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94
94. 부부싸움은 칼로 목베기 (1) >
“···이상으로 진술을 마칩니다. 모든 내용이 사실임을 제 신앙을 걸고 맹세합니다.”
위원회가 차원 #77-102이라는 분류코드를 붙인 세계.
엘라후-프라가 교단 최고위급 성직자들은 증언 내용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진술자는 지구에 파견되었던 이단재판관이다. 총 세 명이 파견되었으나 돌아온 것은 두 명. 회수 지시를 내린 ‘머리’는 가져오지 못했다.
그들이 빈 손인 것을 본 공의회 성직자들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그런데 사정청취가 시작되고 나온 진술은 상상을 까마득히 초월해 버리는 것이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간에.
“정리해 봅시다.”
공의회 구성원 중 최연장자가 입을 열었다.
“재판관, 그대는 정말 확신합니까? 지구에서 마주친 존재가··· 우리가 섬기는 분들이 보낸 화신(化神)이라고?”
재판관은 차분한 어조로 답한다.
“저는 이미 제가 경험한 모든 것을 가감 없이 말씀드렸습니다.”
심지어 신앙에 걸고 참이라 맹세했다.
만약 그가 신에게 맹세했다면 말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졌을지도 모른다. 신과의 약속을 어긴 사제가 힘을 잃는 장면은 목격된 적 없으나, 신앙에 대한 맹세를 깬 사제가 신성력을 쓰지 못하게 되는 사례는 자주 발견되므로.
전자는 초월적인 존재를 향한 약속이며, 후자는 자신의 믿음을 향한 약속임을 감안하면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따라서 몇몇 연구자들은 신성력이 신적 존재의 은혜가 아니라 무언가를 간절하게 믿는다는 조건이 갖춰졌을 때 스스로 발현하는 평범한 이능력이라고 주장한다. 정작 그리 주장하는 자들 중 신성능력자가 없기에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은 짐작합니다. 하지만 증거가 있습니다.”
여기 모인 사제들이 그의 진술만 듣고 화신을 바로 인정할 수는 없을 터다.
그래서 재판관은 증거를 내보였다. 뚜렷하고도 확실한 증표를.
“제 신앙의 대상은 이미 확장되었습니다. 저는 지구에서 영접한 화신이 우리의 신에 닿았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따라서 제가 신께 바치는 믿음과 동등한 신앙이 그 분께도 향합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화앗!
재판관의 손이 성스러운 빛을 발한다.
그걸 본 주교들은 침음을 흘렸다. 재판관은 이미 신앙고백을 했다. 따라서 그가 섬긴다고 선언한 대상이 엘라후-프라가의 신과 관련 없다면 신성력을 잃어야 마땅했다. 신이 배교자에게 은총을 허할 리 없기에. 하지만 그는 여전히 힘을 보유하고 있다.
결국 사제들이 이 상황에서 화신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랬다간 그릇된 믿음을 품은 자도 신성력을 쓸 수 있다는 식으로 교리를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몇몇 불신자가 주장하는 바처럼, 신성력은 신의 실존과는 관련이 없고 필멸자의 믿음에 근거한다는 말을 뒷받침하는 꼴이 되리라.
그리고 재판관은 마지막 남은 의혹마저 털어버리겠다는 듯 말했다.
“다시 신앙을 걸고 한번 맹세합니다. 저는 엘라후-프라가에 잠든 영광된 존재 외 그 어떤 신도 알지 못합니다.”
여러 신의 존재를 동시에 긍정하는 천인공노할 배교자도 아님을 당당하게 선언한다.
그 후로 며칠 밤낮 공의회에서는 열렬한 교리토론이 이어졌다. 결과는 모두가 예상한 대로였다.
“만장일치 하에, 엘라후-프라가 공의회는 교령(敎令)을 일부 수정합니다.”
이민국 계약요원이라는 위장신분을 뒤집어쓴 수형자가, 한 교단에서 숭배하는 화신의 격을 얻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공언한 뒤, 주교들은 이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들의 눈이 기대감과 환희로 반짝였다. 화신 강림은 교단 성립 후 처음 발생한 대사건이었으니 당연했다.
“바로잡아야 할 것이 많겠군요.”
“화신께서는 왜 하필 위원회의 종이자 교화가 필요한 죄인의 형태로 이 세계에 거하신 걸까요? 현신하신 장소도 그런 머나먼 변방 차원이고···.”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비참한 형태로 세상을 살피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복되도다,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현신의 시기도 절묘합니다. 우연일 리 없습니다. 잠들어 계신 신들의 잠이 옅어지는 과정에 함께하는 기적인 게지요.”
일단 가장 먼저 합의할 부분이 무언지는 명료했다.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를 섬겨야 할 것인가? 신에게 바치는 기도를 화신에게도 따로 바쳐야 할까? 예배 형식에도 변화가 필요한가?
