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57
457
같은 시각.
김성균은 태일건설 본사 사장실에서 건축 승인서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흰색 와이셔츠에 명품 로고가 들어간 넥타이를 맨 김성균은 소매를 걷어 시계를 확인하곤 살짝 미간을 좁혔다.
“3시 전에 승인이 떨어질 거라고 하지 않았어?”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고동욱 비서실장이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조금 늦어지는 모양입니다. 이길성 시장이 이번 심의 위원회에서 통과시켜 준다고 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죠.”
“쯧.”
짧게 혀를 찬 김성균은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고동욱 실장이 얼른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 주자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면서 김성균이 말했다.
“철거를 맡은 업체가 천지개발이라고 그랬지?”
“그렇습니다.”
“목표한 기한 안에 사업을 끝내려면 시간이 촉박한 만큼 철거를 빨리 끝내야 될 거야.”
“안 그래도 예정대로 건축 승인이 떨어지면 내일부터 바로 철거에 들어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계약된 철거 비용이 250억이라고 했지?”
“예. 그중에 50억은 시티 은행 계좌로 다시 입금시키기로 했습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김성균은 정색을 한 채 고동욱 실장을 봤다.
“혹시라도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게 관리를 잘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공사 부지가 넓은 만큼 철거 비용 역시 상당히 컸는데, 여기에 의도적으로 액수를 부풀린 뒤에 차액을 업체로부터 되돌려 받아 비자금을 조성했다.
이런 식으로 철거뿐만 아니라 다른 하청 업체들을 통해서 몰래 조성하는 비자금 규모가 무려 수천억 원에 달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비자금은 프로젝트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 정치권을 비롯해 여러 힘 있는 사람들한테 들어갔다.
물론 일부는 김종원 회장 일가의 주머니로 흘러들어 가 부富를 더욱 불려 줄 터였다.
“천 의원 쪽에서 요구한 건 어떻게 할까요?”
그러자 김성균은 담배를 입에서 떼고 후, 짧은 숨을 내뱉었다.
“100억이라고 했지?”
“예.”
비서실장이 덧붙여 말했다.
“박상빈 실장님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회장님께서도 승낙하셨다고 합니다.”
김성균이 살짝 콧잔등을 찌푸리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버지가 허락하셨다는데 어쩌겠어.”
“천 의원 측에서 현금을 원해 준비를 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까다롭기는……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
“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용산 드림 타워 프로젝트를 실질적으로 맡고 있는 조영두 전무가 들어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어떻게 됐어?”
김성균 사장의 물음에 가까이 다가온 조영두 전무가 손에 들고 있던 팩스를 건넸다.
“건축 승인이 떨어졌습니다.”
태일건설에서 제출한 원안대로 110층짜리 초고층의 건축 승인이 난 걸 확인한 김성균 사장은 얼굴을 활짝 펴며 크게 기뻐했다.
“이제 제대로 일을 시작할 수 있겠군.”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조 전무도 수고가 많았어.”
팩스를 탁자에 내려놓으면서 김성균 사장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고도 제한과 시민단체의 요구대로 건물 층수를 낮춰야 했다면 수익성이 크게 떨어졌을 텐데, 원안대로 통과된 덕분에 수백억 원을 더 벌 수 있게 됐다.
“시민단체들이 또 귀찮게 하지는 않겠지?”
빈자리에 앉은 조영두 전무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지금 당장은 보는 눈이 있으니 시위를 하는 척은 하겠지만 조금 있다가 슬그머니 물러날 겁니다.”
“날파리처럼 시끄럽게 굴며 공사를 지연시키면 여러 가지로 골치 아파. 그런 일이 없도록 확실히 조치해 놔.”
“염려하지 마십시오.”
“참, 주상 복합 분양 시기는 언제쯤으로 잡았나?”
“이제 건축 허가가 떨어졌으니 최대한 빨리 일정을 확정할 계획입니다.”
김성균 사장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올해를 넘기지 않도록 해.”
