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97
97. 부부싸움은 칼로 목베기 (4) >
***
지하실 문을 연 순간 민준은 어색한 장면을 보았다.
차가운 바닥에 앉은 외계인 사제. 가부좌 비슷한 것을 튼 채 명상 중이다. 어쩌면 기도 중일 수도 있겠다. 여기까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
그런데 TV를 켜 놓은 채 기도하는 사제가 있던가?
틀어 놓은 것도 왜 하필··· 오크 짝짓기 예능을? 그것도 폭력성과 선정성으로 악명 높은.
‘뭐지? 극기훈련?’
관중이 찬 야구장에서 활쏘기 훈련을 하는 양궁선수들처럼, 어떤 유혹이나 방해도 이겨 내기 위한 정신수련 중인가 싶었다.
윰투스라는 이름의 재판관은 무아지경에 빠졌는지 민준이 들어온 것도 몰랐다. 혹시 유체이탈 상태인지 살폈지만 다행히 영혼은 몸 속에 잘 있었다.
딱!
손가락을 튕기자 공기 밀도가 바뀐다. 단순히 소리만 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집중이 깨지는 걸 느끼며 윰투스가 눈을 떴다. 그리고 민준을 발견하고는 호들갑 떨며 몸을 조아린다.
민준은 화면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런 게 (훈련에) 도움이 되나?”
=네! 물론입니다. 언어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만··· 다들 어찌나 열심히인지. 보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뿌듯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동문서답인 동시에 범상치 않은 고백이었다.
마침 화면에서는 한 명의 미녀 오크를 두고 남자들끼리 난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아, 참전한 용사 중 방금 대리석 테이블을 깨서 휘두르는 저 치는 여자 같기도 하다.
옛날에 저러고 살았다고?
‘예삿놈이 아니었군.’
민준은 더이상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윰투스의 과거는 묻어둔 채 민준은 내려온 목적을 전한다.
엘라후-프라가의 고위 사제는 악몽의 권능을 깨우친다. 태초의 종족이 잠든 곳으로 가서 달란트를 채취하는 동시에 그들의 꿈을 끔찍하게 물들이기 위한 능력. 민준은 그 권능을 지금 여기에서, 자신에게 쓰도록 요구했다. 일종의 수면최면요법을 시도하려는 것.
=물론 가능합니다.=
“그럼 바로 해 보지.”
윰투스는 총대주교처럼 신성력이 폭주하는 상태가 아니므로 잠에 든 채 시도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민준은 불을 일으켜 하은성이 쓰던 슬라임 침대를 소독했다. 여기 머무는 동안 그것과 물아일체 상태였는지 비늘 자국이 선명했다. 준비를 마친 뒤 몸을 눕힌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재판관 손에서 빛이 발한 순간 민준은 스스로를 수마(睡魔)의 늪에 빠뜨렸다.
***
“누나, 저 왔어요.”
“왔니? 잠깐 앉아서 기다려 봐. 지금 하는 거 거의 다 됐어.”
독일로 돌아오고 며칠 뒤 하은성은 캐시의 초대를 받았다. 점심이나 간단하게 같이 하자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해외체류 후 가뜩이나 금단증상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엌에 가득한 향기를 맡으며 하은성은 행복해졌다. 캐시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인류의 축복을 쥐고 요리 중이었다.
“현관에 저건 다 뭐에요?”
수북하게 쌓인 종이 더미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대부분 뜯지 않은 봉투로 보였다.
집주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다 버릴 거야. 해외 우편이라서 반송하기도 귀찮고.”
독일에서 해룡의 레어를 방문했던 일은 예상치 못했던 상황으로 이어졌다. 수륙 양쪽 생활이 가능한 미녀를 본 드래곤의 권속, 다핀 족들이 그날 이후 편지를 보내오기 시작한 것. 주소는 어찌 알았는지 답장이 없어도 끊임없이 보내오는 통에 캐시는 요즘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내용도 복사한 듯 거의 똑같아서 ‘당신의 알지킴이가 되고 싶습니다.’ 따위의 문장으로 끝났는데, 위키피디아에서 검색해 본 캐시는 그것이 청혼 문구라는 걸 알고 기겁했다.
그녀의 한탄을 들으며 하은성 역시 당황했다. ‘아니··· 반하는 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근데 그게··· 그······ 가능하긴 한가?’ 물론 의문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캐시가 화낼 것 같았으니까.
“자, 일단 완성.”
첫 플레이트는 만다린 소스로 맛을 낸 안심 요리였다. 한 점 입에 넣은 하은성은 요즘 머릿속을 괴롭혔던 고뇌를 모두 잊었다.