재판관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제가 그런 질문을 드렸습니다만··· 화신께서 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이어진 말을 들은 주교들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화신이 본래 대꾸한 내용은 훨씬 짧았지만 재판관의 품위 있는 번역을 거친 그 문장은···.
– 너희들이 날 어찌 섬기든 나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주교들은 난상토론을 시작한다. 그 결과 도출한 결론은 이런 것이었다.
“필멸자의 기준으로 신의 의도와 생각을 가늠할 수는 없지요. 우리가 오랜 세월 유지한 예배 방식은 선지자께서 알려주신 것이 아니라 교단에서 스스로 발전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런 형식 따위는 상관없다고 친히 알려주신 것이로군요.”
“신의 눈으로 우릴 보면 그들이 모랫바닥에 흘린 핏방울에 몰려드는 개미나 마찬가지겠지요. 그 흔적을 중심으로 개미들이 빙글빙글 돌거나 다른 곤충을 물고 와 배를 가른다고 한들, 신격이 거기에 큰 의미를 두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형식보다 본질이 중요하다는 가르침 아닐까요? 저희의 순수한 신앙 말입니다.”
“더군다나 이어서 하신 말씀 요지는··· 그런 장면을 보여드린다고 해서 그분들이 악몽을 꾸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가장 끔찍한 악몽의 재료는 이미 신의 기억 속에 있으니.”
수형자의 말 한 마디 때문에, 긴 시간 전승되어 온 엘라후-프라가 교단의 기괴한 예배형식이 근본적으로 개혁될 조짐이 보였다.
그들의 토론이 잠잠해질 무렵 재판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재판관은 화신에게 교단의 모든 것을 낱낱이 고하여 바쳤다. 그들이 얼마나 충실하게 신을 모셔왔는지를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화신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인 것은 교단이 지금까지 열심히 달란트를 빼돌려서 모아 왔으며, 다가오는 ‘사이클’에 맞춰 신들을 깨울 준비를 하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여기까지 들은 화신께서 제게 말씀하시되···.”
***
“그건 좀 보류해 두는 게 좋겠는데.”
이미 폐가나 다름없어진 브레먼하펀의 은신처에서 민준은 재판관들에게 그리 말했다. 머릿속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지금 그가 자각하는 내면 세계를 묘사하자면, 몸을 반으로 찢어 놓았다가 억지로 다시 봉합한 느낌이었다. 갑자기 돌아온 기억과 수형자로서의 자아가 제대로 맞물리지 못하고 엇갈린 채 돌아간다.
다만 근본이 되는 자아는 여전히 수형자다. 그러니, 그는 민준이다.
‘돌아온 기억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고작 몇 개의 장면과 개념만 돌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에는 큰 차이가 생겼다.
일단 손바닥에서 횃불처럼 빛을 내는 달란트가 그 증거였다. 그리고 재판관들 이야기를 듣자 마자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솟구치는 ‘직감’ 역시, 엉뚱한 방향으로 엇나가던 수형자의 예감과 달랐다.
‘이건 기억과 경험에 근거한 거다.’
그렇기에 민준은 확신했다.
저들의 방법은 잘못되었다.
그걸 알려준 선지자가 최초에 잘못된 방법을 알려준 것인지, 아니면 시기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시간이 흐르면서 기록이 변질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식으로는 잠든 이들을 깨우지 못한다.
민준은 두통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 의식은 잠시 미뤄두라고.”
재판관은 당황하다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그리 공유하겠다고 말했다.
그리자 민준은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에서 가장 신경 쓰였던 부분을 지적한다.
“그때를 위해 엘라후-프라가에서 조금씩 빼돌렸다는 달란트 말이야.”
이전까지 민준은 우주화폐에 집착하는 자신의 성향이 당연한 것이라고만 여겼다.
수형자이니까. 그리고 달란트는 자유를 약속하는 유일한 열쇠이니까.
설마하니 그것이 자신의 피, 혹은 잠들어 있을 동족의 피이기 때문에 그랬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착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민준이 갈구한 것은 수형자 계좌에 찍히는 ‘숫자’로서의 달란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달란트 실물을 욕망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본래 그의 것이기에. 그들의 것이기에.
본래 자신들에게 속한 것을 위원회에게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얼마나 모았지?”
대답을 들은 민준의 두 눈이 커졌다.
재판관은 허둥지둥대며 말한다.
=화신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바치겠습니다! 당장 공의회에 보고를 해서···!=
“아니, 잠깐. 그런 거액의 달란트를 도약선으로 옮겼다가는 위원회가 바로 알아차릴 거야. 방법은 좀 생각을 해 봐야겠군.”
이 자리에서 계속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위험했다. 위원회는 그들이 접선한 사실을 절대 알면 안 된다. 흔적을 지운 뒤 민준과 재판관들은 말을 맞추기로 한다. 민준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신성 마법을 펼치는 대신 죽어 버린 요하임이 알리바이를 보완할 것이다.
