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91
91. 불신지옥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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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란트가 그곳에서 채굴된다고요?”
요하임은 되묻는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네. 엘라후-프라가. 신들이 잠든 장소. 스스로 꾼 꿈에 묻히고 스스로 흘린 피에 잠긴 그곳에서.=
“피?”
그 단어를 반복한다.
“피를 흘린다고? 그런 이야기는 아시프의 서에서도 읽은 적 없습니다.”
이단재판관은 이제 침통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정신파로 답했다.
=다른 차원 사제들에게 허락된 부분은 그 경전의 57장까지지.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58장 이후 기록된 문장일세.=
하늘에서 내려온 선지자는 차원 #77-102 원주민들의 선조에게 말했다.
=’태초의 종족이 깨기 힘든 복락된 꿈에 묶임을 알고 교활한 짐승들이 그들 목덜미를 물었노라. 가장 무방비하고도 나약한 곳의 살결이 찢기고 피가 흘러내리니, 그것은 모든 가능성의 근원이며 어떤 한계도 허하지 않는 힘이라.’=
지금까지 접해본 적 없는 문구를 듣고 요하임은 머릿속에 풍경을 그려냈다.
흔히 꿈 속 세상으로 번역되는 세계, 엘라후-프라가. 그곳에서 행복한 꿈을 꾸며 잠든 태초의 종족들. 목덜미가 찢기고 선혈이 흘러내리는데도 고통을 느끼지 못함은 물론, 거짓된 행복에 젖어서 눈을 뜨지 못한다. 그들이 몸을 눕힌 바닥에는 찰랑거리며 피가 차오르고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오래 전 우리 교단의 교리연구자들은 태초의 종족을 신격으로 정의하는 것에 동의하고 그들이 흘리는 피를 신혈(神血)이라 부르기로 하였지. 하지만 위원회를 비롯한 다른 종족은 그것을 달리 칭하고 있어.=
그러자 요하임의 입에서 오늘 몇 번이나 언급되었던 그 단어가 흘러나왔다.
“설마, 달란트!? 하지만 피라고 했잖습니까. 혈액이 어떻게 화폐가···.”
=신혈은 필멸자의 세계에 닿는 순간 끓고 비산하며 증발하지. 그렇기에 그 정체가 피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드물다네. 하지만 선지자께서 말씀하셨으니 그것은 피가 맞아. 형체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에 존재하는 성물. 모든 우주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광체 말이야.=
그리고 선지자는 최초의 교인들에게 지시했다.
=’그들이 흘린 피는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힘을 품었으니 잠든 그들을 다시 깨우는 열쇠 또한 그것이다.’=
이 시점에서 교단의 지상과제를 수행할 구체적 방법이 언급된다. 평소에도 잠 속에 악몽을 섞어 흘리도록 노력을 경주하는 동시에 미래를 준비해야 했다.
그들의 잠이 얕아지는 사이클을 기다리면서.
=그 시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신혈을 모으고 있었지. 위원회도 모르는 방법으로.=
선지자는 촌부들 앞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보였다고 한다. 이단재판관이 문장을 외웠다.
=’선지자가 이르되, 이것은 그들 피로 날을 적신 검이니 너희는 내가 알려주는 방법에 따라 이것을 만들지어다.’=
=’촌부가 아뢰어 묻되, 그것으로 저희가 무얼 하오리까?’=
=’선지자가 답하되, 태초의 종족이 잊고 잃은 고통을 대신 느끼라. 너희 역시 가장 무방비하고도 나약한 곳의 살결을 찢고 피를 내리라.’=
그리고 이어진 것은 교단 역사 상 최초의 세례였다.
선지자가 들고 있던 검을 그들 목덜미에 한 번씩 찔러 넣은 것이다.
인간이라면 즉사했을 상처였지만 종족의 신체 특성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선지자가 가르치되, 이 날은 살을 찢고 혼에 닿으니 닦이지 않는 흔적을 남겼더라. 너희는 이제 그들의 피를 머금을 수 있으리.’=
=’촌부가 주저하며 묻되, 하지만 그들이 있는 곳까지 저희가 어찌 가리까?’=
거기까지 읊던 이단재판관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상상의 범위를 벗어난 이야기를 멍하니 듣던 요하임이 되돌아온 눈빛으로 캐묻는다.
“왜요, 이야기하다 보니 더 들려주기 아깝습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닐세.=
그는 주저하다가 말한다.
=엘라후-프라가까지 산 채로 가는 방법은 오로지 우리 종족에게만 가능한 것이기에 그렇네. 애초에 그 단계까지 언급하기 전에 세례부터가 문제···.=
요하임의 눈에 다시 이글거리는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머리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자 재판관이 다급하게 말했다.
=제발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게! 그러고 나서 선택하고 행동해도 늦지 않네!=
그는 빠르게 정신파를 쏟아낸다.
=알겠네. 그 방법은 산 채로 영혼을 엘라후-프라가로 보내는 것일세. 그리고 신혈에 닿은 뒤 다시 몸으로 영혼을 불러 들이는 것이지.=
“?!”