그의 행복지수를 잔뜩 올려 놓은 캐시는 곁에 앉는 대신 불 앞으로 돌아갔다. 그리곤 미리 손질해 놓은 큼지막한 그루퍼 한 마리를 통째로 튀기기 시작한다. 생선은 안 먹는 그녀가 오로지 손님 맞이를 위해 준비한 것이다. 기름 끓는 고소한 소리가 음악처럼 울렸다. 오늘의 테마는 중식인가 보다.
‘와, 저 큰 물고기가 통째로 들어가네.’
요리하는 모습을 구경하던 하은성이 문득 의문을 품는다.
‘근데 저 후라이팬이 원래 저렇게 컸었나?’
그때 캐시가 등을 돌린 채 뭔가 말했고, 그 생각은 바로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독일 관련해서.”
오늘 초대받은 이는 하은성 혼자다. 답을 줄 수 있는 또 한 사람은 요즘 집에 틀어박혀 통 나오질 않기 때문이다. 무슨 고민이 있는지 후라이팬을 봉인하는 것도 까마득히 잊은 것으로 보였고, 덕분에 캐시가 잘 써먹고 있긴 하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브레먼하펀에서 내가 바닷속에 들어간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녀가 알기로 이번 일의 목표는 요하임의 신변을 확보하는 것이었는데 정작 귀국길에 사제는 동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임무가 실패한 것도 아니란다.
민준에게 물어봤지만 나중에 알려주겠다며 입을 꾹 다물었고, 살인자 생각 때문에 심경이 복잡했던 하은성도 언급을 피했다.
“아, 그게 말이죠···.”
하은성은 거기에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설명할 자신도 없었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민준이 비밀 엄수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사제들과 민준이 주고받은 대화를 다 이해하지도 못했다. 다만 ‘위원회’라는 단어는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지구 밖 세상에 관심이 없어도 모르기 힘든 조직이니까.
그렇기에 그는 당황했다. 아니, 저 사람은 분명 한국에 고용된 요원 아닌가? 그런데 왜 외계인을 위해 일한다는 소리가 나오지?
하은성의 경악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조화인지, 한창 치고 박고 싸우던 재판관들이 갑자기 민준을 신처럼 숭배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러고 보니 자신은 민준의 배경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하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외계인 연합체와 끈이 닿아 있을 뿐만 아니라, 방금 전까지 살벌하게 싸우던 성직자들을 순식간에 신봉자로 만들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사람이··· 하필이면 자기를 노예취급 하는 현실이.
하은성은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누나. 요원님··· 꽤 부자죠?”
캐시는 즉답을 피했다.
“그건 왜 물어?”
“혹시 그 비결이, 계약요원 말고 이런 저런 일을 겸업하는 건가요? 투잡, 쓰리잡 같은.”
예를 들어 위원회를 클라이언트로 삼고 활동한다거나, 라는 말은 속으로 꾹 삼켰다.
더군다나 21세기 문명인이 사람을 자연스레 노예처럼 대하는 태도도 이상했다. 종족을 떠나서 누군가를 사유재산이라고 선포하는 당당함은 오랜 세월 같은 일을 반복한 이의 언행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현대 한국에서 그런 전근대적 행위가 벌어지는 장소라 해 봤자···.
“혹시 부업으로 염전노예사업에 종사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에이, 민준 씨 그런 거 극혐해.”
“······이상하네.”
실은 노예사업이 아니라 축산업에 종사했다는 걸 하은성은 살았다가 다시 죽어도 모를 것이다.
말을 돌렸던 하은성은 캐시의 재촉에 시달렸다.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각색한 버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뭐야. 그러니까··· 결국 민준 씨가 노리던 사제는 현장에서 죽었다는 거잖아? 총대주교 시신도 발견하지 못했고?”
민준은 세간에 알려질 이야기 정도만 캐시에게 공유하라고 당부했다. 너무 많은 것을 알면 그녀가 위험해질 수 있다면서 말이다. 그 위협의 근원이 대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복기하던 캐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좀 이상한데. 그런 고위 성직자가 고작 팔이 잘려서 죽는다고? 과다출혈로?”
그녀의 상식으로는 재생이나 다시 붙는 것은 무리더라도 바로 상처가 아물어야 마땅했다.
그때.
=아마, 신앙을 잃었을 겁니다.=
그녀가 잡고 있던 후라이팬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가 인류의 축복과 대화를 시작한 걸 알고 하은성은 다시 음식에 집중했다. 정부는 저 보물을 가정 당 하나씩 보급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독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진 것이지요. 불쌍한 아이 같으니. 그때문에 신성력을 잃는 성직자 사례는 많습니다.=
캐시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그래? 딱히 개종을 하거나 신을 모욕한 것도 아닌데··· 그냥 생각이 바뀐 것만으로도 능력이 사라진다고?”
=신성력의 특이점입죠. 그 힘이 신의 은총이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생각하는 학자들은 신성력의 비밀이 신이 아니라 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고(思考)가 힘을 결정한다는 건, 다시 말해 뇌가 그걸 결정한다는 거니까요.=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 했었지?”
