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88
188
다음 날 TC인터내셔널에서 재기한 고소 사건을 맡은 문훈철 검사가 지검장실로 들어섰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던 오귀남 지검장은 문훈철 검사가 문을 열고 들어와 꾸벅 허리를 숙이자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어서 오게, 문 검사. 그리고 앉지.”
“예.”
담배를 꺼내 입에 문 오귀남 지검장은 옆자리에 앉은 문훈철한테 시선을 주면서 말했다.
“어제 태일 그룹쪽 사람을 만났다고 들었네.”
“……네.”
“어떻게 하기로 했나?”
살짝 뒤로 몸을 기대면서 오귀남 지검장이 물었다.
뭘 묻는 건지 바로 알아차린 문훈철은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죄는 인정되지만 아직 젊고 갱생의 여지가 있기에 TC인터내셔널에서 재기한 고소 건은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기로 했습니다.”
“많이 시끄러워질 거야.”
“알고 있습니다.”
굳은 얼굴로 문훈철이 짧게 대답하자 오귀남 지검장은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뒤는 내가 확실히 봐줄 테니까 조금만 고생을 하도록 해.”
“예.”
오귀남 지검장의 이야기에 문훈철은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던 불안감이 사라졌다.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면 여론의 질타가 쏟아지겠지만 그건 잠시였다.
대신 재벌인 태일그룹의 스폰을 받고 든든한 동아줄인 오귀남 지검장의 라인이 된다면 출세는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0년 안에 차장, 부장검사를 거쳐 지금 오귀남이 있는 저 자리에 자신이 앉아 있을 걸 상상하자 문훈철은 얼굴 가득 욕심이 일렁거렸다.
오귀남 지검장 역시 부담스러운 일을 처리했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한상주 부장검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지검장님!”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방해를 받은 오귀남 지검장은 짜증 가득한 시선으로 한상주를 쳐다봤다.
“뭔데 이 호들갑이야?”
“큰일 났습니다. 이것 좀 보십시오.”
옆으로 다가선 한상주가 다급한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 PC를 내밀자 오귀남 지검장은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태블릿 PC에 띄워진 것을 확인한 오귀남 지검장은 눈썹을 위로 추어올렸다.
“이게 뭐야!”
하룻밤 사이에 김인철이 저지른 온갖 범죄 사실과 검찰이 재벌 일가인 그를 봐준 정황이 인터넷에 쫘악 퍼진 것이다.
SNS와 개인 게시판을 넘어 대형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까지 올라 있었다.
TC인터내셔널 주가조작으로 큰 손해를 입은 개미 투자자들까지 가세해 불만과 하소연을 쏟아 내면서 비난 여론이 아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지검 인터넷 게시판과 민원실로 시민들의 항의 전화와 글이 빗발쳐서 업무가 마비될 지경입니다.”
“이런…….”
뜻밖의 상황에 오귀남 지검장은 둔기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누군가 김인철에 관련된 수사 정보를 SNS와 개인 게시판에 올렸는데, 그게 밤새 퍼져 포털 사이트까지 삽시간에 번진 것 같습니다.”
“어떤 놈이 이딴 짓을 한 거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오귀남 지검장이 태블릿 PC를 부숴 버릴 듯이 탁자에 내던지며 버럭 고함을 지르자 한상주가 움찔하면서 말했다.
“아직 그것까지는…….”
“그것부터 알아냈어야지!”
“죄, 죄송합니다.”
소식을 전하러 왔다가 괜히 불똥이 튄 한상주가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젠장!”
욕설을 내뱉은 오귀남 지검장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빠르게 상황 판단을 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서 모든 판을 뒤집어엎기에는 태일그룹에서 제안한 것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잠시 망설인 끝에 오귀남 지검장은 주먹을 꽉 움켜쥐곤 입을 열었다.
“막아!”
“예?”
엉거주춤 선 한상주 부장검사가 눈을 껌뻑이며 쳐다보자 오귀남 지검장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귀라도 먹었어. 처음 이 빌어먹을 글을 인터넷에 올린 최초 유포자를 찾아내고 계속 퍼지는 걸 막으라고!”
