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30
430
#원유 거래
다행히 첫 매복 공격 이후 트리폴리 외곽에 위치한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별다른 교전이 벌어지지 않았다.
시가지 전체가 완전히 전쟁터나 마찬가지라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 어려웠기에 혁권은 간단하게 응급처치만 한 뒤에 부상자와 사상자 들의 시신을 대기 중이던 수송기에 태워 바로 제일 가까운 튀니지로 보냈다.
담배를 입에 문 채 막 이륙해서 멀어지는 수송기를 바라보고 있을 때 자말이 옆으로 다가와 나직이 말을 걸었다.
“보스.”
대꾸하는 대신 얼굴을 쳐다보자 자말이 말했다.
“피곤하실 텐데 안으로 들어가서 쉬시지요.”
“아니, 괜찮아. 그보다 부하들은 어쩌고 있어?”
“준비해 온 전투식량으로 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도록 했습니다.”
“잘했어.”
어젯밤 트리폴리에 도착한 이후 잠도 못 자고 지금까지 계속 움직였으니 다들 많이 피곤할 터였다.
여전히 은은한 포성이 들리고 시가지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정부군 병력이 공항을 지키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도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에 다들 무거운 방탄조끼를 착용한 채 무기를 휴대하고 다녔다.
“참, 그리고 보고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 봐.”
“자밀 의장 측이 외국 용병을 끌어들였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용병이라고?”
“예.”
굳은 얼굴로 머리를 끄덕이는 모습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어디서 들은 이야기야?”
“공항을 지키고 있는 정부군 장교 가운데 정보원이 있는데, 거길 통해 들은 정보입니다.”
샤라빌 대통령 역시 용병을 고용했으니 자밀 의장이라고 해서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지만 그래도 상황이 더욱 꼬여만 가는 것 같아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좋은 소식은 아니군.”
자말이 슬쩍 혁권의 눈치를 살피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용병들이 북한 출신이라고 합니다.”
“……!”
인근 국가에서 끌어온 용병들로 생각하고 있던 혁권은 자말의 이야기에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게 정말이야?”
“카다피 정권 시절 때도 북한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면서 매년 정기적으로 군사 고문단이 파견됐었는데, 아마도 그 끈이 자밀 의장 쪽하고 다시 연결된 것 같습니다.”
“북한이라…….”
생각지도 못한 변수의 등장에 그는 낮게 침음을 흘리고는 좀처럼 굳은 얼굴을 풀지 못했다.
진짜로 북한 용병이 들어온 거라면 블랙워터를 앞세워서 반대 세력을 깨끗하게 정리하려는 이쪽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다.
길게 숨을 내뱉은 혁권이 자말을 보며 말했다.
“정부군 장교한테 정보를 좀 더 얻어 보고 나한테 바로 보고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돈을 원하면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까. 챙겨 줘.”
“예.”
북한 용병의 등장이 판세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걸 자말도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최필성이 소속되어 있는 구매부는 국제 유가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최적의 타이밍에 원유를 매입해야 됐기에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다.
책상에는 세 대의 LED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다양한 색깔의 숫자와 차트가 시시각각 변하는 시장 상황을 알려 주고 있었다.
한참 동안 모니터를 뚫어질 듯 쳐다보던 최필성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오영석 씨!”
“예, 과장님.”
이제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하자 최필성이 약간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에 들어오는 아시아 8호에 실린 원유 매입 단가가 얼마라고 그랬어?”
“배럴당 49달러 20센트였습니다.”
아시아 8호는 DK 정유에서 장기용선 계약을 맺은 VLCC(초대형 탱커 : Very Large Crude-Oil Carrier)였다.
가격을 들은 최필성의 이마에 굵은 주름살이 만들어졌다.
“지금 두바이 유Dubai oil가 48달러 12센트니까 며칠 사이에 엄청 손해를 봤구먼.”
불과 1달러 정도 차이였지만 VLCC에 실려 있는 원유의 양이 수십만 톤에 달하는 걸 생각하면 손해가 상당히 컸다.
최필성이 인상을 쓰자 대답했던 부하 직원이 괜히 자기가 잘못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면서 그의 눈치를 봤다.
구매 결정을 내린 건 그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대로 시장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비싼 값에 원유를 사 왔으니, 부서 전체의 실적과 인사 고과에 마이너스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주며 최필성이 원유 가격 추세를 살펴보고 있을 때 화사한 색깔의 투피스 정장을 입은 여직원이 팩스를 한 장 가져와서 내밀었다.
“이게 뭐야?”
“과장님 앞으로 온 팩스예요. 발신자가…… 아, 김혁권 씨라고 되어 있는데요.”
“아, 그거 이리 줘.”
며칠 전에 혁권과 전화 통화를 했던 걸 떠올린 최필성은 얼른 팩스를 건네받아 내용을 살펴봤다.
팩스에는 매각하려는 원유의 품질 분석표와 물량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원유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이 아니었기에 분석표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물량을 본 최필성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양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책상에 올려 둔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우우웅.
액정에 혁권의 이름이 떠 있는 걸 보곤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선배, 팩스를 보냈는데, 확인하셨어요?
“그래. 방금 봤어.”
의자에서 일어난 최필성은 한쪽 손에 팩스를 쥔 채 얼른 조용한 회의실로 들어가 통화를 했다.
“그런데 정말 이만한 물량이 있는 거야?”
-그러니까 팩스를 보냈지. 설마 제가 물량도 없는데 연락을 했을까 봐요. 그렇게 절 못 믿는다니 이거, 실망인데요.
“야, 그게 아니라 물량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으니까. 그러지.”
그러자 혁권이 웃으면서 말했다.