=네. 인간 예를 들면, 종교적 사고가 쾌감 반응을 관장하는 뇌 구역과 연관 있다는 이야기 기억하시죠? 그때 자극되는 감정이 신성력에 영향을 끼친다는 게 그 학파 이야기입니다. 혹시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면 추천 드릴 책이 있습니다. 차원 #91-565의 종교학자이자 생물학자인 뇨르슈 오마라가 저술한 ‘믿음과 신성: 뇌과학적 관점에서 이능력을 말하다’를 읽어 보십시오. 내용이 꽤나 충실합니다만, 지구에 번역이 되었나 모르겠네요. 여하튼, 신앙을 잃은 순간 뇌에서 그것에 상응하는 반대 작용이 발생한다는 게 그들 주장입니다. 그래서 신성력까지 잃는 거지요. =
캐시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사람이 하루 24시간 내내 종교적 사고를 하는 건 아니잖아. 신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이능력을 잃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신을 생각하지 않을 때가 아니라, 신을 믿지 않게 된 순간 나타나는 뇌내 활동입니다. 여담입니다만, 그 책에서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 생각나는군요. 다시 인간의 예를 들자면, 그들이 불신을 느낄 때는 앞뇌섬엽이 양측 모두 활성화되지요. 그런데 그 과정은 어떤 특정한 감정을 느낄 때 반응과 매우 흡사하다고 합니다.=
“그 감정이 뭔데?=
후라이팬은 짧은 단어로 답했다.
=혐오.=
***
“그러니까··· 저 갸날픈 여편네가 곽도출이 모가지를 장검으로 날려 버린 다음 바로 쓰러졌다 이 이야기야?”
“네, 맞습니다.”
현장으로 달려온 계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큰 한숨을 쉬었다. 박정팔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십여 분 전, 바로 앞에서 신변보호 대상이 살해당하는 걸 목격한 오크 형사와 자경단원은 바로 사격으로 대응하여 범인을 제압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남편을 잔혹하게 죽인 아내는 그림과 같은 우아한 자세로 땅에 내려섰다. 그 직후.
– 꺄아아아아아악!
모골이 송연한 비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금속성 충돌음.
여자는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흥건하게 고인 피와 남편의 시신을 보며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자기가 저질러 놓고도 공포에 물든 채 절규하는 기이한 장면이었다.
– 털썩!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여자는 쓰러졌다. 바로 달려가서 수갑을 채우던 정팔은 더욱 기괴한 상황을 목격했다.
“팔이랑 다리 뼈가 완전 아작이 나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들었어.”
“겉으로 드러난 피부가 보라색으로 변하고 퉁퉁 붓더군요. 내출혈 같았습니다.”
정팔은 한 가지를 더 짚는다.
“그런데 쓰러지기 전의 그 움직임, 평범한 사람이 보일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검기만 없었지 제가 봤던 그 어떤 웨폰 마스터 보다도···.”
계장이 피식 웃었다. 서류에 의하면 그녀는 이능력자는커녕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서 병원을 집처럼 들락거리던 사람이다. 그 부분을 지적하며 계장이 비아냥거렸다.
“너, 일 제대로 못했다고 까일까봐 부풀리는 것도 적당히 해야 먹힌다.”
곽도출은 정팔이 보호하던 중 죽었다. 범인을 과대평가하여 업무 과실의 지적을 피하려는 술책이 아니냐는 뜻이었다.
어차피 블랙박스와 CCTV를 까보면 다 판명될 부분인데 괜히 저렇게 사람 심기를 긁는다. 여기서 욱하면 또 그것을 걸고 넘어질 생각인 거다. 명백한 시비.
하지만 정팔은 그 술책에 넘어가지 않았다. 쓰레기 같은 작자가 똥 뿌린다고 같이 달려들면 내 몸만 더러워질 뿐이다. 똥은 피하는 게 상책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대꾸하지 않고 있는데.
우웅!
범인은 경찰 감시 하에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가장 먼저 챙겨야 할 중요 증거는 아직 팽개쳐진 상태였다.
땅에 떨어진 검이 소리를 냈다.
우웅! 우우웅!
물론, 멀쩡한 검이 혼자서 공명하지는 않는다.
저건 에고 소드다.
“요원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사람 목을 깔끔하게 자르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다. 정팔의 증언처럼 신묘한 움직임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평범한 여인이 그런 일을 해낸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검에 손대지 않았다. 혹시 저주라도 걸려 있는지 모르니까. 예를 들어, 그것을 쥔 자가 광기에 휩싸인 다음 자멸하는 종류로.
그런 이유로 경찰청 계약요원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던 중.
“계장님, 지금 도착하셨습니다.”