“그러다가 자칫 역효과가 날 수도 있습니다.”
한상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야기를 하자 오귀남 지검장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래서 이걸 그냥 내버려 두자는 거야! 이건 명백하게 미공개 수사 정보를 무단으로 게시하고 허위 사실을 유포해 우리 검찰의 명예를 더럽힌 거야.”
다소 억지스러운 말이었으나 오귀남 지검장의 최측근으로 뭣 때문에 이러는지 대충 알고 있던 한상주 부장검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서 나가서 일을 처리해!”
“옛.”
한상주가 나가자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면서 좌불안석이던 문훈철 검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검장님, 고소 건은 이대로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오귀남 지검장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일단 보류해 놔.”
“아, 예.”
지금 이 시점에서 TC인터내셔널이 재기한 고소 건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면 스스로 인터넷에 퍼지고 있는 글이 맞다고 자인하는 꼴이 된다.
거기에 만약을 대비해서 빠져나가는 구멍을 만들어 두려는 의도도 있었다.
확실히 다른 피의자들과 달리 재벌 3세인 김인철을 봐주며 상당히 약한 구형을 한 건 맞지만, 어찌 됐건 실형을 판결을 받아 냈고 현재 2심이 진행 중이었기에 일이 잘못되더라도 변명할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문훈철도 이런 오귀남 지검장의 생각을 바로 눈치챘다.
자신이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기 전에 상황이 벌어진 것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인사를 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남역 인근에 위치한 사무실 소파에 앉은 혁권은 지석영 변호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검찰이 아주 곤혹스럽겠군요.”
“그럴 겁니다. 가뜩이나 사회적으로 금수저 논란이 일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니까요. 2심 재판 기일과 저희 쪽에서 재기한 횡령과 배임 그리고 분식 회계 혐의에 대한 기소 여부 판단이 미뤄진 것만 봐도 당황스러워하는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김인철 뒤에 재벌인 태일 그룹이 있는 만큼 여론을 무시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태일그룹에서 적극 나서서 여론이 악화되는 걸 막는 정황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고 말입니다.”
역시나 검사 출신답게 검찰 내부 분위기와 재벌의 대응 방식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상체를 바로 한 지석영 변호사는 상석에 앉은 혁권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번 일, 사장님께서 하신 겁니까?”
노련한 물음이었다.
관계자가 아니라면 알기 어려운 것들이 인터넷에 다 공개가 됐으니 충분히 이런 의심을 할 만도 했다.
뜨끔할 만도 했으나 혁권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나도 누가 이런 일을 했는지 궁금하군요.”
“…….”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혁권의 모습에 지석영 변호사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어찌 됐건 저희 쪽에 유리한 일이니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검찰을 너무 자극하는 행동은 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이번 일만 해도 저희가 몰래 벌인 일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대충 상황을 다 눈치챈 지석영 변호사의 충고에 그는 순순히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소.”
“김인철과 검찰을 압박하기 위해서 바로 민사소송을 함께 재기할 생각입니다. 이렇게 하면 검찰도 쉽사리 사건을 묻어 버릴 수 없는 데다 만약의 경우 형사가 어렵더라도 만사 재판으로 피해액을 회수할 수 있을 겁니다.”
일을 진행하기 전에 대충 이야기가 됐던 내용이었기에 혁권은 별다른 반대 없이 바로 허락했다.
“그렇게 해요.”
“그럼 전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지석영 변호사가 나가자 소파에 몸을 파묻고 있던 혁권이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야. 시킨 일은 잘 진행되고 있겠지?”
그의 물음에 백성균이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오늘부터 시위가 시작될 겁니다.
지석영 변호사가 자중하라고 했지만 이 정도로 흔들릴 상대가 아니라는 걸 잘 알았기에 혁권은 상대를 압박할 다음 패를 꺼내 들었다.
“꼬리가 밟히지 않도록 조심하고.”