“알겠습니다.”
조영두 전무의 대답을 들은 김성균 사장은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양 흡족하게 웃었다.
하즈사피와 만남을 가진 혁권은 다시 전용기를 타고 두바이를 떠나 서울로 향했다.
-조건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보잉 737-700이나 737-880 기종 같은 경우에는 대략 4,000~4,500만 달러 선에서 가격이 책정되어 있더군.
홍성완 지사장의 이야기에 그는 스튜어디스가 가져다 놓은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에어버스 기종은 어떻습니까?”
-A320이 150석 규모로 비슷한 기종인데, 거래 가격은 그리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
“그렇군요.”
-그런데 정말로 중고 여객기를 매입할 생각인 거야?
홍성완 지사장의 물음에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려고 가격을 알아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허어. 이것 참. 유조선에다가 이제 여객기까지 갈수록 스케일이 커지는구먼. 정말 대단해.
“아직 멀었습니다.”
-이럴 때마다 내가 데리고 있던 그 김혁권이 맞나, 의심스러울 지경이라니까.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솔직히 혁권도 불과 몇 년 만에 자신이 이렇게 바뀔 줄은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었다.
주변을 둘러싼 상황에 휩쓸려 어떻게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오히려 그 전의 생활보다 지금이 더욱 만족스러웠다.
쓴 미소를 지은 혁권은 이내 잡생각을 털어 내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러면 중고 여객기를 구매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겁니까?”
-돈을 내고 산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미국과 관계가 다시 악화되고 있는 이란으로 우회해서 보내질 거였지만 딱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매물은 충분히 있습니까?”
-항공 수요가 폭증하고 항공사 간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최근 몇 년간 신형기 도입이 많아진 덕분에 덩달아 중고 여객기 매물이 늘어나 미국과 아시아를 중심으로 매물은 차고 넘칠 정도더군.
“그렇다면 가격을 더 낮출 수도 있겠군요.”
-그래도 쓸 만한 기체를 인수하려면 많이는 힘들겠지만 대당 300~400만 달러는 네고를 받을 수 있을 걸세.
그 정도만 해도 10대면 4천만 달러를 아낄 수 있으니까 절대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혁권은 이내 손에 든 스마트폰을 고쳐 쥐면서 말했다.
“가능하면 같은 기종으로 10대를 매입해 주십시오.”
그러자 홍성완 지사장이 반색을 하며 대답했다.
-그럼 괜찮은 매물을 추려서 다시 연락하겠네.
“그래 주십시오.”
-이거 자네 덕분에 이번 분기에도 할당액을 초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군. 정말 고마워.
“서로 돕고 살아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대신 가격을 최대한 좋게 맞춰 주십시오.”
-그건 나한테 맡겨 두게.
자신만만한 대답에 혁권은 얇은 미소를 지으면서 통화를 끝냈다.
홍성완 지사장이 낮은 가격에 중고 여객기 매물을 구하면 루마니아의 국영 항공사인 TAROM(Transporturile Aeriene ROMune)을 내세워 매입한 뒤에 그걸 다시 이란으로 우회해서 넘길 계획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류상으로 이름만 빌려주기로 되어 있는 TAROM은 루마니아군 실세 중에 하나인 코자레바 중장을 통해 은밀히 이야기를 다 끝내 놓은 상태였다.
“죄송하지만, 이제 조금 있으면 김포 공항에 도착하니 안전벨트를 매어 주시겠습니까.”
갑자기 들린 스튜어디스의 목소리에 그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가 풀어 둔 안전벨트를 찾아서 하자 갈색 머리의 늘씬한 스튜어디스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스튜어디스가 가 버린 후, 혁권은 옆의 둥근 방풍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먹물을 풀어 놓은 것처럼 진한 어둠 속에 형형색색의 빛들이 무리를 지은 반딧불이처럼 깜박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하늘의 별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굽이굽이 이어진 긴 도로들을 따라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은하수처럼 물결쳤고, 고층 빌딩의 불빛들은 그 자체로 빛을 내는 밝은 별들과도 같았다.