드디어 현장에 얼굴을 내민 마법사는 검을 살피더니 이렇게 말했다.
“······뭐야, 겨우 이것 때문에 한밤 중에 불렀어? 난 또 무슨 당장 사람 죽어 나가는 상황인 줄 알았네. 겁들은 많아 가지고.”
그는 투덜거리며 장담한다.
“보니까 영혼이 봉인된 것도 아니고 싸구려 인공지능 박아 넣은 저급품인데? 영체 탐지 마법에 아무 반응도 없어.”
“그럼 저주 같은 건?”
“없어요, 그딴 거. 저주는 무슨. 하다 못해 기본적인 보조 마법 하나 걸려 있는 게 없네.”
계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 맛 간 이유가 저 칼은 아니라는 소리구만.”
감식반이 그제서야 증거를 챙기기 위해 다가왔다. 계장은 거기서 시선을 떼고 폴리스 라인 밖에서 취재 경쟁을 벌이는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눈살을 찌푸린다.
“이거 원, 개떼같이 몰려들었네.”
한밤 중 주택가에 총성과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단지 그것 때문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몰려올 리는 없고, 분명 중간에 정보가 누출된 것이다. 유명한 연예인들이 죽어 나갔다는 이야기가.
간신히 진화된 스캔들은 약간의 불씨만 튀어도 다시 거세게 타오를 참이었는데, 그 와중 이런 사건까지 터졌으니 언론에서는 안달이 났을 터.
계장은 정팔에게 이죽거렸다.
“그 여편네가 아주 지독한 저주라도 걸렸길 기도하라고. 유명 배우 모가지를 눈 앞에서 날린 실책을 덮으려면. 언론이 냄새라도 맡아 봐. 찢고 씹고 만신창이를 만들어 놓을 걸?”
계장은 오크인데다가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는 정팔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정팔은 굳이 맞불 놓는 대신 씹기로 했다. 그러자 상관이 또 한 마디 던지려 했지만···.
푹!
“···어?”
계장은 더이상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폴리스 라인 너머 웅성거림도 잠시 멈춘다.
모두의 시선은 에고 소드를 감정한 마법사에게 꽂혀 있었다. 그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아래를 본다.
복부를 뚫고 나온 날카로운 칼날.
파지직!
옷 속에 숨긴 방어 부적도 속절없이 뚫린 듯, 검날 주변 스파크가 튀고 파르스름한 불꽃이 흩날렸다. 마법사는 부릅뜬 눈으로 그것을 노려보다가 이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으··· 으아아!”
기자들 사이 비명이 짧게 울렸지만 곧이어 터지는 플래쉬 소리에 묻혔다. 각자 카메라와 눈동자로 방금 벌어진 사건을 선명하게 담는다.
“미, 미친··· 저 새끼 잡아!”
깔끔한 동작으로 장검을 뽑아낸 감식반 조사관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끝
***
윰투스의 인도에 따라 민준은 악몽에 잠긴다.
그는 꿈 속에서 먼 과거를 보았다. 떠올리기 싫었던 기억을.
***
“저 여자인가? 이번에 새로 배치된 신입?”
“맞아. 여기가 첫 유배지라더군.”
“뭐야, 완전 초짜잖아?”
동료의 말에 민준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우주전함 내 유일한 유흥시설인 바에 앉아 있다. 수형자들만 승선할 수 있는 이동형 감옥에서 그나마 개방감을 느낄 수 있는 장소인지라 한가한 이들은 주로 여기에서 시간을 보낸다. 저 신입도 그 사실을 빠르게 캐치한 것 같다.
그들 시선을 끈 수형자는 단발의 여성이었다. 아담한 체격. 근무 시간이 끝났을 텐데 아직 배틀 슈트 차림.
“얼마짜리래?”
“모르지.”
새로운 수형자가 나타났을 때 그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 중 하나가 퇴직금이다.
이번 신입이 지불해야 할 자유의 가격은 얼마인가?
모아야 하는 달란트 액수를 들으면 얼마나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가늠할 수 있다. 위원회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사람 몇 명 죽인 경범죄가 백 달란트에서 시작하고 전범은 오십만에서 백만 달란트 사이.
안건에 따라 가중치를 가하므로 정확하게 예측하기 힘들지만, 금액이 클수록 흉악범이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어이, 카인.”
민준은 상대가 자신을 부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멋대로 입이 열리고 말이 나온다.
“왜?”
퉁명스러운 대답. 관찰자인 민준은 그제서야 기억해냈다. 그래, 내가 직전 차원에서 일할 때 쓰던 이름이었지. 카인. 너무 오랜만이다.
“저번에 보니까 저 신입이랑 오래 붙어 있던데. 진지한 사이야?”
민준은 고개를 젓는다.
그냥, 한 번 같이 잤을 뿐이다. 하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떠들지는 않았다.
