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92
92. 불신지옥 (20) >
***
하은성이 혼란에 빠진 사이, 그 원인을 제공한 자들도 하은성만큼 깊은 혼란을 느꼈다. 이단재판관들은 눈을 부릅뜬다.
‘흑마법사? 그리고, 용?!’
민준은 몸과 얼굴을 그림자로 감싼 상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흉악한 주문쟁이들 특기가 분명했다.
그런데 드래곤은 왜 함께 있는가?
‘어쨌든 위원회가 뒤에 있겠군.’
그들은 민준이 지구인이라고 생각할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본단에서 나름 연막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위원회는 목표물을 가로채기로 결정한 것이다.
‘확증은 없을 터다. 추정만으로 우리를 핍박하기 위해 보낸 게지. 이런 더러운 일을 맡겼다는 건··· 저 자, 수형자다.’
그 사이 민준도 상대를 관찰한다.
‘머리는 아직 요하임 손에 있다. 왜 빼앗지 않았지?’
시선이 약간 기울더니 팔이 찢긴 사제를 본다. 절단면의 피는 이미 멈췄다. 신성 마법의 주문을 읊지 않았는데도.
뛰어난 성직자라면 사지 절단 같은 부상도 금방 아무는 것이다. 몸에 내재화된 회복마법. 잘린 팔이 다시 돋아나지는 않지만 저 정도면 전투 중에는 충분했다.
=위원회에서 왜 우리의 정당한 권리행사를 방해하는지 이해할 수 없구려. 이미 도약허가까지 내주지 않았소?=
그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킨다. 찬란한 섬광을 뿜어내는 잘린 목.
“저거, 나 줘야겠는데.”
수형자는 설명하지 않는다. 위원회가 저 목에 엄청난 현상금을 건 사실을.
또한, 이단재판관들과 엮이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 최대한 피하되 여의치 않으면 말살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도 입에 담지 않았다.
지시대로 하지 않을 생각이기 때문이다.
“순순히 협조한다면 죽일 생각은 없어. 들을 이야기도 있고.”
재판관들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불쾌감이 차오른다. 세 쌍의 시선이 험악해졌다. 상대의 말은 자신들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투였기에.
=폐쇄가 그렇게 길었던가? 위원회가 우리 교단의 저력을 까마득히 잊어버릴 정도로?=
그들 이마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리고 몸에서는 맹렬한 신성력이 뿜어져 나온다.
민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가뜩이나 종교쟁이들은 나랑 상성이 안 좋은데.’
그들의 회복력은 저주마저 튕겨내 버린다. 그러니 용을 상대로 하는 것과 비슷한 전법을 쓸 수 밖에.
재판관은 약간 몽롱한 듯한 정신파로 말했다.
=요하임, 잠시만 기다리시오. 방해꾼부터 처리하고 남은 대화를 이어가나는 것이 좋겠군.=
세 명의 외계인이 포위하며 뛰어든 동시에 수형자의 몸집이 불어났다.
***
요하임은 멍한 시선으로 눈 앞의 싸움을 보았다.
상상해본 적 없는 괴물들의 혈투.
‘저건··· 한국의 그 요원 아닌가?!’
얼굴을 가리고 있다지만 그림자 괴물을 저런 식으로 사용하는 흑마법사를 그는 달리 알지 못했다.
그를 덮은 그림자는 일초에도 몇 번씩 형태를 바꾸며 공격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계인 셋은 요원 하나를 압도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것처럼 보였다.
민준은 험악하게 날뛰는 것 같으면서도 매우 정교한 궤도로 움직였다. 짐승 같은 야만성과 절제된 정확성을 동시에 갖춘 공격. 재판관들은 몇 번이나 사지를 날릴 뻔했다.
그런 그를 상대하는 외계인들은 처음 기습당했던 때와 달리 극한의 주의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칼날처럼 날아드는 어둠은 아슬아슬하게 살을 베는 데에 그쳤다. 비록 중상은 피했지만 상처는 남고 회복에 신성력이 소모된다. 3:1의 싸움임에도 불구하고 주도권은 요원이 쥔 것으로 보였다.
‘저건···.’
요하임은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죽일 생각이 없군!’
요하임이 저 종족 급소를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목을 자르거나 머리를 깨면 죽을 것이다. 아버지처럼. 하지만 민준은 그런 곳은 절묘하게 피하는 중이다.
예상처럼 흘러가지 않자 조급해졌는지 재판관 한 명이 무리하며 신성력을 끌어 모았다.
파앗!
이계인 손에서 섬광이 뻗어 나간다. 열기 없는 빛이었지만 민준은 뭔가 직감한 듯 급히 몸을 틀었다. 성스러운 광선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자 끓는 기름에 물을 뿌린 것처럼 그림자가 부서지며 사방으로 튄다. 음영이 뒤집히며 터진 자리에 피부가 드러났다. 그림자에 덮이지 않은 맨 몸.
그런데, 살이 부글거리며 끓어오른다.
콰르르르!