“난 너희들이 도착하기 전 요하임과 싸워서 머리를 손에 넣은 거야.”
=저희들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남은 것은 그의 시신 뿐이었던 거군요.=
일단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으니 더 많은 것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민준은 그것까지 확인한 뒤 저들에게 정확한 지침을 내리기로 했다. 지금 태도를 보니 무슨 지시든 충실하게 따를 기세였다.
‘대체 선지자의 정체가 뭐지? 결과적으로 저들이 ‘태초의 종족’을 신으로 섬기게 유도한 행동은··· 지금 내게 유리한 상황으로 이어졌잖아. 마치 미래를 보기라도 한 듯.’
선지자(先知者)라는 호칭에 걸맞게도 말이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좀···.’
일단 이대로 헤어진 뒤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자는 민준의 말에 재판관은 이렇게 답했다.
=그렇다면 저희 중 한 명이 남아 당신을 몰래 모시겠습니다. 총대주교의 시신을 계속 추적한다는 핑계를 대고 말입니다. 저희 교단은 공식적으로는 시신 행방을 모르는 상태이니까요.=
차원간 통신은 위원회에게 도청당할 염려가 있다. 하지만 사제 한 명이 이곳에 남으면 그들에게 절대 들키지 않는 방법으로 다른 사제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이 가능했다.
“유체이탈로 엘라후-프라가에서 만나면 된다는 거군.”
=네, 워낙 광활한 곳이라서 미리 장소와 시간을 정하지 않으면 서로 마주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정해 둔 표식이 있습니다.=
영혼 상태로 엘라후-프라가에 진입하는 방법 역시 나중에 자세히 물어 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민준의 시선이 초조한 표정의 하은성에게 닿았다.
그들 대화가 대충 마무리되는 것을 알아차린 드래곤이 급하게 외쳤다.
=자, 잠시만요!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용이 질문하고자 벼르던 것은 민준 역시 의문을 품은 부분이었다.
=그 단검!=
영체인 하은성 목에 박힌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검을 재판관들은 들고 있었다. 살해범은 분명 드림랜드 교단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거, 지구인들 중에도 가지고 있는 사람 있죠? 누구에요?=
의아해하는 그들을 향해 하은성은 설명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 채, 그 검을 든 자를 지구에서 목격한 적 있다는 정도로.
하지만 재판관들은 고개를 저었다.
=성검은 우리 종족 외에는 사용이 허락되지 않는 성물이외다. 설사 레파탐 족이라고 해도 알맞은 자격을 갖추지 않으면 취급이 금지되며, 애초에 이런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모차원 밖으로 유출도 불가능하오.=
그러더니 하은성의 기대에 어긋나는 대답을 계속 내놓는다.
=신룡(神龍)이여, 그대가 착각한 것으로 보이오. 방금 죽음을 맞이한 저 자 이후 이 차원을 방문한 레파탐 족은 우리가 처음이오. 그러니 몇 개월 전 성검을 들고 이곳을 활보할 수 있었던 자는 전 차원을 통틀어 존재할 수 없소.=
하루 사이에 정신지체 비만 드래곤에서 신이 키우는 용으로 급격한 신분상승을 했지만 하은성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싸늘하기도 하고 아리기도 한 분노 속에서 그는 소리친다.
=그럴리가 없어요! 그 자는 분명···!=
그러자 잠자코 듣고 있던 민준이 손을 내저었다.
“남은 이야기는 차차 하자고. 너희 셋 중에 누가 날 따라올지 빨리 정해. 비행기 타고 같이 움직일 수는 없으니 어디서 다시 만날지 알려주지.”
다음은 하은성을 보며 말한다.
“네 이야기는 나도 좀 신경이 쓰이는데. 널 죽인 범인, 어떻게 생겼지?”
=어떻게 생겼냐면···.=
대답하려던 하은성은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뭐야? 어떻게 생겼냐니까?”
하은성은 죽고 나서 오늘에야 처음으로 깨닫는다.
그가 사망한 순간을 떠올리는 것은 절대 유쾌한 일이 못 되었고 의도적으로 피해왔던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은 가끔씩 그를 찾아와 할퀴곤 했다. 방금 전 외계인들의 검을 본 순간처럼.
그런데, 짧은 회상 속의 감각은 항상 똑같았다. 허겁지겁 도망치는 자신. 여유롭게 따라오는 살인범의 그림자. 날아드는 날카로운 칼. 나지막한 속삭임.
하지만 그 중··· 어디에도 없다.
=어떻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지?=
그는 아연실색하여 중얼거린다.
=말도 안 돼. 나··· 봤는데. 분명히 봤는데!=
분명 봤음에도 불구하고 하얗게 도려낸 듯한 부분이 남아 있었다.
하은성은 자신을 죽인 범인의 얼굴을 도무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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