스스로에게 ‘델’이라는 가명을 붙인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약 일주일 전. 못 보던 얼굴이라 환영 차원에서 말이나 붙여보려 했던 것이지 별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날 델은 막 수형자 생활을 시작한 이의 특징과, 새로 몸을 받은 자의 특징을 동시에 보였다. 꽤나 혼란스러워 보였고, 몸의 움직임도 어색했다는 뜻이다.
민준이 처음 말을 걸자 대꾸하는 데에 10초가 넘게 걸린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델은 그대로 입을 살짝 벌린 채, 그저 그를 뻔히 바라보기만 한 것이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제스처로 이해하고 다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몸을 돌리는 순간 그녀가 그의 옷소매를 잡았다.
“······?”
그리고 사과했다.
“미안해요.”
딱히 변명을 하진 않았지만, 침묵은 상기의 이유 때문이었으리라 짐작한 민준은 다시 앉았고 가볍게 대화를 나눴다.
표정이 딱딱했고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보이기는 했지만, 일단 대화의 물꼬를 트고 나니 이야기가 잘 통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한 잔, 또 한 잔 넘어가다 보니 술자리의 마무리는 그녀의 선실 안에서 이루어졌다.
“진지한 건 아니다 이거지?”
그렇게 되묻던 동료가 손짓을 하며 묻는다.
“그럼···?”
민준은 델에게 꽂혔던 시선을 돌렸다. 그의 침묵을 동료는 ‘둘 사이 아무 일 없었음’으로 해석한 것 같았다. 민준은 오해를 정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지나치게 깊은 관계를 맺지 않게 된 것은 수형자 생활을 200년 정도 채운 무렵부터로 기억한다.
단생종에게 마음을 주면 항상 끝이 좋지 않았다. 상대가 수형자라도 마찬가지. 결국에는 위원회의 지시로 찢기고 단절될 관계다.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상대는 없었다. 그럴 능력이 없는 것은 민준도 마찬가지였고.
델은 이제 막 수형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준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날 이후 여기에서 처음 마주친 것이지만 그들은 서로 시선 한 번 교환하지 않았다. 그 사이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았다.
‘수형자 생활의 진리를 꽤나 빨리 깨우쳤군. 똑똑한 여자야.’
민준은 상대를 구속할 생각이 없었고, 그녀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많은 수형자가 그렇듯 오픈 릴레이션쉽(Open relationship)을 유지하려는 거겠지. 그래서 민준은 동료가 델에게 다가가도록 두었다. 굳이 쳐다볼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는 생각을 바꿔서 그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뭐? 이 미친 년이 지금 뭐라고 그랬어. 다시 지껄여 봐!”
다가갔던 동료가 기함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바 안 모두의 시선을 끌어 모은 채로, 델이 무표정하게 말을 읊었다. 한 마디 한 마디, 너무나 담담한 어조로.
그걸 들은 민준의 표정에 핼쑥해졌다.
‘뭐야 쟤···. 짬밥도 안 되는게 벌써 미쳤나?
그녀는 요약하면 ‘역겹고 하찮은 포유류 주제에 당치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는 문장을 감정기가 쏙 빠진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대놓고 주는 모욕. 어처구니없는 부분은, 그렇게 말하는 델 자신도 본래 종족이야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인간의 몸이라는 거다. 민준은 중얼거린다. ‘그날은 멀쩡해 보였는데?’
동료는 사과를 요구했지만 델은 고개를 뻣뻣이 들고 거부했다. 자기는 함부로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 않으며, 지금은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고.
“이 년이 진짜!”
그냥 좋은 말로 거절하면 될 것을 저건 너무 심했다. 보고 있던 동료 수형자들이 말리려고 하던 차에···.
파앗!
근육이 부풀고 옷이 찢기며, 동료의 몸이 순식간에 변한다. 평범한 인간 형태에서 파란 피부의 괴물로.
그는 브리드 쉬프트(Breed-shif) 능력자인 동시에 웨폰 마스터다. 첫번째 능력을 통해 트롤을 압도하는 괴력의 생물체로 변신할 수 있으며, 두번째 이능력을 발동한 순간 가뜩이나 월등한 신체능력은 수십 배로 강화된다.
“어이, 진정해!”
그제서야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만 너무 늦었다.
부웅!
공기를 찢는 소리. 바윗덩어리 같은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손괴죄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혼줄내주려는 의도였다. 직격당하는 순간 왜소한 여자의 몸은 돌풍 맞은 낙엽처럼 튕겨져 나갈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은 빗나갔다.
퍽!
“?!”
“크··· 크으읍!”
민준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장내가 고요해지고 공기가 얼어붙었다. 모두가 경악하여 그녀를 보았다. 턱이 빠질 지경으로 입을 쩍 벌린채.