=애초에 자네 같은 종족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야. 생자의 유체이탈은 약물에 의존한 인위적인 황홀경으로는 닿을 수 없는 경지이니까. 그렇다고 정말로 죽어버리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어서 문제고.=
그렇게 말하며 재판관은 다시 옛 이야기를 꺼낸다.
하지만 요하임은 그가 은근슬쩍 생략한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유체이탈만 한다고 누구나 엘라후-프라가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닐 터다. 또 하나의 조건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세례’의 효과에 그것까지 포함되는 것일까?
=어쨌든, 그 후 우리 종족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세례를 받게 되었지. 선지자가 알려준 방법대로 단검을 흉내내서 성물로 만들기도 했어. 그리고 사제 자격을 얻은 자들은 엘라후-프라가로 건너가 신혈을 조금씩 머금고 돌아왔다네.=
그렇게 가지고 온 달란트는 계속 개인이 소지하는 대신 공의회가 관리하는 제단에 전이시켜 보관했다고 한다.
=한 명이 너무 많이 흡수하는 것은 금했어. 그랬다가는 신성력이 폭주하는 걸 알게 되었거든. 짧은 시간에 많이 흡수하는 것도 금했다네. 그랬다가는 밖에서 신혈을 긁어 모으는 고대 종족들이 갑자기 양이 줄어든 걸 알 테니까.=
위원회가 손에 넣는 양이 항상 예측치보다 적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사제들은 아주 조금씩 가로채고 있던 것이다. 조폐국이 채굴하는 장소보다 훨씬 안쪽에서, 위원회가 들어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엿볼 수도 없는 내부에서 말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 모은 끝에 마침내 그 시기가 다가오게 되었다네. 신들의 잠이 얕아지는 때가.=
드림랜드의 본단인 공의회에서는 본격적으로 신들을 깨울 준비를 시작한다. 하지만 위원회와 다른 종족들이 그 세계에 들락날락하는 상황에서는 전념할 수가 없었다.
결단이 이어졌다.
=우리는 차원 전체를 불시에 폐쇄했다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사전 고지를 했다면 위원회에서 수상하게 여기고 필사적으로 뒤를 캘 것을 걱정했기에 락다운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심지어 선교 활동이나 무역 등의 이유로 다른 세계에 나가 있던 종족들조차 돌아오지 못했을 정도.
물론 고위 사제나 귀족 출신들은 비밀리에 연락을 취해 귀환토록 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은 소수였고, 대다수는 차원 밖에 방치된 채 발이 묶였다. 정보를 최대한 통제하려는 조치였다.
이단재판관은 잘린 머리를 가리키며 말한다.
=저 자도 그래서 이곳에 남은 게지.=
“······당시로서는 고위 사제도 귀족도 아니었던 아버지는 버려진 거군요.”
재판관의 얼굴은 해석하기 힘든 표정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네.=
“그럼 아버지는 왜 죽기 직전 그렇게 돌아가려고 애쓴 겁니까? 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음 사이클이 돌아오기 전에 귀환해야 한다고.”
=추측컨대 신을 깨우는 의식에 직접 참여하고 싶어한 거야.=
사제인 요하임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마지막 의식에서 봉사하면 깨어난 신의 기억 속에 누구보다 뚜렷하게 남을 것이라 생각한 게지. 그 기억 속에서 영생을 사는 축복을 보장받고 싶었던 거야.=
자신만 이곳에 버려져 영광된 순간을 놓치는 것을 견딜 수 없었을 터다.
공식 교리에 따르면 꼭 의식에 참여하지 않아도 그 전에 최선을 다해 ‘신의 시선’을 끌었다면 진실된 세상에서 함께 할 수 있지만, 총대주교는 그 이상을 바랐던 것. 더 선명한 기억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알겠지만 우리 종족은 쾌락과 행복감을 유도하는 뇌내물질을 통제할 수 있네. 그는 여기서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그것을 폭주시켰을 거야.=
요하임은 당시 총대주교의 상태를 떠올렸다. 미간에 박힌 세 번째 눈이 열리고 붉은 피거품이 끓어오르며 기이한 돌기 같은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시기를 절묘하게 조절한 탓에, 몸에서 흘러나온 영혼은 성불하는 대신 엘라후-프라가로 전송되었겠지. 그 직후 육신이 식었을 것이고.=
그 다음을 설명하는 재판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저 자가 죽었다가 어떻게 부활했는지 이해가 되는가? 그 상태로 성역에 간 다음 말도 안 되게 많은 신혈을 영혼에 품은 걸세! 위원회가 눈치를 챌 정도의 무시무시한 양을!=
그의 정신파가 거칠어진다.
=다행히 우리가 조금 먼저 알게 되었네. 신혈의 은혜를 받기 위해 참배하러 간 사제 덕분이었지. 그 형제가 성역에 흐르는 신혈 양이 대폭 줄어든 걸 알아차렸거든. 누군가 금기를 깬 것이었어!=
내부적으로 조사했지만 용의자를 찾을 수 없자 차원 밖에 있는 사제들로 눈길을 돌린 것이다.