신성마법 중 회복계의 원리는 세포 분열을 극도로 활성화시키는 것이며, 그것을 멀쩡한 부위에 적용했을 때는 역효과를 낸다. 그 결과 민준의 어깨에 큼지막한 종양덩어리가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푹!
민준은 주저하지 않고 종양에 제례단검을 박아 넣었다.
펑!
수박보다 크게 부풀던 살덩어리가 터지며 핏덩어리가 튄다. 붉은 잔해는 금세 허공에 녹아 사라졌다. 방금 자기 몸에 붙은 살점을 산산조각 내 놓고도 신음 한줄기 흘리지 않은 요원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공격에 나선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요하임은 그림자가 더 짙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대체 누구지? 왜 한국에서 여기까지 와서 재판관들과 싸우고 있지?’
그의 지식으로는 상대의 정체를 위원회와 연결시킬 수 없었다.
‘아니,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인가.’
요하임은 선택을 내려야 했다. 예상과 달리 싸움은 일방적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 저 요원도 재판관들도 싸우느라 정신이 없다. 그렇게 보였다.
그러니 지금 자신의 거취를 결정해야 했다.
재판관들의 제안을 생각한다.
‘그 차원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가야 하는가?
그들은 말했다. 그곳에서 준비하는 마지막 의식에 참석하여, 신의 잠을 깨우는 데 일조하고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남으라고. 그리하여 영생을 보장받으라고.
답은 금방 도출되었다.
‘믿을 수 없어!’
그동안 양부에게 줄기차게 요구했던 교단의 비밀을 들었음에도.
요하임은 그 내용을 신뢰할 수 없었다.
특히 태초의 종족에 대한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이 세상을 꿈꾸고 있는 자들. 언젠가 거짓된 세계를 무너뜨리고 기억 속에서 영생을 부여할 구원자.
요하임이 숭배하고 신심으로 섬겨 왔던 신격.
그런 신들이···.
‘행복한 꿈에 빠져서··· 목덜미에 피가 쏟아져 내리는 것도 모른다고? 그것도 모르고 잠이나 자고 있단 말인가?!’
심지어 거짓된 세상에 사는 자들이 신혈을 채집하여 화폐로 쓴다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니, 그런 수준을 넘어 불경한 지껄임이다.
산 채로 피를 빨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요하임이 떠올린 것은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이었다. 요즘은 뱀파이어도 안 하는 짓을 지속하는 미개한 자들 말이다.
어디선가 본 장면. 삐쩍 마른 소 목덜미에 사람들은 구멍을 뚫는다. 핏줄기가 터져 나오면 한 방울이라도 흘릴 새라 더러운 플라스틱 통을 바짝 들이대고 피를 담는다. 채혈이 꼭 도축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죽지 않을 정도로 뽑은 다음에는 상처에 진흙이나 뜨거운 재를 발라 응고시킨다. 그리고 다시 피가 차오를 때까지 기다린다. 그 후에 다시 목에 구멍을 뚫고···.
‘말도 안 돼! 태초의 종족이 그런 식으로 소모당하고 있을 리가 없다!’
눈을 희번득 치켜 뜨며 생각한다.
‘그건 신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가축’에 가깝지 않은가!’
혐오스럽다.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려는 시도조차 혐오스럽고 역겹다.
‘거짓말이야.’
요하임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믿음에 명백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믿고 싶은 것은 믿고, 믿고 싶지 않은 것은 불신한다.
그가 사는 세상을 거짓이라 단정 지었던, 현실이라 믿을 수 없었던 어린 시절처럼 그는 재판관들의 말도 믿지 않기로 했다.
그런 가축들은 자신이 섬기는 신이 아니니까. 신일 리가 없으니까.
그렇기에 요하임은 도망가기로 했다.
=안 돼!=
양부를 들고 내빼는 요하임을 보고 이단재판관들은 경악했다. 그들이 상정한 반응에 도주는 없었기에. 애타게 갈구하던 진리를 알려주고 영생의 보장이나 마찬가지인 제안을 했는데, 왜?!
그래서 당장 요하임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민준이 허락하지 않았다. 바로 몸에 감겨 드는 그림자를 기겁하며 떨쳐낸다.
결국 요하임의 도주를 제압한 것은 그들이 잊고 있던 존재였다.
***
=!=
잠시 얼이 빠져 있던 하은성은 머릿속에 울린 민준의 호통에 정신을 차렸다.
경악과 공포는 빠르게 분노로 바뀐다.
‘저 외계인들, 날 죽인 새끼랑 연관이 있구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외계인들 좋은 일 시킬 수는 없었다. 저 익숙한 광체를 넘길 수 없다는 뜻이다.
‘어딜 도망 가!
민준은 분명 이렇게 말했다. ‘누가 도망칠 것 같으면 대뜸 불을 뿜어 버려! 어차피 그걸로 죽을 놈들은 아니니까!’
흐으으읍!