델은 그저 한 손을 가볍게 들었을 뿐이다. 전방을 향해 편 손바닥 한 뼘 앞에 푸른 괴수가 내지른 주먹이 멈춰 있었다.
허공에 고정된 팔은 부들부들 떨렸고 혈관이 흉하게 튀어나온 상태였다. 심지어 피부 위 희미한 오러까지 빛을 발한다. 전력을 다할 때나 나타나는 모습.
하지만 주먹은 한 치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염동력?”
그녀가 손바닥에 무형의 벽을 만들어 막은 것이다.
그런데, 웨폰 마스터의 힘을 버티는 염동력이라니!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는지, 변신능력자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그 순간 거체를 타고 흐르던 오러가 더 강렬해졌다. 민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것은 그때였다.
‘눈이 뒤집혔군!’
여태까지는 수형자들 사이 흔한 기싸움이었지만 이제 이야기가 달라졌다.
저런 힘을 끌어내 싸우면 둘 중 하나는 손괴죄로 잡혀갈 것이다. 민준은 저주를 읊으며 그의 뇌혈관을 겨냥했다. 정신이 델에게 팔려 있으니 저항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계획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콰직!
“?!”
선명하고도 경쾌한 소리.
허공에는 괴물의 조각난 어금니가 흩날렸다. 그의 고개는 극적인 각도로 꺾였다. 그리고 델의 주먹이 머리 위로 치솟아 있었다.
어퍼컷을 날렸던 손을 회수하는 델의 눈이 불타올랐다. 방금 전 동료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정확하게 파악한 자의 표정이었다.
“지금부터는 정당방위야.”
다시 한번.
퍽!
델이 날린 주먹이 상대에게 닿기도 전에 고개가 꺾인다. 또 한 방, 턱주가리에 제대로 먹혔다.
저것이 몸에 염동력을 둘러 운동에너지를 증폭하는 방법임을 민준은 알아차렸다.
‘저 정도 컨트롤은 오랜만에 보는데?’
상대에게 가하는 파괴력은 극대화하는 한편 능력자 본인 몸에 전달되는 충격은 최소화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염동력으로 만든 권투 글러브인데 그 기능이 지나치게 뛰어나다.
“크아아아아아!”
이제 변신능력자는 이성을 완전히 잃었다. 온 몸에 오러의 파도가 들끓자, 동료들이 민준에게 눈빛을 보낸다. 자신들이 끼어들 수준은 이미 넘겼으니 그가 나서서 말려달라는 뜻이다. 하지만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괜찮을 것 같은데?”
“?!”
괴수가 맹공을 퍼부었다. 델은 왼쪽으로 피하는 척하다가 날쌔게 몸을 날려서 다시 달라붙는다. 놀랍도록 빠르고도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그러며 가차없이, 오른발로 변신능력자의 두꺼운 허벅지를 내려 찍는다.
“!”
괴수는 절규했다. 발판 역할을 한 돌덩이 같은 허벅지를 박차며 델은 날아오른다.
상대 어깨 높이까지 몸을 튕긴 그녀는 양 다리를 벌려 가위처럼 상대의 목을 죄였다. 그리고 염동력의 반동을 사용하여, 무게 중심을 꺾으며 몸을 아래로 찍는다!
괴수의 머리가 땅바닥에 충돌.
쿵!
본인 체중의 열 배도 넘을 수형자를 바닥에 메치는 위업을 보인 후에도 델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머리를 땅바닥에 박은 뒤에도 기절하지 않고 뒤구르기로 도망가는 괴물을 쫓아 발차기를 날린다.
퍽!
복부에 내려 꽂히는 날아차기.
“퀘에에에엑!”
괴물은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난다. 그러자 이번에는 주먹이 꽂혔다. 눈썰미 좋은 자들은 그곳이 방금 발차기를 꽂았던 정확한 포인트임을 알아차렸다.
퍽! 퍽! 퍽!
벽까지 몰린 괴수의 배와 옆구리를 델이 주먹으로 사정없이 난타했다. 북을 치는 듯한 찰진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와중에 머리를 노리지 않는 것은 손괴를 피하기 위함임을 민준은 알았다. 괴수도 리치가 긴 팔과 다리를 휘저으며 저항했지만 델은 쏜살같이 사정권 밖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파고들기를 반복했다.
결국 괴물이 정신을 잃고 나서야 델의 공격이 멈췄다.
“······.”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으면 웨폰 마스터들 간의 싸움이라고 오해할 난전이 끝나고, 수형자들은 침묵 속에서 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더 이상 여기 머물 생각이 없는지, 안드로이드에게 술값을 전자화폐로 지불한 뒤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그녀가 문득 민준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하지만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도 고개를 돌리고는 문 쪽으로 향했다. 차분한 걸음으로.
“이거··· 손괴로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누군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회복 캡슐에 집어넣으면··· 하루면 멀쩡해질 걸?”