전용기에서 내린 혁권은 마중을 나온 백성균이 대기시켜 둔 검은색 밴을 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댄 혁권은 오랜 비행에 약간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조수석에 탄 백성균을 보며 입을 열었다.
“요즘 소현이는 어때?”
앉은 채로 몸을 반쯤 뒤로 돌린 백성균이 얼른 대답했다.
“손주아하고 여전히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그것 말고는 드라마도 반응이 좋고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다행이군.”
매일 빼먹지 않고 통화를 하지만 소현이 시시콜콜 안 좋은 일까지 다 이야기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내심 걱정이 많았던 혁권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안도했다.
“저, 그리고…….”
“할 이야기가 있으면 머뭇거리지 말고 해 봐.”
“이걸 좀 들어 보시겠습니까.”
백성균이 스마트폰 안에 들어있는 녹음 파일을 보여 주며 이어폰을 건넸다.
이게 뭐냐는 뜻으로 눈썹을 슬쩍 치켜 올린 혁권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안에 든 것은 두 사람이 사무실에서 앉아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었다.
잠시 이야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혁권은 이내 김성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입가를 굳혔다.
다른 한쪽은 누군지 모르겠지만 대화 내용으로 보아 김성균의 비서인 것 같았다.
이내 이어폰을 귀에서 뺀 혁권이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확실한 거야?”
“예. 실시간으로 녹음한 거라 틀림없습니다.”
“녹음 파일은 여기 있는 거 하나뿐인가?”
“혹시 몰라 백업도 하나 해 뒀습니다.”
백성균이 작은 USB를 들어 보였다.
“잘했어.”
혁권은 USB를 받아 제 주머니에 넣고는 백성균의 스마트폰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뭔가를 생각하는지 말이 없다가 얼마쯤 지나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김성균 사장의 움직임을 계속 감시하고 수상쩍은 것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깊이 가라앉은 눈동자로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면서 그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100억이라…… 이거 일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조연이라 분량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드라마가 방영되자 시간에 쫓기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촬영을 하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앞선 드라마가 시청률이 너무 저조한 바람에 조기 종영되어 급하게 들어간 영향도 있었지만, 한 신을 찍는 데 NG를 열 번은 기본으로 내는 손주아의 활약이 촬영이 늦어지는 데 단단히 한몫을 했다.
그러다 보니 스태프들도 지치고 촬영장 분위기 역시 안 좋아졌다.
오늘도 소현은 자정이 훌쩍 지나서야 촬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밴이 오피스텔 앞에 멈춰 선 뒤에도 소현은 다음 회 차 대본을 무릎에 올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많이 피곤할 텐데도 쉬지 않고 벌써 몇 번이나 잃은 대본을 손에 계속 들고 있는 걸 보면 정말 대단했다.
천천히 밴을 멈춰 세운 도형석은 몸을 돌려 조심스럽게 소현을 깨웠다.
“소현 씨, 집에 도착했어요.”
“음…….”
소현이 눈을 비비면서 일어났다.
“벌써요?”
“네. 빨리 들어가서 제대로 자요.”
일반 승용차보단 넓다고 하지만 그래도 침대에서 두 다리 쭉 뻗고 자는 것만 못한 게 당연했다.
“그렇게 앉아서 졸면 허리 아플 텐데…….”
“응, 괜찮았어요. 형석 씨도 얼른 집에 가요.”
소현이 제 가방을 챙겨 밴에서 내렸다.
운전석에서 고개를 꾸벅 숙이는 도형석에게 손을 흔들어 답한 소현은 찌뿌둥한 몸을 쭉 펴면서 기지개를 했다.
“후아암.”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얼른 자야지.’
소현이 아직 잠기운에 몽롱한 머리를 흔들며 오피스텔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 가방 안에 있던 스마트폰이 벨소리를 울렸다.