-염려 마십시오.
“좋아.”
통화를 끝낸 혁권은 느긋한 얼굴로 다음 결과를 기다렸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
많은 사람들이 손에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모여 있었다.
한쪽에는 지붕에 대형 확성기가 설치된 승합차까지 세워져 있었는데, 검찰의 봐주기식 수사와 재판을 항의하기 위해서 모인 TC인터내셔녈 주가조작 피해자들과 시민 단체 회원들이었다.
“수백억 대 피해가 발생했는데 고작 벌금 10억이 웬 말이냐. 검찰은 재벌의 눈치를 보지 말고 제대로 수사를 해라!”
“옳소!”
“검찰은 각성해라!”
“이 시대에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니, 그러고도 정의를 집행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와아아!”
“공평한 법집행을 해라!”
화를 참지 못한 피해자들이 몰려와 중구난방으로 떠들어 댔던 법원 앞과 달리 이번에는 숫자도 몇 배나 많고 확성기를 들고 앞에 선 사람의 외침에 맞춰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시위를 벌였다.
그러다 보니 검찰도 그냥 무시하지 못하고 상당한 압박을 받았다.
확성기와 스피커 볼륨을 최대로 키워 떠들어 대는 소리가 지검장실까지 들렸다.
둥둥둥!
“제기랄!”
책상 앞에 앉은 오귀남 지검장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연신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태일그룹에서 손을 쓰자 문제가 됐던 글이 인터넷에서 퍼지는 속도가 줄어드는 걸 보고 방심한 것이 실수였다.
아침부터 잔뜩 몰려든 시위대가 지청 앞을 완전히 점거한 채 항의를 하면서 일이 더 커져 버렸다.
인터넷으로 여론이 형성되던 것이 현실 세계로 나와 버리고 만 거였다.
태일그룹에서 언론을 틀어막고 있었지만 그게 언제까지 가능할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당장 검찰지청에서 근무하던 기자들이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 떼처럼 사진을 찍고 취재를 하는 걸 보면 오늘 석간신문에 기사가 실릴지도 몰랐다.
“으으…….”
머리를 감싸 쥔 그의 입에서 끙끙 앓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두꺼운 이중창에다 커튼까지 쳐 놨음에도 불구하고 군중의 성난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처럼 계속 울리는 듯했다.
그는 거의 신경쇠약에 걸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제 머리카락을 뜯다가, 또 불현듯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처럼 정색하기를 반복했다.
“대체 어쩌다 이런 꼴이…….”
앞으로의 내 인생은 탄탄대로다, 이대로만 가면 출세는 틀림없다고 확신했던 것이 발밑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좋은 대학을 나와서 사법 고시를 패스하고, 선배 검사의 중매로 괜찮은 집안의 아가씨와 결혼도 했다.
실력도 남들이 하는 만큼은 했으니 굳이 흠이 될 만한 건 없었다.
누가 봐도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생활 아니던가.
그런데 왜 지금은 이 모양 이 꼴이지?
내가 뭘 잘못했기에!
“큭.”
갈고리처럼 세운 손톱으로 의자 팔걸이를 콱 움켜쥐었다.
사람이 막다른 곳에 몰리면 이성 아래에 숨겨 놨던 공격성이 형체를 드러내는 법이다.
오귀남 지검장의 눈동자가 번들거리며 기분 나쁜 빛을 띠기 시작했을 때, 타이밍 나쁘게도 여비서가 그에게 급히 전할 말이 있다며 방으로 들어왔다.
“뭐야! 아무도 들어오지 말랬잖아!”
힉, 하고 여비서가 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서슬 퍼런 오귀남 지검장의 기세에 압도당한 그녀는 괜히 불똥이라도 튈까 봐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거, 검찰총장님의 급한 호출입니다.”
“……?”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오귀남 지검장은 슬쩍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순간 살인이라도 할 것처럼 흉흉한 기운을 내뿜던 그의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더니 이번엔 장난을 치다가 걸린 아이처럼 찔끔한 기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