그만큼 절묘하고도 신묘한 컨트롤이었다. 그렇게 대꾸한 뒤 민준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델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민준은 그것이 아쉬웠다.
***
“또 사고쳤다며?”
민준의 물음에, 곁에 누워 있던 델이 몸을 일으켰다. 이불 자락을 걷어 내고 침대 밖으로 몸을 빼더니, 일어서서 거울 앞에 섰다. 처음에는 자기 얼굴을 보는 걸 기겁하며 싫어하더니 이제는 좀 괜찮아 졌나보다.
잠시 물끄러미 응시하던 델이 뒤돌아보는 대신 거울 속에서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별거 아니었어.”
“우주 벌레 잡으라고 보내놨더니 대피선 격추시킬 뻔한 게 별 일이 아니야?”
델은 얼마 전 매노바 말벌 소탕 작전에 동원되었다. 다른 은하에서 대규모로 벌떼가 날아오는 사실을 사전에 파악한 텔레시아는 그 궤도 상에 있는 콜로니의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사실상 무정부 상태인 이 차원을 임시로 통치하는 주체는 위원회였으며 그 손발은 수형자들이 맡고 있었으니 그녀의 지시에 불응하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이번 작전에는 타이밍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아직 대피가 다 끝나기도 전에 말벌 떼가 접근한 것이다. 그래서 텔레시아는 사격을 지시했고··· 전투기 파일럿 중 가장 많은 벌레를 격추시킨 것은 델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해도 믿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델은 전투기를 타고 사격할 때 레이더를 보지 않는다. 오로지 육안으로 확인한 풍경과 ‘감각’으로 탄환을 쏟아내는데 그것이 백발백중을 해버리니, 대체 본래 종족이 무엇인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다만, 그 감각이 가끔 치명적인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 문제였다. 맞춰야 할 것을 못 맞추는 오류는 아니다. 맞추면 안 될 것을 맞추는 오류였다.
“그 대피선 쪽에서 느낌이 왔단 말이야.”
“무슨 느낌?”
“···벌레 잡을 때랑 똑같은 느낌.”
“미치겠네.”
우주 벌레를 향해 포탄을 쏴서 격추시킬 때와 다르지 않은 본능적인 감각이 그녀에게 속삭였다고 한다. 저 대피선도 ‘잡아야 할’ 대상이라고.
심지어 그녀가 격추시킬 뻔한 그 대피선은 레이더에 잡히지도 않을 정도로 멀리 있었다. 대체 어떻게 맞췄냐고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물론 눈먼 포탄이 우연히 맞췄다고 설명하는 것이 가장 속편하겠지만··· 진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민준은 알았다.
깊게 한숨을 쉰 뒤에 민준이 덧붙였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또 한 놈 두들겨 팼고?”
아무리 공언하지 않는다고 해도 두 사람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소문은 선함 내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문제는 다른 곳으로 파견 나갔다가 모함으로 돌아오는 수형자들이었다. 오랜만에 배로 돌아온 그들은 신입을 보고 관심을 가졌으며, 수형자들의 문화가 다 그렇듯 새로이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했다.
그때마다 델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꼭 그렇게 시비를 걸어야겠어? 그냥 좋은 말로 거절하면 되잖아.”
“하지만···.”
델은 풀이 죽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정말로 역겨운 걸.”
“?!”
“여기 수형자들은 다 인간 몸을 받았잖아. 그래서 견딜 수 없어. 보기만 해도 징그러운데, 나한테 다가와서 수작까지 거는 꼴을 보고 있으면···.”
민준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저기, 지금 니 몸도 인간이거든?”
“맞아. 그래서 처음엔 거울 보는 것도 싫었어.”
“······.”
델은 거울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중얼거린다.
“아마, 난 기억을 잃기 전에 엄청나게 큰 죄를 저질렀을 거야.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였겠지. 그러니까 이런 몸 속에 갇힌 거야. 내가 혐오하고, 견딜 수 없이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이런 생물의 몸 속에.”
그 이야기를 들으며 민준은 몇 번이고 궁금해했던 질문을 다시 곱씹었다. 대체 원래 종족이 뭐였을까? 포유류가 징그럽다고 여기면··· 곤충 계열이나 어류였나?
그런 생각은 갑작스러운 고백 때문에 끊겼다.
“53만.”
“······.”
그 숫자의 의미를 눈치챈 민준이 무거워진 시선을 던졌다.
“놀랐지? 53만 달란트야. 나, 그 돈을 값아야 자유로워질 수 있어.”
그러더니 허탈한 웃음을 터뜨린다.
“사실상 무기징역이나 마찬가지지? 어처구니가 없지? 나도 무서워. 그 돈을 어떻게 모아서 값아야 할지가 무서운 게 아니라, 대체 무슨 끔찍한 죄를 저질렀기에 이런 금액이 책정되었을까 상상하는 것이 무서워. 그리고 내 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희생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몸이 떨려.”