=이미 그 짐승들 사이에서는 난리가 났을 거야! 이제 돌이킬 수 없네. 어서 마지막 의식을 진행해야 해. 이 상황을 저 자는 예상했겠지.=
“잠깐만.”
요하임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적한다.
“그게 전부라고요? 그렇다면 당신들이 락다운까지 풀면서 다급하게 오지 않았을 겁니다. 이 머리를 그토록 애타게 원하는 이유는··· 결국 이 속에 깃든 영혼이 필요하다는 거 아닙니까? 정확하게는 아버지의 혼이 머금은 신혈이요!”
정곡이 찔린 재판관은 잠시 침묵한다.
그리곤 곧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저 자가 노린 게 그것이지. 이렇게 된 이상 빨리 의식을 진행해야 하는데 신혈의 양이 아직 모자라다네. 저 자가 얼마나 흡수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거라도 보태야 할 판이야!=
죽기 전 총대주교는 확신했다.
파문이니 뭐니 해도, 본단에서는 자신을 결국 모차원 제단으로 데리고 갈 수밖에 없으리라. 그가 담은 달란트를 전이해야 하니 말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악몽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만으로도 영생에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까지 설명한 이단재판관은 손을 내밀며 제안했다.
=이런 비밀을 모두 안 이상 자네도 위험하네. 어떤가? 나와 함께 우리 차원으로 가는 것이 좋겠네.=
“······.”
=자네에게는 신혈을 머금을 능력이 없고 세례를 내릴 수도 없지만 마지막 의식에 함께 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네. 그대가 바라는 영생에 더욱 가까워지는 거야. 거부할 이유가 있는가?=
요하임은 짧은 침묵 후 입을 열었다.
“나는···.”
콰쾅!
그때, 굉음이 울렸다.
=뭐야!=
고개를 든 세 명의 외계인과 한 명의 지구인은 그곳에 있어서는 안될 것을 보았다.
공해가 사라진 대기를 뚫고 선명하게 내려 쬐는 별빛.
어설프게 봉합했던 결계가 종이장처럼 찢어지고 집의 지붕이 통째로 날아간 것이다.
그리고 내부로 뛰어든 것은 검은 바람이었다.
콰직!
“@#%@#@!”
이단재판관 중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의 한쪽 팔은 온데간데없다. 공기를 찢던 절규는 그의 미간에 피거품이 끓어오르며 잦아들었다. 뇌내물질로 통증을 억제한 성직자는 바로 전투 태세를 갖췄다.
=누구냐!=
각자 허리에 찼던 단검 형태의 성물을 빼어 든다.
들끓는 그림자 괴물을 뒤집어쓴 남자, 민준은 내심 혀를 찼다.
그는 왼손에 재판관의 팔을, 오른손에는 단검을 쥐었다. 사제의 성스러운 무기와 달리 흑마력으로 들끓는 흉기.
시선이 외계인들을 차례로 향한다.
‘분명 팔과 다리 전부 찢어버릴 생각으로 공격했는데··· 뭐야? 이 괴물들은.’
위원회가 눈독들일 죄를 짓지 않도록 평생 조심해야 할 자들이었다.
혹시라도 잡혔다가는 극한까지 알차게 부려 먹힐 능력자니까.
‘그래도 저 머리는 못 가져간다. 그리고··· 너희도 나랑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어.’
대체 얼마나 대단한 비밀 이야기를 나눈 것인지, 민준의 주문으로도 내용을 명확하게 들을 수 없었다.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경계하여 그 안에 또 하나의 차폐 결계를 만들었기에.
하지만 노력 끝에 몇 가지 키워드는 입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결정적인 단어는···.
‘달란트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입에 담았지!’
그리고 그의 눈에는 총대주교의 머리가, 그것이 뿜어내는 찬란한 빛이 보였다. 더이상의 증거는 필요 없었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을 예상하며, 민준은 등 뒤 드래곤에게 정신파로 쏘아붙였다.
=누가 도망칠 것 같으면 대뜸 불을 뿜어 버려! 어차피 그걸로 죽을 놈들은 아니니까!=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전면을 주시하는 민준은 볼 수 없었지만 하은성은 드래곤에게 가능한 가장 극적인···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대꾸할 정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요원이 보는 방향을 하은성 역시 응시하고 있었다. 다만 주목하는 대상은 달랐다.
=······말도 안 돼.=
하은성은 무릎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허파는 젖은 진흙이 가득 찬 듯 아프고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그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외계인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검이었다.
몰라볼 수 없었다.
죽기 직전, 누군가 속삭인 말이 떠오른다.
‘넌, 살아서보다는 죽어서 더 쓸모가 많겠구나?’
잊으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던 기억이 목구멍 밑으로 치밀어 오른다. 시야가 하얗게 된 채 도망치던 자신이. 뒤에서 너무도 평온한 걸음으로 따라오던 살인자가.
그리고 마지막 순간 목에 박힌 칼날.
몰라볼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저 외계인들은 자신을 죽인 범인의 것과 똑같은 단검을 들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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