 어제 뉴스를 들으셨나 모르겠군요.”
“효성에서 느닷없이 자사주 매입에 나섰죠.”
“정확합니다.”
자기가 발행했다가 회사 명의로 도로 사들인 주식에 의결권은 없지만, 그럼으로써 경영권을 노리는 시도를 막아낼 수는 있다.
“여기서 눈 여겨 볼 부분은, 장태준 사장이 없는 상태에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거지요.”
젠킨슨이 고의로 효성을 흔들어 봤다는 걸 민준은 이제 알게 되었다. 그 결과 드러난 것을 보면 꽤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것 같다.
‘승인을 미리 받아 놓았다고 치부하기엔 찝찝하다. 젠킨슨의 개입은 그가 실종된 뒤 시작되었으니까.’
민준은 나지막이 말했다.
“누군가 총대를 매고 나서서 지시한 거군요. 실종된 장태준 사장의 경영권을 지켜주려는 목적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선량하지 않은 의도일 수도 있지요. 곧 ‘자기 것’이 될 거라 생각해서 빼앗기기 싫은 저항일 수도 있고요.”
“나중에 장태준 사장을 잡아 족쳐서 주식을 빼앗을 자신감이라도 있는 건가?”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엘프가 파일 하나를 내민다.
“열어 보시죠.”
그것은 한 사람의 신상 정보였다. 김연주 전무. 효성실업의 명실상부한 이인자.
얼마 전 효성의 임시 이사회에서 전무는 대표이사이자 대주주인 장태준의 위임장을 내밀며 안건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이미 행적을 감춘 자의 위임장을 말이다.
“지금 심문을 하면, 미리 받아놨다고 변명하겠지요.”
하지만 젠킨슨 회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민준이 그녀를 직접 만나 보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정팔에게 사건이 넘어가기 전에 경찰이 전무와 인터뷰를 했지만 민준이 직접 두 눈으로 보면 다른 것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고.
“이 사람을 의심하시는군요.”
“네, 어제 하룻동안 알아낸 두 가지 정보··· 소사이어티의 의뢰주 정체와 김연주 전무의 이상한 행동을 엮어 보면 하나의 시나리오를 떠올릴 수 있으니까요.”
민준과 두 눈을 마주치며, 비서는 자신이 섬기는 이의 가설을 입에 올린다.
“생각해 보세요. 그 위에 상관이라고는 장태준 사장 한 명 밖에 없는 입장이라면··· 달콤한 유혹에 빠질 수 있지 않을까요? 드래곤에게 정보를 흘려서라도 그 한 명을 치워버리고 싶은 유혹 말입니다. 직장상사를 살해하는 방법으로는 꽤나 세련되었다고 평가해야겠네요.”
엘프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