그에게는 처음 꺼내는 말이었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민준이 잠시 침묵을 지킨다.
그리고, 고백을 고백으로 답하는 대신에 대화의 주제를 바꿔버렸다.
도저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액수는 가슴 속에 묻어둔다.
“그런데, 나도?”
“응?”
“나도 인간 몸이잖아. 그런데 처음 만난 날 왜 나한테는 안 그랬지?”
그러자 델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은 완전히 다르지.”
“다르다니, 뭐가?”
“···막상 그렇게 물어보니 답을 못하겠네.”
잠시 고민하던 델이 말했다.
“당신은 보자 마자 알았어. 다른 수형자들이랑 비교할 수 없어. 인간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그 안의 근본적인 부분이 완전히 달라.”
그렇게 말하며 다시 침대 속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민준의 머리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민준은 콧잔등에 열기가 맺히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입에서 새는 잔숨이 뺨을 간지럽혔다.
“당신한테서는, 빛이 났어.”
음.
낯이 뜨거운 걸?
아무리 침대맡 대화라지만 지나치게 통속적이고 닭살 돋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빛이 나다’니.
그런데 오랜만에 감성이 차올랐는지 델은 말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니 난 확신해. 당신 같은 사람이 죄를 저질렀을 리 없어. 여기 수형자들과는 다르니까. 나와도 다르니까. 당신은 무고하고 결백한 사람이야.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게 분명해.”
조명을 등으로 받은 채 음영진 델의 표정은 묘한 굴곡을 만들고 있었다. 두 눈은 홀린 것 같기도 하고, 경배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더 끌리는 걸지도 몰라. 이 중에서 유일하게 속죄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니까. 자유로워야 할 사람이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 같은 죄인들 곁에 내려와 있는 사람이니까.”
민준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평소보다 감정이 많이 격해진 상태라서 그렇다고 넘기기로 했다.
그런데.
“······.”
비록 큰 의미를 두지는 않으려고 했지만, 그 말이 가슴 속에 어떤 묵직한 흔적을 남겼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이유가 폭주하는 호르몬이든, 과몰입된 감정이든, 불안 속에서 피운 애착이든지 간에··· 자신을 저렇게 맹목적으로 긍정해주는 상대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자신이 수형자라는 걸 알면서도 저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고마워.”
하지만 끝내 말할 수 없었다. 목구멍까지 걸려 있는 어떤 액수는.
그래서 이 대화를 이어나가는 대신 좀 더 단순한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는 시계를 가리키며 말한다.
“아직 착륙 태세로 전환하려면 20분 정도 남았는데······ 어때?”
델은 거절하지 않았다.
***
그 뒤로도 민준은 둘의 관계를 공언하거나 진지하게 티를 내는 법이 없었다. 그 부분은 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달라진 부분은 있었다.
일단, 그녀에게 접근하는 남자들(과 소수의 여자들)을 거절하는 델의 방법이 훨씬 온건해졌다. 민준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인지 더 이상 손괴 직전까지 가는 아슬아슬한 혈전도 벌이지 않았고, 상대에게 대 놓고 모욕을 주는 일도 없었다. 당연히 수형자들 사이에서 델의 평가가 조금 좋아졌다. ‘저거 드디어 사람 됐네.’
또 하나의 변화는 앞서 언급된 것보다 조금 늦게 알려졌다. 비록 좋게 거절당하기는 했으나, 일단 들이댄 전적이 있는 그 수형자들이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사례가 속속들이 보고된 것이다. 대부분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종류였으나 시달리는 자로 하여금 정신적인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병세였다. 회복 캡슐을 사용해도 그때뿐이고, 캡슐 밖으로 나오자 마자 다시 발병하는 그 괴질은 최초 증상 발현 후 일주일을 넘겨야 완전히 나았다.
이쯤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게 이상했다.
결국 상황을 안 텔레시아가 광분했다.
“이봐, 카인! 델! 제발 그냥 공표를 해! 정식으로 다른 동료들에게 알리라고! 너희 사귄다고 말을 해! 왜 말을 못하니!”
그러더니 그녀가 수형자들에게 둘의 관계를 대신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상황이 되어서야 민준은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여 미적대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확실하게 말로 뱉은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될까봐.
위원회의 손짓 하나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릴 관계를 시작하는 게 불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쩌면 잘 풀릴지도 모른다.’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 속에서, 민준은 모든 살림살이를 가지고 델의 선실로 들어갔다. 텔레시아의 허락을 받아 방도 두 배 넓이로 확장했다.
이번에는 뭔가 다를 것 같다고 생각했다. 델이라면 아주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 것이다.
그리고 이번 예감은 이전과 달리 적중할 것 같다는 예감도 느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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