-DK정유라면 업계에서도 알아주는 곳인데 거래를 하려면 최소한 이 정도는 준비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너무나도 능청스러운 대답에 최필성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지난번에 원유를 가져온 걸 보고 난놈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제 보니까 배포가 장난 아니구먼.”
-어떻게, 매입할 의향이 있습니까?
혁권의 물음에 최필성은 신중한 태도로 이야기를 했다.
“판매 가격이 얼마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
-생각하는 가격을 말씀해 보십시오.
팩스에 적힌 내용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며 잠시 고심한 최필성은 마른 입술을 혀로 살짝 적히면서 가격을 제시했다.
“두바이 유를 기준으로 해서 배럴당 48달러 어때?”
-너무 날로 먹으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 시세가 48달러 12센트인데요.
“대량 매입을 하는데 그 정도 할인은 해 줘야지. 그리고 원유를 국내까지 가져오려면 운송비도 들어가잖아.”
-울산까지 운송을 해 주고 배럴당 48달러 10센트로 하지요.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려본 최필성은 귀에 댄 스마트폰을 고쳐 쥐면서 대답했다.
“좋아. 대신 400만 배럴에 더해서 3개월 치 물량까지 그 가격으로 계약하는 거야?”
-그렇게 하죠.
“대금 지급은 어떻게 할까?”
내심 지난번처럼 원유를 다 받은 다음에 정산하는 걸 기대했지만 혁권이 다른 조건을 걸었다.
-선금으로 30%를 먼저 받고 나머지는 도착해서 지급해 주는 걸로 하지요.
“10%로 하는 것이 어때?”
그러자 혁권이 단호하게 말했다.
-너무하시네. 그럴 거면 그냥 선물 시장에 내다 팔 테니까 그만두세요.
거래를 접으려고 하자 최필성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거참. 성격이 급하기는 알았어. 30%를 선금으로 주도록 하지. 대신 나도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말해 보십시오.
회의실 안에 혼자뿐이었지만 최필성은 주위를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했다.
“계약서에는 배럴당 1달러를 더 얹어서 계약한 걸로 해 줬으면 좋겠어.”
-이면계약을 하자는 겁니까?
“맞아. 서류 정리는 이쪽에서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차액을 별도의 계좌로 다시 넣어 주기만 하면 돼.”
별거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를 했지만 그 역시 온갖 일을 다 겪으면서 닿고 닿았기에 뭔가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태일물산을 다닐 때 김인철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이런 식으로 단가를 부풀려서 몰래 비자금을 만들었기에, 무슨 상황인지 눈치 못 채는 것이 더 이상했다.
-비자금이라도 만들려는 겁니까?
정색을 하며 묻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던 최필성은 이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그래. 경영 승계를 준비하려면 자금이 많이 필요하거든. 무슨 뜻인지 알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기에 혁권은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가장 고전적인 수법이지만 비자금을 만들기에 단가를 부풀리는 것만큼 간편하고 쉬운 방법도 없지요.
“어때, 해 줄 수 있겠어?”
-거절하면 계약은 없던 일이 되는 겁니까?
최필성이 얼굴을 굳히면서 대답했다.
“그러지는 않겠지만 내 입장이 조금 곤란해지겠지.”
말하는 걸로 봐서 윗선에 비자금을 만들 수 있다고 이미 보고를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냥 모르는 척할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원유를 계속 처분해야 되는 상황에서 이번 기회에 최필승한테 빚을 지워 놓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선배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 수는 없지요. 원하는 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행여나 거절하면 어떻게 하나 마음을 졸이던 최필승은 반색을 했다.
“자식 역시 너밖에 없다. 이번 일은 잊지 않으마.”
-빚 하나 지신 겁니다. 아시죠?
“그래.”
-일주일 정도면 원유를 가져갈 수 있으니까. 그 전에 계약을 끝내도록 하지요.
“윗선에서 결재가 떨어지면 곧장 연락할게.”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최필성은 윗선에 보고를 하러 서둘러 회의실을 나갔다.
트리폴리 시내 정부청사.
한동안 잠잠하던 폭음과 총성이 다시 가까이서 시끄럽게 울리자, 차가운 바닥에 담요를 깔고 누워 있던 심정열이 눈을 떴다.
얼마 전까지 정부 공무원들이 일하던 사무실이었지만 지금은 전투에 대비해서 책상을 비롯한 사무 집기류를 창가에 쌓아 두고 무장한 병력이 삼삼오오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심정열이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 있자 어디서 찾아냈는지 차정태가 양손에 캔 맥주를 하나씩 들고 다가왔다.
“조장 동지, 이것 좀 드셔 보십시오.”
“그건 또 어디서 난 거야?”
그러자 차정태가 턱으로 바깥을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길 건너에 있는 상점에 가서 몇 개 집어 왔습니다.”
그러면서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을 슬쩍 열어서 보여 줬는데 양주병 세 개가 안에 들어 있었다.
“누가 마음대로 자리를 이탈하라고 했어.”
“무단이탈이 아니라 주변을 정찰하고 온 겁니다. 그러다가 전리품을 조금 챙겨 온 거고요. 이런 것이 자력 갱생 아니겠습니까?”
“아새끼 말은 잘하는구먼.”
심정열은 피식 웃으면서 차정태가 내민 캔 맥주를 받아 뚜껑을 따고 주욱 몇 모금을 들이켰다.
조금 미지근한 것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알코올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모래먼지 때문에 텁텁했던 것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크으. 좋구먼.”
“그것 보십시오. 제가 잘 찾아왔지 않습니까.”
“그래. 잘했어.”
그렇게 캔 맥주를 마시면서 잠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아랍어를 할 줄 알아 통역을 맡고 있던 부하 한 명이 급히 들어오더니 곧장 앞으로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