가슴을 부풀린 하은성은 예전 연습한 감각을 떠올렸다. 브레스를 입 밖으로 뿜어본 적은 없지만 그 직전 단계까지는 여러 번 훈련을 했기에.
공기가 한계까지 응축되고.
화아아아앗!
힘껏 뿜어낸 순간.
“!”
브레먼하펀의 밤이 잠시 절단되었다.
지상에서 솟구친 열선이 어둠을 꿰뚫는다. 검은 하늘이 조각난 사이로 낮이 스며들었다. 음영이 사라진 도시가 주홍색으로 빛났다. 그 중심에 화염 폭풍이 이글거리며 몰아친다.
콰르르르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불꽃은 대지와 수평을 유지하는 대신 축이 위로 살짝 기울어 있었다. 이 도시의 시민들에게도 불을 뿜은 당사자에게도 행운이었다. 도시를 관통하는 대신, 불꽃은 아무도 없는 하늘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그렇기에 대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하지도 않았고 민준이 노리는 머리를 태우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당황했다.
민준과 재판관들의 공세가 잠시 멈춘다. 요원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용을 보았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하은성이었다.
=이, 이게 뭐야···.=
이 정도로 세게 태우려고 한 게 아닌데, 집의 절반이 통째로 날아가버렸다!
벽이 무너지고 브레스의 둥근 윤곽을 따라 불꽃이 이글거린다. 그 안쪽엔 철골이 녹아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요하임은 머리를 움켜쥔 채 주저 앉았다. 도주를 막는 목표는 달성한 셈이나, 과정이 너무 과했다. 조준 실패가 천만 다행일 정도로.
민준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 투덜거림에는 수형자의 것이 아닌 감정도 섞여 있었다.
‘백 살도 못 넘긴 녀석 불질이 왜 저렇게 뜨거워? 합사시켰다간 큰일 낼 놈이군.’
그의 사고는 순식간에 수형자로 돌아온다. 재판관들이 얼어붙은 사이, 주저 앉은 요하임을 향해 그림자 채찍을 날렸다.
=아닛?!=
이어지는 비명.
“으아아악!”
예리하게 벼린 그림자는 주교의 팔을 잘라냈다. 들고 있던 머리가 허공에 솟구친다.
짧은 포물선을 그리고.
데구루루.
외계인이 몸을 날린다. 요하임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닥에 뒹구는 머리를 가로채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민준이 막아서고, 역시나 머리를 향해 발사한 그림자 자락을 다른 재판관이 막아낸다.
그들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누구 하나 요하임을 신경 쓰는 자는 없었다. 오히려 암묵적으로 지금 상황을 반기고 있었다. 주교급 성직자가 팔이 잘렸다고 죽을 것도 아니고, 움직임을 봉했으며 머리도 손아귀에서 빼 냈으니까.
아니면, 그의 생사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
“······!”
요하임은 자신이 흘린 피 속에 엎어져 버둥거리다가 이변을 알아차렸다.
‘······왜 회복되지 않지?’
그 정도 되는 성직자라면 당연하게 나타나야 할 현상이 보이지 않는다. 팔이 잘렸지만 절단면은 금방 아물 터였다. 민준도 그걸 알기에 자른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상처는 심각한 상태였다. 피가 콸콸 쏟아져 내린다.
요하임은 그제서야 신성 마법의 주문을 외운다. 하지만···.
‘?!’
처음 이능력을 각성한 후로 항상 몸 속에 머물던 그 힘이 이제는 느껴지지 않았다. 요하임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의 시도가 되풀이되고.
그는 머릿속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추워···.’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통해 엄청난 양의 피가 빠져나간다. 몸이 얼음장처럼 식어 가기 시작했다. 눈 앞이 흐릿해진다. 섬뜩한 추위가 사방으로 스며들었다.
흔들리는 시야 너머 내팽개친 양부의 머리가 보인다. 옆으로 엎어져서 붉은 선혈 속에 뺨을 적시고 있다.
사제는 아득한 고통 속에서 생각한다.
‘다 거짓말입니다. 그렇지요? 아버지!’
총대주교는 자식처럼 품어 키우던 주교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매우 잔혹하게.
요하임은 그것을 광기에 물든 자가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사고라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뚜렷한 목적에 따른 것이었다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이 정신병자의 충동적인 망상이 아니라 영생을 보장받고 싶은 종교인의 열망이었다면?
아비가 영생을 얻고자 자식들을 죽인 거라면?
‘저들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정말로 미치기는 했던 겁니까?’
아니, 사실일 리 없다.
필사적으로 부정한다. 모두 거짓일 뿐이다.
그러는 사이 고통이 천천히 멀어지고, 둔탁해지다가, 마침내 요하임을 포근하게 감쌌다.
그제서야 그는 극도의 피곤을 느낀다.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자고 싶다.’
이제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푹 자고 싶었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혹시라도 꿈을 꾸게 된다면 그 꿈 속에서 다시 잠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저, 악몽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눈 밑에서 어둠이 찰랑거리며 올라온다. 요하임은 그것에 저항하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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